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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지호대표의 자생경영 인간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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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지호5.jpg» 불광미디어 류지호 대표


불교 전통사찰들은 문화재를 지렛대로 예산의 상당부분을 정부 지원에 의존한다. 불교단체와 잡지, 출판사들은 대부분 대형사찰이나 능력있는 스님에게 의존해 버텨왔다. 이런 의존 피라미드 하에서 자생력은 더욱 고갈됐다. 그런데 남다른 자생력을 보여준 불교출판사가 있다.  <불광출판사>와 <월간 불광>을 운영하는 <불광미디어>다. ‘부처님 오신날’(5월 3일)을 앞두고, 지난 10년간 <불광미디어>를 반석에 올린 류지호 대표(56)를 27일 서울 견지동 조계사 옆 사무실에서 만났다.

  

 이곳엔 장기근속자가 적지않다. 이 회사는 근무 20년이 되면 금 20돈으로 만든 불상을 안겨주고, 25년이 되면 파트너와 유럽 여행을 시켜준다. 얼마 전엔 고민이 많다는 직원이 가고싶던 런던에서 생활해보록 항공료와 3개월 체류비를 지원했다. 그 직원은 출판사를 나가 다른 길을 택했지만, 그를 탓하는 사람은 없다. 이런 ‘사람 중심’ 경영이 호황 업종이 아니라, 장기 불황 속의 출판계에서 추구되고 있다는게 놀랍다.


 <월간 불광>은 불교 잡지 가운데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한다. 43년 역사로 지난해 500호를 발간했다. <불광출판사>도 단행본 50권을 발간할 불교계 최대다. <불광미디어>는 불광운동을 주창하며 서울 잠실에 광덕 스님이 창건한 불광사가 모태다. 10년 전까지도 불광잡지·출판사는 불광사 불교용품점에서 나오는 수익금에 의존해 잠실 불광사 옆에서 유지해왔다. 


 류 대표는 자신이 이 회사를 맡으면서 불교용품점 운영권을 포기하고, 사무실도 조계사 옆으로 옮겨 자생을 모색했다. 사찰에만 경영을 의존하면 지속 가능할 수 없다고 본 때문이었다. 경전과 큰스님 일대기와 법어를 묶는 수준이던 불교출판계의 관행도 과감하게 탈피했다. 분야는 현대인들의 관심을 반영해 심리치료와 정신분석, 상담,명상, 서구불교까지 확대하고, 편집과 디자인은 현대적으로 변화시켰다. <월간 불광>도 판형을 키우고 전면칼라화했다. <월간불광>은 100퍼센트 유료화해 매달 1만여부를 발행하고 있다. 모사찰에 의존하지않으면서 매출은 10억에서 30억원으로 늘고, 직원은 9명에서 20명으로 늘었다. 


 지난해엔 잡지사와 출판사를 합쳐 <불광미디어> 주식회사를 출범시키며 디지탈북과 팟캐스트 등을 통해 또 한번의 업그레이드를 시도중이다. 불교 외 책들도 내는 <원더북스>도 만들었다. 같은분야 명강사 3명씩을 동시에 초청하는 ‘붓다 북 퀘스천’ 강연회도 정기적으로 연다. 홈페이지도 불교계 책·논문·강좌들까지 모두 소개하도록 개편 중이다.


 그는 가톨릭 모태신앙이었다. 고등학교도 가톨릭학교인 동성고를 나왔고 견진성사도 받았다. 미국에서 사는 그의 5형제도 가톨릭이나 개신교 신앙을 갖고 있다. 

 

 그런 그가 어떻게 대표적 불교전도사가 됐을까. 류대표는 훤칠한 키지만 실은 왼쪽 무릎 아래 의족을 한 장애인이다. 시골에서 상경한지 1주일만에 교통사고로 다리를 절단해야했다. 그런데도 초·중학교때까지는 의족을 한채 만능 스포츠맨으로 활약할만큼 성격이 밝았다. 그런데 고교에 진학하자마 다리 절단부위에 종기가 생겨 체육·교련시간 내내 교실에만 혼자 앉아있으면서부터 장애를 자각하게 되고, 소설과 시를 읽으며 인생과 세상의 부조리에 관심을 갖기 사작했다. 고교 졸업후엔 2년 동안 진하게 방황했다. 청계천 헌책방들에서 <씨알의 소리>와 <사상계>, <뿌리깊은 나무> 같은 잡지들을 구해 읽고, 향린교회로 함석헌의 장자 노자 강의를 들으러 다녔다. 책을 통해 불교과 인연도 그때 시작됐다. 


