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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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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환의 인도 방랑 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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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북부-.jpg» 파키스탄 북부


산은 그저 높은 고개일 따름이다.

산 아래 사람은 산정을 올라가려 하고 산정에 선 사람은 내려가려 한다. 히말라야나 카라콜람 산맥의 해발 5천m급의 고개에 서면 한 걸음이라도 더 빨리 움직여 몰아치는 눈보라를 피해 내려가려고 한다. 나지막한 산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산정에 선 사람은 저 계곡 아래에 사는 사람들의 무리 속으로 돌아간다. 그 무리에는 앞서거나 뒤따르거나 높고 낮은 고개를 넘나들었던 사람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경론을 옮긴다며 책상머리 밥상머리 수평 이동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는 자전거 안장 위에 앉아 인도를 쏘다녔고 티벳 고원을 가로질러 타클라마칸과 고비 사막을 건넜다. 


그리고 황해를 가로질러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무엇이 제일 힘들었느냐?’는 질문을 더러 받았다. 그 때 투르판에서 만났던 한 현지인의 “늑대가 나타난다.”는 말 때문에 인적 없는 고비 사막에서 마른 나무 등걸을 긁어모아 모닥불을 피우며 잤던 밤이 생각났다. 싸구려 빠이주 한 병을 마시며 괴성을 지르며 모닥불 주위를 미친 듯이 춤추던 밤, 침낭 하나에 의지하여 비박을 하면서 서티벳 알리에서 산 람보 칼을 품고 잤다. 늑대가 무서운 게 아니라 사람이 무서워서였다. 


파수빙하아래서-.jpg» 파수 빙하 아래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산 아래의 계곡, 평지이지 산정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려올 줄 알면서 산을 오르고 돌아올 줄 알면서 떠난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일상에서 벗어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 그것 또한 일상인 셈인가? 어찌된 영문인지 정도의 차이가 매우 심한 떠돎이었다. ‘지상에 한 평의 땅이 없어 하늘을 떠돌기로 했다’며 ‘물결 파(波)’를 써서 스스로 파천(波天)이라 칭했더니 의형이 ‘부술 파(破)’자가 떠오른다며 그윽한 길을 뜻하는 ‘담정(覃程)’이라 호를 지어주었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의형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명호 하나 바꾼다고 성정이 바뀌는 일은 섬진강 백사장에 심어둔 군밤에서 싹이 나는 것보다 힘들 것이다. 다만 ‘그윽한 길’을 추구하는 삶이라는 게 무엇인지 종종 떠올려볼 따름이다.


1993년 맨 처음 비행기를 타고 티벳을 향했을 때는 만취의 연속이던 하계 졸업 직후였다. 당시 배낭 여행자들의 성소였던 홍콩의 충킹 맨션의 도미토리에 짐을 풀고 구룡반도 앞바다에 섰을 때는 어떻게 날아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걸무드에서 티벳의 수도 라싸로 올라갈 때 고산병에 걸려 파란 오줌을 누며 티벳 고원에 올랐다. 앞으로 티벳 불교 공부를 하게 될 운명이 기다릴 줄 모른 채 새외변방의 하나인 서장 포달랍궁의 라마의 밀종대법, 금강대수인 정도의 비전절기가 전부였다.

 스카루드가는길-.jpg» 스카루드 가는 길



그리고 이듬해 11월 법현과 현장, 혜초가 넘었고 마르코 폴로가 ‘너무 높아 하늘에는 나는 새가 없는 곳’이라는 불렀던 파미르 고원을 넘었다. 전생에 경전을 지고 파미르를 넘던 노새였다가 천장단애 아래로 불경을 떨어뜨린 죄로 금생에 그걸 다 옮겨야 되는 업을 지었다고 말하곤 한다. 


삶이 언제나 현재적이라고?

남인도에서는 50도가 넘는 날씨에도 자전거를 탔고 타이어가 녹아 튜브가 튀어나오는 줄도 모르고 달렸다. 티벳 고원의 5천미터 고개를 자전거를 밀며 오르고 우박 속에서도 자전거를 밀었으나 지나온 길 따위야, 따위야 …. 일부러 떠오르려고 해도 힘든 기억의 일부일 뿐이다. 모든 고(苦)는 현재적인 것이고 그 현재적인 것 또한 다만 흐르고 흐를 뿐이다. 


한 곳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세계 시민의 둥지(Nest of world citizen)’인 ‘평화의 땅’ 샨띠

니께딴, 어찌 그곳에서 10년을 앉아 있었는지! 인도 불교의 역사와 그리고 그것이 티벳으로 넘어가 어떻게 오늘날 세계 불교의 일원이 되었는지를 샨띠의 ‘현장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갠지스 강의 모래 하나만도 못하는 지식의 첫 단추를 꿴 곳은 오직 그곳에서 사부님의 가르침 덕분이다. 


 카라콜람-.jpg» 카라콜람


“샨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 있는지?”

다리를 건넌 사람은 다른 사람이 그 다리를 건너올 수 있게 남겨두고자 한다. 그러나 혹시나 다시 그 다리를 건너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길까봐 지나온 다리를 끊어버리고 살았다. 


“3년 동안 뒤도 돌아보지 않겠다.” 

그렇게 5년이 지났다. 다만 사부님을 생각하면 한번쯤은 반드시 돌아가 드릴 말씀이 있다. 올해 아흔 일곱이신 사부님, 경론을 읽고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경이감에 달뜨시고 제자들에게 미소를 베푸시던 사부님 …. ‘『중론』, 『회쟁론』 등 『중관이취육론』을 제가 모두 옮겼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삼시(三時)가 자성을 가진 것임을 부정하는 중관학자가 현재의 바로 여기도 아니고 두고 온 샨띠의 그곳도 아니고, 다만 사부님에 대한 그리움에 머무르다니! 불법(佛法)의 길을 이끌어주셨던 사부님 생각만이 떠나온 그곳, 샨띠를 그리게 한다. 과거의 현재, 그 그리움과 옛 떠돎으로 ‘인도 20년’을 시작한다. 누에가 실을 뽑듯이 지난 이야기를 내보일 필력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만 섬진강 백사장에 심어둔 군밤에서 매화가 피기 전에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꾸준함, 끈기 그 하나만으로 옛 일들을 추슬러 본다.  



씨과실은 놔둔다 했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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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IMG_3650.JPG


씨과실은 절대로 먹지 않는다고 했는데.....

 

마하트마 간디는 깡마른 체구에 둥근 안경테 너머로 쏘는듯한 형형한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또 몸을 최소한의 옷으로 가린 채 하염없이 물레질을 반복한다. 이런 행동은 그 자체가 독립운동이었다. 식민지 국민이 할 수 있는 비폭력저항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런 모습을 보며 또 나름의 상상력을 보탠다. 모르긴 해도 목화솜을 이용하여 실을 짰을 것이다. 그렇다면 생산하고자 하는 옷감은 무명천이다. 인도는 예나 지금이나 유명한 면화 원산지인 까닭이다.

 

고려말기 문익점(1331~1400) 선생은 목화를 한반도에 처음 들여왔다. 당시 목화는 최첨단 의류재료인 까닭에 원()나라 조정에서 엄격하게 관리하던 금수품목이었다. 대륙주변의 여러나라에서 많은 이들이 유출을 시도하다가 좌절했을 것이다. 그 역시 이런저런 궁리를 했다. 순간 씨앗을 붓뚜껑 속에 몰래 숨겨 옮기는 방법이 섬광처럼 스쳐갔다. 붓이라는 착한물건 속에 도둑질한나쁜물건이 들어있을 리 없다는 성선설(性善說)을 최대한 이용한 것이다. 그리하여 세관원의 예리한 눈길을 따돌리고 무사히 국경을 통과할 수 있었다. 개인적인 부를 축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전체를 위해 선의로 한 일이며, 밀수이지만 동시에 밀수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목숨걸고 몰래 가져온 세 개의 씨앗 가운데 한 개만 겨우 싻이 텄다고 하다. 하긴 극적인 요소가 가미돼야 스토리가 더욱 흥미진진해지는 법이다. 어쨋거나 정성을 다해 키운 덕분에 3년만에 동네 밭을 모조리 목화밭으로 바꿀 수 있었다. 장인과 손자까지 합세한 가족기업 형식으로 운영했다.‘물레라는 이름도 무명이란 옷감이름도 모두 문씨집안의이라는 글자에서 나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당시에 목화의 모든 것은 문씨집안으로 통했다.

 

그 시절 고급옷감인 비단은 귀하고 비싼지라 양반계급만 입을 수 있었다. 대다수 서민들이 이용하는 삼베와 모시는 겨울에는 사용할 수 없는 옷감이다. 당시의 관료들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신분제의 칸막이로 인하여()’에는 대부분 문외한이었다. 하지만 선생은 지리산 언저리에서 농사 짓던 경험을 가진 덕분에 남의 나라에서 만난 낯선 목화이지만 그 귀중함을 한 눈에 알아본 것이다. 그리하여 고려백성에게 제대로 된 옷을 입힌 공덕을 남겼다. 더불어 역사에 의류혁명가로 기록 되었다.

 

이제 목화는 경남 산청 단성 배양마을 목화시배지에 관광삼아 가야 볼 수 있는 귀한 물건이 되었다. 전국의 목화밭도 대부분 없어지고 생활 속에서 솜이불도 만나는 것도 쉽지않다. 더욱이 뭉친 이불솜을 다시 새 것처럼 만드는 작업인 솜 탄다는 말도 듣기 힘들다. 그리고 솜옷마저 거의 사라졌다.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선생의 창조경제 업적과 벤처정신은 옛세대가 배운 것처럼 아직도 중등학교 교과서 속에 그대로 남아있어야 할 것 같다. 지금도 그대로 교과서 속에 있는지 궁금하다.

 

요즘 젊은이들은목화라는 물건을 의외의 장소에서 만나고 있었다. 어느 날도깨비라는 텔레비전 인기드라마 한 장면에 목화꽃다발이 등장했다. 이후 졸업식장 입학식장 그리고 개인기념일 할 것 없이 꽃다발이 필요한 곳의 수요증가로 수입목화꽃이 동이 나고 웃돈을 줘야 구할 수 있는 귀한 물건대접을 받고 있다. 문익점 이후 최고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김영란법(청탁금지법)으로 불황에 허덕이던 꽃시장에 오랜만에 등장한 히트상품이 되었다.

 

이제 목화밭은 경관 농업이 되었다. 농작물이 아니라 관상용으로 바뀐 것이다. 관광지 유채꽃처럼 사진을 찍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뒷배경이 되는 물건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에는 ‘cotton'마크가 찍힌 면으로 만든 제품이 넘쳐나는 것을 보면 이 땅에 농작물로서 목화가 없어도 갖가지 면제품을 맘껏 쓸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구촌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라고 해두자. 가격경쟁력이 없다보니 국내생산을 포기해도 우리들의 일상생화에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그런 부분에 대한 문제의식도 같이 사라졌다.


목화카페-IMG_3664.JPG

 

주역석과불식(碩果不食)’이라고 했다. 씨과실은 절대로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농부는 씨앗주머니를 베고 죽는다는 뜻이다. 내가 죽어도 뒷사람을 위해 남겨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대의 종자전쟁론의 근거인 셈이다. 하지만 IMF때 많은 국내의 종자기업이 외국계회사로 팔려나갔다고 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 하지만 경제논리 앞에 씨과실마저 남에게 넘겨버렸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석과불식 정신도 같이 사라진 것이다.

 

서을 한복판 인사동 입구 커피집에서 목화를 만났다. 은행으로 사용되던 공간이 어느 날 인테리어 작업을 거치더니 널찍한 가게로 개장했다. 컨셉은 목화였다. 입구에 솜꽃이 달린 목화나무가 서있고 안쪽자리 가운데 목화솜으로 만든 꽃다발을 공중에 매달았다. 나오는 문 앞에 목화의 학명이 'gossypium'이라는 설명을 붙이고서 가게이름 꽃이피움의 출처로 소개했다. 알파벳 발음을 우리말로 그럴듯하게소리번역하는 안목의 극대치를 보여준다. 문득 유치환 시인의 깃발마지막 구절이 생각났다.“아아 누구던가? ....맨처음 (깃발을) 공중에 달 줄 안 그는?”

그렇다면꽃이 피는 것목화학명에 처음으로 대입할 줄 안 그 혹은 그녀는 도대체 누구일까?

