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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 막는 브루더호프의 솔직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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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배너1.jpg 

미국 브루더호프공동체

8.뒷담화 말고 앞에서 솔직하게 얘기하라


독재의 기억이 만든 불문율, 대놓고 할말 다하기



 -Hindley family.jpg» 브루더호프의 힌들리 대가족. 브루더호프 공동체는 일과후 대부분의 시간을 가족끼리 보내며, 충분히 대화하고 교감하는 시간을 갖느는다. 온마을사람들이 함께 식사를 하는 점심때도 가족끼리 앉는다. 사진 브루더호프 제공


공동체마을 3백여명 전체 잔디밭 모임

어른 아이 다함께 거의 매일 모여

방문자에게 진솔한 논쟁 속살 보여줘


평화로운 마을 뒷면엔 부끄러운 ‘흑역사’

지도자 크리스토프의 부친 하인리히

독재자로부터 밀림 귀양 보내져도

누구도 저항 못했던 부끄러운 기억들


이젠 ‘할말 있을땐 당사자에게 직접’

“저 사람, 음주운전했다”

면전에서 말하고, 공개적으로 사과

‘식사 재료’ 놓고도 반론에 반론

민주주의 지켜내는 그들만의 지혜



 -대화.jpg» 브루더호프에선 남이 없는데서 그 사람 이야기를 하는 것은 금기다. 당사자에게 솔직하게 직접 이야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사진 브루더호프 제공


브루더호프 사람들은 주일에만 모이는 게 아니다. 점심시간에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식사할 뿐 아니라, 평일에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야외에 모일 때가 많다. 따라서 혼자만의 시간을 필요로 한 내게 ‘고독의 자유’를 즐길 시간은 그다지 없었다. 호스트 글렌이 모임 때마다 우리 부녀를 데리러 와 슬그머니 빠질 수도 없었다.


 타이 아속과 인도 오로빌을 거쳐 브루더호프에 오기까지 공동체마을을 신문에 소개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개인적 관심에 따른 순례 여정으로 여겼기에 ‘취재’에 민감한 브루더호프 쪽에도 순수한 방문일 뿐이라고 전했다. 취재 필수품인 카메라도 휴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드크레스트에서 생활하면서 이런 삶을 독자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직업병’이 발동했다. 무엇보다도 말이 넘치는 한국 교회와 달리 말없이 예수 정신을 삶으로 살아내는 그들을 보고는 그런 열망에 사로잡혀 버렸다. 그런데 공장에서 일하는 시간 외엔 대부분의 시간을 글렌이 꼭 달라붙었다. 그래서 휴대전화로나마 사진 하나 마음대로 찍을 수 없었다. 이처럼 후에 사진 사용을 허락받을 수 있을 줄 알았다면 속을 끓이지 않아도 됐을 텐데 말이다.


 브루더호프는 카메라에 상당한 경계심을 보였다. 공동체원들의 초상권을 보호해주고 싶은 배려심 때문이겠지만, 종교개혁 세력과 나치 정권에 이어 영국에서까지 박해를 받고, 공동체를 컬트(이단)로 음해하는 이들에게 당한 트라우마 때문에도 그런 듯했다.

 

 사진을 찍고 싶은 열망이 컸다는 것은 독자들에게 꼭 전하고 싶을 만큼 모습 하나하나가 아름답고도 특별했다는 뜻이다. 한국의 보통 개신교인들과 달리 내놓고 포도주나 맥주를 즐기는 모습도 카메라에 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공동모임.jpg» 브루더호프에선 점심은 모든 공동체마을 사람들이 함께 먹는다. 식사때는 가끔 찬송을 하고, 새로 온 식구를 소개하기도 하고, 좋은 경구들을 누군가 일어나서 읽어주기도 한다. 사진 브루더호프 제공



 -교육.jpg» 브루더호프는 교육에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입시교육이 아니다. 그들은 노동하고 캠핑하고 놀고 진솔하게 대화하며 삶 속에서 성숙한 인간으로, 이웃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인간으로 자란다. 사진 브루더호프 제공


 공동체원 전체가 모이는 모임의 대부분은 언덕 위 잔디밭에서 열렸다. 원으로 겹겹이 배치된 긴 나무의자에 가족들끼리 앉았다.

 주일에도 주기도문 암송과 찬송가, 설교 등으로 이어지는 ‘예배 틀’이 없었다. 노래는 많이 불렀지만, 일방적인 전달인 설교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모든 공동체원이 자신들의 신상이나 생각을 나눴다.

 

 모임 도중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파라과이 등에 있는 브루더호프 마을 공동체원들과 전화를 연결해 안부를 묻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 재해지역과 분쟁국에 파견된 형제들과 연결해 소식을 듣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누군가 사망했다거나 아프다거나 사고를 당한 슬픈 소식엔 모두 함께 슬퍼했고, 기쁜 소식은 축하해주었다. 


 예배나 기도를 위한 별도의 시간 속에서만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려는 시도는 시간 낭비쯤으로 여기는 듯했다. 그들은 일상 속에서 ‘사랑’을 나눔으로써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나도 함께하고 있다’는 그리스도의 말을 증거하는 것처럼 보였다.




 -보트.jpg» 보트를 타고 놀이를 즐기는 브루더호프의 청년들 사진 브루더호프 제공


 브루더호프의 지도자인 요한 크리스토프 아르놀트는 노령으로 거동이 불편했다. 그런데도 ‘한 사람이 주님’인 것처럼 한명 또 한명에 대한 그의 집중력은 놀라웠다. 누군가 그에게 인사하러 다가서면 절뚝거리며 일어서서 마치 죽음에서 돌아온 자녀나 형제를 맞이하듯 상기된 모습으로 반겼다. 


 크리스토프는 도저히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용서하는 ‘폭력의 고리 끊기’(BTC·Breaking the Cycle)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과 영국 사회의 놀라운 변화를 이끌고 있는 기독교 지도자다.


 그러나 그가 브루더호프의 창시자인 에버하르트 아르놀트의 아들 요한 하인리히 아르놀트에 이은 손자로서 ‘공동체 지도자직도 부자 세습이 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런데 2000~2010년엔 아르놀트가와는 무관한 리처드 스콧이라는 이가 지도자직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통받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던 사람으로 공동체원들에게 기억되는 리처드 스콧은 우리 부녀를 돌봐준 호스트 글렌-아델 부부 가운데 아델의 아버지였다. 평화스럽고 고결한 심성을 잃지 않던 아델을 보며 6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난 리처드 스콧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



 -대화2.jpg» 거의 매일 갖는 브루더호프의 모임은 대부분 야외 잔디밭에서 있다. 사진 브루더호프 제공


 우드크레스트를 떠나기 전 크리스토프 부부의 집을 찾았다. 벽면에 리처드 스콧과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크리스토프는 진심 어린 눈빛으로 환대해주었다. 브루더호프에 대해 칭찬하자 크리스토프의 부인은 “우린 연약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크리스토프는 “왜 공동체에 관심을 갖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휴직 기간에 공동체를 찾아다니며 살아보는 희한한 기자에 대한 당연한 궁금증이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어린 시절 부친과 모친이 방물장수·보따리장수들과 걸인들을 그냥 보내지 않고 늘 밥을 먹이고 잠을 재우고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하느라 가족들끼리만 식사해본 경험이 별로 없었던 고향집의 모습을 소개하며, “우리집도 공동체의 일종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부인 베리나는 “바로 당신의 부모님 같은 이들이 천국을 만드는 분들 아니냐”며 감동했다.


 브루더호프에서는 지도자들이 군림하지 않고 모두를 섬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한국에서 신자를 사익의 도구로 활용하면서도 하대하고 군림하는 종교인들을 적잖이 보면서 ‘성직자란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컸기에 이들의 비권위적인 섬김이 더욱 감동이었다.

 

그런데 공장장인 델프가 때마침 준 <꿈꾸는 인생>(홍성사 펴냄)이란 한국어판 책을 읽고 감동이 부서졌다. 브루더호프의 창시자인 에버하르트의 아들이자 크리스토프의 아버지로서, 브루더호프 100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요한 하인리히 아르놀트의 전기였다. 


 그 책 표지 날개엔 내가 1999년에 영국의 다벨 브루더호프를 방문해 쓴 르포기사와 함께 내 이름이 실려 있었다. 처음엔 살짝 훑어만 볼 셈으로 집어들었는데, 손을 떼지 못하고 단숨에 읽고 말았다. 그 책엔 브루더호프의 흑역사가 담겨 있었다. 에버하르트 사후 지도자가 된 사위 한스에 의한 독재와 배신과 갈등과 분열이 낱낱이 소개된 것이다. 주인공 하인리히가 매형 한스에 의해 파라과이 밀림 속으로 귀양 보내져 처자식도 만나지 못하는 등 몇년을 죽음의 위기 속에서 보내며 처절히 부서져버린 지옥 같은 삶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한스가 ‘성공적인 공동체’란 ‘장밋빛 성공신화’를 제시하며 공동체원들을 꼭두각시로 만들고, 오랫동안 아내 외 여성과 부정을 저질렀던 사실마저 공개돼 있었다. 전기 저자는 하버드대 출신으로, 주인공 하인리히의 외손자인 피터 맘슨이었다. 등장인물은 모두가 저자의 외증조부모와 외조부모와 어머니의 형제 등 가족들이었다.


 저자는 한스가 오랫동안 성공주의와 공동체주의를 내세워 리더라는 직책을 통제수단으로 사용하며 브루더호프의 초기 정신과 반대로 나아가는데도 아무도 저항하지 못한 음울한 역사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이토록 아름다운 공동체에 그런 독재와 갈등이 있었다는 것도 충격이었지만, 자기 가족의 비사를 세상에 남김없이 공개한 자신감이 놀라웠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전기의 주인공 하인리히가 수십년간 자신을 죽이려 한 독재자에게 협조한 사람들까지 용서로 끌어안고, 섬기며, 자기 아버지가 꿈꿨던 ‘오늘날 브루더호프의 하모니’를 이루어갔다는 점이었다.

 

 -대화1.jpg» 이들은 상대의 문제가 있을 때 상대 앞에서 직접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방법을 통해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것을 방지하고 있다. 사진 브루더호프 제공



 -크리스토프부부.jpg» 전세계 브루더호프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 크리스토프 장로와 부인 베리나. 사진 조현 기자


 그 독서 이후 겉모습의 브루더호프가 아닌 좀더 실제적인 브루더호프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간 느낌이었다. 브루더호프 사람들은 방문자에게도 속살을 보여주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한번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잔디밭의 야외 전체모임이 무르익었을 때 한 중년여성이 앞으로 걸어나와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한 이웃 남성의 이름을 거명하며 “술을 마셨으니 운전대를 잡지 말라고 했는데도 운전을 했다”고 말했다. 


 브루더호프엔 ‘상대에게 할 말이 있을 때는 뒷담화를 하지 말고 당사자에게 직접 솔직하게 말하라’는 불문율을 가지고 있다. 그 지독한 흑역사의 갈등을 거치며 배운 지혜일 것이다. 그러나 대중 앞에서 상대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은 과해 보였다. 그 남자도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이내 그도 마이크 앞으로 나와 그 여성에게 “위험에 빠뜨려 미안하다”며 “이제 조심하겠다”고 사과했다.


 우드크레스트를 떠나기 전날 밤엔 실내에서 어른들만 모인 가운데 열린 마을회의에 참석했다. 외부에서 식자재를 사오는 공급담당 청년이 “이 정도의 식사라면 어느 곳과 비교해서도 괜찮은 거 아니냐”고 말했다. 공동체의 누군가가 ‘요즘 식사가 형편없다’고 문제를 제기한 모양이었다. 


 우드크레스트에 머물며 음식이 고급호텔에 못지않아 공동체가 너무 잘 먹고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기에 그런 문제제기가 의외였다. 누군가 청년의 말에 반론을 펼치자, 청년은 다시 나와 눈물을 흘리며 “지금 가난한 나라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굶주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고 물었다.

 

 브루더호프는 미국의 빈자들을 돕고 있다. 소년소녀들이 가꾼 채소도 인근 홈리스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준다. 또 시리아 난민들이 도착하는 그리스를 비롯해 이라크, 요르단, 팔레스타인, 파키스탄, 네팔 등에 형제들을 파견해 난민들을 돌보거나 병원이나 집을 지어주는 일을 하고 있다. 이미 그런 일을 모범적으로 하는 자선단체 16곳에 재정지원도 하고 있다.

 

 이어 중년의 남성과 여성이 잇따라 일어나 “우리 형제들은 이 공동체 안에서 사는 사람들만이 아니다”라며 “세상 모든 형제들을 위해 우리의 욕심을 포기하고 헌신함으로써 지상천국을 만들어가는 게 우리가 함께 사는 이유가 아니냐”고 말했다.


 브루더호프에선 개인이 받는 월급도 용돈도 없다. 신용카드도 없다. 개인은 아무도 통장이 없고, 오직 한개의 통장만 존재한다. 유일한 통장을 관리하며 식자재 등을 살 때나 개인이 외출할 때 돈을 지출해주는 회계책임자가 일어났다. 그는 “우리는 전쟁과 박해, 재해 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늘 아껴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늘 말발이 센 사람들만이 발언권을 행사하는 바깥세상과는 다른 회의가 이어졌다. 누구나 일어나 나와 말했고, 토의는 길었고, 진지했다.


 다시 비민주적인 흑역사로 돌아가지 않기 위한 진솔한 대화의 밤이 그렇게 깊어갔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1.왜 공동체인가 

 

  타이 아속

 2.가장 ‘핫한 남자’ 포티락을 만나다

  3.이윤을 포기하고 부자가 된 사람들

 

  4.현대판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다

 

 인도의 오로빌

 5.자기로 살면 누구나 천재가 된다

 

 미국 브루더호프

 6.돈 없이 최고급리조트에서 살아보기

  7.공부보다 청소와 요리에 더 열심인 아이

 

 

 일본 애즈원

 9.인간과 사회 탐구, 제로에서 시작한다

 10. 아무도 명령 하지않는 일터에서 일하다

 

 일본 야마기시

 11.못난이도 잘난이도 함께 살아가는 곳



내 마음이 지옥일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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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수책-.jpg



괜히 견디지 마세요


 <꿈꾸는 당신>      마종기


 내가 채워주지 못한 것을

 당신은 어디서 구해 빈 터를 채우는가.

 내가 덮어주지 못한 곳을

 당신은 어떻게 탄탄히 메워

 떨리는 오한을 이겨내는가.


 헤매며 한정없이 찾고 있는 것이

 얼마나 멀고 험난한 곳에 있기에

 당신은 돌아눕고 돌아눕고 하는가.

 어느 날쯤 불안한 당신 속에 들어가

 늪 깊이 숨은 것을 찾아주고 싶다.


 밤새 조용히 신음하는 어깨여,

 시고 매운 세월이 얼마나 길었으면

 약 바르지 못한 온 몸의 피멍을

 이불만 덮은 채로 참아내는가.


 쉽게 따뜻해지지 않는 새벽 침상.

 아무리 인연의 끈이 질기다 해도

 어차피 서로를 다 채워줄 수는 없는 것


 아는지, 빈 가슴 감춘 채 멀리 떠나며

 수십 년의 밤을 불러 꿈꾸는 당신.



 밤새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약 바르지 못한 온몸의 피멍을 이불만 덮은 채로 

 참아내는'사람이 너무 많이 생각나더군요.

 그렇게 길고 시고 매운 세월을 어떻게 견뎠을까.

 당신, 참 대단하세요.

 하지만 이제부턴 괜히 견디지 마세요.

 그럴 필요 없어요.



 

국선도 청산거사의 수제자 허경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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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선도도종사4.jpg» 국선도를 세상에 알린 청산선사에게 직접 사사받으며 내공을 기른 (사)세계국선도연맹 허경무 도종사 글 조현 기자




 국선도1.jpg» 국선도 행공 수련 모습. 사진 세계국선도연맹 제공


갓쓴 장안의 기인으로 지난해 11 별세한 한양원 전민족종교협의회장(1924~2016) 청산선(1936~84·본명 고경민) 대한 일화를 들려준 적이 있다. ‘실내에서 청산선사가 공중에 떠서 2백여명의 대중들 주위를  돌더라 얘기였다

 

 비틀즈의 스승으로 유명해진 인도의 요기 마하리쉬 마헤시는 “초월명상’(TM) 하면 공중부양을   있다  한때 시선을 모았다오래전 이를 검증하기 위해 취재를 해보았지만초월명상을  이들에게서 그런 능력은 발견할  없었다이에 비해 국선도나 천도교의 시천주주문 수련 현장에서는 콩을 튀듯 엉덩이가 펄쩔펄쩍 떠오르는 모습을 쉽게   있었다그럼에도 인간이 공중에 떠서 돌아다녔다는 얘기까지는 믿을  없었다그러나  전회장은 여러명의 기자들 앞에서 “직접 본것이라며 그렇게 주장했다그런 전설적 일화를 많이 남긴 청산이 하산해 국선도를 세상에 전한지 올해로 50년이 됐다

 

 ()세계국선도연맹이 있는 충남 공주시 이안면 목동리 천선원을 찾았다청산의 법제자인 도운 허경무(70) 도종사가 머무는 곳이다. 2 과정의 국선도 대학에서 사범들을 양성하는 곳이기도하다

 

10년만에 보는 도종사는 선풍도골 풍모가 더해졌다청산이 무골이라면 그는 도골이다청산이 하산한 1967년만해도 해방후 이승만·박정희 정권에 의해 동양적인 것은 모조리 미신으로 치부됐다그래서 청산은 일본후지텔레비전의 쇼에 출연해 불속에서 타지않거나미국 후버댐의 수중에서 18분간 머무는 등의 시범을 통해 ‘수련의 실제 증명해 보였다그러나 도종사는 스승의 그런 외피 속에 가려진 ‘진정한 ()’ 드러내는데 더욱 주력했다.

 

그럼에도 그에게 한전회장의 증언을 전하며, “그게 가능한 얘기냐 물었다그는 “호흡을 통해 단전에 () 축적되면 기이한 현상들이 의도치않게 일어나게 된다 “스승님이 앉은 채 공중에서 앞으로 날아갔을테지만 처음보는 이들은 너무도 놀라  돈것으로 느꼈을지 모르겠다 말했다그러면서 그는 “인도에서  요기가 1970년대 카이스트에서 학생들이 하는 국선도 행공을 보고 놀라던 모습이 기억난다 “만약 인도 요기에게 국선도의 몇가지 기능만 가르쳐도 그가 단박에 세계적 유명세를 타게될 이라고 자신했다.

 

초기 국선도는 무인들에게 알려지면서 ·· 삼사관학교와 국회관공서에서 가르치기 시작했고정신문화연구원이 가르친 주요 내용이 국선도였을 정도로 일세를 풍미했다국선도는 전두환·노태우·박근혜 전대통령노무현 전대통령 부인 권양숙씨도 수련한  있다고 한다. 1970 서울 종로 국선도 본원에서 여당인 공화당 윤길중 총무와 야당인 신민당 조윤하 의원  유명정치인들이 수련했다그때 청산은 정치인들과 얽혀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했다국선도에선 1984년을 청산선사가 재입산한 해라고 밝히고 있으나세간에선 신군부에 의해 끌려간 상당수가 고문후유증으로 세상 떠난 선례에 비춰 청산도 당시 세상을 떠났을 것이란 추정도 적지않다 도종사는 이에 대해 “가족들이 생존해있는만큼  부분은 가족들이 아닌 타인들이 언급하기 어렵다 말을 아꼈다.