 그는 성균관대 동양철학과에 입학해 불교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불교’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대학생불교연합회 간사를 시작으로 불교정토구현전국승가회, 대승불교승가회 등 불교개혁 단체들에게 활동가로 지냈다. 1994년 종단개혁 때는 개혁의 기획자였던 현응 스님을 도와 몇개월간 성명서와 유인물을 밤새워 쓰는 실무를 맡기도 했다. 조계종 개혁 뒤엔 총무원 기획조정과장과 문화사업단 초대 사무총장 등을 지냈다. 이어 형제들이 있는 미국으로 날라가 1년을 보내던중 미국까지 날라와 불광출판사를 맡아달라던 불광사 회주 지홍스님의 청을 받아들여 이 일을 시작했다.


 그는 “지홍 스님이 틀어쥐지않고 개방해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는 배려로 자율경영을 해올 수 있었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류 대표는 회사를 어느 정도 궤도에 올린 다음엔 1년 휴가를 자청해 아프리카와 중남미, 인도 등을 돌았다. 그는 “처음 1개월은 아내와 다음 4개월은 딸과 여행하면서 과거 너무 일에만 매달려 가족들의 감정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외동딸이 외국어고를 나와 서울대를 가서 잘 자란 줄만 알았는데, 딸은 아빠와 중학교 교사인 엄마는 너무 바빠 자기는 혼자 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 자기가 어릴적 아빠와 장기를 두면서 아빠가 한판도 져주지않아 화가 났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딸을 강인하게 키우고 싶은 생각뿐이었지, 아빠가 져주길 바랐던 딸의감정을 헤아려주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렇게 소통하지 못했던 아픔이 불교적 가치를 더욱 체화하는 과정이 되었단다. 


 그는  “이제 불광미디어가 불교 신도 몇명  늘리는 일이 아니라 경쟁과 욕망, 소통 부재 등 시대적 아픔을 해결할 불교적 가치를 널리 공유하는 모델을 만들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잊지 말게, 자네 생각도 틀릴 수 있다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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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구머리.jpg» 픽사베이 제공




잊지 말게, 자네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걸! 이따금 생각한다. 그때도 이렇게 알았더라면 좋았을걸! 그럼 이제 그렇다고 알았으니 앞으로는 같은 실수를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을까?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머릿속에 표어 하나를 붙여두고 산다. “자네 생각이 그를 수도 있네!”라고. 애초 이 딱지는 여차하면 얼른 꼬리를 자르고 숨어들 보호막이 아니라 스스로 범한 오류를 얼른 인정하고 바로잡겠다는 다짐이지만, 솔직히, 오래 묵은 편견과 생각 쪼가리들은 완강하게 교정을 거부하기 일쑤다.


 우리네 세상살이는 오관을 통해 들어와 쌓인 온갖 정보를 정리하고 평가, 판단하여 제 좋을 대로 실행하는 일의 연속이다. “이것이 이렇고 저것은 저러니 나는 이리 하리라!” 그런 평가와 판단, 실행의 경험은 거듭 축적되고 다음의 판단에 영향을 준다. 거기다 우리는 자신의 경험뿐만 아니라 남들의 경험조차 자기 것으로 만드는데, 필시 우리가 습득한 세상살이의 슬기는 대부분 간접 경험으로 채워진 것일 수도 있다. 그 틈을 비집고 온갖 쓰레기도 들어온다. ‘이래라저래라. 이것이 좋다 저것이 좋다. 저것은 독이고 이것이 보약이다. 저놈은 마귀요 저분이 구세주라더라!’


 고타마 붓다께서 한 마을에 이르렀다. 사람들이 붓다께 다가가 물었다. “우리 마을에 이따금 도인들이 머물다 갑니다. 어떤 이가 ‘이것이 진리다’라고 말합니다. 다음에 또 다른 이가 와서 ‘그게 아니고 오로지 이것이 진리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오는 이마다 제각각 제가 옳다고 하니 어느 것이 참인지 혼란스럽고 모두 가짜라는 의심이 듭니다. 어떻게 가려 알 수 있겠습니까?” 붓다께서 답합니다. “거듭 들었다 해서, 전통이 그렇다고, 소문이 났다고, 경전에 그리 써 있다고 해서, 자명한 공리라고, 논리적으로 옳으니, 상황에 적절하니까, 존경하는 스승의 말이라고 곧이곧대로 수용해서는 안 됩니다!”