 

공부보다 요리와 청소에 더 열심인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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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배너1.jpg


1.왜 공동체인가 

 

 타이 아속

2.가장 ‘핫한 남자’ 포티락을 만나다

3.이윤을 포기하고 부자가 된 사람들

4.현대판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다


인도 오로빌
5.자기로 살면 누구나 천재가 된다


미국 브루더호프

6.돈 없이 최고급 리조트에서 살아보기


7.공부보다 청소와 요리에 더 열심인 아이


8.뒷담화 말고 앞에서 솔직하게 얘기하라


일본 애즈원
9.인간과 사회 탐구, 제로에서 시작한다
10. 아무도 명령 하지않는 일터에서 일하다


일본 야마기시
11.못난이도 잘난이도 함께 살아가는 곳 



 -아이들 당근수확.jpg» 당근을 수확하는 브루더호프 아이들. 사진 브루더호프 제공



-수확한 당근먹기.jpg


“인생의 가장 지속적이고 긴급한 질문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다.”

  브루더호프공동체 누리집(http://www.bruderhof.com)에 올라 있는 흑인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말이다.

 지난번 ‘돈 없이 최고급 리조트에서 살아보기’를 통해 브루더호프공동체를 막상 천국처럼 그려놓고 보니 우려되는 바가 있었다. 이런 브루더호프 정신이 간과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브루더호프에서도 풍요로운 겉모습만이 보여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메일을 보내왔다. 브루더호프다운 반응이다.


 브루더호프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자신의 행복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목표는 사랑과 헌신이다. 그들에게 행복은 그런 비움에서 나오는 보너스다. 다른 기독교 교단이나 수도원에 가면 교리와 계율이 많다. 브루더호프엔 하나의 계율만이 있다. ‘서로 사랑하라’뿐이다. 다른 어떤 것도 이유일한 법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런 박애정신이 아니었다면 브루더호프가 초기부터 수난을 자초했을 리 없다.


 브루더호프는 1920년대 독일의 대학개신교선교단체 지도자였던 에버하르트 아르놀트와 동료들에 의해 세워졌다. 아르놀트가 독일에서 오갈 데 없는 장애인이나 고아들을 돌본 게 시작이다. 당시 독일에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 히틀러였다. 기독교 지도자들조차 파산한 독일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준 지도자라고 히틀러를 치켜세웠다. 그러나 아르놀트는 자신의 뜻을 침략과 폭력과 살육으로 관철하려는 히틀러에게 ‘사랑하는 형제 히틀러여 그러면 안 됩니다’라고 반대하는 편지를 계속 보냈다. 결국 공동체는 독일에서 나치에 의해 쫓기는 신세가 됐다. 인근 소국 리히텐슈타인으로 숨어들었지만 그곳도 나치가 장악해 갈 곳이 없었다. 위기에 처한 공동체와 형제들을 위해 노심초사하던 아르놀트는 다리가 부러졌고, 다리 절단 수술을 받던 중 52살에 사망했다.


 아르놀트의 부인과 자녀들과 공동체원들은 이후 영국의 시골마을 다벨에 정착했다. 그러나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당시엔 독일인이 다수였던 브루더호프 사람들이 독일의 스파이가 아니냐는 비난이 고조됐다. 고국 독일로도, 연합국의 나라에도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 그들은 남미 파라과이 밀림에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50여년 전부터는 미국에서 크게 성장하면서 브루더호프의 무게중심이 미국으로 이동한 상태다.


-가구공장1.jpg-가드닝.jpg-거름내기.jpg-공장 휴식시간.jpg-농장에서 수확하자.jpg-농장일.jpg-농장일1.jpg



바깥세상에선 일 안 하고 돈을 쓰고만 살거나, 최소한만 일하고 많이 노는 삶을 ‘팔자 좋다’고 부러워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곳에선 반대다. 결코 그런 삶이 행복하다고 보지도 않고, 존경하지도 않는다. 이곳에서 일을 할 수 없는 장애인이나 노인, 아기들은 배려와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다. 그러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일하는 게 당연하다. 손님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삶의 현장인 브루더호프가 ‘놀고 먹는 휴가지’는 될 수 없다.


나도 도착 다음날부터 공장에서 함께 일했다. 우드크레스트의 주수입원은 페이서라는 장애인용 전동휠체어를 만드는 공장이다. 이 마을에 사는 300여명 가운데 100명 가까운 사람이 이 공장에서 일한다. 아이들과 학생, 노인을 제외하고 공동식당과 세탁실에서 일하는 이들을 빼면 주요 노동력 대부분이 이곳에 투입되는 셈이다. 일하는 사람 수는 주문량에 따라서 달라진다. 주문량이 많을 때는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이들까지 공장에 투입되고, 농장에 콩 수확이 시급해지면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까지 함께 농장 일을 돕는다. 공동체원들은 필요한 곳으로 유연하게 움직인다.


공장 노동은 아침 7시30분에 시작해 점심시간인 12시까지, 또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이어진다. 오전과 오후 중간에 15~20분가량의 휴식시간이 있긴 하지만, 나머지는 온전히 일에 집중해야 한다. 나는 전동드릴로 나사를 박아 부품을 조립하는 일을 주로 했다. 한가지 일에 익숙해질 만하면 다른 일이 주어졌다. 주문량에 따라 일도 달라지는 것이다. 미국은 선진국이고, 이 공장은 유명 브랜드를 생산하는 곳이다. 유기농 샴푸나 비누를 수작업으로 하던 타이의 아속공동체가 가내수공업 같은 것이라면 이곳은 세계 유수의 기업들과 경쟁하는 공장이다. 노동 강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하지만 노동의 목표가 이윤 창출이 아니라 약자들을 돕는 사랑의 실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게 남다르다.


 나는 처음엔 실수가 많아서 옆에서 일하던 톰이 “나사를 이렇게 느슨하고 비틀어지게 박으면 안 된다”며 지적했다. 며칠이 지나자 반장 스티브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줄 정도로 내 실력도 늘었다. 하지만 온종일 일하는 게 보통 힘든 게 아니다. 특히 의자 없이 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하루 종일 서서 일하다 보면 다리가 저려왔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이런 노동에 이골이 난 듯 조립을 하면서도 콧노래를 부르거나, 가끔씩 따뜻한 눈빛과 웃음을 보내주곤 한다. 주위엔 필라델피아 출신 청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찾아온 부부 등 브루더호프의 다른 마을에서 온 사람들도 있다. 그들 역시 손님으로 지내는 게 아니라, 도착 즉시 한 마을 사람처럼 일을 했다.


처음 며칠은 전동드릴과 망치가 손에 익지 않아 손바닥이 부어오르고 피멍도 들었다. 저녁이면 파김치가 되어 누우면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브루더호프가 천국처럼 아름답고 사랑이 넘쳐도, 나 같은 책상물림은 일을 감당 못해서도 살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주 이상 노동을 하며 노동에 대한 내 안의 감정이 보이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가끔은 요리하고 텃밭을 가꾸는 걸 즐기는 편이지만, 그건 하고 싶을 때일 뿐이었다. 노동이란 가급적 하고 싶지 않은 것이란 무의식이 보였다. 이 마을에서도 푸른 초원과 수영장이 천국이지 이런 공장은 천국이 아니라고 유아적으로 ‘삼팔선’을 긋고 있었다.


브루더호프의 천국은 이기심 극복 투쟁 

타인과 약자 등 이웃 사랑의 보너스


브루더호프의 가장 긴급한 질문은

“타인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것


어린 아이들도 거부감 없이 노동 참여

밭일과 요리, 청소 등 집안일 함께 해


노동에 대한 무의속 속 거부감있는 아빠와

달리 아이들과 어울려 즐겁게 일하는 딸


아이들의 천국되게 해주면서도

한살박이 아이에게도 놀이하듯 일 시키고

떼쓴다고 봐주지않은 아이 교육 철저


-밭일.jpg-밭일1.jpg-일하는 조현1.jpg» 우드크레스트의 공장에서 일하는 필자



-하이너와 아들 마크.jpg» 변호사 하이너가 아들 마크가 요리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사진 조현기자




-마운트아카데미.jpg» 브루더호프의 마운트아카데미. 사진 조현기자하루는 딸에게 멍든 손바닥을 보여주며 엄살을 부렸다. 그랬더니 딸도 농장에서 일하다 애호박의 잔가시가 박혀 피가 맺힌 손을 보여주었다. 초등학교 6학년인 딸은 오전엔 주로 마을 내 아기들을 돌보는 육아방에서 보조교사를 하거나 농장에서 일하고, 오후엔 방학을 맞은 또래 친구들과 수영장 등에서 놀았다. 그런데도 딸은 “난 할 만하고, 그래도 재밌던데…”란다.


 “헐. 뙤약볕 아래서 일하는 게 재미있다니!”

 한국에서 그런 노동을 거의 해본 적이 없는 딸의 반응이 믿기지 않아 다시 물었다. 그랬더니 “여기 애들은 다 그래”라고 답했다. 노동을 의무적으로 하는 걸 넘어 즐기는 경지에 오르다니. 또래 집단의 분위기에 쉽게 동화되는 나이 때문일까, 나보다 ‘삼팔선’을 빨리 타파해 일상적인 노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딸이 부러웠다.


 한국에선 아이들에게 공부하라며 집안일 등 노동에선 ‘열외’를 시키기 마련이지만, 이곳에선 아이들도 일에서 예외가 없다. 내 옆집에 사는 변호사 하이너는 아침마다 초등학교 1학년 아들 마크와 식사를 준비했다. 마크가 프라이팬에 요리를 하게 하고 하이너는 뒤에 서서, 꼭 필요할 때만 “이렇게 해보면 어떠냐”고 가르쳐주었다. 부엌에서 나오는 쓰레기들을 마을공동 쓰레기장에 버리고 오고, 샤워실에서 나온 수건들을 마을세탁실에 가져다주는 것도 일곱살 마크의 몫이었다.


 노동의 분배는 이웃간에도 효율적이었다. 가령 식사에 초대를 받으면 설거지는 초대받은 사람들이 했다. 나도 처음 몇번은 눈치 없이 먹고만 왔지만 나중엔 설거지와 청소를 했다. 브루더호프에서 일을 거부하지 않는 또래들처럼 딸도 설거지와 청소를 야무지게 해내곤 했다. 감개무량했다.


우리 부녀를 여러 번 초대한 호스트 글렌과 아델에겐 귀엽기 그지없는 한살배기 아들 숀이 있었다. 식사를 하고 나면, 아델은 의자에 선 숀 앞에 설거지통을 끌어다놓고, 소꿉놀이를 하듯 함께 설거지를 했다. 말을 배움과 동시에 일도 그렇게 함께 배우는 것이다. 규율도 마찬가지였다. 숀이 식사에 초대받은 자리에서 음식이 나오는데도 딴짓을 하면 좌시하지 않았다. 한두 번의 경고에도 계속 장난을 치고 있으면, 숀의 의자를 뒤로 돌려놓고 벽을 쳐다본 채 반성을 하도록 했다. 그런데 숀은 아직 벌이 무언지 모르기 때문에 고개를 우리 쪽으로 돌려서 장난스레 미소를 날리곤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도저히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이들이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은 때론 냉정하다 싶었다. 아이들에게 가장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이며 사랑을 듬뿍 주지만, 과보호와는 거리가 멀다. 떼를 쓴다고 봐주는 법도 없다.


 가령 내 옆집엔 크리스네 가족이 사는데, 크리스와 헤나는 성인이 된 아들과 중고생 두 딸을 두고 있지만, 한살배기 늦둥이인 아들 스티븐이 있다. 스티븐은 장난꾸러기이자 울보였다. 크리스와 헤나는 스티븐이 자야 될 시간이 되면 홀로 방에 재웠다. 스티븐을 아기 침대에 누이고, “아빠는 너를 사랑해” 하고 방을 나오면 그만이었다. 스티븐이 아빠를 목이 터져라 불러도 누구도 대꾸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크리스와 헤나가 이웃집에 저녁 초대를 받아 가면서 옆집에 얘기하고 나간 뒤였다. 스티븐이 울음을 그치지 않자 그 방문을 살짝 열어봤다. 그랬더니 스티븐은 울면서도, 아기 인형에게 아빠가 자기에게 하듯이 ‘아빠가 사랑하니, 울지 마라’ 하고 다독이고 있었다. 코흘리개의 그런 모습이 얼마나 귀엽던지 안아주고 말았다. 아마 그의 아빠 같았으면 문을 열어보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우드크레스트에서 차로 20분 거리엔 브루더호프가 백년 넘은 가톨릭수도원을 사들여 2012년 문을 연 고교과정 마운트아카데미가 있다. 이곳의 교육 목표도 공부 잘하는 아이를 기르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하는 게’ 일차적 목표다. 설립된 지 얼마 안 된 이 학교가 학력은 물론 스포츠 등 각종 경진대회에서 뉴욕주뿐 아니라 미국을 휩쓸자 신문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 기자는 학교를 취재해보고 공부나 스포츠를 하는 모습이 아니라 모든 학생이 대걸레를 들고 학교를 청소하는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라고 썼다.