 

허경무가 고등학교를 마치고 청산을 만난 것은 태권도 6단으로 충남 오도관장이었다가 훗날 기독교 목회를  매형 이종택 목사의 소개를 받고서였다·고교때 태권도 복싱을  펄펄 날던 그가 매형에게 “우리나라에서 누가 제일 쎄냐 물으니 “기인이 나타났다매형과 의형제였던 청산을 알려주더라는 것이다그런데 막상 도장에 가보니무예는 안가르쳐주고 벽보고 숨만 쉬라고 했다곁눈질로 행공을 하는 사람들을 보니 덤벼도 한주먹감도 안될  같았다또래들과 도장을 내려오며 불만을 토로할  청산과 맞닥뜨렸다청산의 숙소인 낙원여관에 갔다혈기방장한 허경무의 불만을 들은 청산은 각목에 손으로 대못을 박고 나중에 볼로 박아 넣었다그리고는 이로  못을 다시 뽑아냈다청산은 허경무에게 새벽마다 인왕산의 수련터로 오라고 했다 때부터 그는 스승만 믿고 호흡과 명상으로 내공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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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선도 행공 모습. 사진 (사)세계국선도연맹 제공


 

그도 당시엔 철선녀 등과 함께 격파  외공 시범을 보였던 무예 고수였지만이를 드러내기를 꺼린다그러나 그에게 외공을 불과 1 남짓 배운 제자가 1회전국무술대회에서 대상을 받을만큼 국선도의 외공은 간단치않은 비장으로 무예로 평가받고 있다그런데도 그는 “진정한 힘은 용력에서 나오는게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이라고 다시금 일깨워준다

 

격파를 할때도 손바닥 힘은 한계가 있지만 마음은 한계를 뛰어넘는다육체가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한계 속에 갇히고만다그러나  안의 생명의 핵인 영이란 본질을 보고  힘을 통하면 한계를 단박에 뛰어넘을  있다.”

 

그러면서 그는 외적인 힘을 자랑하기보다는 다시 경계한다그는 “수련을 하다보면 의도치않게 나타나는 현상에 현혹돼 언제든 그 능력을 보일 수 있는 것처럼 내세우면 결국 사기꾼이 되고 무당이 되는 것”이라며 “국선도는 그렇게 마음이 둥둥 뜨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잡고 비굴하지도 휩쓸리지도 않고 자기다운 삶을 살아내는 전인격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날아오는 화살을 얼굴 앞에서만 쳐버려도 되는데정신집중을 못해 두려움 때문에 제풀에 나가 떨어지는 이라며 “단전에 의식을 집중하면 마음이 흔들리지않아 진정한 고수가   있다 말했다

 

세계국선도연맹은 경기도 과천시민회관에서 8일 오전1030~12국선도의 현대적 의의와 사명을 주제로 학술대회(세미나룸)를 열고, 같은날 같은시간 7회 국선도대회’(소극장), 오후 230분엔 세계국선도연맹 개원 50돌 기념식을 연다. 세계국선도연맹 누리집  http://kouksundo.com/

 

공주/·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지식만이 살길이라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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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숙.jpg 5유형은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

세 번째 


핵심동기 :지식

자신의 시각 : 탐구, 수집, 객관적

타인의 시각 : 관찰, 인색, 냉정

 

 

5유형은 지식은 이자 안전장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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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물에게 햇빛은 생명의 원천이듯 5유형에게 있어서 지식은 살아가는 입니다.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만족하는 지식수집가라 할 수 있지요. 그러나 5유형의 지식은 능력을 펼치거나 성공의 도구로써 보다는 현명하기 위해서 입니다. 또한 예측 불가능한 미래에 대비하고자 하는 정보 입수입니다.

 

사례 1>주말, 공휴일 상관없이 관심 분야의 피정, 세미나, 콘퍼런스 등 여러 곳

을 혼자 참석한다.


김인숙3.jpg 5유형은 대체로 차분하며 진지한 사람들입니다. 여러 아이디어를 생각하며 몰두합니다. 생각을 하지 않거나 무언가 하지 않으면 불안합니다. 이들에게 생각한다는 것은 자신의 일이나 말에 대해 논리적으로 단서를 제공하는 안전장치가 되지요!

 

이러한 5유형은 자신의 의견과 주장을 변호하려는 욕구를 갖고 온갖 지식을 쌓습니다. 탐욕적이라 할 수 있지요.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많이 안다고 하면서 회심의 미소를 짓습니다. 지적 수준을 견주려는 자세가 강합니다. 지적오만이라고 할까요?

 

 

5유형은 지식, 시간, 말 감정에 인색 합니다

 

진공청소기처럼 5유형은 한 번 들어간 정보, 자원을 쉽게 타인과 나누지 않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모두 드러내지 않지요. 사람을 싫어해서가 아닙니다. 나누면 마음이 빈 것 같은 공허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렇습니다. 속마음도 많이 나누면 소진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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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유형은 시간에 대해서도 양보하는 게 어렵습니다. 자신의 시간에 맞추려 하며, 상대방을 위해 시간을 내어주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시간을 허투루 잃을까봐 타인의 일에 관여하지 않으려 합니다. 단체 생활에서 어쩔 수 없이 참석을 하거나 해야 할경우가 있을 때 이들은 꾸물거리고 미루거나 잊어버리는 등 핑계를 대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례 2> 노트북이 고장 난 A는 컴퓨터의 달인인 룸메이트 5유형에게 도움을 청하

지 않는다. 시간을 내어주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에.

 

5유형의 이러한 태도는 생활 안에서도 나타나지요. 금전, , 미소에 인색하며자기에게 필요한 것도 최소한으로 절제합니다. 심하면 마치 청교도적인 삶처럼 삽니다.

 

사례 3>찰스 디킨즈 <크리스마스 캐롤>스크루우지 영감

4>헤어숍 잘 가지 않음.

 

5유형은 남의 도움 없이 해결하려는 성향이 있고, 누구에게 신세지기를 기피합니다. 그러다보니 삶, 사랑, 인간관계에서 독신주의자 아닌 독신주의자 성향이 되기 쉽습니다.

 

 

이것이 지나치면 관계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가지고 있는 풍부한 지식을 내어놓지 못하기에,

10개를 알아도 한 개를 제대로 풀어먹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타인에게는 옆에 있으나 마나 한 사람, 도움이 안 되는 사람으로 여깁니다.

 

 

 

 

 

한마디 코너: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서로 내어주면서 돕고 사는 유기체입니다.

타인에게 베풀 의외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두려움 불안 부추긴 구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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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숭실대 기독교학과 교수인 김회권 목사가 <복음과 상황>에 쓴 글을 3회에 나누어 연재합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동력은 무엇이었는가 <1>


-프랑스성당2.jpg» 프랑스 한 성당의 석상. 사진 pixabay


한국교회 안팎의 엄중한 현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기독교한국루터회를 필두로 대다수 한국 개신교단들과 여러 단체들이 다양한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행사들을 기획하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 전시용 연례행사의 일환이거나 16세기 종교개혁의 전체상을 파악하려는 연구 노력이라기보다는 개신교의 몇 가지 교리를 되뇌고 오래 전에 사라진 로마가톨릭교회의 여러 가지 모순들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데 주력하는 듯하다. 이런 회고적이거나 연례행사용 기념사업들은 정작 한국교회 자체의 개혁과제를 심층적으로 다루거나 한국교회 안에 누적된 적폐(積弊)들을 정직하게 대면하려고 하지 않는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둔 이 즈음 한국교회 안팎의 상황은, 확실히 16세기 루터의 종교개혁 역사에 대한 복고주의적 기억 재생이나 개신교 분리독립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몇 가지 교리를 재확증하는 수준으로 기리고 넘어가기에는 너무 엄중하다. 한국교회는 정치-경제권력의 총체적 부패와 타락을 방조하거나 그 배후에 있는 주류 지배 체제를 종교적으로 재가하는 고무도장 역할을 수행해왔다. 한기총과 여러 주류 교단들은 대체로 체제순응적, 분단체제 고착적이며 신자유주의 무한경쟁체제 옹호적인 입장을 피력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진보와 발전을 가로막는 수구세력의 대표자로 행세해왔다. 한국교회 강단은 권력층과 지배엘리트 연합세력의 죄를 무섭게 추궁하고 탄핵할 예언자적 기백을 상실한 채 사회 전체의 붕괴조짐을 미리 감지하고 경보음을 울리는 영적 지도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대언하고 성문과 광장에서 공평과 정의의 담론을 설파함으로써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전파하는 전도 사역에 오랫동안 불순종한 일과 관련이 깊다. 하늘로부터 오는 예언자적 묵시(비전)가 없는 경우 지배층부터 보통 사람들까지 다 방자하게 행하고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 요구를 묵살하기 마련이다.

 

현재 청와대와 여당을 정조준한 하나님 심판의 손이 언젠가는 교회와 영적 지도자들을 겨냥할 수도 있다. 한국 사회를 향한 무섭고 충격적인 하나님의 정화적 심판이 이미 작동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초래한 한국의 누적된 타락과 공평과 정의 붕괴를 일소하기 위해 백만촛불 민심의 아우성을 들어쓰실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향해 영적 각성과 정화를 위한 회초리를 드신다고 하더라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맘몬숭배가 극에 달한 제도권 기독교는 이제 한국 사회의 진보와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역기능할 위기에 놓여 있다.

 

한국교회의 7가지 적폐

 

한국교회 안팎의 깨어있는 관측자들은 한국교회의 많은 적폐 중 대략 일곱 가지 정도를 지적한다. 한국교회의 무정부 상황적 교파분열(장로교단만 70여 개), 주류 교단들의 성장 하락세와 사회적 신인도 추락, 그리스도인들의 윤리도덕적 타락과 부패, 세상을 하나님께로 이끌 영적 지도력 결여, 교회의 정치경제권력 시녀화, 목회자와 당회원들의 교회 사유화, 그리고 더 이상 성령의 중생사역과 영적 쇄신사역이 일어나지 않는 원인이 되는 하나님의 임재 철수다. 이 마지막 현상은 앞의 여섯 가지 현상들의 원인이면서 결과다. 에스겔 8~11장은 우상숭배의 소굴로 전락해버린 예루살렘 성전을 단계적으로 떠나는 야웨의 영광(쉐키나)의 동선을 단계적으로 보여준다. 예루살렘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타락이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하여금 당신의 성전을 어쩔 수 없이 떠나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한국교회의 오래된 불순종과 불충성이 하나님을 교회에서 떠나도록 압박하는 수준에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교회에는 이제 성령의 역사로 인한 중생과 새 신자의 입교, 그리고 교인들의 삶을 총체적으로 정결케 하시는 성령의 성화 역사가 점차 희소해져가고 있다. 어린 사무엘이 야웨의 법궤 앞에서 불침번을 서면서 예언자로 부화하던 시기에 야웨의 말씀과 이상이 희귀했듯이, 지금 한국교회에도 하나님 말씀을 진정성 있게 청취하여 세상에 기탄없이 대언하는 예언자적 중보와 소통 사역이 사라져가고 있다. 교회와 교인을 넘어 한국인들의 양심 가장 깊은 곳을 진동시키는 하나님의 대언자가 없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보면 한국교회 중심교단들이 마치 자신들이 종교개혁의 유산을 이어받은 개혁교회의 후예라고 자임할 수 있는지 자체가 의문스럽다. 지금 한국교회는 16세기 개혁교회를 거의 하나도 닮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도적 정통교회의 네 가지 표지 어느 하나도 뚜렷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사도들의 신앙전통을 계승하며 십자가의 도()로 세상을 이기는 사도적 정통성, 한 분 하나님·그리스도·성령으로 결속되어 누리는 단일성, 말씀과 치리와 권징으로 자기를 개혁하고 고결한 삶과 인격으로 세상을 놀라게 만드는 거룩성, 종과 자유자, 이방인과 유대인 등 온갖 차별을 초월해 모여드는 국제적 친교공동체의 토대인 인적 구성의 보편성을 결여하고 있다.

 

이 글을 쓰는 필자 자신이 바로 이런 주류 교단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그 교단 중 하나에 속한 목회자로서 행세하는 자다. 필자가 속한 주류 교단의 모든 한계와 연약한 점을 나눠지며 이런 뼈아픈 자성(自省)을 하지만 우리에게는 한국교회를 단순간에 거룩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전망과 통찰이 없다. 이런 좌절을 의식하면서 루터를 종교개혁자로 등장시킨 사태의 진면목을 알아보고 그의 종교개혁 횃불의 발화점을 추적해보려고 한다. 이 글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둔 한국교회가 이를 의미있게 기리려면 종교개혁의 근본동인이었던 이신칭의 구원과 그 열매인 디아코니아 신학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종교개혁 이전의 루터 : ‘그리스도인의 탄생

 

루터의 종교개혁이 이룬 성취 중 가장 근본적인 것은 한 명의 그리스도인이 탄생하는 과정을 명료하게 보여준 점이다. 루터를 일생동안 로마가톨릭에 맞서게 하고 그의 양심을 한없이 담대하게 만들어준 것은 하나님의 의()’의 복음이었다. 그것은 로마서 1:16~173:24~26에 기록되어 있다. 이 두 본문이 루터가 주창한 솔라 그라티아(sola gratia)와 솔라 피데(sola fide) 복음 즉 이신칭의 복음의 핵심구절이다. 루터가 바울의 이신칭의 복음을 발견하기 전까지 그가 걸어온 황량한 영적 여정을 생각하면 그가 왜 종교개혁자로 추앙받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로마가톨릭교회에 맞싸운 투사였기 때문에 종교개혁자로 추앙받는 것이 아니라 중세교회 천 년 동안 은폐되었던 하나님의 복음을 재발견했기에 종교개혁자로 각인되었다.

 

루터가 비텐베르크의 쉴로스교회(Schlosskirche) 문에 95개 조항의 쟁점들을 붙였던 1031일이 해마다 종교개혁절로 지켜지지만, 그의 종교개혁은 그 한 날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 후대 역사가들이 강력한 세계사적 순간이라고 명명한 루터의 95개 조항 벽보 게시는 로마교황청에 대한 직접적 개혁 요구가 아니라 당대에 중요했던 일련의 신앙 쟁점들에 대해 학문적인 토론을 해 보자는 초청장 게시였다.

 

루터로 하여금 95개 조항을 교회벽에 게시하도록 격동한 것은 순회 하급 성직자들(friars)이 주도하던 면죄부 판매행위였다. 루터는 면죄부가 이미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최후 심판에 소환되기 전에 연옥에 머무는 시간을 줄여주기 위해 쉽게 용서받을 수 있는 죄에 대한 징벌을 경감시켜 줄 수 있는지 없는지부터 토론하자고 동료들을 초청한 것이다. 그런데 결국 면죄부 판매행위에 대한 루터의 항의가 로마가톨릭교회의 중추신경계를 건드렸고 루터 자신을 교황청의 대적자로 등장시켰다. 루터는 어떻게 이렇게 대담한 문제 제기를 할 수 있었을까? 그는 교황보다는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더욱 더 사실적으로 느끼고 의식했기 때문에 그토록 용감해질 수 있었다. 그는 로마가톨릭교회가 구축해놓은 보편적 객관세계의 틀을 뛰쳐나가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가 되었다.

 

1483년에 태어난 마틴 루터가 자신의 신앙문제로 고뇌를 거듭하던 16세기 초반은 중세적 고딕 신앙의 불안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중세적 고딕 신앙의 불안이란, 하나님과의 신비주의적 접촉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직접 인을 쳐주신 구원확신을 갈망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직접적인 어루만지심을 맛보지 못해 생긴 불안을 말한다. 죄책감과 죄의 형벌에 대한 두려움은 커져가는데도 용서의 확신이 사라질 때 오는 불안이 바로 고딕적 불안이었다. 이런 불안은 미사와 성인숭배 등에 대한 광적 몰입을 촉발했다.

 

예를 들면 1년에 64명의 신부가 비텐베르크에서 두 시간 반 걸리는 미사를 8,881번이나 드렸다. 쾰른에서는 심지어 11개 대학교와 22개의 수도원, 19개의 교구교회, 100여개의 예배당에서 매일 1천 번의 미사가 열렸다. 특히 죽은 자들의 영혼을 천국으로 보내준다는 미사가 가장 많았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구원의 터치를 목말라 하며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려고 많은 수도원들이 성업을 이루었다. 이런 영적 환경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그 시대의 아들 루터의 양심에도 이 고딕적 불안은 쉴새없이 질문을 불러일으켰다. ‘어떻게 나는 은혜로운 하나님을 얻을 수 있을까?’ ‘어떻게 최후 심판 때 하나님의 기꺼운 영접을 받을 수 있을까?’

 

이 질문들 앞에 선 루터에게 일곱 가지 성사는 도무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심지어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사실상 죄사함의 복음을 매개해주는 고해성사와 성만찬마저도 쓸데없었다. 하나님과의 직접적 만남을 갈구하던 중세신비주의, 일상생활에서 마귀가 마음대로 사람들의 영혼을 지배하고 가위누를 수 있다고 믿었던 마귀활성론적 신앙, 종교교권으로 죽은 사람의 영혼까지 살릴 수 있다고 믿는 무시무시한 돈 중심의 구원론 등이 착종(錯綜)된 시대에 태어난 루터는 그 시대의 아들답게 하나님께 용납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놓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청년이었다.


김회권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공부했으며, ESF(한국기독대학인회)에서 회심하고 신앙 훈련을 받은 뒤 11년간 ESF 간사로 섬겼다. 장신대 신대원을 나와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성서신학석사 및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모세오경 1, 2》 《김회권 목사의 청년설교 1, 2, 3》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사도행전 1, 2등 다수가 있다.



이 글은 <복음과상황>(http://www.goscon.co.kr/)에 실렸습니다.

루터, 복음을 재발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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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상황>에 실린 숭실대 기독교학과 교수

김회권 목사의 종교개혁 글 3편 중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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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종교개혁 동력, 복음의 재발견

 

이런 고딕적 불안에 시달리던 루터는 스물두 살 무렵에 쉬토테른하임이라는 곳에서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는 장면을 보고 동정녀 마리아의 어머니이자 광부들의 수호성인으로 존숭되던 성 안나를 부르며, “성 안나여 저를 살려주시면 제가 수도사가 되겠습니다라고 서원하고 말았다. 1505년에 스물두 살 청년 루터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들어갔다. 하지만 하나님께 용납될 만한 자가 되어 구원을 향유하고 싶었던 루터는 수도사가 되어서도 구원을 확신하지 못했다. 에르푸르트 수도원 수도사 시절에 루터는 새벽 4시에 일어나고 저녁 8시에 잠들면서 분투를 거듭했지만 그의 영혼은 끊임없이 죄책감으로 가득 찼다. 독일어로 안페히퉁’(Anfechtung)이라고 불리는 도덕적 양심가책증이 그를 포박하고 있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한 달에 한 번씩 고해성사를 하는데 비해, 루터는 매일 한 번씩 고해성사를 했다. 루터의 고해성사를 받았던 존 스타우피츠 수도원장은 루터로 하여금 더 이상 중세적 고딕 불안에 빠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하라고 권했다. 결국 30세를 전후한 루터의 내면은 중세적 고딕의 불안과 자기가 가졌던 독특한 종교적 감수성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대표하는 의(), 즉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불쾌감과 심지어 무관심을 몸서리치게 느꼈다.

 

무엇보다 루터가 하나님의 의를 인간의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라고 생각했던 가장 큰 이유는, 시편 31:1의 라틴어 성경 번역인 당신의 심판에 나를 넘기소서때문이었다. 지금 성경에는 영어성경이나 한글성경 모두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쁘치드코터카 팔러테니)라고 되어 있는 이 구절이 당시 루터가 읽은 라틴어 역본에는 당신의 심판에 나를 넘기소서라고 번역되어 있었다. ‘당신의 의로 구원하시는 하나님당신의 의로 심판하는 하나님으로 오해한 루터의 영혼은 평화를 잃고 동요했다. 미사나 고해성사는 물론이요 로마 순례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특히 1510~1511년의 여덟 달 동안 로마에 체류하면서 죄용서 효능을 일으킨다는 로마의 빌라도 계단을 무릎 꿇고 올라갔지만 그의 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럴수록 루터는 사흘에 한 번씩 물도 마시지 않는 금식을 했다. 20대에 갔던 수도원에서 여성을 보고도 한 번도 음욕을 느끼지 못했고, 사제가 되어서도 여신도의 고해성사는 딱 세 번만 받았다. 심지어 여신도의 고해성사를 받을 때 목소리를 기억하려 하지 않았고 주발 너머의 얼굴 윤곽도 보지 않았다. ‘수도원 규칙준수로 말하면 천국의 가장 꼭대기에 가야 할 내 영혼이 왜 이렇게 황량하고 쓸쓸하며 하나님은 내 인생을 향해서 진노를 드러내고 있는가?’라고 그는 늘 생각했다.

 

이런 루터의 고뇌가 7년간(1505년 수도원 입회부터 1512년 시편에서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기까지) 계속되자 하나님께서 루터에게 시편 71, 31, 로마서 1:16 등을 통하여 은혜를 주셨다. 그는 먼저 시편에서 하나님의 의를 발견한 후에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히브리서 강해(1512~1520년까지 종교개혁의 영적 동력 축적기에 깊이 연구한 책들)로 나아간다. 시편은 도덕적 건조증과 죄책감에 휘둘리며 하나님 앞에서 진창과 수렁에 빠졌다고 느끼던 루터에게 영적 소생력을 제공했다. 시편에서 복음의 시적 표현을 발견한 루터는 로마서 1:16~17에서 복음의 명료한 진술을 보았다. 16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곧 하나님의 신실성임을 깨달은 루터는 이 하나님의 의가 죄인을 지옥으로 던지는 심판의 정의가 아니라 죄인을 의롭게 만드는 구원의 의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루터가 발견한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원리다.

 

루터는 여기서 말한 ’()은 신자의 믿음을 가리키기 이전에 하나님께 대한 그리스도의 신실성을 가리킨다. 하나님 앞에서 율법의 요구를 100%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의롭게 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성례전(영성체)을 통해 그리스도의 의가 유입된다고 가르친 반면, 루터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하나님의 의성취를 믿으면 그때 하나님의 의가 죄인에게 전가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시편, 히브리서, 로마서, 갈라디아서 이 네 책을 약 8년에 걸쳐 집중 연구하고 강의함으로써 루터는 나중에 종교개혁이라고 불리는 가톨릭교회의 적폐해소 싸움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수 있는 내적 구원의 확신을 구비하기에 이르렀다. 이 네 책 연구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오해에서 이해로 가는 주석 과정이었다.

 

8년의 성경연구에서 터득한 진리

 

8년 여에 걸친 성경연구를 통해 루터가 깨달은 진리는 다음과 같다.

 

1. 죄인을 의롭다하심 곧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 즉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져다준 선물이다. 우리는 죄에 대한 양심의 고통스런 자각을 가지고 어떤 선행으로도 우리가 의롭다 함을 덧입는데 이바지할 수 없으며 그러므로 오로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무조건적으로 믿고 의뢰하고 의존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홀로 우리 믿음의 최고 기준이 되는 성경이 하나님의 약속의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는 바다. 이 단순한 깨달음이 후에 종교개혁의 배타적인 슬로건으로 정착된, “오직 은혜만으로(sola gratia), 오직 그리스도만을 통하여(solo Christo), 오직 믿음만으로(sola fide)”로 결실된다.

 

2. 이 신조들은 오로지 성경이 최고 권위를 가지고(sola scriptura) 증거한 증언에 근거하고 있다. 이 신조들은 어떤 세상적 혹은 종교적 권위보다 더 높으며 황제나 교황의 권위보다 더 높다. 그래서 그것은 믿음의 확실성 안에서 한 개인으로 하여금 교권이나 황제에 대항할 능력과 용기를 고취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절대주권적 자유 가운데 은혜를 나눠주신다면, 스스로 은혜를 나눠줄 수 있다고 말하는 교황청 교회의 주장은 분쇄된다. 만일 모든 인간이 그들의 종교적 선행이나 그들에게 부여된 영적 위엄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는 똑같이 무가치하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소유하고 누릴 수 있는 특별한 특권을 가졌다는 교황청의 모든 주장들은 공허한 주장이 되어버린다. 이것은 종교적 위계질서의 종말, 즉 사제주의의 종말을 의미한다.

 

3. 하나님의 구원은 후기 스콜라신학의 매개 신학(사제들에 의한 일곱 성사 매개를 통한 구원의 유입)을 통해 경험되지 않고, 개인의 양심에 성령의 권능으로 동력화된 하나님의 복음이 직접 속죄의 확신과 죄사함의 효능을 방출함으로써 일어난다. 동물희생의 피제사가 이스라엘을 1년간 의롭게 해주었다면 하나님의 독생자가 흘린 피는 세계만민을 의롭게 할 수 있는 영단번에 드려진 제물의 피였다. 예수의 피는 하나님 자신이 계약관계를 유지하려는 결심을 천명한 사건이기도 할 뿐 아니라 죄인의 양심을 회복시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믿음으로 응답하도록 언약적 결속을 창조한다. 예수의 피는 하나님의 의에 응답하는 의로운 삶을 창조하도록 부단히 격려하는 사랑의 샘이 된다. 이신칭의 복음은 사랑의 샘에서 흘러나온 이웃 사랑 실천의 윤리로 바뀐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의 피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려고당신의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이신칭의의 복음은 의로운 삶을 가능케 하는 행동화될 복음인 것이다.

 

이 글은 <복음과 상황>((http://www.goscon.co.kr/))에 실린 것입니다.

 

루터의 양심가책증을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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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상황>에 실린

숭실대 교수 김회권 목사의

종교개혁 시리즈 3편가운데

마지막편입니다.


-루터.jpg» 독일 작센주 드레스덴 성모교회에 서있는 마틴 루터상. 사진 픽사베이



한국교회가 계승해야 할 유산 1 : 루터의 회심 체험

 

이처럼 예수의 피가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 안에 있다고 고뇌하던 루터의 양심가책증을 치유했다. 자기 인생이 지극한 영적 건조증에 빠져 있으며 하나님의 분노와 불쾌의 대상이라고 고뇌하던 루터의 영혼에 예수의 피가 뿌려지자마자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불안이 사라졌다. 그리고 뒤이어 지··의를 소생시키는 성령의 조명으로 하나님의 가슴 속 깊은 사랑이 루터의 영혼에 유입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첫 출발은 그의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지속적으로 강력하게 사로잡히는 경험이었다.

보름스 국회(1521)에 소환된 38세의 젊은 사제 루터는 자신의 가르침을 철회하라고 요구하는 황제 카알 5세와 로마 교황의 대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항변했다.

 

내 양심은 하나님 말씀에 붙들려 있습니다, 내 양심과 반하여 하는 말은 정당하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시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100년 전 체코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를 화형했던 바로 그곳에서 루터가 이렇게 용감하게 외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양심이 하나님의 복음에 붙들렸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에 의해 그 양심이 송두리째 포획된 사람만이 무한히 대담하고 일관성 있게 종교개혁을 외칠 수 있다. 한국교회는 이런 루터를 가졌는가? 루터의 종교개혁을 계승하려면 루터의 양심을 강력하게 사로잡은 하나님 말씀에 결박당한 자가 나와야 한다.

 

아니 그보다 더 앞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 영적 갈망이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종교개혁의 유산을 이어받으려면 루터적 양심가책증을 먼저 앓아야 한다. 루터는 너무나 사소한 죄를 가지고 지옥에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에 빠졌는 데 비해 오늘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요구를 한 번도 진정하게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의 불꽃 같은 거룩한 시선도 도무지 경험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삶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얼마나 엄숙하고 진지한지를 상상조차 못하기에 너무 쉽게 하나님을 사랑이 많으신 분으로 단정하며 구원을 쉽게 확신한다.

 

한국교회 교인들 대부분이 확신하는 구원이 과연 루터적 양심가책증을 통과한 후 맛보는 구원인지 심히 의심스럽다. 따라서 루터를 이해하고 계승하려면 가장 원형적인 이신칭의 복음에 붙들리고 추동되는 그의 구원 경험을 에누리없이 추체험(追體驗)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종교개혁은 순전히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구원이 임하고 하나님 복음의 뜨거운 생명력에 사로잡힌 자들에 의해 착수될 수 있는 신적 가능성이다. 하나님에 의해 전적으로 갱신되고 쇄신된 개인에게서 발화하는 것이 종교개혁적 불씨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예수님이 드린 속죄의 피의 효력을 루터처럼 깨닫고 임상 경험하는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가? 예수의 피복음과 그의 보혈로 구원받고 십자가의 권능으로 자신의 옛자아 해체를 경험한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는가? 쉽게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없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보고, 온갖 불의한 쾌락과 불법 가득 찬 축재와 타락상을 뉘우치고 루터적 회심을 경험한 사람이 출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국교회 안에 종교개혁의 기초 동력도 축적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예수의 보혈로 자기쇄신을 맛보지 않고는 자기 밖의 사람들과 제도를 향해 개혁을 외칠 수가 없다.

 

한국교회가 계승해야 할 유산 2 : 디아코니아 신학의 토대가 된 이신칭의 신앙

 

한국교회가 계승해야 할 종교개혁의 또 하나의 유산은 이신칭의 구원이 이웃 사랑의 봉사 신학으로 객관화된다는 사실이다. 루터의 구원은 그의 내면과 양심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루터가 받은 구원은 결코 개인 구원이 아니었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하나님께 신실케 된 신자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신실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는다고 확신했다. 루터는 로마서 8:1~4 강해에서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는 이신칭의 경험의 진수가 하나님의 율법 요구를 행할 능력을 갖게 됐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루터는 우리가 구원받았기 때문에 다시는 영적 분투가 필요 없는 몽환적 무릉도원으로 피신해가는 그런 의미의 구원을 말하지 않았다. 루터에게 하나님의 의로 의인이 됐다는 말은 언약적 요구를 그리스도인이 다 수행하고 성취했다는 의무 성취 종결선언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복음으로 의인이 됐다는 말은 언약적 결속감과 언약적 의무감을 회복하고 복원했다는 말이지 더 이상의 언약적 의무 수행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으뜸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죽기까지 성취함으로 율법의 요구를 100% 준행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계명을 일생 동안 준행하며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내포한다. 루터에게 칭의는, ‘당신은 이제 하나님과의 계약적 요구를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감화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샘솟는 사랑을 맛보고 그 사랑을 이웃에게 실천함으로써 당신이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십시오라는 요구로 귀결된다. 그는 한때 야고보서를 아기 예수를 깜싸는 부드러운 강보(로마서, 갈라디아서)가 아니라 말구유의 가장 밑에 깔려 있는 지푸라기 정도라고 폄하했지만, 야고보서 1:25이 말하는 자유케 하는 율법의 의미에 대해 무지하지 않았다.

 

그는 이신칭의를 덧입은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힌 자라고 보았다. 루터가 한 말 중에 크벨레 리베’(Quelle Liebe, Spring of Love)가 있는데 이 말은 하나님의 복음에 의해 의인화된 죄인의 마음 속에 쏟아지는 하나님의 충일한 사랑(5:8~10)을 가리킨다. 사랑의 샘이라는 어구는 의롭게 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입된 하나님의 사랑 샘이 터져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율법의 요구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샘솟는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만드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처럼 루터는 전가된 하나님의 의가 반드시 삶을 통해 행동화하는 의가 된다고 보았다. 구원받은 신자가 성령의 감동과 하나님의 사랑 샘에 추동되면 하나님의 의의 요구를 준행할 힘을 덧입게 됨으로써 전가된 의는 이웃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의로 치환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해주신 사랑의 샘에서 솟아나는 사랑으로 율법의 요구를 초월하는 이웃 사랑의 실천이 디아코니아다. 디아코니아 신학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집사가 되어 봉사하는 것을 장려한다. 결국 루터의 이신칭의 신학의 열매가 디아코니아 신학으로 결실한 것이다. 디아코니아 신학의 테제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에 돌입했는가? 답은 이웃 사랑에 투신한 사람만 하나님과 의롭게 된 자다라는 것이다. 의롭게 됐다는 증거는 이웃과 화평한 상태에 들어가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투신된 삶이다. 루터는 하나님과 의롭게 됐다는 확신을 양심의 판단에만 맡기지 않고 그것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기준을 마련한 셈이다.

 

로마서 12:1~313:8~10이 바로 이신칭의 신학이 디아코니아 신학으로 결실되는 원리를 설명한다. 로마서 12:1~3은 하나님의 큰 자비로 구원받고 의롭게 된 사람은 자신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삶으로 자신의 의롭게 된 구원 경험을 입증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

 

여기서 영적 예배의 헬라어는 로기코스 라트레이이다. ‘로기코스논리적인’(logical) 혹은 합리적인’(reasonal)을 의미하며, ‘라트레이라는 말은 예배혹은 봉사’(service)를 의미한다. 의롭게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예배드린 행위가 이웃을 섬기는 행위라는 것이다. 의롭게 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예배하며 그 몸 제물은 이웃에게 봉사하고 섬기는 행위로 나타난다. 즉 이웃의 필요에 던져진 내 몸은 하나님 제단에 드려진 산 제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루터가 말한 봉사 신학이며 그 봉사 신학의 뿌리는 이신칭의 신학이다. 이신칭의의 완전한 형태는 이웃 사랑을 위해서 제단에 바쳐진 몸 신학이다. 그래서 루터교가 지배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나라에서 국가복지제도가 빨리 정착되었다. 이웃에게 봉사하는 길만이 하나님께 의롭게 된 자임을 입증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모든 루터교 국가 시민들(특히 독일인)은 이웃을 위해 돈 내는 것을 쉽게 생각한다. 그들은 높은 세율의 세금을 기꺼이 내기에 복지국가를 만들 수 있었다. 북구 복지선진국가들, 즉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독일 등 전부 다 독일 루터파 교회의 영향력 아래 있는 나라들이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소책자에서 이 봉사 신학의 역설을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에 의해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케 된 자는 이웃을 위해 종이 될 정도로 자유케 된 자다. 나는 하나님의 속량은혜로 만민에게 자유하지만 하나님의 속량은혜로 말미암아 만민의 종이 되었다.”

 

이신칭의를 누리고 성령충만을 받는 성도들은 종말론적 확신 속에서 돈을 숭배하고 형제자매들을 물신적 노예상태로 부려먹었던 모든 맘몬추구적 삶을 포기하고 돈을 가지고 형제를 살리고, 자기 힘을 가지고 하나님 백성들의 생명을 살리는 거룩한 낭비를 일삼게 될 것이다. 이신칭의를 받고 로마서 8장처럼 성령의 충만함으로 율법의 의를 이루는 사람들은 동터오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확신 때문에 먼저 자신의 힘을 다하여 이웃 사랑에 힘쓴다. 루터나 본회퍼는 이렇게 급진적인 사랑에 의해 움직이는 민간조직으로서의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전위라고 보았다.

 

사도행전 2장과 4장은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공동체를 아주 순간적으로 간취(看取)한다. 예루살렘 원시교회 교인들은 하나님 예배를 이웃 사랑으로 표현함으로써 교회 안에는 아무도 핍절한 사람이 없도록 강력한 언약적 결속감으로 뭉쳐 있었다. 그들은 서로 돌보았을 뿐 아니라 모든 가난한 사람을 돌봄으로써 그들 가운데 아무도 가난한 사람이 없게 만들었다.

 

맺는 말

 

루터의 종교개혁이 결코 완벽한 종교개혁이 아니었으나 적어도 한국교회가 계승하고 터득해야 할 교훈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무엇보다 먼저 루터의 종교개혁은 한 개인의 양심이 하나님 말씀에 포획되어 촉발된 운동이었다. 루터가 청년기에 발견한 하나님 말씀은 로마가톨릭교회를 세차게 질책하고 그 죄상을 폭로하는 예언자적 말씀이며 고딕적 불안에 시달리던 영혼을 구원하는 복음이었다. 또한 루터의 종교개혁은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 확신으로 승화된 신앙만이 부패한 제도권 종교권력 체제와 맞설 수 있게 만드는 영적 무용(武勇)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루터는 인간은 자기 마음을 정복한 확신들에 의해 창조되고 형성된다는 사실을 스스로 경험했다. 마음 속에서 확신하게 된 진리만이 우리의 관계적인 존재를 변화시킨다. 인간은 믿는 동물이며, 인간의 삶은 그가 진리라고 믿는 것 속에서 그리하여 궁극적인 신뢰를 쏟아붓는 것 속에서 그의 존재를 끌어가는 방향성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루터는 오직 말씀의 수레를 타고 오는 성령만이 거대한 구조악과 맞설 수 있는 개인의 확신을 창조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루터는 인간의 확신은 조작될 수 없지만 사람들이 믿는 바 확신의 내용은 공적인 논쟁과 공적인 토론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확신 주관주의로 빠지지 않았다. 그래서 루터는 진실로 복음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내적 증거로 창조된 확신은 복음 선포라는 외적인 형식을 통해 선포되고 공적인 광장에서 토론되고 검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 교회와 세계를 다스리신다는 확신은 기독교회의 선포와 삶, 그리고 공적 토론을 통해 객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루터의 종교개혁은 인류에게 행하는 봉사와 섬김이 바로 하나님께 몸을 제물로 드리는 예배임을 강조했다. 루터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말하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삶을 하나님 눈 앞에서 공로를 세워야 할 벌판이라고 보는 관점에서 해방되었다는 점에서 만유 위에 있는 자유케 된 주(). 하지만 세상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은 세상을 섬기는 활동을 통해 세상 안에서 실습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실천하는 사명은 모든 직업과 모든 활동을 통해 실습되고 실천될 수 있다고 믿은 루터는 그리스도인들은 각각의 직업영역에서 만인제사장적 봉사를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끝으로 루터의 종교개혁의 유산 중 이신칭의와 디아코니아 신학은 현대 독일의 국가적 재활복구 과정을 설명하는 틀이 되기도 한다. 몰트만의 자서전 앞부분을 보면 루터가 독일신학과 독일정신을 창조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영감의 원천인지를 알 수 있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과 이신칭의 신학은 단지 인간구원의 신학 테제 이상이었으며 두 차례 전범국가로 낙인찍혔던 독일을 재활복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루터의 이신칭의 신학이 없었다면 1,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무후무한 전쟁을 30년 안에 두 번이나 겪은 독일이 오늘날처럼 재건될 수 없었을 것이다(몰트만 자서전, 66). 독일이 1, 2차 세계대전 이후 자존심을 회복하고, 언약재갱신과 재활복구를 경험한 것은 바로 만신창이가 된 죄인이 하나님의 압도적인 의로 의롭게 되는 루터적 경험의 공동체적 적용 사례다.