 브루더호프에선 요란한 기도나 수도를 찾아볼 수 없다. 말없이 자기 일을 묵묵하게 해내는 그 일이 바로 비움이고 자기 수련의 과정이다. 그런 헌신 속에 노동의 피로가 있기에 퇴근 후 잔디밭에서 가족과 이웃과 함께하는 시간이 더욱 달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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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 큰스님(1924~2003)은 하루 한 끼의 공양과 청빈과 장좌불와를 일생을 두고 실천하셨습니다. 그중 사성암에서의 혹독한 고행은 세간에 알려질 정도의 두타행이었습니다. 큰스님은 동안거 결제정진을 위해 암주보살에게 방세를 주어 아랫마을로 내려 보내시고 홀로 산중에 남아 삼동 한 철을 공부하셨습니다. 안 자고 안 눕고 하루 한 끼만 먹으면서 큰스님은 겨울 눈보라에 맞서 정진하셨습니다. 암주보살이 절 안에 놔둔 고양이 때문에 밤중에 가끔씩 아무도 오는 이 없는 산중 사성암에 올라와보곤 했는데, 큰스님께서는 껌껌한 바위 웅덩이에서 찬 샘물을 큰 양동이에 받아 아주 천천히 머리에서부터 붓고 계셨다고 합니다.


 ‘생사사대 무상신속 촌음가석 신물방일(生死事大 無常迅速 寸陰可惜 愼勿放逸, 삶과 죽음이 가장 큰 일인데 덧없는 세월은 빨리 가버리니 짧은 시간도 한껏 아끼며 방심하고 게으르지 말라)’

 ‘근고청중(謹告淸衆 삼가 청정대중에게 알림)’의 푯말을 수행처 앞에 내거는 큰스님은 수행처 앞에 써놓은 당신의 말씀대로 수행을 하셨습니다. 말씀과 행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큰스님의 수행을 겨울 혹독한 추위도 어쩌지 못했습니다.


  <위대한 스승 청화 큰스님>(유철주 지음, 상상출판 펴냄)에서


 유철주

 2003년부터 <현대불교신문>, <불광> 등 불교계 언론에서 일했다. 현재 선(禪) 전문지 <고경>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해인사 백련암에서 발행하는 <고경>은 선과 성철 스님의 가르침을 담아내는 잡지다.

 지금까지 <산승불회>, <진광불휘>, <흠모>, <스님의 물건> 등의 책을 썼다.



포정이 터득한 양생의 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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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정 포정이 문혜군을 위해 소를 잡습니다. 손으로는 잡고, 어깨로 받치고, 발로 밟고, 무릎으로 누르면서 칼질을 하니 뼈 발라지는 소리와 함께 고기 썰리는 소리가 음률에 잘 맞아 떨어졌습니다. 마치 상림(은나라 탕왕 때의 노래)의 무악에도 합치하고 경수(요 임금 때의 노래)의 음절에도 잘 어우러진 듯한 모양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문혜군이 말합니다.

 "아! 훌륭하구나! 기술이 어떻게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포정이 칼을 놓고 대답합니다.

 "제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도(道)랍니다. 기술보다 훨씬 앞서죠.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 보이는 것은 온통 소뿐이었죠. 그러다가 3년이 지난 후에는 소 전체를 본 적이 없었고, 요즘에는 정ㅅ니으로 대할 뿐 눈으로 보지도 않습니다. 감각기관의 활동을 멈추고 오직 정신만을 운용하는 거죠. 소 몸체가 부여받은 자연스런 이치에 따라 칼질을 합니다. 근육의 틈새를 젖혀 열거나 뼈와 관절의 빈 곳에 칼을 쓰는 일은 소 본연의 생김새를 따르기 때문에 지금껏 힘줄이나 근육을 베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물며 큰 뼈야 방해가 되겠습니까!"


 솜씨 좋은 백정은 일 년 만에 칼을 바꿉니다. 힘줄이나 근육을 베기 때문이죠. 보통의 백정은 한 달 만에 칼을 바꿉니다. 무리하게 뼈를 자르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지금 제 칼을 십구 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동안 소 수천 마리를 잡았지만 칼날은 막 숫돌에서 갈아낸 듯 예리합니다. 소의 관절은 틈새가 있고 예리한 칼날은 두께가 얇습니다. 그러니 얇은 칼날을 틈새에 넣으면 칼 놀리기에도 넓고 넓어 여유마저 있습니다. 이 때문에 제 칼은 십구 년을 사용했는데도 막 숫돌에서 갈아낸 듯 예리합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힘줄과 뼈가 엉겨 있는 곳을 만나면 자칫 난관에 봉착함을 알기에 긴장하며 조심합니다. 눈길을 멈추고 손놀림을 천천히 하죠. 그러면 칼놀림은 아주 미묘해집니다. 어느 순간 살이 뼈에서 떨썩하고 해체되는데, 커다른 흙덩이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와 같습니다. 그러면 저는 칼을 들고 일어나 둘어본 뒤 머뭇거리다 마음이 흐뭇해지면 칼을 씻어 잘 보관합니다."


 문혜군이 포정의 말을 듣곤 감탄합니다.

 "훌륭하구나! 나는 포정의 말을 듣고서 생명력을 기르는 양생의 도를 터득했노라."


 <내 안의 나를 깨우는 장자-내편>(장자 지음, 최상용 옮김 . 일상이상 펴냄)에서


 최상용
언론계 기자로 활동하다가 동양학의 깊이에 매력을 느껴 기공(氣功

)학으로 석사를, 기(氣)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기를 체득하기 위해 참선, 명상, 도인법 등을 수련했다. 동양학의 과학적 접근을 위해 서울대학교 한의물리학교실에서 인체의 경락, 바이오포톤, 생체자기장, 생체에너지 등을 연구하기도 했다.

 현재 인문기학연구소장으로 활동하면서 대학 및 대학원, 기업, 사회단체 등에서 동양학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브레인 한자>, <브레인 급수한자>, <인문고사성어집>, <하루3분 수명혁명>, <한자실력이 국어실력이다>, <한자 실력이 사회 실력이다>, <한자 실력이 과학 실력이다> 등이 있다.



기독교와 무슬림의 신은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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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도 넘었을 건데터키 중서부 지방을 보름 동안 여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니데’ 라는 지방 소도시에서 민박을 했어요물론 무슬림들이지요그 가정의 대학33, 초등 6년생인 3남매와 대화를 하는데 주로 진로에 대해서 주로 얘기했습니다영어 교사가 되고 싶다는 등...


그런데 말끝마다 인샬라인샬라!” 라고 합니다. ‘인샬라!’는 신께서 허락하신다면’ 그런 뜻이지요. ‘신께서 허락하신다면자기는 영어 교사가 되고 싶다내 꿈도 신께서 허락하셔야 한다.’ 뭐 그런 말이지요비록 습관성이라고 하지만 그들의 신앙과 언어문화에 감명을 받고 주일학교 학생이나 청년들에게 종종 강론을 했어요글로 쓴 적이 있어서 지난 번 에세이집을 낼 때 책에 수록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글을 책에서 읽은 어떤 이가 말하기를 그러면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차이가 없지 않은가?” 하였습니다약간 멍~해지고.... 나는 이슬람 신자들의 믿음을 보면서 같은 하느님을 믿는 우리 신자의 믿음생활에 대한 반성을 말한 건데 교회의 차이가 뭐냐고 반문하니 우문인지 현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했지요. “형제님은 그리스도교의 신과 이슬람교의 신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설명할 수 있습니까?” ‘하느님은 한 분 뿐이라고 고백하는데 같은 하느님이 아니란 말인가?


하느님은 하느님일 뿐입니다어떤 신학자라 할지라도 지상의 여러 종교가 믿는 신의 존재방식이나 속성에서 차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알아듣게 설명하는 것을 들어 본적이 없고 그런 책도 없습니다다만 신에 대한 오해가 있을 뿐이지 신에 대해 서로 알고 있고 믿고 있는 면을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신은 하나뿐이라고 믿는 유일신교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3대 종교가 있습니다서로가 믿는 신이 다르고 차별이 난다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사람들은 왜 그런지에 대해서 아무도 설명을 못하지요같은 것을 나눠 설명하려니까 제 말에 넘어가고 꼬이고 해서 설명이 안 되는 겁니다.


신자라면 부활에 대해서도 의심 없이 믿어야 한다지만 부활이 어떤 부활을 말하는지 설명하지 못합니다모든 존재 현상을 인간이 다 파악할 수도 없기 때문에 믿고 나서 깨우쳐 가려는 것입니다.


    신이 먼저 있었고 교회가 생긴거지 교회가 있어서 신이 생긴 건 아니지요그러니까 신들끼리 싸우고 계급을 지어놓고 내 신이 최고하면서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는 역사를 만들지 않았는가그건 신이 아닌 것을 신이라고 고백하는 허상입니다그것이야 말로 偶像이지요신은 평화 사랑 행복 정의와 절대진리의 신인데 진짜 신이라면 왜 싸우겠어요.


그리스도교의 신야훼 하느님 만이 진짜 유일한 신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조심해야 합니다그들은 진정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서 믿는다고 스스로에게 속임 당하고 있거나 아니면 자신의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기처럼 믿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의 우리 교회의 교리가 절대 옳다!’ ‘내가 믿는 하느님만이 하느님이다’ 라는 믿음이 다른 신을 믿는 이들과의 사이를 불화케 하고 불행스럽게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대표적인 게 이스라엘과 미국이지요.


(벌써 일어나야 할 시간이네다음에....).*

선승들,조계종 총무원장 직선제 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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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수좌회가 23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오는 10월로 예정된 총무원장 선거를 직선제로 실시하라고 요구했다. 

수좌회는 선원에서 참선을 하는 1천2백여명이 속한다. 기자회견에는 정로선림위원장인 봉암사 수좌 적명 스님과 고우·대원·무여·혜국·현기·성우·지선·원각·인각·지환·정찬 스님 등 대표적인 방장 조실 선원장이 대거 참여해 무게감이 적지않다.

 이들은 “일부 권승들이 파당을 만들어 종권을 장악학고, 유력한 사찰의 주지와 본사, 말사의 주지까지도 자파의 세력으로 채워 승가의 자율성과 역동성을 말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수좌회 의장 월암 스님은 “인구조사에서 지난 10년간 불자가 3백만명이 감소하고, 출가자들도 현저히 줄고 있어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인식 때문에 큰스님들까지 나섰다”면서 “불교가 이 지경인데도 책임지는 사람도 대책도 없고, 총무원장 직선제 약속마저 내팽개쳤다”고 말했다. 

 조계종은 1994년 종단개혁 이후 24개 교구본사에서 선출된 240명의 선거인단과 중앙종회 의원 81명 등 321명의 선거인단이 투표로 총무원장을 선출해왔다. 지난해 10월 선거제도 개편에 대해 중앙종회 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승랍 10년 이상 비구·비구니 스님의 80.5%가 직선제에 찬성했다.

 중앙종회는 지난해 총무원장직선제선출제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선거제 개편을 놓고 논의했으나 같은해 10월 종회에서 위원장과 위원들이 사퇴함으로써 선거법 개편은 물건너간 것이라는  평을 받았다. 종회는 오는 27일 다시 열린다.

 수좌회는 또 종회의원 6년이나 본사주지 4년 이상을 지내야만 출마할 수 있는 총무원장 피선거권 제약을 개정하고, 승려의 복지를 전면 시행할 것도 촉구했다. 