 

루터가 쓴 마지막 성경주석인 창세기 주석(1546), 이신칭의란 인간의 허무한 쓰레기 경험()과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는 악행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눈부신 의와 은혜를 창조하시는 새 피조물 창조 사건이라고 말한다. 루터의 창세기 주석은 시궁창 아래 굴러떨어진 인간의 존엄 상실 경험들을 활용해서 죄인을 의인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견인적 은혜를 철저하게 부각시킨다. 루터가 보기에는 참혹한 죄악과 그것을 역전시키는 의인화(義認化) 복음의 역설의 병치가 창세기를 관통한다. 루터의 모든 저작들은 야만적인 문명 안에서 우주의 먼지처럼 작아지는 인간을 소생시키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만지게 한다. 이 뜨거운 구원 경험이 루터의 이신칭의 신학의 열매인 디아코니아 신학을 배태한다.

 

 

김회권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공부했으며, ESF(한국기독대학인회)에서 회심하고 신앙 훈련을 받은 뒤 11년간 ESF 간사로 섬겼다. 장신대 신대원을 나와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성서신학석사 및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모세오경 1, 2》 《김회권 목사의 청년설교 1, 2, 3》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사도행전 1, 2등 다수가 있다.


죽어야할 이유, 살아야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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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자살예방센터장 손애경 수녀


벼랑 끝에서 걸려온 전화

공감·위로 한마디에 울컥

 

죽어야  이유에 압도당해

잊어버린 살아야  이유


고통을 해결해줄  없지만

마음의 손을 내민다


 유치원 보내고 베란다에 서서

절망하는 엄마에게 “아이 보이세요?”


영하 20 강추위 아파트 옥상에서 

 끝내려는 학생에게 “춥지밥은?”


사람보다 앞서는 ·직업·공부

죽을병에 걸린 우리 사회 적나라


초등생도 아빠를 현금지급기로

혼자 앓다가 목숨 끊는 남성 많아


자살자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아

자살 유가족의 절망도   고통

 


 

-손예경마리아2.jpg


꽃이 핀다동토를 뚫고 나온 부활의 꽃잔치가  산하에서 펼쳐지고 있다그러나 봄햇살이 찬란할수록꽃이 화려할수록 더욱 초라해지고 아파지고 우울해지는 사람들이 있다우리나라는 자살률이 인구 10만명당 26.5명으로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1위다더구나 4~5월은 자살률이 가장 높은 때다.


 부활절(16) 앞두고지난 7 서울대교구 한마음한몸운동본부 자살예방센터가 있는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422호를 찾았다. ‘자살이란 끔찍한 단어와는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명랑소녀’ 같은 이가 맞는다자살예방센터장 손애경(46) 수녀(예수성심전교수녀회 소속)그는 상담  교육 담당자 3명과 전화상담 봉사자 39명과 일하고 있다 ‘죽고 싶다’, ‘죽겠다’, ‘지금 뛰어내리겠다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다.


 이날도 아침에 젊은 엄마가 전화를 해왔다딸을 유치원에 보내고는 지금 아파트 베란다에 서서 아이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남편이 빚을  도저히 감당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겠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했다상담사가 아이가 보이느냐고 묻자 아이는 버스를 타고 떠났다고 했다다시 아이가 몇시에 돌아오느냐고 묻자  시라고 답했다상담사는 “아이가 돌아왔을  엄마가 없으면 어떻겠어요라고 물었다엄마는 아이 얘기에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온  같았다상담사는 “커피 좋아하세요” 묻고는 “커피 한잔하고 식사도 하고아이 간식도 준비하고친한 친구를 만나라 권유했다수화기 너머로 “그러겠다 소리가 들리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생명이 그렇게 한고비를 넘겼다.


 모처럼 듣는 따스한 말에  잃어

  수녀는 “우리가 상담자의 고통을 해결해줄 수는 없다 안타까워했다하지만 죽음의 이유에 압도당하면 살아야  이유를 잊어버리는데 이유를 환기해주는 것만으로도 벼랑 끝에서 구해낼 수도 있다고 한다.


 지난 1 그와 통화한 고교 1학년 남학생도 그랬다영하 20도로 한파주의보가 내린  아침이었다. 9 전화상담 업무가 시작되기도  전화벨이 울렸다수화기에선 ‘쌩쌩’ 부는 바람 소리가 요란해 말이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학생은 “아파트 옥상 끝에  있다 “떨어져 죽고 싶다 했다우선 “소리가  들리니 바람 피하는 곳으로 가줄  있니라고 물었다학생이 “잠깐만요” 하더니  바람 소리가 잠잠해졌다그는 “학교 적응도  되고 공부를 못해대학에 합격할 가능성도 없어서 엄마 아빠가 ‘ 같은 애는  필요도 없다 했다 “내가 죽어도  세상에 슬퍼해줄 사람   없다 했다 수녀가 “춥지~”라고 따스하게 물었다학생은 “춥다 했다  속에서 강추위보다 심한 마음의 한기와 외로움이 느껴졌다. “얼마나 춥니”, “밥은 먹었니라는 물음이 이어졌다학생은 모처럼 듣는 따스한 말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친한 친구가 있느냐 물음에 학생은 “있다 했다 수녀는 “우선 따뜻한 밥부터 먹고 친한 친구 만나 힘든 얘기를 하라 권했다그리고 “엄마 아빠도 화가 나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거야네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잊지 마라 당부도 건넸다.


 “지금 떨어져 죽고 싶은 아이한테 그런 말들이 무슨 도움이 될까 싶기도 해요그러나 ‘춥지~’ 한마디에 아이는 울컥하지요. ‘힘들지~’라는 공감과 위로 한마디  받아 위기를 넘을 힘이 없는 이들이 너무 많아요.”


 그는 날마다 죽어야  이유를 들으며 우리 사회가 얼마나 죽을병에 걸려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고 있다. “돈이나 능력직업공부도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들인데 인간 존재의 가치는 사라지고 학력과 연봉 같은 겉모습만으로 가치를 평가해버리지요그러니 공부 못하고실직하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인간으로 생각해버려요공동체가 무너진 것이죠.”


 그가 특히 안타까워하는 이들은 중년 남성들이다남성들은 혼자만 끙끙 앓다가 자살을 실행하는 바람에 남성 자살률이 여성에 비해 2.5~3배가량 높기 때문이다. “초등학생들이 아빠를 에이티엠(현금지급기)이라고 한대요아빠도 아내자녀들과 관계를 돈독히  짬도 없이 가정의 경제력 유지만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애쓰다가 경제력을 상실하면 자신과 가족들 모두 쓸모없는 인간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자살한아빠가.jpg-준비안된이별1.jpg-하늘악수그림1.jpg

 

 그처럼 빈천하면서도 그처럼 부자

 경제력만으로 평가된다면 그는 무가치한 인간이다. 65 이상 노인들 대부분이 받는 노령연금의 절반에 불과한  10만원의 용돈으로 살아가니 말이다그러나 타인의 고통은 품어서 삭여주고사랑은 화수분처럼 무한정으로 나눠준다는 점에서 그만한 부자도 드물다그는 어느 때와 다름없이 오늘도 출근길에 명동성당 대성당에서 “ 시간 자살을 선택하려는 사람들의 행동을 멈춰달라 기도하며 고통받는 이들에게 사랑의 마음을 보냈다그는 “사랑받은 경험이 없으면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존중감이 바닥이라며 우리는 서로에게 공감과 위로와 사랑이 필요한 존재들이다라고 말했다 살아야  이유를 스스로 일깨워야 한다는 그가 ‘살아야  이유 뭘까.


 “오늘 기자님을 만나기 위해서오늘 죽고 싶어서 전화하신 분과 통화하기 위해서벚꽃 구경하기 위해서.”


 그는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면서 예쁜 할머니 수녀가 되는 이란 ‘삶의 이유’ 앞에 이렇게 사소한 이유들을 열거할  있을 만큼 공감 센스가 넘쳤다그의 공감이 미치는 곳은 자살 위험자들만이 아니다그는 “자살은 자살자만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아 자살자  명당 그의 가족과 지인  평균 7명이 죄책감·절망감으로 어려움을 겪고 이로 인해  다른 자살자가 생기는 사례가 빈번하다 “자살 유가족들이야말로 눈총의 대상이 아니라 가장 공감받고 위로받아야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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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날  가톨릭회관 소성당에선 자살예방센터가 주관한 미사가 봉헌됐다자살 유가족들은 세상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다그런데도 이날 소성당을 가득 채운 유가족들 속에서  수녀는 말없이 공감과 위로의 파장을 보내고 있었다.


 ‘자살 유가족을 위한 해바라기 슬픔 돌봄 모임 614~82 매주 수요일 오후 2~4 명동 가톨릭회관 422 자살예방센터에서 열린다문의 (02)2265-2952. www.3079.or.kr.

 자살 예방을 위해 도움을 받을  있는 전화는 위기상담(1577-0199), 전화상담(1599-3079), 면접상담(02-318-3079) 있다.


 ·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세월호 아픔과 함께하는 부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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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아픔 함께하는 부활절예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안산에서 부활절예배

고난주간 주제 “예수는 여기 계시지 않다

예수님의 정신 잃은 한국교회 성찰 담아

신자 동원 예배 아닌 자발적 참여 예배로

설교도 유명목사 아닌 무명의 여성목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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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세월호 참사 3주기에 맞는 오는 16 부활절의 예배를 세월호 희생자 가족과 함께 드리기로 했다.

 이에따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당일 오후 4 30 안산 분향소 야외공연장에서 ‘4·16가족과 함께하는 부활절연합예배  올린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이번 부활절 주제를 ‘예수는 여기 계시지 않다 삼고  사순절(예수의 수난을 기념하는 교회력 절기) 안산 세월호 정부 합동분향소에서 금식기도회를 연데 이어 ‘탈핵 기원하며 경주방폐장에서 경북 성주를 거쳐 영광 원전까지 ‘생명과 평화의 도보순례 진행 중이다.


 사순절은 예수 부활을 기념하는 경축일인 부활절 전까지 6번의 일요일(주일) 제외한 40일을 말한다사순절 동안의 주제인 ‘예수는 여기 계시지 않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무덤에 있지 않고 갈릴리로 갔다는 누가복음 24장의 18절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김영주 목사는 “당시 갈릴리는 가장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이 사는 이라며  “부활하신 예수가 갈릴리로 가셨던 것처럼 한국 교회도 고통받는 곳으로 가자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는 “고통받는 이웃과 함께하지 않는 오늘의 한국 교회는 ‘예수님 없는  교회 수도 있다는 신학적 성찰도 담고 있다 말했다.


 사순절에 이어 부활절 당일 연합예배 주제는 ‘예수는 여기 계시지 않다에서  ‘예수가 여기 계시다’(마태복음 28 110) 바뀐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사순절을 보낸  맞이하는 부활의 기쁨처럼 극적인 전환을 변화된 주제에 담는 셈이다.

 이번 연합예배는 교단 대표들 중심이 아닌 열린 예배마당 형식으로 꾸려진다대규모로 교인을 동원하지 않고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진행키로  것이다.

 부활절연합예배의 설교는 샬렘영성원 홍보연 목사가 맡는다.  지금까지 부활절 예배엔  대형교회 목사와 교단장  명망가들이 설교자로 나섰으나,  이번에는 무명에가까운 여성 목회자가 설교를 맡게  것이다.


 개신교계에선 부활절을 앞두고  메시지를 일제히  발표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김영주 총무 명의의 메시지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인에게 철저한 자기 성찰을 의미한다 “세월호가 침몰하던  그때 국가는 무엇을 했느냐는 의문은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는지?’, ‘우리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는지?’라는 질문으로 이어져야 한다 말했다.

 이어 “(이는누군가를 변호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다더욱 혹독히 정의와 사랑평화를 기준으로 잘잘못을 따져서 어그러진 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각성이자 각오라고 강조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대표회장 이영훈 목사 명의의 부활절 메시지를  내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라며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메인 죄의 사슬에서 해방되고자유를 얻게 됐다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가 다가가야  이웃은 소외되고 약한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이라며 “특별히 세월호 미수습자 가정을 위해서 기도한다미수습자가  명도 발생하지않고모두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있기를 기도한다 밝혔다.


 한국교회연합(한교연) 대표회장 정서영 목사 명의의 메시지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 2526절을 인용하며 “부활하신 주님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길로인도하셨다 말했다.

 그는  “한국 교회는 갈등과 분열의 역사를 회개하고 주님 앞에 돌아와 하나님의 공의가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면서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해야  이라며 “희생과 섬김의 본을 보이신 주님을 따라 우리 사회  약자의 손을 잡아주고 그들의 고통에  기울여야 한다 밝혔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마약하는 아이도 구원할 선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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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가 8학년 정도였을 때, 청소년 마약문제 전문가가 학교에 초대되어 학생과 부모들에게 강연을 했습니다. 그 강연에서 가장 깊이 가슴에 와닿은 이야기가, 스스로 한 일 속에서 뿌듯함과 기쁨을 경험한 청소년들은 마약의 유혹에 쉬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설사 빠졌더라도 마약이 아닌 다른 것을 통해서도 마약이 주는 편안함이나 가벼움이 가능하다는 경험을 했기 때문에 회복의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거였습니다.


 청중 중 16살 된 아들을 둔 한 엄마가 자기 아들의 얘기를 솔직히 털어놓았습니다. 학교에서 만든 록 밴드에서 열심히 활동하던 아들이, 부모가 이혼하고 여자친구와 결별할 즈음 마약을 하기 시작했는데, 급기야는 학교도 제대로 안 가고 밴드활동도 집어치웠답니다. 록 밴드를 뒤에서 돌보던 음악 선생님과 친구들이 끈질기게 노력한 결과 이제는 다시 밴드에 들어갔지만, 엄마의 마음은 늘 불안하고 도루묵이 될까봐 노심초사한다고요. 자기가 아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강사는 그 아들이 밴드활동을 하면서 느낀 성취감과 행복감을 부모가 정말 진지하게 받아주었는지, 그의 고민에 귀기울여주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아들 스스로 마약 없이도 베이스 기타를 통해 희열과 성취감이 가능했음을 상기하고, 밴드 안에서 새로운 자기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적극 후원하라고 조언했습니다. 그 엄마는 사실, 공부는 안 하고 밴드에 어울리는 아들이 못마땅했는데, 이제는 그렇게 열중해서 기타를 치는 아들을 보며 너무나 고맙고 또 미안한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이기심과 오만과는 다른 자신감 내지 자존감은 부모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자식이 스스로 땅 위에 두 발 딛고 ‘인간’(인간은 ‘사람과 사람의 사이’입니다)으로서 자신감과 자존감을 갖고 살 수 있다면, 그 부모는 성공한 겁니다. 아이들은 무엇이건 스스로 겪고 스스로 이루면서 자신감을 갖게 되고, 잘잘못이나 능력과 상관없이 보호받고 사랑받는다는 믿음이 있으면, 자기 존재 자체에 회의하지는 않습니다.


 부모 자신의 체면이나 걱정으로 아이가 실패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면 그 아이는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됩니다. 남의 칭찬과 인정이 있어도, 제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면 허상임을 알기에 수치심을 갖게 되고, 비판에 과민해지며, 스스로나 남을 가해할 수도 있습니다. 마약은 이런 갈등을 외면하는 방법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의 아이들은 자존감을 가르쳐달라고 거리에까지 나와 외치고 있습니다. 


공동밥상 차리니 행복은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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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서환하게.jpg» 함께 식사하는 밝은누리 공동체 사람들. 사진 밝은누리 제공



  하려고 ?” “마을식당 하려고요.” “ 식당 망하는  보면서 어쩌려고 그래!” 마을밥상을 시작할 이웃집 아저씨가 염려하며 한마디 하신다이미 어린이집마을학교 시작할 때도 비슷한 걱정을 하셨다조용하던 마을이 아이들과 젊은이들로 북적거리는  보고는 신기해하셨는데새로운 일을  때마다 여전히 걱정이 앞서시나 보다.


 오가는 사람이 많지 않은 북한산 아래 한적한 마을, 2 넘긴 가게가 별로 없다 닫은 식당을 임대해  식당을 차리려 하니 걱정하실 만도 했다마을밥상은 눈에  띄는 간판도손맛 좋아 보이는 주방장도 없다요리도 뒷정리도 여러 사람이 함께 한다유기농 밥상이라 재료비가 많이 들고 밥값은  수익 내기 어려운 구조지만지난 12 동안 마을을 든든히 살리고 있다함께 만들고 함께 먹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점심과 저녁밥을 함께 먹는다직장 다니는 사람들은 퇴근  저녁 밥상에 참여한다마을밥상에서 함께 먹으니 집집마다 김치냉장고나  냉장고가 없어도 된다혼수품으로 갖춰 두던 비싼 그릇도 필요 없다손님이 오면 마을밥상에서  먹고마을찻집에서 차를 마신다밥상과 찻집이 공동 부엌이고 거실이 된다 부엌과 거실 공간이 줄고 비용도 준다자동차를 같이 타고생활용품 나눠 쓰고 모아 마을도서관에 두고 함께 보니 이래저래 생활비도 줄어든다.


 우리 시대 젊은이들을 두렵게 만드는 취업경쟁도시 생계비혼인 자금이라는  속에는 많은 허상이 있다허상에 쫓기다 보니  불안하고 돈에 주눅든다홀로는 벗어나기 어려운 굴레다문제를 느껴도 다른 삶을 생각하는  자체가 두려움이 된다대학을   그만둔 청년이 있다입시 공부를 열심히  대학에   부모님 바람을 따른 거였다행복하지 않았다취업경쟁에 발목 잡힌 창백한 대학 문화도 싫었다다시 마음먹고 들어간 다른 학교도 마찬가지였다그만두는  쉽지 않았지만잃어버린 자기를 찾고 싶은 갈급함이  컸다 삶을 만들어가는 사람들과 함께 살며 용기를 얻었다.


 마을수도원에서 기도하며 지난 삶을 돌아봤다언제 행복을 느꼈던가의외의 곳에서 행복했던 기억이 떠올랐다휴전선 감시초소에서 취사병으로 밥할  행복했단다마을에서  짓는 일을 하면 행복하겠다고 나섰다밥상지기로 함께하다 주인장이 되었다밥상을 차리다 혼인해 아이를 낳고귀촌해  삶을 이어가고 있다지금 밥상지기도 청년  밥상 주인장이 되었다회사에서 경력도 쌓이고 나름 인정받고 만족했지만 근원적인 생명운동에 관심 갖고 밥상을 차리는 일을 시작했다밥상을 차리다 혼인해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산다농촌에서 살아갈  꿈을 꾼다자기를 찾는 것은 주어진 대로 사는 것보다 모호하지만깨어 있게 한다생명을 살리고꿈을 현실로 살게 한다.


프란치스코성인 한국교회를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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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성인.jpg» 프란체스코 성인 동상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세상이 성자 프란체스코라고 부르는 사나이입니다. 제가 살았던 시대는 12세기 말과 13세기 초엽입니다. 지금으로부터 7백 년 전쯤이었지요. 저의 아버지는 부유한 상인이었고 그 덕에 부족한 것 없이 살았습니다. 그랬던 제가 어느 날 하나님의 역사로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새로운 세상이란 가난한 사람들 속에 숨 쉬고 있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거리의 걸인들과 함께 구걸하면서 저는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현실에 놓여 있는 사람들의 순수한 영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깨우쳤던 것입니다. 그것은 거대한 땅 부자가 되고 있던 당대의 교회 지도자들의 탐욕스러운 표정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뭐든 눈에 띄는 것이라면 자기 것으로 삼아 배를 불리고 있던 욕심이 풍기는 악취와는 다른 내면의 향기를 저는 그들에게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그들의 옷과 몸에서 나는 냄새를 악취라고 하면서 고개를 돌렸지만, 그보다 더한 악취는 다름 아닌 욕심 덩어리가 되고 있던 교회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현실 앞에서 자발적 가난의 축복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모두가 부자가 되려는 세상에서 자발적 가난이란, 욕망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뜻을 온전하게 따르는 삶의 결단입니다. 가난은 누구나 싫어하고 저주라고까지 여기지만, 저는 스스로 가난을 택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가난한 사람들이 위로받고, 탐욕에 찬 사람들은 부끄러워하며 회개하리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부유하게 자란 제가 자발적 가난을 선택했을 때 주변은 놀라워했습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아 편안하게 살아도 될 터인데 무슨 어리석은 짓이냐고들 말이지요. 그러나 제가 택한 가난은 저도 미처 생각지도 않게 부자들의 탐욕을 세상에 드러내고 가난한 이들의 내면에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를 보도록 했습니다. 그걸 본 젊은이들이 저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것이 수도원 공동체가 되고, 세상의 가난한 이들이 모여들어 함께 공동생활을 하면서 영혼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로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가난하면서도 존경받고, 가난하면서도 도리어 그 영혼이 부하고, 가난한데 무력하지 않은 삶이 펼쳐진 것입니다. 가난이 주는 고통을 넘어서 가난으로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고 생각이 맑아지며 하나님의 뜻을 세상과 타협하는 일은 결코 생겨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잃을 것이 없으니 세상의 그 어떤 권력도 두렵지 않았고 어떻게든 움켜쥐겠다고 욕심을 부릴 일이 없으니 그 마음이 초조하거나 절망할 일도 없었습니다. 가난은 제게 평화를 주었고, 물질은 소박하고 영혼은 고귀할 수 있는 삶을 살아내게 했습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 제가 21세기의 한국에 와서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부자라는 사실에 경악했습니다. 그건 이미 7백 년 전 일이라고 여겼는데 아직도 그 탐욕의 성채가 계속 존재하고 있는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교회가 가난해져야 세상의 영혼이 부해지는데, 교회가 부자가 되니 세상의 영혼은 더욱 가난해지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교회의 가난이 세상의 욕심을 부끄럽게 만들 수 있어야 하는데 그와는 반대로 교회의 부로 말미암아 정작 부끄러워지는 것은 교회인 것을 알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사실 저처럼 굳이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문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빈곤으로 허덕이고 있는데 교회는 그 빈곤의 현실에 눈을 돌리기보다는 부자가 되는 길로 가는 통로처럼 되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가 봅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가난의 고통에 시달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려는 욕망으로 영혼이 타락하는 것은 가난의 고통을 이겨내는 것보다 더 심각한 죄의 늪에 빠지게 하는 첩경입니다.


-프란체스코.jpg» 프란체스코 수도원의 수사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좇으면서 큰 교회를 짓고 목회자가 수억 원의 연봉을 받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요? 저 프란체스코는 그런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한없이 나누어 주기만 하셨던 예수님이 물질적으로 부자였기 때문에 그러셨나요? 우리는 부자 예수를 기억하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입니까?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셨을 때 남기신 것이 거대한 교회건물이었나요? 옷 한 벌 달랑 남기고 가신 예수님에게서 자발적 가난의 증거를 그대는 목격하고 있진 않나요? 그런데도 한국의 교회와 교회 지도자는 그런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어쩌면 그대들은 눈이 멀었고 가장 큰 것을 놓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죄스럽게 아름다운 비단으로 차려입은 부자는 하나님의 빈자이고, 누더기를 입어 누가 봐도 가난한 사람보다도 더 가난한 빈자입니다.

 

중세 유럽의 교회는 그렇게 부자로 살다가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교회의 재산이 너무 많아지면서 이것이 세속의 권력자들에게 공격당하는 근거가 되었고 그 재산을 빼앗기고 나서야 비로소 눈을 떴던 것이지요.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지 않은 결과로 타율적 가난을 강제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는 재산과 권위만을 잃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잃었고 사람들을 잃었습니다.

 

바라기로는, 한국교회 안에서도 새로운 수도원 운동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소박한 삶을 선택하는 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 영혼은 하나님 나라에 거하고, 그 뜻은 어떤 세상의 힘도 유혹하거나 짓밟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 영혼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뿌리내리도록 할 수 있을 겁니다. 이기적이던 사람들이 공동체적 연대와 그로 인해 생겨나는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가진 것이 너무 많아지면, 그걸 지키기 위해 그 영혼은 하나님과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근본적인 잘못은 가치체계의 맨 꼭대기에 돈을 올려놓은 거지요. 진리와 사랑 대신에.

 

귀신팔아 먹고사는 선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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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냐 조사교냐.

수십년 수좌 떠받들었지만 도인 얼마나 나왔나

 

송광사 전 율원장 도일스님

간화선 제일주의 풍토 비판

일부 수좌들 무애행도 문제

선한다면서 위패장사에 몰두

선종의 정체성 문제도 비판

 

그동안 한국불교는 수십년간 선방 수좌를 최고로 떠받들고, 온갖 좋은 공양물을 다 올렸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도인이 과연 얼마나 나왔나?”

 

송광사 전 율원장 도일 스님이 간화선 제일주의의 한국불교 수행풍토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도일 스님은 410일 부산불교실업인회관 묘광선원에서 개최된 열린불교아카데미 특강에서 초청법사로 나서 지금 한국불교는 좌선제일주의에 빠져 너도나도 좌선을 하고, 도인이 나오길 바라고 있다그러나 가만히 앉아 있다가 한방에 다 깨닫는 그런 경지는 없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도일 스님의 이 같은 비판은 화두선 중심의 한국불교 수행풍토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지적으로 보여 귀추가 주목된다.

 

도일 스님은 이날 우리가 믿고 있는 불교가 제대로 된 불교인지 의문을 가져야 할 때라며 제대로 된 불교라면 한국불교가 현재와 같은 이런 난맥상에 빠질 이유가 없다고 말문을 열었다. 스님은 부처님 법은 하나인데 여기서는 이렇게, 저기서는 저렇게 말을 하면서 불자들이 혼란을 겪고 있다한마디로 한국불교의 지금 모습은 짬뽕불교. 뭐가 부처님 말씀인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라고 지적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조사선을 제일로 여기고, 부처님 방식대로 공부하는 것을 하근기 수행으로 치부하고 있다면서 조사선이 제일이라면 왜 불교공부를 하는 것이냐, 차라리 조사교라고 하는 것이 맞지 않냐고 반문했다.

 

도일 스님은 한국불교에서 원효 대사와 경허 스님을 승가의 사표로 삼는 것도 잘못된 일이라고 지적했다. 스님은 원효 대사가 위대한 분인 것은 맞지만, 그 분은 (결혼을 했기 때문에)승가로서 실패한 분이라며 그분이 승가의 모델이라면 지금 스님들은 모두 결혼을 해야 하느냐고 꼬집었다.

 

도일 스님은 경허 스님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스님은 경허 스님이 깨달음을 얻기까지 치열하게 정진한 그 모습은 충분히 본받을만하다그러나 깨달았다는 미명하에 부처님이 인정하지 않았던 그 이상한 행동들까지 미화시켜서는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부처님은 가장 위대한 깨달음을 얻은 분이지만, 깨닫고 난 이후 아무렇게나 행동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무애행을 미덕으로 여기는 일부 수좌들의 그릇된 불교관에 대해 일침을 가한 셈이다. 도일 스님은 이어 우리의 판단 기준은 항상 부처님의 법이 돼야 한다그런데 그런 것을 하지 않으면서 한국불교가 혼돈에 빠지게 됐다고 진단했다.

 

도일스님.jpg» 도일 스님은 4월10일 부산불교실업인회관 묘광선원에서 개최된 ‘열린불교아카데미 특강’에서 초청법사로 나서 “지금 한국불교는 ‘좌선제일주의’에 빠져 너도나도 좌선을 하고, 도인이 나오길 바라고 있다”며 “그러나 가만히 앉아 있다가 한방에 다 깨닫는 그런 경지는 없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도일 스님은 또 간화선 제일주의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비판을 이어갔다. 스님은 많은 분들이 간화선을 불교수행 가운데 제일로 여긴다그러나 그것이 정답인지 의심하지도 않고, 오직 화두를 들고 수행한다는 자만에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스님은 한국불교의 가장 큰 문제는 부처님 법에 묻지 않는다는 것이라며 부처님은 성도 이후 45년간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 법 안에 정진해야 할 내용들이 다 들어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오로지 이뭣꼬만 붙잡고 있다고 말했다.

 

스님은 한 발 더 나아가 한국불교는 수십년간 선방 수좌들을 최고로 떠받들고 온갖 좋은 공양물을 올렸다면서 그런데 그렇게 해서 과연 도인이 얼마나 나왔냐고 반문했다. 스님은 또 선종에서 소위 일가를 이뤘다는 유명한 스님치고 선방에서 죽치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느냐너도나도 좌선을 해서 도인이 나오길 바라고 있지만 그렇게 해서 도인이 나오는 것은 요원하다고 몰아붙였다.

 

도일 스님은 한국불교 선종의 정체성 문제도 거론했다. 스님은 요즘 (참선하는) 스님들이 만년위패를 팔아서 먹고 살고 있다이것이 선종의 전통에 맞는 것이냐고 꼬집었다. 스님은 이어 선종의 전통은 직지인심(直指人心), 즉 둘러서 가는 게 아니라 바로 정곡을 찌르는 것이라며 그런데 귀신을 팔면서 선을 이야기하는 게 가당키나 한 말이냐고 지적했다.

 

때문에 스님은 한국불교 변화를 위해서는 부처님 정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부처님은 관습에 의지하지 말고, 말에 현혹되지 말며 오직 법에 의지하라고 말씀하셨다이렇게 부처님 법을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짬뽕불교로 전락한 한국불교를 바꾸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도일스님법회.jpg 


<법문 전문>


반갑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오랫동안 경전공부를 해오신 분들도 있고, 공부를 하면서 이것이 불교다라고 자기 스스로 정리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가 과연 제대로 된 불교인가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런 의문을 가져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고 있는 불교가 제대로 된 것이라면 현재 한국불교가 이런 난맥상에 빠질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부처님 법은 하나인데, 그 부처님 법을 두고 백가쟁명식으로 여기서는 이렇게, 저기서는 저렇게 말을 하면서 불자들이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나라는 짬뽕불교가 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뭐가 부처님 말씀인지 정신을 못 차릴 정도입니다.

 

어떤 사람은 조사스님의 말씀이 우선이라고 하고 조사선을 제일로 여깁니다. 그리고 부처님 방식으로 공부하는 것을 여래선이라고 하면서 하근기 수행이라고 치부합니다. 부처님 수행방식이 하근기이고, 조사선이 제일이라면 왜 불교공부를 하는 겁니까? 차라리 불교가 아니라 조사교라고 하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그러다보니 불자들도 어디에다 머리를 둬야 할지 모르는 겁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한국불교가 잘못된 것은 처음부터 스님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을 재가불자에게 강요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한꺼번에 뭉뚱그려서 이것이 불교다라고 하면서 스님에게 가르쳐야 할 것을 재가불자에게도 가르쳤습니다. 스님으로서 삶과 재가불자로서의 삶은 다른 것입니다. 이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700년 한국불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님이 누구냐는 물음에 대부분 원효 대사를 꼽습니다. 물론 원효 대사는 수많은 저술을 남겼을 뿐 아니라 귀족불교를 대중불교로 승화시킨 분입니다. 또 중생을 위해 스스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지위를 과감히 버리고 중생과 함께 살아가신 분입니다. 한마디로 보살의 삶을 사신 분입니다. 그런데 한국불교에서 실수를 저지른 것이 원효 대사를 승가의 모델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원효 대사는 승려로서 실패한 분입니다. 자신의 신분을 낮추기 위해 요석공주와 결혼을 함으로써 승려로서의 지위를 버린 것입니다. 승가의 모델은 부처님 말씀하신 계율과 법에 따라 살아가는 분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승가로서의 삶을 어기고 살았던 분을 승가의 모델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분이 승가의 모델이라면 지금 스님들은 모두 결혼을 해서 무애행을 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국불교가 혼돈에 빠진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그 위대한 보살을 보살로만 봐야 하는데, 승가의 모델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무도 이것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원효 스님은 너무나 위대한 인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원효 대사가 아무리 훌륭한 분이라고 해도 냉정하게 비판해야 합니다. 그래야 후대의 사람들이 배울 것이 있습니다.

 

존경 받는 스님 가운데 경허 스님도 있습니다. 경허 스님은 무애행을 잘 하신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이한 행동도 많이 했고, 일설에 의하면 오도를 한 이후에도 사랑하는 여인을 보기 위해 그 집에 찾아가 머슴을 했다고도 합니다. 지금도 선원에서 가끔 술을 마시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도 이런 경허 스님의 유풍 때문입니다. 물론 그분이 깨달음을 얻기까지 치열하게 정진한 그 모습은 충분히 본받을만합니다. 그러나 그 분의 이상한 행각까지 미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도를 깨달았다는 미명하에 부처님이 인정하지 않았던 이상한 행동들까지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깨달음을 얻은 분들 중에서 부처님만한 분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께서 아무렇게나 행동하신 적이 있었습니까? 우리의 판단기준은 항상 부처님의 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지 않고 원효 대사는 어떻다더라’ ‘경허 스님은 이랬다더라라는 것만 관심을 갖습니다. 이런 것을 정리하지 않고 어떻게 불교가 바로 설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스승을 정할 때 혹은 승가의 사표가 되는 분을 정할 때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경율론을 공히 익히고, 계정혜 삼학을 잘 닦은 분이어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삶의 모습이 원만한지, 부처님 가르침대로 정진이 제대로 됐는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가늠자는 탐진치 삼독이 있는지 여부를 살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흔히 큰스님’ ‘큰스님하는데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돈이 많고, 명성이 높고, 큰절에 계신 분이면 다 큰스님입니까? 아닙니다. 큰스님은 탐진치 삼독심이 없는 분이어야 합니다. 탐심이 있는지, 없는지. 또 화를 얼마나 잘 내는지, 어리석은지 아닌지 등을 살펴보면 어떤 스님이 큰스님이라는 것을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재 한국불교에서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부처님께 묻지 않는다는 겁니다. 부처님은 내 법은 완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성도 이후 45년간 수많은 설법을 하면서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 하셨습니다. 그 속에는 수행하는 과정과 깨달음에 이르는 내용들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부처님 법에 묻지 않습니다.

간화선을 하시는 많은 분들은 화두를 들고 참선하는 것이 불교수행 가운데 제일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답인지 의심하지도 않고, 오직 화두를 들고 수행한다는 자만에 빠져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부처님은 성도 이후 열반하실 때까지 45년간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부처님 법 안에 우리가 궁금하고 정진해야 할 내용이 다 들어있습니다. 그대로 따라가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처님도 확신하신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무시하고 이뭣꼬만 잡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황당하실 것 같지 않습니까? 화두만 드는 게 수행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한국불교는 수십년간 선방 수좌들을 최고로 떠받들고, 온갖 좋은 공양물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도인이 과연 얼마나 나왔습니까? 여러분들은 아셔야 합니다. 제가 이런 말씀드려서 죄송하지만, 이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누구도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조계종에서 금기시되고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제가 수좌가 아니니까 그런 말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선종에서 최고로 여기는 육조혜능 스님이 선방을 다녔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자고로 선종에서 소위 일가를 이뤘다는 유명한 스님치고 선방에서 죽치고 있었던 스님이 있었습니까? 한국불교의 선종에 국한해서도 화두를 들어서 깨우친 분이 얼마나 있었습니까? 결과가 없으면 아무리 아름다운 말로 꾸며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한국불교는 모두가 좌선제일주의에 빠져서 너도나도 좌선을 해서 도인이 나오길 바라고만 있을 뿐입니다. 제가 볼 때는 이렇게 해서 도인이 나오는 것은 요원한 일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것이어야 한다. 그게 바로 나의 길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까지 그런 불교를 하고 있습니까? 제가 볼 때는 아닙니다. 모두가 허상을 좇고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한방에 다 깨닫는 그런 경지는 없습니다.

 

조계종은 선종을 표방합니다. 그러나 그 방식은 선종과 거리가 멉니다. 성철 스님도 선종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으로 선양하기 위해 노력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삶의 방식은 선종이 아니었습니다. 성철 스님이 주석하셨던 절에 가보면 아비라 기도를 하고 삼천배를 합니다. 이것은 밀교적인 수행방식입니다. 선종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선종은 핵심 종지가 무엇입니까? 직지인심(直指人心)입니다. 둘러서 가는 게 아니라 바로 정곡을 찌른다는 것입니다. 성철 스님 당신의 가르침과 실제 수행은 이렇게 달랐습니다. 이것은 한국불교의 불행이기도 한 것입니다. 한 종문에서 한 종지를 가지고 계속 밀고 나가지 못하는 현실은 불행인 것입니다. 또 어디선가는 (참선한다는) 스님들이 만년위패를 팔아서 먹고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선종에서 꿈도 못 꿀 일입니다.

 

선종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중국 명대 중기 이후에 생겼습니다. 그것도 먹고 살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당송 시대의 순수 선은 그런 것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직지인심, 부처님 정법을 딱 물었을 때 한 번에 답할 수 있으면 된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더 수행하라는 것입니다. 그게 선종의 수행전통입니다. 그런데 귀신을 팔면서 선을 이야기하는 게 선종에서 가당키나 한 말입니까. 한국불교의 이중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니 정체성이 흐릿해지고, 뭐가 불교인지 제대로 모르는 것입니다.