 이에대해 총무원장 자승 스님쪽 한 관계자는 자승스님의 재임기간 전반을 혹평한데 대해 “자승 스님 재임기에 자신이 관리하던 관악산 연주암까지 종단 직영으로 돌리는 등 직영사찰을 확대하고 재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며, 종단이 스님들의 기초연금을 불입하는 등 진일보 했다”면서 “특히 용산참사, 세월호, 사드 등 현안에 종단 차원에서 가장 앞장서 도우며 사회적 활동을 어느때보다 확산시키고, 지난 탄핵국면에서도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청와대에 간 종단지도자 가운데 유일하게 물러날 것을 요구하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공은 두고 과만 지나치게 부각시켜 서운하다는 것이다.

 그는 또 “선거제도 개편은 총무원장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선거권자인 종회의원들의 기득권 포기와도 관련되기 때문에 그들을 설득해 개편안을 이뤄내기 위한 설득 작업이나 구체적인 방안 제시들이 오히려 더욱더 필요한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파리지앵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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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살면서 손님으로서의 '갑질'에 익숙해져버린 나는 어느 날 빵집에 가서 점원에게 다짜고짜 "바게트 하나, 크루아상 두 개 주세요"라고 말했다. 점원은 나이 지긋한 인도계 여인이었는데 나를 보고 "봉주르!"라며 인사를 건넸다.

그렇다.

파리에서는 빵을 사러 가도, 내가 손님이라도, 인사부터 하고 물건을 사는 것이 예의고 문화다. 나는 얼굴이 후끈거렸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미안합니다. 봉주르!"하고 다시 주문을 했다. 잠시 잊었다가 파리지앵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다. ''


<파리의 열두 풍경>(조홍식 지음, 책과함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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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스타벅스 매장에 게시돼 있는 안내문.



3.1운동단체, 설민석씨에 공개질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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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역사강사 설민석씨의 3.1운동 민족대표 폄훼와 관련해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설씨에게 발언 내용 시정과 사과를 요구하는 ‘공개질의서’를 띄웠다. 


 이 단체는 설민석씨의 강의 영상 <설민석의 십장생 한국사>와 저서 <무도 한국사 특강>초판본이 3·1운동 민족대표 33인에 대해 “오류와, 사자와 후학에 대한 모욕이 되는 내용을 다수 포함해 3·1운동 의의 전체를 희석시키고, 건국의 초석이 되었던 3·1운동 정신을 왜곡하고 있다”고 밝혔다.

 

 설씨가 지난 16일 본인의 입장과 사과의 뜻을 밝혔지만, 명백한 허위사실에 대한 분명한 정정과 명확한 사과가 필요하기에 공개질의를 한다는 것이다.


“태화관 요릿집이라고 3·1 거사 의의 축소되지 않아

주옥경은 마담 아닌 손병희 선생 부인, 여성운동 선구자”


 이 단체가 설씨의 강의와 책의 주요 오류로 지적한 것은 세가지다. 첫째는 태화관을 ‘최초의 룸살롱’으로 표현한 대목이다. 


 단체는 질의서에서 “민족대표들의 회합장소에 대한 폄하를 바탕으로 민족대표의 역할을 축소하고, 그분들을 비난하기 위해 왜곡한 것”이라며 “태화관이 ‘요릿집’ 이었다고 해서, 거사의 의의가 축소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두번째는 ‘주옥경 여사를 태화관 마담’으로 표현한 점이다. 질의서는 “당시 주옥경은 손병희 선생의 부인이자 비서로서 민족대표들 간의 연락과 안내를 맡은, 독립선언의 숨은 주역의 한분이며, 여성운동의 선구자로서도 큰 공헌을 한 분”이라고 주장했다.


 단체가 세번째 오류로 지적한 것은 ‘민족대표 대부분이 변절했다’고 한 대목이다. 질의서는 “이 문제에 관한 한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역사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수십 년간의 노력 끝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을 기준으로 할 때, 민족대표 33인 중 최종적으로 친일인사로 판명된 인물은 3명”이라며 “그 밖의 인물들 중에서도 구체적인 행적을 놓고 민족문제연구소의 결정과 관계없이 친일행위를 했다고 평가할 수는 있겠으나 이때는 그 근거를 명확하게 제시하고 ‘대다수’라는 표현이 야기할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해야한다”고 지적했다.


 이 단체는 또 ‘민족대표의 역할과 위상에 대한 평가’와 관련해 “민족대표의 역할이 3월 1일의 ‘현장 지휘’보다 더 광범위하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진행되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면서 “천도교의 이병헌, 승동교회의 김원벽, 한위건 등이 학생들과 교감하며 연락을 주고 받았기에 탑골공원에서 시민 학생이 모였을 때 태화관과 교류가 없었다는 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고 밝혔다.


“민족대표 33인 중 친일은 3명 뿐 

나머지는 계속 비타협, 독립운동

많은 사람이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병사

학생 시민운동도 이들과 연계

설씨의 ‘대부분 변절’ 주장은 사실 아니다“


 3.1운동 당일 서울을 제외하고 평안도와 함경도의 6개 도시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3월10일 전후엔 전국주요도시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된 것은 33인을 주축으로 천도교, 기독교, 불교 3개 교단에서 체계적으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조직적 동원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질의서는 이어 “민족대표는 1년에서 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양한묵 선생은 재판 도중 순국했고, 박준승 선생은 복역기간 중 순국했으며, 손병희 선생은 회생 가능성이 없을만큼 병이 깊어진 뒤에야 병보석으로 풀려나와 투병중 순국했고, 이종일 선생과 이종훈 선생 역시 고문 후유증으로 몇년 뒤에 순국했다”며 “살아남은 분들도 변절한 3명을 제외하고는 출감 후에 일제에 대한 비타협적 태도로 일관하거나 만주로 진출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고 밝혔다.


 질의서는 “당시 시위의 주역인 학생과 시민들 중 다수는 바로 천도교 기독교 불교의 신도들이거나 민족대표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대중이었다”며 “그들은 민족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섰지만 대부분 민족대표 33인과 그들에 의해 미리 조직된 지방 지도자의 지도에 따라 이 운동에 참여해 33인과 3·1민중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한 몸이다”고 주장했다.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3·1운동 100돌(2019년)을 앞두고 종교시민사회 공동행사와 3·운동에 대한 문화사업, 청소년 교육 등을 위해 지난 2015년 발족했다. 개신교, 천도교, 불교, 가톨릭, 원불교 성균관 민족종교협의회등 7대종단 대표들이 고문을 맡고, 이들과 사회단체들이 대표들이 추전한 김명혁 목사, 박종화 목사, 박경조 성공회 주교, 법륜 스님, 무원 스님 등 33인이 공동대표를 맡고, 박남수 천도교 전 교령이 상임대표로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세월호 추모 음악회와 기도회 도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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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 세월호 3주기’를 앞두고, 종교계가 각종 추모행사를 펼친다. 특히 오는 4월16일이 부활절과 맞아 떨어진 기독교계가 앞장서고 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지난 6~10일 경기도 안산시 세월호합동분향소에 금식기도회를 연 이래  부활절까지 사순절기간에 세월호를 기억하고, 참사의 진실이 드러나기를 기도를 이어가고 있다.


 또 `고난을 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부활절연합예배준비위원회'와 한국기독교회협의회,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는 공동으로 16일 오후 4시30분 경기도 안선 세월호분향소 옆 화랑유원지에서 `4.16가족과 함께하는 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린다.

 ‘정의평화를 위한 기독인연대’ 4월8일 진도 팽목항에서 ‘세월호 진상규명을 염원하는 3주기 추모기도회’를 연다. 


 같은날부터 부활절 전날인 15일까지 서울 종로구 부암동 254의11 이정배 목사 집에서는 세월호와 관련된 100권의 책을 만나는 ‘세월호 작은도서전’이 열린다. 이 도서전에선 세월호 희생자이자 저자인 승현아빠 이호진 선생(11일), 안산 기억저장소 소장 도언 어머니 이지성씨(13일), <묻는다, 이것이 공동체인가>의 저자 이은선 세종대 교수(14일)와의 만남도 이어진다.


 또 11일 오후 7시30분엔 서울 용산구 청파동 삼일교회에서는 목회멘토링사역원 등의 주관으로 다수 홍순관, 송정미, 이길승, 416합창단, 열일곱 꽃다운 친구들 등이 출연하는 ‘세번째 봄, 열일곱의 노래’ 그리스도인음악회가 열린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누구를 위한 공동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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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디마을.jpg» 반디마을 주거공동체 전경. 네 가정의 주거 공간과 카페, 공방, 커뮤니티센터 등이 어우러져 있다. 사진 정동철전도사 제공)



본회퍼에게 배운 지혜


결혼을 전제로 교제 중이던 자매가 내게 물어왔다.

“선교단체 간사들은 사임 이후 대체로 목회자가 되던데 당신도 그럴 건가요?”


짧은 질문에서 긴 여정의 운명을 가를 기운을 느꼈다. 눈치를 보니 그녀는 목회자 아내로 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목회자가 될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그러나 결정된 미래는 아니니 아니라고 대답해도 될 것이었다. 순간 지혜가 떠올랐고 나는 대답했다.


“미래의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야. 목회자가 된다면 결코 혼자 결정하지 않을 거야. 이제부터 중요한 결정은 우리 것이므로 함께 기도하며 결정할 거야.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가 되고싶은 마음은 있지만 미래의 당신이 사모가 되고 싶지 않다면 나도 목회자는 안 될 거야.”


위기의 순간을 모면한 나는 그녀와 결혼했고, 선녀의 옷을 숨긴 나뭇꾼 마냥 아이 셋이 생긴 후 목회자가 되었다. 물론 그때의 약속처럼 중요한 결정의 순간마다 아내에게 기도할 시간을 주었고 아내의 의견을 경청했다. 그래서 지금 내 모습은 아내가 결정한 인생이다. 돌이켜보면 그 순간의 대답에 공동체의 동력이 될 이상(理想)의 생성-발전-소멸에 대한 열쇠가 있었다.


누구나 마음에 품은 이상 하나 쯤은 있을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경우 그 과정에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강력한 알고리즘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음성에 의한 확신이니까 융합보다 설득, 기다림 혹은 고난이 더 어울리는 단어로 엮인다. 그런 이유로 공동체의 중심에는 그 이상에 걸맞은 사상가가 존재한다. 그리고 공동체는 그 이상에 공감하거나 거부하면서 형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공동체적인 삶에 관심을 가진 후 여러 선배 공동체들의 역사를 접하게 되었다. 그들의 신기한 공통점은 공동체를 시작한 1세대는 대체로 분열했다는 점이다. 물론 나는 분열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성숙으로 이끄는 또 다른 길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헤어짐은 아프다. 나는 이미 공동체의 논의 과정에서 한 차례 아픔을 겪었기에 또 그런 아픔을 대면할 용기가 없었다. 이번엔 정말 시작이 되었고 결혼과 같은 삶이 갈라서는 것은 데이트하다 헤어지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깊은 고통이 예상되니 정말 잘해보고 싶었다.


지혜를 찾던 중 책에서 길을 보았다. 내가 아내에게 말한 대답을 지지해주는 문구가 본회퍼의 글에도 있다. 그는 《신도의 공동생활》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동체를 사랑하는 사람은 공동체를 허물고,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공동체를 세운다. 공동체는 이상이 아니라 사람이다.”


공동체는 이상의 결합이라기보다 인격적 연합이라는 말이 아닐까? 공동체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 동체의 이상을 사랑한다는 말일 것이다. 형제를 사랑하여 공동체를 세운들 그 공동체에 이상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그 공동체에 걸맞은 이상을 하나님이 부어주실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이 믿음이 아닐까? 그리고 공동체는 하나님의 음성을 함께 듣는 과정에서 새로운 하나가 되어 부르심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결혼과 참으로 비슷하다. 누가 결혼을 이상(비전)의 결합이라 여기는가? 결혼엔 로맨스가 필요하다. 사람을 사랑해야 결혼이 가능한 것이고, 이상은 그 가정의 역량에 맞게 생겨나고 자라고 사라질 것이다. 어쩌면 1세대가 겪은 분열의 고통은 사상가 중심의 이합집산이 낳은 결과인지도 모른다. 이상에는 동의하였으나 동상이몽인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공동체는 분열한다. 또한 이상이 고상하나 이를 지탱할 역량이 없을 때 실망하여 공동체는 분열한다. 그 실망은 사상가뿐 아니라 구성원들의 역량부족 때문일 수도 있다. 본회퍼는 과감하게도 그런 이상을 가진 자가 이상을 실현하려는 욕심에 사로잡혀 공동체를 깨뜨린다고 말한다.


결국 기독교가 마지막으로 남겨야 할 한 단어는 ‘사랑’이다. 공동체 이상의 종착역도 ‘사랑’이다. 기차가 종착역에 도착했는데 타고 온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우린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이상과 사랑은 본래 함께할 수 없는 충돌하는 단어라기보다 과정과 목적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사랑이 목적이고 이상이 과정인 것이다. 그래서 순서가 바뀌면 공동체가 깨어진다. 사랑한다는 고백으로 공동체가 되었으나 어느 순간 이상의 도구인 것을 깨닫게 되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다. 우리는 사랑에 항복하여 희생할 수는 있어도 이상을 이루려고 사람을 이용해선 안 된다. 그래서 오랜 기다림이 필요하다 구성원 모두가 사랑에 항복하는 기간만큼….


‘무엇을 위한 공동체인가’에 대한 긴 대답

울산에서 첫 실험의 시기에 우리 공동체에게는 역사적인 연대가 있었다. 한 가정의 이주로 드디어 출발이 된 것이다. 이상의 결합이 아니었으니 출발은 쉬웠다. 그러다 판이 커질 즈음 이웃에 사는 자매가 이상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아직은 공동체의 기차가 시속 20km미만이니 이게 아니다 싶으면 뛰어내릴 수도 있겠지만 속도가 빨라지면 어림없는 일이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궁금증이었다. “도대체 오빠가 무엇을 하려는지를 잘 모르겠어요”라는 그녀의 고백은 물러서기 위한 의심이 아니라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 확신을 가지려는 갈망이었다.


말보다 글이 필요한 순간이라 편지를 쓰기 시작했는데 A4용지로 7장을 쓰고 나서야 타이핑을 멈췄다. 지금 그 편지를 10년 전 폴더에서 찾아서 읽어보니 우습기 그지없지만 분명한 맥락은 있었다. 


첫째, 선택은 너의 몫이니 남편이나 주변 사람에게 위임하지 말아라. 둘째, 공동체의 이상은 구성원이 함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므로 나의 이상에 의존하지 말아라. 셋째, 내가 어떤 이상을 가졌는지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면 좋겠다. 이렇게 세 가지로 요약이 된다. 혹시 공동체를 꿈꾸며 선택의 기로에 있는 이에게 도움이 될까하여 10년 전 편지의 일부를 공개한다.


◯◯에게.

갈림길….  너의 인생에 이런 갈림길이 몇 번 정도 있었을까? 그때마다 너는 용기를 내어 선택을 해왔고 그래서 지금의 네가 있는 거겠지? 앞으로의 인생에도 이런 갈림길은 수도 없이 만나게 될거야. 두렵겠지만 선택을 피할 수는 없단다. 《모험으로 사는 인생》이라는 책의 저자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모험하는 인생은 둘러가거나 다시 출발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을 수는 있어도 실패하는 건 아니라고 조언해준다. 중요한 선택일수록 결정은 쉽지 않지만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하는 것을 믿으면 오히려 기대감이 생기기도 한단다. 그는 사랑이며 우리의 아버지여서 탕자의 잘못된 선택도 존중하고 기다려주시지 않으시는가? 또한 형들의 모략에 빠진 요셉의 길을 곧게 하사 그의 가족과 민족을 구원하지 않으셨는가?


◯◯아. 너의 선택이 어떠하든 그리스도의 사랑이 너를 견인한다는 것을 잊지 않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주님이 너를 실패의 자리에 방치하지 않음을 믿으면 좋겠어. 만약 선택이 어려워 결정을 다른 사람에게 위임하게 되면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게 된단다. 네가 분별력이 없다면 그때부터 너의 인생은 너의 주변 사람들의 결정과 권유의 따라 흘러가게 될 거야. 네 남편이 인생의 동반자이지만 그에게 선택을 위임하지는 말아라. 남편이 확신에 차서 네게 권유할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은 남편에게 말씀하시듯 네게도 말씀하시는 분이셔. 응답이 더디 오더라도 우린 기다릴 수 있다. 이번 갈림길에서의 선택은 어느 것도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것을 선택해도 하나님이 너의 자유를 존중하시므로 우리 또한 그 선택을 존중함에는 불편함이 없다. 다만 선택을 통해 너에게 드러난 두려움의 문제가 극복되기를 바랄 뿐이다. 선택의 기로에서 어느 정도의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단다. 이것을 긍정적으로 보면 신중하다 하겠지만 아무것도 결정을 못할 만큼의 긴장이라면 이 선택을 위임한 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 일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과 우리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며 너를 사랑하고 너의 자유를 존중한단다.


◯◯아,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된 이유는 너의 이상적 의문에 답하려는 의도이지만 선택과 두려움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 넘어가면 앞으로도 그 긴장은 여전할 것 같아서 서두에 이 내용을 담았어. 공동체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생각해. 새로운 일들과 사람들이 끝없이 도전해 올 것이고 그때마다 우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고 갈림길에서 고뇌하겠지? 그건 대체로 개인적인 기도와 함께 회의를 통해 결정될 거야. 그런 날들이 두려움의 연속이 된다면 그건 너무 슬플 것 같구나. 나는 우리 앞에 열린 갈림길이 건강한 기대감이길 바래. 네 남편과 난 여러모로 생각이 닮아 있다. 우리는 전혀 다른 배경에서 자랐고 학창시절 학교에서 마주친 일도 없었다. 내가 포항에서 간사로 있을 때 수련회에서 몇 차례 마주 쳐서 알게 된 거란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대화할 때마다 참으로 개운한 느낌을 많이 받았단다. 분명한 이상, 명쾌한 행동, 견고한 의지… 서로 호감을 가지고 큰 일을 꿈꾸게 되는 건 결코 오랜 시간의 사귐이 있어야 가능한 게 아니라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우린 오랜 시간 저마다의 배경에서 하나님 나라를 갈망해 왔던 거지. 이후에 신학대학원을 같이 다니게 되었고 오가는 차 속에서 이미 와 있는 하나님 나라를 실현할 교회와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즐겨했다. 그렇게 2년이 쌓여서 여기까지 온 거야.


나에게 이상을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언제나 ‘하나님 나라’이다. 나는 그의 나라가 이 땅에 왔다고 말하는 성경의 가르침이 사실인지 실험해보고 싶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한결같은 주장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 왔다”였다. 중요한 것은 그의 나라는 시작이 되었고 언젠가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이 되겠지만, 지금도 그 나라는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아주 구체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음을 증명하고 싶고 이를 위해 공동체적인 삶을 살고 싶어. 공동체는 우리 삶에서 피상성을 깨뜨려 준다. 서로의 삶에 개입하고 채워주고 용서하는 것이 모두 실제화되어 우리의 말과 삶이 일치하도록 훈련시킨단다. 우리의 삶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드러나게 한단다. 물론 나도 두렵다. 나의 죄성은 나로 하여금 웬만하면 섞이지 말고 은둔하라고 일러준다. 그래야 편하다고…. 그러나 나는 평안한 삶을 살고 싶어. 하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누리는 평안의 삶. 그런 삶에 대하여는 구체적으로 이런 저런 생각이 많다. 하지만 더 구체적으로 나의 이상을 밝힐 수는 없단다.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있어도 내 이상이 우리의 이상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 아내와 나는 계획이 많았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계획일 뿐 너희 가족의 계획은 아니잖니? 그래서 네게 묻고 싶다. 너희 꿈은 무엇이냐? 할 수 있다면 그것을 공유하고 싶다. 그런 날들이 이어지면 주님이 우리에게 한 음성을 들려주실 테고 우리는 함께할 이상을 갖게 되지 않을까? 


우리가 사업체라면 우리의 사업을 설명하고 너희가 우리에게 투자하면 될 일인데 우리는 인격이고 동체라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갈망해야 한다는 조건만 있을 뿐이다.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 음성을 함께 분별하여 앞으로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 우리가 먼저 정해 두면 반칙이 아닐까? 그러기에 우리의 사업에 투자하지 말고 우리에게 투자해 보렴. 우리 역시 너희가 어떤 사람들인지 잘 모른다. 얼마나 영향력이 있을지? 뭘 잘하는지, 얼만큼 해낼 수 있는지…. 그런 것을 보고 너와 함께한 것이 아니란다.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는 너희의 마음 하나를 보았을 뿐이다. 네 남편이 오니 따라오는 너의 삶은 싫다. 나는 지금 너를 부르고 있단다. 그러니 너도 우리를 보렴…. 우리의 능력, 계획, 실현 가능성이 아닌 우리 존재를 보렴. 우리를 우여곡절 끝에 여기까지 인도해내신 주님의 능력을 보렴. 너희의 삶과 우리의 삶이 공동체의 삶이 되어 그의 나라를 실현하고 확장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길 바란다. 너의 불안한 지난 날과 앞으로의 갈등들을 생각할 때 미리 정보를 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구나. 일이 이렇게 급박하게 진행될지 우리도 짐작치 못했단다. 우린 이런 모험에 익숙해서 그런지 기대감에 들떠있어. 너의 잠 못 드는 밤은 생각치도 못하고….


◯◯아. 어떤 선택을 해도 나름의 기쁨과 고난이 있겠지? 그러니 이번 선택은 어떤 것도 죄는 아니라고 생각해. 그러니 두려워 말아라. 하나님은 좋은 선택을 하지 않았다고 너의 인생을 고달프게 하실 분도 아니다. 이쯤에서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간다 해도 우리는 괜찮다. 그래도 여전히 너를 사랑하며 소중한 동역자라 여기니 선택함에 부담이 없었으면 한다. 이렇게 길게 쓰게 될 줄 모르고 시작한 편지가 7페이지에 달했구나. 교정도 못하고 보낸다. 아침에 시작했는데 점심을 넘겼네…. 배가 고파서 그만 써야겠어. 뭘 말해야 할지 모르는 나라서 그때 그때 질문을 하면 열심히 대답할게. 많이 물어보렴.


― 2007년 6월 22일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길 기대하며…, 동철 오빠 씀



지금 반디마을 사람들은 공동체의 이상과 규칙을 정하는 일에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냥 한 곳에 모아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그런 결정의 순간에 기도와 회의를 거듭하지만 결정이 쉽지 않은 일들은 충분한 시간을 들여 모두가 공감하기를 기다린다. 어떤 사안은 없어지기도 한다. 우리는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 세대와 이 지역을 위해 우리에게 할 일을 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정동철

1971년생으로 울산대학교에서 산업디자인을 공부한 뒤 IVF(한국기독학생회) 캠퍼스간사로 14년 동안 섬겼다. 지금은 ‘디자인잇다’ 대표로 일하면서, 몸 된 교회 전도사로 섬긴다.


 이 글은 <복음과상황>(http://www.goscon.co.kr/)에 실린 것입니다. 


독수리로 환생하고싶었던 캬라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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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선불교의 직관과 음률을 결합시킨 클래식 음악의 황제
알랭 베르디에  |  yayavara@yahoo.com



카라얀1.jpg» 카라얀은 선불교를 통해 다른 이들의 민감하고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감지하는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됐다고 말한다.


“만약 어느 누군가가 세워둔 모든 목표들을 성취했다면 그것은 그가 목표를 높이 세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악보 보지 않고 곡 외워
춤추는 듯한 지휘로 유명

명상을 통해 마음 비우고
단원들 환상 호흡 이끌어

불교 이해가 깊어갈수록
사람들 미묘한 감정 감지

선불교와 기독교 결합시킨
라살레 목사에게 큰 감명

선과 음악 환상적으로 조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20세기뿐만 아니라 전 역사를 통해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지휘자일 것이다. 베를린 오페라극장과 베를린 필하모니의 상임지휘자로 또,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예술감독으로, 비엔나 국립협회의 예술감독으로도 활동한 카라얀은 어쩌면 클래식음악계를 상징하는 아이콘과 같은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현대 오케스트라의 수준을 최고로 끌어올렸다고 칭송 받는 카라얀을 일컬어 세계언론은 ‘거장’, ‘천재’, ‘환상의 창조자’, 혹은 ‘음악의 마술사’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차가워 보이는 인상을 가진 카라얀을 연상시키는 대표적인 모습은 오케스트라 지휘를 시작하기 전 깊고 푸른 색의 눈을 지긋이 감고 악보를 보지 않은 채 기억만으로 곡을 외워 춤을 추듯 지휘를 하는 모습이다. 그 모습은 그가 음악이라는 최면에 완전히 빠져 있는 듯 신비롭다. 타임지는 카라얀과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유럽 음악 전통의 최고 권위자”라고 그를 평가했다. 음반 판매량을 보더라도 전세계를 통틀어 1억 장이 넘어가는 기록을 가진 그이기에 클래식 음악을 멀리하는 사람들도 ‘카라얀’이라는 이름은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라는 주장이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선불교 신자였다. 요가와 참선으로 정적인 여유 시간을 보내던 카라얀은 소형 비행기 조정이나 요트 레이싱, 카 레이싱, 산악 자전거와 같은 격한 스포츠도 즐겼다. 최신 전자제품이나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상당한 관심을 가진 얼리 어댑터이기도 했다.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 프랑스의 생 트로페즈, 스위스의 생 모리츠와 같은 휴양도시에 저택을 소유했던 그는 각각의 집에 수행을 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마련해 놓았다. 그가 유명한 지휘자로서의 삶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게 한 것도 바로 불교 덕이었다. 그는 부처님의 말씀과 선불교의 철학을 오케스트라 단원들과의 협력에 적용했다. 그는 자신과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하나가 될 때 최고의 음악이 완성된다고 믿었다. 