 

스티븐 호킹 박사는 누군가가 당신은 내세를 믿느냐?”고 묻자 안 믿는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럼 인간은 왜 좋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냐?”고 다시 묻자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저는 스티븐 호킹 박사의 이 대답이 부처님 다음으로 좋은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내세가 있건 없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도리를 다할 뿐이라는 겁니다. 내세에 대한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세에 대한 이야기는 마치 어린아이에게 사탕을 보이면서 이것 잘하면 내가 이거 줄게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어른입니다. 그런데 이것 잘하면 나중에 천당 갈 거야라는 말에 속아야 하겠습니까. 이제 더 이상 속지 맙시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남을 위해 희생하고 선행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공덕입니다. 공덕은 미래에 내가 뭘 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훗날 미래세대를 위해 무엇인가를 저금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음 생에 태어나서 내가 뭘 하겠다는 것은 어린아이 같은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늘 깨어있음을 강조하셨습니다. 관습에 의지하지 말고, 말에 현혹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법에 의지할 뿐 다른 것은 판단기준이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짬뽕불교로 전락한 한국불교를 바꾸는 길입니다.

 

이제 재가불자들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될 시기가 됐습니다. 유명한 스님에 끌려 다녀서는 안 됩니다. 저 스님이 탐진치 삼독이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더 수행이 필요한 분이고, 적으면 존경받아 마땅한 분이라고 분명하게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정법입니다. 고맙습니다.


 

 이 글은 법보신문(http://www.beopbo.com/)에 실린 것입니다

 

한번도 시도되지않은 행복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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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9. 인간과 사회 탐구, 제로에서 시작한다


내가 잘 알아도 “손나 간지데스”(그런 느낌입니다)


-맥주한잔.jpg» 일본 애즈원사람들은 거의 매일 속말을 털어놓는 `제미'라는 모임을 갖는다. 맥주를 마시며 `제미'를 하는 사람들



세계 최대 공동체 야마기시에셔

개인 배려보다 조직 논리 앞서자

두뇌들 변혁 한계 느껴 이탈

인근 스즈카에 ‘애즈원’ 만들어


규율이나 의무 없이 약 200명

일 강박 없이 즐기는 공동체살이


인간과 사회를 제대로 알기 위해

본질탐구하는 ‘사이엔즈’연구소와 스쿨


화 부르는 고정관념 에서 벗어나

속말 쏟아내는 ‘제미’ 몇시간씩 나눠


도시락사업과 농장 수입 공유하며

가게 ‘조이’에서 무료로 식료품 가져가



-제미1.jpg» 일본 전통 다다미 방에서 차를 마시며 `제미'를 나누는 사람들


 일본 나고야 주부공항에서 배편으로 한 시간이면 소도시 스즈카에 닿는다. 그곳에선 독특한 실험이 전개되고 있다. 인류가 전에 만들어본 적이 없던 사회를 만들어보자는 실험이다. 화도 다툼도 없고, 죄와 벌도 없으며, 어떤 사람이든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도 없이 느긋하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야말로 공상 소설 속에나 있을 법한 얘기를 현실에서 실현하겠다고 나선 곳은 ‘애즈원 커뮤니티 스즈카’다. ‘애즈원’(As one)은 비틀스의 ‘이매진’이란 노랫말 가운데 ‘세계는 하나가 될 거예요’(The world will live as one)에서 따온 말이다. 

 그런데 이곳은 지금까지 간 아속이나 오로빌이나 브루더호프처럼 한마을공동체가 아니다. 스즈카컬처스테이션, 즉 문화센터 같은 본부를 중심으로 이들이 사는 4채의 집과 기숙사, 일터인 도시락 가게와 농장 등이 스즈카 곳곳에 흩어져 있다. 하지만 이들은 ‘한 지갑’으로 ‘돈 없이도 행복하게 사는 커뮤니티’를 모색하고 있다. 그러니 공동체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애즈원 스즈카 커뮤니티’의 모태는 야마기시다. 야마기시공동체 가운데서도 한때 3천여명이 살 만큼 세계 최대 공동체마을의 하나였던 도요사토는 이곳에서 불과 차로 20여분 거리에 있다. 2000년부터 시작된 애즈원의 주축은 한때 이상사회의 모델로 여겨져온 야마기시를 이끌던 두뇌집단들이다. 야마기시에서도 머리 좋기로 손꼽히던 이들이 왜 이미 경제적 기반을 확고히 구축한 야마기시를 탈출해 맨몸으로 맨땅에 헤딩하는 험고를 자처한 것일까.

 애즈원의 주축들이 잔뼈가 굵었던 야마기시에 대한 이해 없이 이들을 알 수는 없다. 야마기시즘의 정신적 뿌리는 야마기시 미요조(1901~61)란 인물이다. 그는 어린 시절 길가에서 자신이 무심코 던진 물건에 머리를 맞은 한 어른이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자기를 죽일 기세로 달려오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고, ‘사람은 왜 화가 나는 것일까’란 화두를 품었다고 한다. 탐구하고 또 탐구한 끝에 그가 도달한 화의 원인은 ‘고정관념’이었다. 인간은 주워들은 지식이나 경험, 문화에 의해 ‘이래야 한다’거나 ‘이래서는 안 된다’는 고정관념을 갖게 되는데, 자기만의 그런 기준에 어긋날 때 분노를 참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고정관념’이란 틀에 갇힌, 감옥의 죄수라는 것을 직시한 셈이다. 


-문화센터.jpg-문화센터1.jpg-옷나누기.jpg

스즈카의 센터 구실을 하고, 문화센터처럼 모임, 강의, 전시회, 옷을 나누는 바자회 등을 여는 애즈원의 스즈카문화센터



-가게 조이.jpg» 애즈원 사람들은 누구나 품목을 적은 뒤 무료로 식료품 등을 가져갈 수 있는 가게 `조이'



한때 사회주의운동을 주도하다 경찰의 수배를 받아 양계장에 숨어들었던 그는 그곳에서 ‘상생의 세계’를 발견했다고 한다. 농작물들은 인간과 닭에게 먹거리를 제공하고, 인간과 닭은 그 먹거리로 건강해지며, 다시 배설물을 거름으로 자연에 돌려줘 순환하며 서로 번영해가는 모습을 본 것이다. 그는 ‘자신이라는 틀’ 속에서 갇혀 있지 않고 상생하는 순환농법을 보고는 ‘나, 모두와 함께 번영한다’는 이상을 제시했다. 야마기시즘에 대한 호응이 커지면서 이를 삶에서 실현하기 위한 ‘실현지’라는 공동체마을이 일본 30여곳을 비롯해 브라질, 스위스, 타이, 독일,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등 50여곳에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도 1966년부터 7박8일의 야마기시즘 특강이 열렸고, 1984년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에 산안(야마기시) 마을이 세워졌다. 야마기시는 국내 공동체·환경·생명운동과 수련 프로그램들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야마기시 미요조는 자신에 대해서도 교조화를 거부하며 종교를 만들지 않았다. 그는 어떤 진리나 이데올로기라 하더라도 독선적으로 수용하지 말고 무에서 탐구해 ‘무고정(無固定) 전진’ 하며 나아갈 것을 희망했다. 지금은 정당들의 모임에서까지 따다 쓰는 ‘연찬’(硏鑽)이란 말은 야마기시즘에서 나온 것이다. 연찬은 ‘연구해 뚫는다’는 의미다. 이미 정한 결론을 관철하기 위한 ‘회의’나, 대충 논의하다가 ‘하모니’란 이름으로 얼기설기 결론을 맺는 것이 아니라, 끌텅을 캘 때까지 대화해보자는 것이다.

 과연 그의 희망대로 고정관념 없이 열린 자세로 최상의 것을 실현하는 것이 가능할까. ‘무고정 전진’은 고차원 종교뿐 아니라 변화와 혁신을 부르짖는 기업들까지도 추구하는 ‘이상’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국가나 종교, 주의는 사랑과 자비, 조화, 행복 같은 이상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결국은 독선화한 이데올로기만 남아 갈등과 대결, 폭력의 주체가 되기 마련이다.

 야마기시즘은 이런 한계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했지만 자신도 그런 한계에 봉착하고 말았다. 야마기시에서 철학적 이론을 제시하는 간부였다가 2009년 스즈카에 합류한 사카이 가즈키(56)는 “야마기시가 너무 커져 조직이 굳어지면서 변혁이 어려워졌다”고 했다. 연찬마저 타성에 젖어 ‘열린 대화’가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야마기시에도 처음엔 이상사회를 만들어보려는 사람들이 모였고, 한명 한명은 나쁜 사람이 없고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인간과 사회에 대한 탐구가 줄면서 계속 변화해갈 수 있는 힘이 사라지고 말았다”고 했다. 그것이 노년의 평안한 삶을 모색해야 할 나이에 평생 가꾼 공동체를 뒤로하고 야마기시를 탈출한 이유라는 것이다.

 또 애즈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든 이탈 사유는 야마기시의 ‘제안과 조정’ 문제였다. 가령 공동체원들이 외부에 있는 가족을 만나러 여행을 간다거나 무엇을 사겠다고 제안을 하면 조정위원들이 조정을 해서 결정을 하는데, 한명 한명의 마음을 배려하기보다는 조직의 논리로 거부하는 경우가 많아 개인들이 상처를 입곤 했다는 것이다.


-도시락.jpg-도시락만들기.jpg-도시락쉼.jpg-배달차.jpg-어머니도시락.jpg

애즈원 사람들의 수입원인 `어머니도시락'. 도시락을 만들거나 쉬는 모습. 그리고 단 한개를 주문해도 배달해주는 배달차.



하지만 공동체 밖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그들의 새로운 도전은 쉽지 않았다. 모토야마 데루코(66)는 “야마기시에서만 살아서 바깥은 이렇게 네 것, 내 것이 엄격하고 집세가 비싼 줄을 몰랐다”며 “스즈카에 와 야마기시에서 나온 사람들끼리 가족처럼 돈을 주고받고 지내며, ‘돈이 없으면 한집에서 살고, 집도 없으면 다리 밑에서 살자’는 얘기도 했었다”고 말했다.

 이런 과거를 웃으며 얘기할 만큼 이들에게도 이제 여유가 생겼다. 2005년말 시작한 ‘어머니도시락’이 하루 1천여개의 도시락을 팔아 연간 우리 돈으로 10억원 정도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 일본식 전통가옥 등 괜찮은 집 네채도 사들였다. 그럴듯한 방문자센터도 갖췄다. 어머니도시락에선 40~60여명, 농장에선 8~15명가량이 일한다.

 애즈원은 ‘커뮤니티’(공동체)라고는 하지만 규약이나 제약도, 의무나 책임도 없다. 따라서 정식 멤버 규정도 없다. 100퍼센트 이곳에 몸을 담근 이도 있지만, 시간제로 일하는 이들도 있다. 특정할 수는 없지만 어른 150명 등 200명가량이 함께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70여명은 어머니도시락이나 농장에서 일해도 센터 격인 ‘오피스’에 급료 전액이 자동입금되게 해놓았다. 집세와 신용카드 요금이나 세금은 오피스에서 지급하고, 필요한 돈은 오피스에서 타다 쓴다. 또 농장과 어머니도시락의 생산품 등을 가져다놓은 이들의 가게 ‘조이’에서 식료품 등을 무료로 갖다 먹을 수 있다.

 사람마다 욕구가 다르고 쓰임새도 다를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의 소득을 다 맡기는 게 가능할까. ‘별로 일도 안 하는 사람이 돈을 다 써버리면 어떻게 하느냐’는 물음에 사토시 후카다(67)는 “그런 사람은 없는 것 같다”며 “‘내 것을 다른 사람이 써버리면 어떻게 하지’라는 마음보다는 ‘함께 잘 써주니 좋다’는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사유경제 사회에서 이해하기 쉽지 않은 모습이다.

 희망을 앗아가는 것도 희망을 만들어가는 것도 역시 인간이다. 이들은 인간의 마음과 사회를 잘 알지 못하면, 이상이나 진보 등의 구호만으로 이상사회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체험한 바 있다.

 따라서 이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 ‘사이엔즈’다. ‘연찬’이란 말 대신 이들이 쓰는 사이엔즈는 ‘과학적 본질의 탐구’(Scientific Investigation of Essential Nature)란 영문 글자에서 따온 것이다. 인간은 지능을 지닌 존재이므로 이를 최대한 활용해 인간에 대해 과학적으로 탐구해서, 인간답게 살아내겠다는 의지가 담긴 말이다. 그래서 이들은 사이엔즈연구소에서 인간과 사회를 연구하고, 사이엔즈 스쿨에서 6박7일씩의 ‘자기를 알기 위한 코스’, ‘인생을 알기 위한 코스’, ‘사회를 알기 위한 코스’, ‘내관(內觀)코스’, 3박4일씩의 ‘자기를 보기 위한 코스’, ‘사람을 듣기 위한 코스’를 운영한다. 어머니도시락이나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코스에 참가할 때는 온전히 이곳에만 집중한다. 사이엔즈연구소의 후쿠다 히로야(31)는 “학교는 주로 지식과 기능을 전수하는 데 그치지만 이곳은 자신과 타인을 더욱 깊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한다”고 말했다.


-스즈카식사.jpg» 애즈원에서 일하며 사이엔즈스쿨에서 자기와 사회를 탐구하는 일본과 한국의 장기 유학생들이 `제미'를 나눈뒤 식사하는 모습



-후쿠다집식사.jpg» 애즈원 사람의 가정집 식사



‘지식이나 경험이 있어도 그것을 그렇다 하고 단정하거나 전제로 하여 생각하지 않고 실제는 어떨까 하고 제로(영·零)에서부터 탐구한다.’

  사이엔즈 프로그램이 열린 곳엔 이런 큰 글귀가 정면에 붙여진다. 이렇게 열려 있지 않고서는 고정관념의 쳇바퀴 도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해, 진보니 변혁이니 이상이니 하는 것도 역시 구두선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들과 함께하는 시간 동안 어디를 가나 ‘제미’(세미나란 뜻의 독일어에서 따온 말)가 이어졌다. 흔히 일본인들은 속을 잘 표현하지않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랑방 담화’처럼 편하게 마음을 다 표현하는 ‘제미’에서 나오는 속말은 너무 진솔해 놀랄 정도다. 겉만 빙빙 도는 대화로 10년을 사귄 친구보다 ‘제미’를 함께 한 이들이 더욱더 가깝게 느껴지는 이유다. 특히 ‘제미’가 무르익으면 ‘조이’에서 챙겨온 맥주와 전통과자들까지 곁들어졌다.

 ‘제미’를 몇시간씩 자주 하다 보니 몇가지 특징이 잡힌다. 자기가 절대선인 듯 상대를 자기 기준에서 재단해 비난하는 극단주의자들의 말투는 찾아볼 수 없다. 뭔가를 물으면 이들은 ‘정말은, 정말은 무엇일까요?’라며 되묻곤 했다. 자기 고정관념을 그대로 내뱉기보다는 ‘실제’에 대한 탐구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말끝마다 ‘손나 간지데스’(그런 느낌입니다)란다. 보통의 일본인들도 가끔 쓰는 말이지만 이들에겐 상용어다. 자기의 말이 객관적으로 진리가 아니라 자기의 느낌일 뿐이라는 것이다. 듣는 이를 안식으로 이끌어 더 진솔한 속말이 나오게 하는 주문 같은 느낌을 주는 말이었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세계적 참여형 축제 3일간 연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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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7.jpg» 연등행렬을 마친뒤 서울 종각 보신각 앞에서 야외클럽 난장을 연출해 즐기고 있는 참가자들


-행렬5.jpg» 동대문에서 종로를 지나 조계사로 향하는 연등행렬


세계적인 볼거리로 자리한 연등축제가 오는 28일부터 30일까지 3일간 서울 조계사 우정국로와 종로 일대에서 펼쳐진다.


통일신라시대부터 1200여년간 이어와 국가무형문화재 제122호로 지정된 이 축제는 외국인들에게 브라질 삼바축제처럼 참여자들이 즐기는 축제로 알려지면서 매년 외국인 참여가 크게 늘고 있다.  이번에도 프랑스, 러시아 등 외국인 2천여명이 참석을 사전 예약했다. 외국인 참여자들을 위해 27개국에서 80여명은 글로벌 서포터즈로 봉사활동을 자원했다. 이번 축제엔 30여만명의 내외국인이 참여할 것으로 예상된다.


 ‘부처님오신날 봉축위원회는’ 지난 1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미륵사지 석탑등’을 점등해 봉축의 서막을 열었다. ‘미륵’은 ‘차별 없는 새로운 세상을 여는 미래의 희망’을 상징한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해도 온갖 모양의 10만개 등이 종로를 수놓을 연등행렬이다. 행렬은 토요일인 29일 오후 7시 동대문에서 조계사까지 이어진다. 행렬 직전인 오후 4시30분부터 6시까지 서울 장충동 동국대학교 운동장에서는 어울림마당이 열려 40여개 단체에서 참석한 1천여명의 연희단과 어린이, 청소년 들이 공연을 펼친다. 연등행렬이 끝난 뒤인 오후 9시30분부터는 종각 사거리 보신각 앞에서 꽃비가 내리는 가운데 30여만명이 손에 손을 맞잡고 민요와 강강술래를 하고, 삼삼오오 춤을 추며 즐기는 ‘야외 거리 클럽’이 연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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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등행렬 외 대표적인 참여형 축제로 자리잡은 게 전통문화마당이다. 이 마당은 30일 일요일 낮12시부터 저녁 7시까지 조계사 앞 우정국로 일대에서 전개된다. 이곳엔 130여개 부스가 마련되는데, 누구나 사찰음식을 맛보거나 단청을 해보거나 정목스님의 토크콘서트에 참석하거나 참선·명상·심리상담 등의 힐링도 체험해볼 수 있다. 청소년들을 위한 애니매이션, 컬러링, 미니 게임 등을 하는 부스들도 있다. 외국인들이 등을 만드는 코너도 따로 있다. 안국동과 공평사거리 두 곳의 무대에서는 같은 시간대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다양한 공연도 열린다. 


 이날 밤 7시부터는 연희단 등이 인사동과 종로 일대에서 다시 한번 연등행렬이을 펼치며, 공연과 전체 율동으로 연등축제의 대미를 장식한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브루더호프 크리스토프를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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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놀드 부부.jpg» 크리스토프와 베레나 부부. 사진 브루더호프 제공


 

 지난 여름 17일간 머물렀던 미국 브루더호프로부터 오늘 아침 슬픈 메일을 받았습니다.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지도자인 요한 크리스토프 아르놀트 장로가 지난 15일 소천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 분이 돌아가시 전날인 14일 성금요일에 전세계 공동체가 그분과 함께 마지막 성만찬을 했다는군요. 그 분의 마지막 말씀은 “주 예수여 어서 오소서!”였다고 합니다.


 크리스토프는 100여년전 독일의 시골에서 부랑아, 고아, 장애인 등과 함께 브루더호프(형제들의 집)를 연 에버하르트 아르놀트(1883~1935)의 손자이자, 오늘날 브루더호프를 세계적이고 조화로운 공동체로 이끈 요한 하인리히 아르놀트(1913~82)의 아들이지요. 

 저는 세계적인 종교 지도자들을 직접 많이 만나보았습니다. 그 많은 지도자들 중에서도 크리스토프의 모습은 아주 깊게 남아있습니다. 