최근 유튜브에서 베토벤 7번 교향곡을 지휘하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영상을 볼 수 있었다. 영상 속에 담긴 그의 모습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지휘를 하는 모습이었다. 베토벤 특유의 장엄하고 경쾌한 장단과 리듬에 완전히 젖어 있는 듯한 카라얀의 지휘 모습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우리 인간은 언어라는 훌륭한 표현의 도구를 가졌지만 카라얀의 지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언어 말고도 인간이 희로애락이라는 감정을 표현하는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베토벤 7번 교향곡의 환희와 낙관을 표현해 내는 오케스트라의 음악과 그의 열정적인 몸짓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유형의 표현 방식이 아닐까 생각된다. 카라얀은 눈을 감고 있을 때 음악이 머리 속에 펼쳐지고 그가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더욱더 가까이 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그에게 음악은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수행을 하루도 빠짐없이 해왔던 카라얀은 선불교를 통해 다른 이들의 민감하고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감지하는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능력은 그가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더 밀접한 인간관계를 쌓아가고 서로를 신뢰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그런 인간관계는 매번 더 훌륭한 음악을 만들어 내곤 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유명한 SF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에서 우주선이 우주 정거장에 정차하는 장면에서 흐르는 카라얀의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선율을 들어보면 평소 선불교 신자로서의 삶이 음악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느끼게 한다. 40여년이 넘게 선불교 신자로서 수행을 해왔던 그는 부처님의 말씀과 가르침들이 그가 음악계에 오랫동안 몸담을 수 있는 동력이 됐다고 한다. 선불교의 가르침처럼 가만히 앉아 복잡한 마음을 비우고 작은 변화와 미묘한 움직임에 귀 기울이는 능력을 키우면서 음악에서도 작은 리듬의 변화나 음정의 작고 세세한 높낮이에도 민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카라얀은 설명했다. 

카라얀은 1908년 4월5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에른스트 폰 카라얀(Ernest Von Karajan)은 잘츠부르크 종합병원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외과의사였다. 언젠가 에른스트 폰 카라얀은 아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들아, 세상을 살면서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건 ‘네가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란다.” 

이 말은 어린 소년의 마음속 깊이 새겨졌다. 자신이 음악에 소질이 있음을 발견한 그가 이 세상에 남길 수 있는 것은 음악이라고 결정하고 음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5살이 되던 해, 발이 피아노 페달에도 닿지 않는 작은 키로 자선연주회에 참가해 모짜르트의 론도를 연주했고 9살이 되던 해, 그는 그의 이름을 건 최초의 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렇게 피아노로 음악 경력을 쌓아가던 어린 카라얀은 자신의 음악에 대한 깊은 열정과 천재성이 피아노에만 국한되기는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방향을 선회했다. 결국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1935년 독일 역사상 가장 어린 지휘자로 선출되는 계기로 이어졌다. 1937년에 비엔나 국립오페라의 전임지휘자로, 1938년에는 베를린 필하모니를 지휘함으로써 최초의 연주회를 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당시, 정치에 관심이 없던 카라얀이 갑자기 나치 당에 가입한다. 그는 당시를 회고하며 방해 없이 음악을 계속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지휘자로서의 삶을 계속해 이어갈 수 있었다. 전쟁이 점점 확산되어 가는 시기에 카라얀은 유태인 출신의 아니타 구터만(Anita Guterman)이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졌고 곧 결혼했다. 이 결혼 때문에 나치당은 독일의 오케스트라 지휘자였던 그를 해임했다. 그는 가족의 안위를 위해 이탈리아로 이사를 갔다. 그러나 나치당의 압력 때문에 어디서도 지휘자로서의 자리를 찾지 못하는 힘든 생활을 이어가게 됐다. 카라얀은 길고 길었던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음악인으로서 경력을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1950~70년대 카라얀은 유럽에서 가장 인정받는 지휘자로 성장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카라얀은 불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수많은 불교서적들을 읽었다. 그러던 중 그는 선불교에 심취하기 시작했고 부처님의 가르침과 수행을 일상생활의 중요한 덕목으로 삼기 시작했다. 독일의 예수교 목사이자 참선의 대가였던 휴고 에노미아 라살레(Hugo Enomiya Lassalle)는 로마 카톨릭 교회와 선불교를 잘 결합한 인물이었는데 카라얀은 라살레 목사를 만나 친해지면서 선불교에 대해 확실하게 눈을 떴다. ‘선,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Zen, A Way to Enlightenment)’이라는 책을 집필한 라살레 목사는 선불교와 기독교의 공통점을 강조하며 선불교가 기존의 기독교에 좋은 영향을 미쳐 오랫동안 침체되어있던 기독교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라살레 목사와의 인연과 그의 저서들은 카라얀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카라얀은 선불교의 가르침을 일상생활은 물론 음악 활동에까지 적용시키게 됐다. 미국 출신 유명한 저널리스트 로저 보간(Roger Vaughan)과의 인터뷰에서 카라얀은 이렇게 말했다. 

“라살레 목사님이 설명하는 불교에 관한 책을 처음으로 읽었을 때의 벅찬 감동은 지금도 잊기 힘들어요. 그런 감동을 주는 책을 쓴 저자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 감동은 두 배가 됐지요. 라살레 목사님을 처음 만났을 때도 마치 그 분은 20여년간 알고 지낸 친구처럼 느껴졌어요.” 

불교를 통해 그의 음악세계가 크게 성장을 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명상을 통한 집중과 비움은 단원들과 소통해야 하는 지휘자로서의 능력을 확장시켰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절대로 ‘내가 지휘를 한다’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 뒤에는 언제나 그 분께서 계시니까요.” 

그가 음악을 하면서 얼마나 부처님께 의지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989년 오스트리아 비엔나 필하모니의 지휘자로 그는 마지막 콘서트를 가졌다. 콘서트를 마친 후 얼마 뒤인 7월16일 자택에서 조용히 생을 마쳤다. 그가 81살 되던 해였다. 카라얀은 환생을 굳게 믿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여러 차례 다시 환생한다면 독수리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했다. 좋아하는 알프스산맥 곳곳을 날고 싶었기 때문이다. 

독수리로 환생하고 싶어했던 클래식 음악계의 황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선불교와 음악을 환상적으로 결합시켜 가장 완벽하게 표현했던 역사상 드문 음악계 위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알랭 베르디에 저널리스트 yayavara@yahoo.com

<법보신문>(http://www.beopbo.com/)에 실린 글입니다.

상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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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영감도 예고 없이 찾아온다. 기다려도, 기다리지 않아도 온다. 하지만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으며 그러므로 찾아 나설 수도 없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 마침내 당도했을 때 우리는 비로서 허기로부터 건져 올려진다. 뿐만 아니라 세상사 모든 것에 끝이 있어 인연을 다해 떠나간다 해도 우리는 그것이 남긴 빛을 따라 생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니 무엇이 상실일까. 그것이 내게 오기 전의 상태일까, 아니면 그것이 나를 떠나버린 후의 상태일까.


<아주 오래된 말들의 위로>(유선경 지음, 샘터) 중에서

 

//sedentaria21.rssing.com/chan-11693739/article1994-liv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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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말 오후 집회를 마친 후 몇몇 교인들과 마주앉았습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고가던 중 한 분이 문득 "목사님도 외로우세요?"하고 물었습니다. '주님이 계신 데 외롭기는 뭐가 외로워요'라고 대답했으면 좋았겠지만, 저는 몇 번이고 힘을 주어 '그럼요, 그럼요'하고 대답했습니다. 언제 외로우냐는 질문에 "말의 무기령함을 절감할 때, 선포하는 말씀이 사건을 일으키지 못할 때"라고 대답했습니다. 친구들에게 문자로 언제 외롭냐고 물었습니다. 한 친구는 '서로 옳다는 두 교인 사이에 서 있을 때'라고 답했고, 다른 친구는 '주일 오후 모두 떠난 텅 빈 예배당에 혼자 앉아 있을 때 문득'이라고 답했습니다.


 감리교 최초의 조직신학자라고 일컬어지는 정경옥 교수는 1930년 대에 쓴 <그는 이러케 살엇다>라는 책에서 예수의 외로움에 대해 말합니다. 예수가 외로운 것은 한 제자가 자기를 밀고해서도 아니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실 때 잠을 자다가 흩어져 버린 제자들 때문도 아니고, 베드로가 자신을 모른다고 했기 때문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는 자기의 제자들이 다 어디로 가고 자기 혼자 남아 있다는 것이 외롭다는 것보다 사랑을 주어도 받을 이 없다는 것을 외로워하셨던 것이다. 그렇다. 신앙의 사람이 되려면 세상에서 친구가 없다. 믿음의 생활을 하는 사람은 고독의 사람이요 눈물의 사람이다. 선견을 가진 사람은 군중의 환영을 받지 못한다.


             <끙끙 앓는 하나님>(김기석 지음, 꽃자리 펴냄)에서


김기석

서울 용산 청파감리교회 담임목사다. 이와여교 교목을 지냈다. 지긍ㄴ 책으로 <아! 욥>(욥기 산책), <광야에서 길을 묻다>(출애굽기 산책),<말씀의 빛 속을 거닐다>(요한복음 산책),<행복하십니까, 아니오, 감사합니다>(시편산책),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아슬아슬한 희망>, <기자와 목사, 두 바보 이야기>, <오래된 새길>, <삶이 메시지다>, <일상순례자> 등이 있다.




붓다의 명상법을 직접 해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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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상-담마제공.jpg» 진안 담마코리아명상센터의 담마홀에서 수련생들이 명상하는 모습. 앞에 앉은 지도법사는 하루에 1~2분가량씩 인터뷰를 통해 명상 상태를 점검해준다. 사진 담마코리아 제공


어느날 통증이 산산이

박하사탕같이 ‘~’

 

오랫동안 괴롭혀온  통증

있는 그대로 보고 싶었다


 붓다가 수행한 원형 유지한 

고엔카 위파사나 명상을 택했다


 한국 유일의 ‘담마코리아 명상센터

10 코스 지상 가장 지루한 여행


 새벽 4   930분까지 촘촘

식사도 아침 6오전 11  

어떤 말도 해선 안되고 독방 수행


 5일째부터는  시간씩 하루   

 꼼짝 않는 좌선으로 고행


쾌감도 불쾌감도 그저 관찰할 뿐

 명상 목적은 치병술 아닌 깨달음 



-고엥카.jpg» 불교가 멸실된 인도에서 출가승려가 아닌 재가자로서 위파사나 붐을 일으킨 고엔카

 -글로발파고다.jpg» 붓다의 명상법을 순수 그대로 보존해준 미얀마의 은덕을 기려 양곤의 쉐다곤파고다를 본따 세계 최대규모의 명상센터로 고엔카와 전세계 위파사나 명상가들이 함께 세운 글로벌파고다


조현 종교전문기자의 위파사나 체험기

엎어진 김에 쉬어 가는 것도 좋다땅에서 넘어지면 땅을 짚고 일어나야 한다쓰러진  땅이 다시   있는 발판이다. 1년의 휴직기에 해외 대안공동체들과 히말라야를 순례한  말고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명상이었다.


 세상엔 수많은 명상·수행법이 있다그런데 동서 종교를 망라해 다양한 수도법을 경험해본 내가 이번에 선택한 것은 위파사나였다그중에서도 이른바 ‘고엔카 위파사나 알려진 것이었다동남아시아와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수행법인 위파사나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 뜻의 관찰명상법이다고타마 싯다르타를 깨달음으로 이끈 수행법이다위파사나는 인도에서는 사라졌으나 미얀마에서 보존됐다그런데 미얀마에서 위파사나도 진화하고 변화했다그러나 ‘고엔카 위파사나만은 붓다가 수행할 당시 그대로 원형을 유지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위파사나가 ‘생각’ 관찰을 중시하는 데 비해, ‘고엔카 위파사나 ‘몸의 감각 관찰한다오랜 ‘ 통증 시달려온 내가  명상을 택한 것은  몸에서 일어나는 통증을 세밀히 관찰하고 싶어서였다.

 


인도 장기 여행자 체험 1순위

 미얀마 출신 인도인 고엔카(1924~2013) 의해 인도로부터 전세계로 전해진  명상법은 인도 장기 여행자에게 체험거리 1순위로 꼽힌다특히 서구 지식인들이 많이 한다지난해 방한한 <사피엔스> 유대인 저자 유발 하라리는 “지난 10여년 동안 매년 연말이면 30~60일씩 인도의 위파사나명상센터에 가서 외부와 단절한   명상만 했다 밝힌  있다.

 

-법맥사진.jpg


 15  인도 장기 순례  10 코스를  차례 경험한 적이 있다그러다 통증이 심해지자 다시 생각난 것이다그래서 한국에서 유일하게  명상을 하는 전북 진안 ‘담마코리아 명상센터 찾았다.


 담마코리아는 모든 명상센터를 통틀어 가장 엄격하다하루 전에 도착하고, 10 명상을 마친 다음날 퇴실하기에 12일이 필요하다도착 즉시 휴대폰과 자동차 열쇠나 잡지는 모두 맡겨야 한다선승들조차 안거 중에도 외부와 전화통화를 하는 경우가 많은 데 반해 이곳에선 그런 일은 있을  없다.


 새벽 4 기상하고 30  명상을 시작해 식사 시간과 잠깐의 휴식 시간을 제외하고는 930분까지 빈틈이 없다. 식사도 ‘오후 불식이다. 아침 6 오전 11 밥을 먹으면 그날 식사는 끝이다식사는 채식뿐이다신체를 접촉해서도말을 해서도 안 된다모두 독방을 사용한다지루함을 달래줄 어떤 이벤트도 없이 지상에서 가장 지루한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어떤 종교적 예식도 없다종교적 상징물이나 그림조차 걸려 있지 않다오직 관찰법만을 제시하기에 무종교·기독교인들도 다수 참여했다.


 처음부터  전체의 감각을 관찰하는 것은 아니다처음엔 호흡을 관찰한다오직 들숨과 날숨이 드나드는코와 윗입술 사이의 감각만을 관찰한다번뇌로 인해 흩어지는 마음을  지점에 모아 집중력을 개발하기 위함이다번뇌 망상으로 가득  마음이 쉽게 한군데로 모아지긴 어렵다심장이 멎기 전엔 코로 숨이 드나드는  분명하지만처음엔 어떤 감각을 느끼기도 어렵다그러나  무료한 집중을  시간  시간하루이틀 지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아래 미세한 감각이 감지되기 시작한다그만큼 마음이 예리해진 것이다.


 그러면 4일째부터 감각 관찰이 시작된다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부분 부분으로 나누어 관찰한다가려움통증발열감냉기  일체의 감각을 세밀히 관찰한다 명상법은 마음의 모든 불순물은 결국 감각으로 표현된다고 본다, 감각을 보는 것이 마음을 보는 것이다.

 

 -담마코리아.jpg» 전북 진안에 폐교를 개조한 담마코리아명상센터. 담마코리아는 최근 한 보시자의 기부로 이 자리에 새로운 명상센터를 세우는 계획을 추진중이다.


 -공양간.jpg» 많은 이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10일코스 내내 아무 대가없이 헌신적으로 봉사에 나선 봉사자들


중도에 벌떡 일어나 포기하기도

  명상이 통증 치료법은 아니다고엔카는 20대에 미얀마의 재벌이 됐지만편두통이 극심했다고 한다그는 전세계의 명의를 찾아다녔지만 소용이 없었다그러다 미얀마 독립정부의 초대 재정장관으로  명상법을 가르치던 우 바 킨을 찾아갔다그때 편두통을 나으려고  명상을 배우고 싶다고 했을  우 바 킨은 ‘ 명상은 진리를 깨닫기 위함이지 치병술이 아니다 ‘당장 나가라 호통을 쳤다고 한다.


 그러나 전미개오(번뇌를 깨달음으로 전환시킴) 미혹한 중생의 꿈이듯통증에 시달리는 환자는 고진감래(고생 뒤의 기쁨) 고대하기 마련 아닌가.


 그러나 어찌 거저 주어지는 것이 있으랴. 5일째부터는  시간씩 하루   ‘아딧타나’(강한 결심으로 앉기) 하여몸을 전혀 움직이지 않는 좌선이 시도된다골반과 무릎이 조여오고 복숭아뼈가 부서질 듯하고 파리나 모기가 앉아도가려워도 털끝만큼도 움직이지 않고 버티는 고행이다다리뼈가 엉겨 부러질 듯해도 움직이지 않고 참다 보면 끝나는 종소리는 영원히 울릴 것 같지 않다이를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 중도 포기하는 이들도 있다하지만 고행을 이겨내면다른 세상이 펼쳐진다통증이나 가려움에서 미세한 파동을 느끼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번의 10 코스로 원하는 체험을  얻을 수는 없다 경우 연이은 3번째 코스에서 통증이 진동으로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그러면서 오히려 그토록 고통스럽던 통증 부위로 박하사탕이 쏟아져나오는 듯한 시원한 감각이 일었다 쾌감에 잠겨서는 종이 울려도 한나절씩  자세 그대로 앉아 있기도 했다.


 그러나  명상은 통증처럼 싫은 감각을 쫓아버리고 쾌감을 불러오는  목표가 아니다인간은  쾌감을 갈망한다반면 통증 같은 감각을 혐오한다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여서 마음에 드는 사람에 대해선 죽고 못살  애착하고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에 대해선 증오심에 불탄다그래서 갈망과 혐오의 쳇바퀴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좌선2.jpg» 담마코리아 담마홀에서 명상중인 수련생들. 다리나 무릎이 아파 앉기 어려운 수련생은 지도법사의 허락을 받아 의자에 앉아 명상한다


상주자 없이 경험자가 무료 봉사

  명상에선 쾌감도 불쾌감도 오직 ‘있는 그대로’ 관찰할 뿐이다그래서 어떤 감각도 ‘일어났다가 사라져갈 이라는, ‘아니짜’(무상)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다따라서 쾌감에도 집착하지 않고 불쾌감을 증오하지도 않는 평정심에 이르는 것이다그것은 쾌감이나 불쾌감을 나와 동일시해서 들뜨지도 싫어하지도 않고실험동물을 관찰하듯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가능한 경지다.


 거친 감각들이 미세한 진동으로 용해되면 오래 묵은 상카라(부정성)들이 피부 표면으로 올라온다그래서 가끔 독충이  것처럼 벌겋게 피부가 부풀어오르기도 한다그러나 그때도 평정을 지켜내는 노력은 지속된다그렇게 금이 정련되기 위해 불가마를 통과하듯 관찰과 평정 속에서 마음의 불순물이 태워지는 것이다.


 이곳에서 놀라운 것은 명상만이 아니다 명상센터엔 평소 상주자가  명도 없다코스가 열릴 때만 명상 경험자들이 타인들의 명상을 돕기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청소하며 돕는 무료봉사에 나선다코스 참가비도 없다코스를 마친  다음 코스 참가자를 위해 원하는 만큼 기부할 뿐이다그런데도 이런 방식으로 세계 160여개 명상센터가 유지되고 있다담마코리아 명상센터 누리집 https://www.korea.dhamma.org/ko/


 진안(전북)/·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4월1~2일 전북 남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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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 경연 서당문화제공.jpg» 2년전 전북 남원의 서당문화한마당에서 한 어린이가 경연에 참석하고 있는 모습. 사진 서당전통문화진흥회 제공


4월1~2일 전북 남원에서 2500여명 참석한 가운데 펼쳐질 서당문화한마당


‘서당문화한마당’이 4월1~2일 전북 남원시 어현동 ‘사랑의 광장’에서 펼쳐진다.


 지난 2002년부터 개최돼 올해로 16회를 맞은 이 대회엔 전국에서 남녀노소가 참석해 한자문화로 기량을 겨루어 옛 과거시험장을 방불케하고있다. 지난해 대회에는 6세 아동부터 96세 할아버지까지 1천5백명이 응시했다. 특히 외국유학생과 다문화가정 여성들까지 참여해 기염을 토했다. 


 (사)한국전통서당문화진흥회와 문화체육관광부가 공동주최하고 (사)갱정유도가 주관하는 이 행사에서는 옛 과거시험처럼 한자의 강경(읽기), 제술(짓기), 휘호(쓰기) 등 세 과목의 경연이 펼쳐진다. 


 이와함께 일반 시민들이 훈장님과 함께 전통을 배우며 퀴즈를 풀어보는 풍류놀이마당과 국악공연이 펼쳐지고, 훈장들이 직접 경전과 축문, 한시 낭송을 시연하기도 한다.


 대회 수상자에겐 임금처럼 곤룡포를 입은 시상자가 과거 장원급제자에게 급제증서를 주듯이 수상자에게 어사화와 예복을 입혀 상을 준다.


 전통서당문화진흥회 한재우 훈장은 “이 대회엔 한중일 유학생들과 이주여성들이 매년 늘고 있어 한문을 매개로 하는 한자문화권에서 유일하게 전통을 보존하고 있는 한국의 서당이 한류의 정신문화적 가치와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장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여 이번 주제를 ‘한류, 서당에 길을 묻다’고 정했다”고 말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63년치 정을 어찌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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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기 (6).JPG» 사별가족 모임에 참석한 이들이 둘러앉는 식탁


봄입니다. 세상 곳곳에 노랑, 빨강, 분홍의 꽃들이 피어나고 초록 잎도 가득합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봄도, 꽃도, 살랑살랑한 봄바람도, 계절의 변화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늘 만나는 사별 가족들, 사랑하는 가족을 죽음이라는 사건으로 이별하고 ‘따라 죽지 못하고 살아 내야만 하는 고통’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분들입니다.


 사별 가족 모임을 하다 보면 아직도 찬 바람이 몰아치는 3월 초에 얇은 브라우스에 조끼 하나만 걸치고 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추위도 느끼지 못하는 듯합니다. 마음은 언제나 한겨울, 이렇게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계절에 늘 겨울인 분들입니다. 


 칠십을 훨씬 넘긴 나이, 결혼 생활을 60년 이상 같이 하시다가 이별한 분들도 오십니다. 그분들이 오셔서는 한결같이 하시는 말씀은 ‘이렇게 나이 먹어 사별했는데 어디 가서 말도 못한다,’ ‘살 만큼 살다 헤어졌는데 왜 그리 슬퍼하느냐고 자식들까지 뭐라 한다’며 모임에 온 것을 창피해하기도 하십니다. 오래 살다 이별했으니까, 충분히 사랑을 하다가 헤어졌으니까, 세상에 나와 할 일을 다 하고 이별했으니 슬프면 안 될까요? 슬프지 않을까요?


 결혼 1주년 기념일을 하루 앞둔 젊은 아빠가 임종 중에 있었습니다. 아기는 태어난 지 열흘도 채 안 되었고 아내는 제왕절개한 수술 상처에서 아직 실밥도 제거하지 않은 상태로 그 젊은 남편 곁에 있었습니다. 갓 세 명이 된 그 가족을 바라보는 다른 가족, 친척, 병원 직원들의 맘은 한결같았습니다. 아무리 호스피스가 누구에게나 좋은 이별을 준비시키기 위해서 애쓴다고는 하지만 정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 시간을 좀 미루어 달라고….