 작년에 보았을 때, 크리스토프는 70대인에도 마치 90살 정도는 된 것처럼 몸이 불편해보였습니다. 걷는 것도 상당히 불편해보였지요. 옆에서 젊은이들이 부축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놀드부부와.jpg» 브루더호프 지도자 크리스토프 부부와 조현 기자


 그런데도 그가 사람 한명 한명을 대하는 모습이 감동이었습니다. 대중적인 인물들은 너무 많은 사람들을 배려하려는 마음이 앞서면, 대중을 하나로 보지, 한명 한명이 개성과 인권을 가진 별개의 존재라는 것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한명 한명을 보지못하면, 설사 민주적인 구호를 내세우더라도, 실제 시각과 행동은 전체주의자인 경우가 적지않지요.


 그런데 한명 한명에 대한 크리스토프의 집중력이 놀라웠습니다. 지난번 브루더호프 공동체 기사에서도 소개했다시피, 그는 한명 한명에게 절뚝거리며 다가서서 반기는데, 마치 죽은 자식이나 형제를 맞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저를 맞을 때도, 제 딸을 맞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 이분이 온 마음을 다해, 온 정신을 내게만 집중해서 이렇게 환대하고 있고, 축복하고 있구나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불편한 몸으로 쉬지않고 주로 학교에서 아이들과 많은 대화를 하더군요. 그가 아이들과 나누는 교감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 지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크리스토프와 베레나 부부가 사는 집으로 찾아갔을 때도 크리스토프는 그렇게 환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왜 공동체에 관심을 갖게 됐는지” 물었습니다.

 

 제가 가난한 사람들과 상인들, 걸인들을 재워주고 먹여주며 늘 여러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했던 어린시절 저의 시골집 풍경이 마치 공동체 같았다고 얘기하니, “당신의 부모님이 천국을 만드는 분”이라고 칭찬하시고는, 자신들에 대해서는 아주 겸손했습니다. 


 브루더호프에서는 사진찍는 것에 알레르시 반응이 있는 것 같아 조심스러웠는데, 그래도 그 분과 이메일 인터뷰도 했던터라, 부부의 사진을 찍고싶어 부탁했을 때 부인 베레나는 겸언쩍어하며 “저는 별로 사진이 어디에 나고 싶지않다”고 얘기하자, 크리스토프가 부인의 손을 잡으며 “멀리서 오셨는데...좀 찍어줍시다”며 사진을 찍도록 아량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아놀드부부와 아름.jpg» 부친 요한 하인리히 아르놀트의 추도식 이후 조현기자의 딸과 인사를 나누는 크리스토픞 부부. 크리스토프는 누구를 대하든 호기심과 호나대의 표정으로 그에게만 집중했다. 사진 조현 기자


 크리스토프는 용서 화해의 전도사로 유명합니다. ‘폭력의 고리 끊기’(BTC·Breaking the Cycle)를 시작한 인물이지요. 이 프로젝트는 1999년 미국에서 발생한 콜럼바인 총기사고 이후 시작한 것입니다. 전신마비 사고를 당한 뉴욕 경찰관 스티븐 맥도널드와 등과 함께 왕따와 폭력, 총기사고 등에 멍든 중고등학교를 방문해 자신의 경험을 전해주고 용서의 경험을 나누어 놀라운 호응을 얻어 미국에선 588개 학교가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다. 지난 2008년부터 시작된 영국에서도 지난해에만 80개 학교가 함께하는 등 참여가 점차 확대되고 있다고 합니다. 크리스토프는 우리가 용서해야하할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린 시절 상처가 나머지 인생마저 송두리째 망치도록 더 둘 수는 없다.”

 순찰중에 총을 맞아 장애인이 된 스티븐 맥도널드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해 범인인 흑인 소년을 용서한 뒤 “척추에 박힌 총알보다 가슴 속에 자라는 복수심이 더 끔찍했다”고 고백했습니다. 또 세계적인 뮤지션인 장 폴 삼푸투는 1994년 90일 사이에 100만명이 죽은 르완다 대학살 때 부모와 세형제와 누이를 동시에 잃고 고통을 이기지못해 알코올과 마약에 손을 대며 감옥을 드나들었습니다. 그는 오랜 분노 끝에 “늘 끌어안고 있는 두려움과 분노가 나를 죽이는 진짜 적이다”는 것을 깨닫고 용서를 택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용서는 그런 극단적인 경우보다는 일상사의 경우입니다. 우리는 아주 사소한 것조차 용서하지 못해 괴로움에 휩싸여 사는 경우가 많지요. 그와 인터뷰에서 “현대인들은 경쟁 속에서 내몰리다보니,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거나, 상사 및 동료와 불화로 인해 고통 받는 경우가 많다. 이 때 어떻게 하는게 좋은가.”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우리 중에 살인이나 강간 같은 엄청난 일로 용서를 해야하는 상황을 겪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하지만 우리 모두 매일 배우자나 자녀, 친구나 동료를 용서해햐 하는 상황을 겪는다. 아마 하루에 수십번도 더 그런 일을 겪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매일 용서하는 일이 극단적 상황의 용서보다 덜 어려울 수는 있어도, 절대 덜 중요한 것은 아니다. 똑같이 중요하다. 아마도 매일 용서를 실천하는 일이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잘 아는 사람을 향해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게 다뤄야 한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다시는 보지 않을 낯선 사람을 용서하기는 쉬워도,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일을 훨씬 더 힘들다. 내 아버지 하인리히 아놀드는 ‘숱하게 배신을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분노와 불신에 잠겨 사는 것보다 용서하는 게 훨씬 낫다’고 말하곤했다.”


 그에게 이런 질문도 했습니다. “뜻하지않게 자식이나 가족을 잃게 될 경우, ‘왜 내게 이런 일이?’라며, 살인자에게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분노가 치밀기 마련이다. 이 때 어떻게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가.”라고요. 그러자 크리스토르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분노할 대상이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도 누군가를 향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도 치유와 회복에 대한 희망을 걸고 누군가에게 분노를 털어놔야  한다. 결국에는 ‘받아 들임’이 하나님을 용서할 수 있게 한다. 이걸 경험하지 않으면 우리는 운명에 반항하게 되고, 억지로 지게 된 것같이 느껴지는 삶의 십자가를 매번 뿌리치게 될 뿐이다. 하지만 받아 들일 때 우리의 어려움을 통해 다른 사람의 고통을 바라보게 되고, 그 고통을 함께 짊어질 힘을 얻게 된다.”

 

 오늘 크리스토프를 가장 아름답게 추모하는 것은 지금까지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 내게 상처를 입혔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용서하고, 내가 아픔을 준 사람에게 용서를 비는 것입니다.


 “내 말과 행동으로 아팠을 분이시여, 저를 용서하소서. 제게 아픔을 주었다고 서운해하고 미워했던 분에게 이 마음을 열기 시작하는 날이 되길!” 



핸드폰 없이 하루를 살아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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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공장 홍천수련원의 1박2일 성찰프로그램 참여자들의 체험 후기


 참고:1박2일 성찰프로그램 이끄는 검사출신 권용석 변호사와 연극인 노지향씨 부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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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방이라... 늘 자신에 갇혀 산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낼 수 있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탁자에 자리 잡은 잎차 한 잔의 맛이(배고픔) 이렇게 좋을 수 있을까? 이제 느끼는 게 생긴다. ‘독방 24시간’ ‘’ ‘새벽에 든 깊은 잠모두가 새로웠다. 소감이 무슨 의미? 없다. 그저 내 마음속에 ‘Reset’ 버튼을 누른다. Thank you!


짧은 시간이었지만 좋은 추억 좋은 생각 가지고 퇴소합니다. 어리둥절하고 아무것도 모른 상태에서 와서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를 돌아보게 하고 다시 생각하게 하고...


하루가 결코 길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독방에서의 쉼은 생각보다 더 편안했고 만족스러웠습니다. 쉬는 시간동안 모든 것이 멈출 줄 알았는데 새싹 같은 새로운 것들이 꿈틀꿈틀 피어나는 것 같이 삶에 대한 새로운 영감과 호기심, 소망들이 피는 것 같았습니다. 어제 한참을 창 밖의 산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곳에서 하루가 아닌 일 년을 지내야 한다면, 일 년 후 나갈 때 쯤, 저 산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정상에 올라볼 것 같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바쁘게 산다는 명분하에 잊고 지냈거나 경시 여긴 것들이 무엇이 있는지 되돌아보게 되어 좋았고, 몸의 쉼도 충분히 가져서 좋았습니다. 돌아가면 매주 하루씩은 이렇게 쉴 수 있도록 노력해 봐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진정한 안식의 시간을 갖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나만의 공간에서 나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인생 그래프를 그리며 행복했던 순간 슬퍼했던 순간들은 기억하며 내 인생의 중간 점검을 해봤습니다. 큰 것에 행복했던 것 보다는 작은 것에 소중하고 기뻐했던 것 같습니다. 또 살아오면서 했던 잘못된 판단, 생각, 편견들에 대한 실수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조용히 생각하고 쉴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을 가진 것에 대해 고맙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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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시간... 하루 가까이 아무 말도 안하고 있던 기억은 없었던 것 같다. tv도 휴대폰도 없는 나 하나로 가득 채워진 공간에 큰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멍 때린다는 표현의 아무 생각 안하는 상태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낮에는 푸른 잎이 돋아나는 나뭇가지 사이로 하얀색, 연보라색, 검은색 나비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때마다 춤추듯 흔들리는 소나무, 자작나무, 버드나무 들 이리저리로 직박구리, 박새, 이름 모를 꼬리 긴 작고 귀여운 새가 보였기 때문이다. 해가 지는 저녁이면 어둡고 고요한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혼자만의 시간에 주어진 큰 선물 같았다. 삐죽 솟은 나무들 틈새로 달이 비치고 달이 떠올라 달무리가 어스름하게 밤하늘을 밝혀주었다. 무념무상의 목표는 이 모든 것들로 이루기 힘들었지만 큰 창밖으로 비치는 자연의 풍경과 또 창에 비치는 나를 보면서 이 고요한 시간을 즐거이 보냈다. 앉아서 보고 있기 힘들면 누워서 보다 졸리면 잠들고 또 깨어 창밖을 보고 이런 시간이 나에게 있었나! 앞으로도 있을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주시는 음식들이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기하게도 맛있게 남기지 않고 먹을 수 있어서 감사했다. 특히 고구마를 쪄서 주실 때 껍질도 다 씻어서 주시고 얇았던 터라 음식물 쓰레기 없이 다 먹을 수 있었다. 아무 일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을 수 있다는 느낌을 오랜만에 가져서인지 굉장한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다시 내 일상으로 돌아가 도시 속에서 이런 시간과 느낌을 가질 수 있을까...


독방에 있는 동안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미루고 미루던 영어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도 많이 하게 되고 집중이 돼서 너무 좋았습니다. 명상도 하고 절도 하고 요가 운동하고 창문으로 멍 때리기도 하고 시간이 생각보다 빨리 가는 것 같습니다. 스마트폰이 없으니... 거기에 신경 쓰지 않게 된 것 같습니다. 원래 저녁 많이 먹는데 고구마랑 쉐이크 먹어도 나중에 배고프지 않아 몸이 가뿐해진 느낌도 받았습니다. 잠도 너무 꿀잠이었습니다. 절 하면서 땀도 흘리고 앞으로 매일하게 될 것 같습니다. 너무 좋았습니다.


 어느 봄날 날이 좋아 여행을 하고 싶은 마음에 강원도 황천의 내안의 감옥 릴레이 성찰에 추천을 받고 한번 오고 싶었는데 드디어 오게 되었고 오후 2시부터 오롯이 나를 돌아보고 나만 볼 수 있는 방안과 밖 풍경을 보면서 세간의 개념을 무시하고 순서 없이 서두 없이 나하고 싶은 대로 잠도 자고,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내가 지내온 세월들, 나와 인연 있던 사람들, 스쳐서 이별한 사람들 한분 한분 떠올리고, 지우고, 보고 싶어 하고, 여러 가지 생각과 과거 속에 나를 보냈다가 미래 속에 나를 보냈다가 미소 짓게 하고 울게 하고 속을 털고 나니 마음이 시원해지고 감옥(독방)이라는 단어보다 혼자 가는 길을 배운 것 같아서 뜻깊은 시간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어갑니다. 행복이 릴레이 물결을 타고 대한민국 국민이 모두 동참할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바라며~ 감사드립니다.


나는 사실 내가 어떠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다만, 부정하고 싶었고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누구보다도 나 자신에게... 그러나 결국 마주앉아 정면으로 내가 내 자신을 들여다보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미 올 때부터 이런 결과를 예상했지만... 오롯이 나에게 주어진 20시간. 사실 맘만 먹으면 어디서든 가능 할 수 있는데도 불구 계기가 되어 주지 않으면 쉽지가 않다. 이러한 경험을 알게 해 준 친구에게도 행복공장에게도 감사한 일이다. 주위의 힘들어 하는 많은 친구들이 떠올랐다. 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이 필요한 시간을 선물 해 주고 싶다. 무엇이 문제인 줄 알면 이미 절반은 성공이라고 했다. 세상 밖으로 나가면 난 다시 노력해야 할 것이고 대부분 또 지금의 감정을 망각 할 테지만 그래도 아주 미비하나마 한걸음 앞으로 나올 것임을 믿는다.


절반 넘게는 잠으로 보낸 것 같지만 처음엔 막막하기만 했는데. 시간이 지나다보니 이것저것 하다가 시간이 금방 지나가 버린 것 같다. 색다른 경험을 해본 것 같고 고민들이 많지만 평소에 바쁘게 지내고 한가할 때마저 핸드폰, tv 때문에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아무것도 없으니 계속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나중에 아빠나 언니도 와서 체험해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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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온통 걱정뿐이었습니다. 낯선 곳에서 아무도 없이, TV도 없이, 핸드폰도 없이 20시간을 뭘 하고 보내지? 란 생각뿐이었습니다. 모두 모여 식사를 하고 마지막 산책도 하고 이제 정말 독방에 갇힐 시간이 되어 핸드폰을 반납하고 밖에서 문이 잠기자, 이제부터 무얼하지? 란 생각도 없이 일단 누워 잠을 청했습니다. 두 시간여 남짓 잠을 자고 일어나 무의식적으로 손으로 뒤척뒤척 핸드폰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핸드폰이 없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채고 일어나 앉아서 창 밖 풍경을 보았습니다. 창밖의 나무, , 하늘, 새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그동안 생각하지도 않던 산속의 나무들이 멋있네, 이제 봄이라 꽃이 피기 시작하는구나, 꽃이 너무 예쁘네, 새들은 저기 모여 무얼 할까?... 한 생각들을 해가 져 깜깜해질 때까지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처음으로 108배를 해 보았습니다. 다하고 나니 몸과 마음이 아주 가볍습니다. 이곳에 있으며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그동안 내가 얼마나 시간에 쫓기며 살았는지, 집에서 쉬는 시간에도 TV와 핸드폰만 보고 살았는지, 나를 돌아 볼 시간이 있었는지,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오로지 나만 볼 수 있는,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이 시가니 이제 끝나 가는 게 아쉽습니다. 집에 가면 식구들에게 자랑할 생각을 하니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집니다. 이 시간을 저에게 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첫날 산책 후 방으로 들어와 이제 뭘 해야 하지?’ 생각했습니다. 우선은 밥 먹고 난 뒤라 잠이 와서 이불을 펴고 누운 후 잠이 들었습니다. 2시간 정도 지난 후 눈을 떠서 이제 뭔가 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낙서장에 다음에 이방으로 들어올 참가자를 위해 몇 글자 남기고, 휴휴 내안에 감옥에서 나오기를 펼쳐서 생각하고 작성하려고 했는데 막상 생각하려니... 자꾸 잡생각이 나서 이건 포기 해야겠다 생각하고... 편지지를 꺼냈습니다. 신랑에게 오랜만에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계속 쓰다 보니 또 잡생각이 들어서 편지 쓰는 걸 멈췄습니다. 가만히 창밖을 보고,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온전히 내 생각만 들지가 않았습니다. 계속 내 머릿속에 잡다한 생각들이 마구마구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서 잠이라도 푹 자야지 생각했습니다. 불을 끄고 누우니 잠이 바로 들지 않아서 또 다른 생각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계속 뒤척이다 이내 잠이 들고... 눈을 떠보니 해가 뜨려고 하더라고요... 이제 아침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이방에 들어와서 20시간 동안 크게 한 일은 없지만, 잠깐의 여유와 저 혼자 조용히 푹 쉬고 잘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돼서 또 오게 된다면 이번보다 더 뜻깊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편하고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옥 안의 나를 관찰하는 시간이었다. 감옥 밖의 나는 나에게 “**해라라고 지시만 하고 나를 들여다 봐 주지 않았다. 나를 위해 운동하고 산책하고 취미생활을 하지만, 그 순간순간 나를 지켜보고 깨어있지 않았다. 감옥 안의 나 자신이 안절부절 못하고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마주보고, 언제든 이런 질문에 마주할까 싶을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답을 적는 기분. 창밖의 소리가 반갑다. 함께 세상에 공존해 나누어 살아가는 만물의 소리가 더없이 좋다. 곧 나갈 시간이 다가오니 더 좋구나.


혼자만의 장소, 혼자만의 시간이 주는 집중과 평화는 역시 중요함을 느낀다. 이번이 두 번째 참여이라 긴장감을 덜어내고 편안한 맘으로 지냈다. 나만의 독방 체험시간이 아니라면 가질 수 없는 내 인생을 돌아보는 시간을 온전하게 가진 것이 고마웠다. 겸손해지고 평화로워지고, 더 많이 단순해져야 함을 다시 배우는 성찰 시간이었다. 사실은 평소 중요하고 반드시 해야 한다고 믿는 일도 생각 한번 바꾸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좀 우울하고 사는 재미가 없었는데 그런 기분은 펼쳐진 듯 한 느낌입니다. 이런 기회 주셔서 고맙습니다.


 

종교개혁되지않은 십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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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세계 유일의 '십일조 왕국'입니다. 전 세계 어느 국가에서도 개신교에 속한 거의 모든 교단들이 이구동성으로 합심하여 십일조를 당연시하거나 의무적으로 강요하는 나라는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 한국교회에서 십일조를 안 하고 정상적인 교인 노릇이 가능할까요. 교회 내에서 헌금이나 십일조로 인해 믿음이 부족한 자로 업신받고 하찮은 사람으로 취급받는 그런 모멸감과 상처를 진정 이해하시는지요. 그리고 그런 부당하고 모욕적인 차별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정말 희한한 점은 툭하면 별 시답지 않은 이유로도 서로 쉽게 갈라서며 교단 분열을 밥 먹듯이 하던 한국의 교회들이 성경적 근거가 매우 취약한 이 십일조는 거의 만장일치로 지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왜 유독 한국교회는 십일조를 이리도 중시할까요.

 

중세 십일조의 부활은 '돈이 되기 때문'

한국 신학자들의 성경 해석 실력이 외국 교회보다 훨씬 탁월하거나 또는 영적 단결력이 높아서일까요. 유감스럽지만 그건 아닙니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십일조란 그저 교회 내에서 믿음이 좋은 아주 극소수의 신도들이 '자발적으로 하는 특별한 헌금'정도로 인식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에서는 이 십일조를 안 하거나 못 하면 '믿음이 부족한 신자'로 폄하되는 이상한 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런 흐름을 주도한 사람들은 목회자들입니다. 그러나 힘없는 교인들이 뭐 알겠습니까. 그냥 그럴려니 하고 구경만 했지요. 그랬더니 근자에 이르러서는 아예 노골적으로 '십일조를 안 하면 중병에 걸리거나 천국에 못 간다'고 주장하는 간 큰 목사들마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맹신적 신앙이 매우 위험한 이유입니다. 한국교회가 십일조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이유는 결코 무슨 대단한 신학적인 연구의 결과도 아니고, 하나님의 명령도 아닙니다. 그냥 솔직히 말하자면 '돈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중세 교회의 면죄부 장사처럼 공교회가 맘몬적 돈맛에 심취하게 된 것입니다.