 그런 안타까운 관심이 이 가족에게 기울어져 있을 때 그 옆 병실에서는 63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하셨던 할머님이 임종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표현이야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참 오래 잘 사셨으니…, 백년해로하셨으니…’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자녀들도 이별을 아쉬워했지만 그런 마음으로 부모님을, 그리고 서로를 위로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그런 마음을 아셨는지 그 방의 할아버님이 나오셔서 복도에서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습니다. ‘저것(젊은 부부)들은 1년어치 정밖에 안 들었지만 난 이 63년어치 정을 어떻게 하란 말이냐?’ 하시면서 통곡을 하셨습니다. 


상대적인 슬픔이란 없습니다. 사별을 경험하신 분들에게는 절대적인 슬픔, 고통이 있을 뿐입니다. 온 우주도 끌어안지 못할 가장 큰 슬픔을 내가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손영순/까리따스 수녀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


손원영교수 파면사건 시민대책위발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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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에 의해 훼불이 저질러진 불교 사찰 개운사를 돕자는 운동을 벌인 것이 우상숭배 행위라는 이유로 서울기독대학교에서 지난달 파면된 손원영 교수 파면사건시민대책위가 31일 오후6시 서울 마포구 백범로 169의19(지하철 공덕역 3번출구 롯데캐슬 뒷편) 공덕감리교회에서 발족된다.


 시민대책위는 전동덕여대이사장인 박경양(평화교회) 목사가 상임대표를, 연세대 신대동문회장 원진희목사, 한국문화신학회회장 박숭인 협성대 교수, 전국교수노조위원장 홍성학 교수, 감리교 원용철 목사 등이 공동대표를, 서울기독대학교민주동문회 오범석 목사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센터 박정범 목사가 초무를 맡았다.


 시민대책위는 “손 교수 파면이 개인의 징계가 아니라 헌법이 보장하는 학문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심각히 침해한 사건”이라며 “종교계 학계 시민사회 공동 활동을 펼쳐갈 것”이라고 밝혔다.


  발족식에 이어 손원영 교수가 책임편집하여 출간한 <예술신학톺아보기>(신앙과지성사 펴냄)출판기념 콘서트가 열려 조성진 마임이스트의 <보름스로 간 루터>, 배일동 명창의 판소리, 가수 홍순관 노래 공연 등이 펼쳐진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불경에서 찾는 선거철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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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법대로 하라고!


세상에는 수많은 겨루기가 있다. 꼬맹이들의 딱지치기로부터 동네 고샅에서 벌이는 닭싸움, 초등학교 운동회 마당의 청백전, 온갖 시합, 심지어 나라와 나라가 벌이는 전쟁까지. 우리는 이런 갖가지 형태의 겨루기에서 이해득실의 직접 당사자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국외자로 관망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다양한 구실과 이유를 들어 편을 가르고 응원을 한다. 겨루기의 양상이 격해지고 우열이 엇비슷하면 구경꾼의 가슴도 덩달아 달아오르고, 때로는 응원하는 사람들의 패싸움으로 이어지기까지 한다.


선거1.jpg


민주주의 선거제도 또한 투쟁과 유희가 기묘하게 배합된 겨루기의 일종이다. 모두가 이해 당사자이며 끝나도 몸살과 후유증이 훨씬 오래 지속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물론 이는 인류 역사의 빼어난 성취가운데 하나임에 분명하지만, 오늘날 우리 앞에 펼쳐진 저 그림은 엄청나게 비싸고 난잡하며 때로는 조악하고 비루하기조차 해서 차라리 눈을 감고 싶을 지경이다. 정치혐오를 유발하는 주제에 정치 리더, 지도자? 누가 누구를 어디로 끌고 간다는 거야?


이천 육백년 전에 형성된 불교 경전 속에 선거제도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면 믿기지 않을까? 원시공동체의 확장과 분화 변천을 설명하는 장아함 세기경(장부 니까야 제27경 Aggañña-sutta)에 따르면 먼 옛적 사람들은 배고프면 그때 그때 들에 나가 먹거리를 취해 살아갔다. 그러던 중 어떤 게으른 친구가 꾀를 내어 내일 양식을 미리 가져다 쌓아두면서 한꺼번에 많이 쌓아놓기 경쟁이 벌어졌고, 이어 토지의 분배와 사유가 시작되었다. 따라서 이전에 없었던 ‘도둑질’이라는 말이 생기고, 이로 인한 다툼을 해결할 사람이 필요했다. 하여, 자기네 무리 가운데 잘나고 힘센 사람 하나를 뽑아 들판에서 일어나는 분쟁을 조정하는 임무를 맡기고 그 대가로 소득의 일부를 떼어주었는데 그가 ‘마하삼마타’라는 최초의 크샤트리야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는 세습 왕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대중(mahā)이 인정한(sammata), 즉 선출직 공무원이었다.


그들이 뽑은 마하삼마타가 잘나고 힘센 사람인 것은 공동체와의 약속을 어긴 자를 응징할, 위임된 폭력을 행사할 적임자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는 법을 집행하는 일꾼이지 지도자가 아닌 것이다. 또 다른 경전(본생담)에서 ‘정의로운 왕’에 대한 질문에 고타마 붓다께서는 “거짓과 분노, 웃음을 자제할 수 있는 왕”이라고 답하신다. 주석서는 “자신과 남을 속이지 않으며, 지지하지 않는 자들에게 앙심을 품지 않고, 때 아닌 웃음을 보이지 않음”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바야흐로 온갖 떨거지가 떼거리로 설쳐대는 시절, 역겹다고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두 눈 부릅뜨고 봐줘야 한다. 우리가 뽑을 사람은 지도자도, 법의 수호자도 아니다. 다만 법대로 일하는 머슴이어야 한다. 그런 사람 어디 쉽게 찾을 수 있을까마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 일삼는 자, 제 역성을 들지 않았다고 꼼꼼하게 앙갚음하고, 때 없이 실실 웃는 자는 제발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 어쩌다 어겼다 해도 얼른 사죄하고 부끄러워하는 일꾼이라면 훗날 훌륭한 지도자였다고 칭송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재연 스님(선운사 불학승가대학원장)


흥미롭고 놀라운 분이 수녀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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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레사 수녀.jpg» 강연 중인 데레사 포카데스 수녀. (이미지 출처 = 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데레사 포카데스 수녀는 여러모로 놀랍고 흥미로운 사람이다. 영국 언론 <가디언>과 <BBC>는 데레사 수녀를 각각 ‘스페인과 남부 유럽에서 가장 래디컬하고 거침없이 돌직구를 날리는 수녀’, 또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좌익 지식인의 하나’라고 묘사했다. 반자본주의자로 그의 혹독한 비판은 은행에서부터 제약회사, IMF, WTO, 심지어 나토까지 종횡무진으로 거칠 것 없어 보인다. 

이력도 다채롭다. 그는 15살에 성서 나눔을 하다가 불에 덴 듯한 통증 비슷한 충격을 가슴에 품고 살았는데, 하버드에서 의학으로 석사를 마칠 때까지도 그 갈증은 식지 않았고 결국 베네딕토회 수도자의 길을 가게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수도회에 입회하고서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아 2005년 바르셀로나 대학에서 의학 박사를, 2009년에는 카탈루냐 신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의사이기도 하다.

다양한 이력과 지식의 경계가 없을 것만 같은 박식함, 거기에 더해 달변이기까지 하다. 이런 ‘화려한 스펙의 능력자’ 수녀가 페미니즘을 일종의 해방신학으로 보고 자신의 정체성을 거기서 찾는다. 곧 자신을 여성 해방신학자로 자리매김한다. 그는 태아는 생명체로 살 권리를 갖는다는 가톨릭 교회의 공식 교리를 따르면서도, 임신한 산모도 동일한 수준으로 임신에 대한 자기결정권이 있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공개적으로 ‘낙태와 피임약 사용을 지지’한다. 이쯤 되면 바티칸의 반응이 궁금해지는데, 아니나 다를까. 교황청 수도자성은 2009년 그의 ‘위험한’ 반 교리적 사상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 활동을 겨냥하고 베네딕토회 수녀원장에게 데레사 수녀가 가톨릭교회의 공식 가르침을 따르는지 공개적으로 밝힐 것을 요구했다.

그는 물론 교회 가르침과 교도권을 따른다고 했지만, 공개적으로 이에 반대할 자유가 있으며 낙태 문제에 있어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지지한다고 되풀이 강조했다. 데레사 수녀는 한 강연에서 이러한 바티칸의 조사와 간섭은 여성에 대한 ‘두려움’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또한 하느님의 창조물 가운데 의미 없는 것은 없으며 따라서 남성, 여성의 이성애뿐만 아니라 다른 섹슈얼리티, 곧 호모나 레즈비언, 양성애자, 퀴어 등도 그 자체로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존재라고 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톨릭 교회가 “여성혐오적이고 가부장적 구조를 갖고 있다”면서 “
가능한 한 빨리 변화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가디언>에 따르면, 그가 수녀회에 입회하기 전인 1997년, 베네딕토회 수녀들을 시험해 보기 위해 동성애 단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데레사 수녀는 이들이 자신들의 섹슈얼리티가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라면서 이것을 축하했다고 수녀들에게 말하자, 수녀들의 반응이 매우 인간적인 데에 감동해 입회를 결심하게 되었다.

그 뒤로 지금까지 바티칸에서 어떤 조치를 내렸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분명한 것은 그가 아직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와 그의 활동을 가시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 밖 정치권에서도 데레사 수녀를 두고 ‘광란의 음모주의자’라거나 오직 반쪽만의 진실로 수도자라는 신분을 이용해 공포를 조장하는 ‘사기꾼 수녀’라고 비난했다. 심지어 스페인 내무부 장관도 그를 포함해 스페인 가톨릭 수녀들의 정치사상을 겨냥해 “수녀를 이용해 정치활동을 하는 것은 이상하다. 그것은 철 지난 시대의 유물이며 21세기에는 정상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정치인들과 장관까지도 비판을 해 대는 판국이니 그의 명성과 활동을 미루어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비판에 대한 그의 대응은 ‘쿨’하다. “비판은 예상했다. 난 단지 예수라 불리는 사람을 따르고 있으며 그도 무수한 비난을 받았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다는 말을 이처럼 간단명료하게 할 수 있는 것도 그의 멋스러움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바티칸의 조사와 정치권에서의 공세적 비난 등을 생각하면, 베네딕토 수도회에서는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다른 소임을 맡기거나 해외로 보내거나, 좀 심각한 경우에는 아예 강연과 출판 등의 모든 공개적 행동을 못하게 할 것 같은데, 이 공동체의 대응은 좀 달랐다. 사실 수녀회가 아니었으면 그가 이렇게 유명해지지는 않았을 것 같다. 2009년 데레사 수녀는 조류 독감과 비슷한 돼지 독감이 창궐했을 때 돼지독감 백신에 대한 WHO와 스페인 의약산업계의 태도에 독설을 퍼부으면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는 수녀원에서 백신의 위험성에 대해 한 시간짜리 비디오를 녹화해 유튜브를 통해 전파를 탔고 스페인 사람 100만 명이 시청했다. 그러니까 수녀원이라는 무대를 통해 첫 데뷔를 한 스타 탄생의 시나리오는 수녀들의 도움이 없었으면 어려웠다는 얘기. 거기에다가 베네딕토 공동체 수녀들은 그에게 수녀 한 명을 일종의 ‘비서’로 붙여 주고 어디든지 가서 말하고공부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이러한 ‘찰떡궁합’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2013년 데레사 수녀와 한 유명 경제학자는 카탈루냐의 독립, 은행 국유화, 범 좌파 연대, 모든 시민의 한 집 가질 주거권 및 정당한 임금 등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운동을 주창한다. 그가 속한 정치단체는 바르셀로나 지자체 선거에 깊이 관여했고, 수녀회는 그에게 시간을 주기 위해 ‘부모가 심각한 병으로 수발이 필요한 경우’에 한해 시행하고 있는 3년간의 안식년을 허락했다. ‘데레사 수녀도 그렇지만 베네딕토 수녀회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이 질문이 자연스럽게 들리는 독자에게는 문제 없겠지만, 이 질문 자체에 대해 거부감이 드는 이들이라면 이 글의 서두조차도 의심해 봐야 한다. ‘여러모로 놀랍고 흥미로운 사람’이 수녀여서는 안 되는가? 수녀가 뭘 어쨌길래.... 이는 그에 대한 정치권의 비난의 맥락, 곧 ‘수녀의 지위를 이용해....’ 라는 생각과 맞닿아 있다. 도대체 수녀가 뭘 어쨌다는 말인가.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장

 우리신학연구소 홈페이지(http://wti.or.kr/)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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