'십일조를 해서 복을 받으라'는 말은 영적 사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일조와 관계없이 이미 우리에게 독생자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아들까지 주신 하나님께서 나머지 무슨 복을 아끼실까요. 하나님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돈을 많이 바쳤다고 복을 주시고, 못 바치면 멸시하시는 그런 분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돈이 부족하셔서 우리의 재물을 원하실까요. 그런 속된 가르침은 이방 종교의 무속적 신앙일 뿐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중에서 돈을 잘 바치고 '세속적 복'을 구하라고 가르친 사도가 단 한 분이라도 있었던가요. 만일 세속적 복으로 복음을 평가해야 한다면, 사도들은 물론 예수님까지도 모두 실패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십자가 사역은 '성전 제사'와 '십일조'를 종결

특히 말라기서를 인용하며 십일조를 강요하는 목사는 지극히 용감 무식한 사람입니다. 만일 구약이 그 자체로 완전하다면 뭐 때문에 신약이 필요했을까요. 그냥 계속 동물 제사나 지내지 뭐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을까요. 십자가 사역은 예수님 자신이 제물이 되어 구약의 '성전 제사'와 '십일조'를 동시에 종결시킨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신약의 예수님은 구약의 불완전성을 완성시키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지금 한국의 교권주의자들은 사도들과 개혁자들에 의해 고사된 십일조를 부활시켜 부와 권력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쌓인 부정한 돈은 다시 교회의 대형화, 목사의 귀족화, 그리고 신도들의 맹신화를 촉진하며 교회를 변질시키는 밑거름이 되고 있습니다. 이는 백성들에게 율법의 무거운 짐을 강요하다 멸망한 '바리새인의 길'을 따르는 행위입니다.
          
한국교회에서 십일조가 얼마나 심각하게 기복적으로, 미신적으로, 그리고 교권적으로 악용되고 있는지를 결코 잊지 마십시오. 중세 교회도 그 길을 가다가 몰락했습니다. 십일조가 아무리 교회의 살림에 긍정적 역할을 하더라도 성경적으로 정당치 못하다면, 점차 우리의 신앙을 해치고 결국은 교회 자체를 허물게 될 것입니다. 아니 한국교회는 이미 속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라는 거룩한 울타리 속에서 양들은 오늘도 울고 있습니다. 목동들의 털깎기에 추워서 떨며 웁니다. 이리들에게 찢기고 아파서 웁니다. 상처 입은 형제들을 보며 분통해서 웁니다. 배가 고파 울고 삶에 지쳐 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의에 주리고 목말라서 웁니다. 언제부터인지 착한 목동들은 구석으로 밀려나고, 배부른 목동들이 웃고 있습니다.

오늘날 주님의 교회가 '강도의 굴혈'이 되어 버렸습니다. 의와 인과 신은 사라지고, 돈과 세력과 교권이 판을 칩니다. 스스로 '종'이라던 목동들이 목자를 배신하고 양들을 약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양들만 우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이신 예수님도 함께 우십니다.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멸망한 예루살렘보다도 더 큰 죄악을 우리가 쌓고 있기 때문입니다.

 

강요적 종교 활동의 역기능

한국교회의 금전적 부패가 매우 치명적인 이유는 '구조적인 헌금 강요'가 은밀하게 뿌리를 내리고 '토착화'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인위적이며 암묵적인 헌금 강요가 예배 속에 위장하거나, 조직 속에 숨어서 은근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신학'은 그나마 비교적 정통인데 '사역'은 갈수록 사이비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탈북하신 분들이 교회에 와서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북한이 싫어서 나왔는데 도리어 교회가 너무 북한 사회 같아서 싫다"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대부분 수 년 내에 교회를 떠납니다. 은근히 헌금을 강요하는 분위기나 강압적인 종교 활동이 사람을 질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보지 마십시요. 세상은 바보가 아닙니다. 교인이 괜히 줄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상식을 버리면 세상은 교회를 버립니다. 세상이 돈의 노예가 되고 돈에 찌든 개신교를 비웃고 있다는 말이지요.

교회는 무슨 세무서가 아닙니다. 어떤 경우이든 돈이 없으면 갈 수 없는 교회란 정상적인 교회가 아닐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하는 교회이고, 아울러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이신 예수님을 멸시하는 교회일 뿐입니다.

왜 오늘날 교회에서 가난한 장로들이 사라지고 있습니까. 요즘 장로님들은 전부 물질적 축복을 듬뿍 받아 그런가요. 아니지요. 교회가 돈으로 직분을 차별하기 때문입니다. 돈이 없으면 장로가 되기 힘듭니다. 그러나 예전엔 교회와 장로님들이 가난해도 좋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비록 협소한 예배당이지만 오손도손 모여 예배하고, 이웃에 복음을 전하고, 물질을 나누고, 그리고 사람을 키웠습니다. 세상의 칭송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가난한 교회에서 경건하고 성실한 신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주의 제자된 성도들의 믿음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요. 교회가 헌금을 바르게 걷고 바르게 사용하면 성숙한 성도들은 더욱 기쁘고 신이 나서 열심히 헌금을 할 것입니다. 설사 새신자나 믿음이 연약한 형제나 가난한 교인들이 헌금 좀 덜 내면 어떻습니까. 경제적 여유가 있는 다른 교우들이 더 내면 되지요.

지금부터라도 한국교회가 구태의연한 '종교적 공동체'를 청산하고 보다 '성경적 공동체'를 추구한다면, 그 어떤 교회라도 돈이 없어 쇠락하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것입니다.

 

바른 헌금 없으면 바른 교회 아니다

아울러 우리가 여기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단과 사이비들은 거의 예외 없이 항상 십일조나 헌금을 왜곡하여 신도들의 돈을 갈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하고 대를 이어 확장해 나가고 있습니다. 과연 한국의 토종 이단들치고 세습 안하는 이단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또한 그런 이단들 중에 재정 장부를 공개하는 이단을 본 적이 있던가요.


정통 교단의 미자립 교회들은 다수가 문을 닫기도 하지만, 희한하게도 이단이나 사이비 교회들이 문을 닫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여코 양들을 속이고 약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른 교회에 헌금을 하는 것은 매우 아름답고 귀한 일입니다. 건강한 교회는 그 헌금을 바르게 사용하여 교회당을 관리하고, 구제하고, 선교하고, 교육하고, 교역자들 생활비를 지급하고, 그리고 사회 봉사에 참여합니다. 이런 면에서 헌금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교회는 교인들에게 바른 헌금의 필요성에 대해 성실하게 가르치고 그 사용에 늘 투명성을 유지하도록 노력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 1:13)."

 

신성남 / 집사·<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


이 글은 <당당뉴스>(http://www.dangdangnews.com)에 실린 것입니다.


우리 모두 부처가 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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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권 원불교 무아봉공회 사무총장



-강명권메뉴.jpg» 노숙인들에게 급식할 식사 준비를 위해 식재료를 챙기는 강명권 교무


내것, 내 가족, 내 편, 내 종교

아전인수 벗어나 세상 위해 봉사


서울역 노숙인 수요일마다 저녁밥

"먹는 것으로 자존심 건드리지 마라"

북한동포 말에 종교의식 일절 안해


근처 기초수급자, 장애인 고시원도

작은 인연은 끊겼지만 큰 인연 맺어


국내는 물론 지구촌 어디라도 달려가

밖에서 자기를 밥 먹듯


빵점 남편 빵점 아빠지만

아내도 아이도 지지하는 지원자



28일은 원불교 대각개교절이다. 이날은 교조인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1891~1943)의 대각(큰 깨달음)을 기념하는 원불교 최대 축일이다. 주요 종교들이 교조의 탄생일을 최대 축일로 여기는 것과 달리, 원불교는 탄생보다는 ‘생각이 근본적으로 전환된 날’을 가장 중시하는 셈이다.


 원불교의 깨달음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게 무아봉공(無我奉公)이다. ‘사사로움에서 벗어나 공을 위해 봉사한다’는 것이다. 즉 내 것이나 내 가족, 내 편, 내 종교, 내 민족의 아전인수에서 벗어나 세상을 위해 봉사한다는 것이다.

 

-부엌1.jpg» 서울역 지하철 14번출구 앞에 있는 무아봉공회 사무실엔 노숙인 급식을 준비하는 대형 부엌이 있다



-사무실구호품.jpg» 무아봉공회 사무실에 쌓여있는 구호품들


처음엔 감사의 말보다 욕이 먼저

 각 종교단체들이 참여하는 서울시 자활센터인 서울역따스한채움터에서 원불교 무아봉공회는 수요일 저녁마다 노숙인들에게 식사를 제공한다. 원불교 밥은 그 정성스러움으로도 정평이 나 있지만, 이웃 종교들과 달리 밥을 주기 전에 종교의식을 일절 하지 않는 점이 독특하다. 무아봉공회 사무총장 강명권(55) 교무는 “북한 동포로부터 ‘제발 먹을 것 주면서 자존심 좀 건드리지 마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법회를 하지 않는 이유’를 밝혔다.


 그런다고 노숙인들이 반색해주는 건 아니다. 무아봉공회가 2011년 노숙인 급식을 시작할 때만 해도 노숙인들은 밥을 늦게 준다거나, 밥이 질다거나, 반찬이 맛없다며 그릇을 집어던지고 욕설을 퍼붓기 일쑤였다. 남구로역 인근에서 아침을 급식할 때는 서울역 부근 무아봉공회 사무실에서 새벽 2시 반부터 국을 끓이고 반찬을 만들어 5톤 밥차에 싣고 가면 감사의 말보다 욕이 돌아올 때도 많았다.


 그래도 식사에 정성을 들이고 또 들였다. 그 한 끼가 노숙인들을 변화시켰다. 언제부턴가 욕설이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욱더 많이 변화된 쪽은 봉사자들이었다. 강 교무는 밥을 얻어먹으러 온 탈북소년들에게도 친해지면 밥이나 국을 함께 퍼줄 것을 부탁하곤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남에게 밥을 퍼주면서 “세상엔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도 있구나”, “나도 남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구나”라며 자존감을 회복했다. 강 교무는 “예비 교무들이 이곳에 오면 처음엔 노숙인들이 무서워 말도 못 걸지만, 지내다 보면 이들도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다음부터는 어떤 사람을 만나는 데도 두려움이 없어진다”고 말했다.


 -네팔쌀나눔.jpg» 네팔 지진 피해 현장에서 쌀을 나눠주고 있는 강명권 교무와 무아봉공회 회원들

 


-팽목항봉사.jpg» 진도 팽목항에서 봉사중인 무아봉공회 회원들


휠체어 보자마자 막무가내로 거절

 무아봉공회가 밥만 퍼주는 건 아니다. 서울역 부근에 고시원도 운영한다. 47개의 방을 갖춘 고시원은 대부분 기초수급자나 장애인들이 들어와 있다. 이 고시원은 월 20만~24만원으로 저렴한데도 일반 고시원이 밥과 반찬 한 가지만 제공하는 것과 달리 1식3찬에 밥은 얼마든지 먹을 수 있도록 하고, 텔레비전과 인터넷도 자유롭게 접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그러나 무아봉공회의 재정이 넉넉지 못한 상황에서 서울시가 그 고시원을 여성시설화하면 운영비를 지원해주겠다고 제안해왔다. 이에 따라 없는 돈 1억2천만원을 끌어들여 에어컨과 소방시설을 완비했다. 그런데 장애인 두 분이 갈 곳이 없었다. 강 교무가 몇달간 이 고시원 저 고시원을 전전하며 겨우 방을 얻어놓고 장애인을 모시고 가면, 고시원 주인은 휠체어를 보자마자 장애인은 들일 수 없다고 막무가내로 거부했다. 결국 다음 갈 곳은 자기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내보낼 수도 있었지만 강 교무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서울시로부터 운영비를 지원받는 여성시설화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다. 하지만 강 교무는 “갈 곳 없는 장애인들을 내보내지 않은 건 잘한 일이었다”며 수줍게 미소지었다.


 강 교무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출가했다. 어머니는 과수원에서 사과를 따다가 떨어져 척추를 다쳤는데, 병원에서 복막염을 발견하지 못해 세상을 뜨고 말았다. 병원 원장에 대한 원한이 컸는데 알고 보니 원장은 아버지의 친구였다. 아버지의 친구가 친구 부인을 일부러 죽게 둘 리는 없었을 텐데 왜 어머니는 그렇게 맥없이 돌아가시고 만 걸까. 의문에 찬 그가 만난 한 교무는 “진리를 공부하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출가를 결행했다. 그는 이제 “어머니가 돌아가심으로써 작은 인연은 끊겼지만, 큰 인연들을 맺었다”고 했다.


 그의 책상에 놓인 3대 종법사 대산 종사(1914~98)의 법어가 큰 인연들을 말해준다. ‘무아무불아(無我無不我·내 없음에 내 아님이 없고), 무가무불가(無家無不家·내 집 없음에 천하가 내 집이네)’ 

 

 가정 생계는 아내가, 그래도 부창부수

 강 교무는 재해재난이 발생하면 무아봉공회 회원들과 만사를 제치고 달려간다. 인도네시아, 중국, 아이티, 일본, 필리핀, 네팔 등 천하를 내 집처럼 누볐다. 국내도 마찬가지다. ‘세월호 참사’ 현장인 진도 팽목항에서도 8개월을 살고, 충남 태안 기름 유출 때는 115일을 살았다. 지금도 무아봉공회 사무실에서 밤을 날 때가 대부분이다. 경기도 산본에 있는 집엔 1주일에 한두번 가는 게 고작이다. 그가 받는 급료래야 100만원 남짓이다. 처자식을 경제적으로 돌보기엔 턱없이 부족한 돈이다. 그를 대신해 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는 아내가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며 두 자녀까지 돌봤다. 그야말로 세속에서 보자면 빵점 남편, 빵점 아빠가 아닐 수 없다. 강 교무도 “많은 시간을 함께 지내지 못해 가족들에겐 미안하기 그지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가족의 평가는 세속의 잣대 같지만은 않다. 대학생 딸은 엄마처럼 교무와 결혼해 엄마처럼 살아가겠다고 한다. 이에 질세라 아들은 “아버지처럼 교무가 되어볼까”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의 아내도 부창부수다. 강 교무가 네팔 히말라야 지진 피해자들에게 30킬로그램씩 담긴 쌀 1500포를 나눠주고 와선 해발 3천미터가 넘는 산들을 초등학교 2·3학년 학생들이 사흘 걸려 지고 가는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고 가슴 아파했을 때였다. 그의 아내는 “퇴직하면 그곳에 가서 아이들을 도우며 살아가자”고 부추겼다.


 강 교무의 멘토는 소년원 출신 청소년들을 보듬고 살아가다 40대에 세상을 떠난 선배 길광호 교무였다. 그는 “그 형님이 ‘만일 내 이웃이 굶어 죽는다면 그것은 ‘법신불 사은님’(원불교의 신앙 대상)이 도와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당신과 내가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고, 내 이웃이 죄악에 시달린다면 법신불 사은님이 가호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당신과 내가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고 했다. 그는 “세상을 구원할 분이 대종사님만이 아니다”라며 “우리 모두 활불(살아있는 부처)이 되라는 게 선진님들의 가르침”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는데, 오직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동성애자들도 하느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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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호주교3.jpg»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장 이경호 주교. 사진 조현기자


서울시청 건너편 성공회대성당은 근대건축물의 백미다. 성공회는 이 대성당 앞마당에 있던 3층 건물을 허물어 300여평을 공원으로 만들어 서울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서울시가 지금 이곳을 공원으로 꾸미는 공사 중이다. 성공회는 매주 수요일 12시20분엔 대성당에서 시민들을 위한 무료 클래식 공연도 선보인다. 이렇게 열린 성공회에서도 이경호 베드로주교(58)는 더욱 더 열린 인물로 꼽힌다. 지난 25일 김근상 전임 주교에 이어 서울교구 교구장에 착좌한 그를 26일 만났다. 대한성공회는 서울·대전·부산 3개교구가 있는데, 전체 232명의 사제 가운데 157명이 서울교구에 속할만큼 비중이 크다. 이 주교는 정년은퇴하는 65세까지 앞으로 7년간 서울교구를 이끈다. 그는 대성당 뒷편에 자리한 주교관인 한옥집 양이재에서 객을 맞았다. 서울 복판에 고층건물을 올리지도 않고 소박하고 멋스런 한옥집을 그대로 간직한 것이 성공회스런 집이다.


  이 주교는 대성당의 주임사제로 있을 때 청년들과 누구보다 가까운 신부였다. 예수의 동정녀 잉태와 부활같은 주제조차 청년들이 얼마든지 묻도록 질문이나 신학 논쟁도 허용하고, “모르면 모른다”고 했다. 숨통이 트인 청년들이 그를 잘 따랐고, 청년신자들도 늘었다.


 성공회는 민주화 기여도와 성공회대 등으로 인해 진보적 이미지가 강하다. 독신사제를 고수하고 여성 사제를 거부하는 가톨릭과 달리 사제의 결혼을 허용하고, 여성사제가 10%나 된 것도  그런 이미지를 더욱 짙게 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자들의 전반적인 보수화는 성공회 신자들도 예외가 아니라고 한다. 그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하는 조화를 특히 강조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다양성을 장려하기까지한다. 그러면서도 약자 배려나 예언자적 사명에 있어서만은 강단이 있다.


 보수 기독교 인사들이 배타를 서슴지않는 동성애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국성공회에선 동성애자 주교까지 탄생했지만, 한국성공회는 그 문제에 대해 여전히 보수적인 경향이 짙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는 “어느 누구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예외가 될 수 없고, 차별 받어서는 안된다”며 “성적인 경향 때문에 그래서도 안된다”고 말했다. 


 어린시절 경기도 안성 시골을 들개처럼 돌아다녔다는 그는 사제복을 입은 신부가 너무 멎져보여 초등학교 5학년 때 사제가 될 꿈을 꾸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은 녹녹하지않았다. 사제의 꿈과 신혼생활을 동시에 추구하며 신학생 시절엔 밤엔 카세트테이프와 옷장사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장사엔 영 소질이 없음을 자각하고, 외벌이로 처가살이를 하며, 아이를 전혀 학원에 보내지않은 소박한 삶을 택했다.


 그는 딸을 키우면서도 쥐어짜지 않았듯이 신자들에게도 교리나 헌금을 강요하거나 쥐어짜지 않은걸 성공회스럽게 여긴다. 그는 “요즘 새로 오는 신자들은 여러 종교 교단의 문화 등을 상세히 비교해 기존신자들보다 더 잘알고 와 깜짝 놀라곤 한다”면서 “전례는 성스러우면서도 쥐어짜기않는 스타일이 이제는 호평을 받는 시대가 된 것 같다”며 성공회스럽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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