 여태껏 자기들이 써왔던 정사(正邪)·선악(善惡) 판단의 잣대를 모두 부정당하고 어리둥절해진 그들에게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자신과 공동체의 안락과 평화를 해치는 일이라 생각되면 삼가고 거부하십시오!” 이어서 탐욕, 증오, 어리석음은 자신과 공동체를 망치는 만악의 뿌리임을 설명하신다. 누군가 참이라고 말할 때 그 주장의 배후 혹은 바탕에 사적인 탐욕과 증오, 사회와 역사에 대한 몰이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면 참일 수 없다는 것이다.


 선거가 가까워지면서 온 나라가 북새통이다. 전혀 새롭지도 않은 남의 허물 찾기에 골몰하여 ‘거듭 되풀이되는’ 온갖 말 같지 않은 ‘카더라’에, ‘이 난세를 헤쳐 나갈 사람은 오직 나’라거나, 지켜질 수 없는 것임을 저도 알고 있을 속 빈 약속들이 넘쳐난다. 이럴 때 저 공식을 대입해보면 금방 드러난다. 아하, 이건 순전히 제 헛된 욕망의 원풀이로구나! 아하, 저건 온통 미움과 오기의 표출이구나! 오호라, 이건 인간과 공동체의 바탕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언동이구나!


죽음도 때론 축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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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jpg» 픽사베이 제공



어버이날이 다가온다. 많은 사람이 평소에 소홀했던 부모님께 효도를 좀 해보려고 새로운 결심을 해보기도 할 것이다. 임종의 말기 상태에 있는 부모님을 떠나보내야 하는 자녀들은 나름대로 마지막 효도를 하기 위해 참 많은 수고를 한다. 그런데 정말 그 수고가 부모님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마음의 짐을 벗으려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신체 대사가 원활하지 않아 계속 복수가 차오르고 뽑아내야 하는 고통을 겪는 아버님에게 그동안 불효한 것이 한스럽다며 마지막에 비싼 영양제라도 맞게 해드려야 한다면서 계속 영양제를 고집하는 아들이 있는가 하면 평소 어머님에게 맛난 음식조차 못 해드렸다며 주말만 되면 세 딸이 각자 자신있는 음식들을 해 가지고 와서 의료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몰래몰래 어머님을 과식하게 해서 그 딸들이 떠나간 후에 복통과 호흡곤란, 구토, 설사로 간호하는 아버님과 의료진을 당혹하게 만들기도 한다.


 70대 중반의 어르신이 돌아가시기 전 고향에 가서 마을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하셨다. 산소호흡기를 단 채로 응급차로 서너 시간 걸리는 고향에 내려가서 마을회관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자녀들과 동네 할머니들은 이미 그 전날부터 가마솥을 걸어놓고 고기를 삶고 산더미처럼 전을 지지고 술상을 마련하였다. 동네 사람 200여명을 모두 불러서 밥을 먹이고 술을 따라주고 고기를 대접하였다. 한 사람씩 안아주면서 “감사합니다. 저 떠난 뒤에 제 아내 좀 잘 돌봐주세요. 맨날 울고 있지 않게”라고 말했습니다. 젊은이들에게는 “부모에게 효도해라. 고향 잘 지켜라”라고 하고, 같은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는 “신앙생활 열심히 해라. 우리 동네는 순교성지 아니겠니”라고 하면서 대여섯 시간 동안 잔치를 하고 돌아오셔서 닷새 만에 돌아가셨다.


 고향 전주 덕진공원에 가서 연꽃을 보고 싶다는 아주머니가 계셨다. 상태가 안 좋아 그냥 근처 봉선사에 가서 모든 예쁜 연꽃 사진을 찍어다가 병실 가득 도배를 해 드렸지만 만족스럽지 않다며 꼭 덕진공원을 가야 한다고 하셔서 여행을 갔다. 덕진공원의 연꽃을 보면서 마치 연인을 만난 듯 행복해하시던 그분은 되돌아오는 고속도로에서 하늘로 떠나셨다.


 자녀로서는 결심하기 힘들었지만 부모님이 떠나신 후 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이야기한다. 부모님이 진정 원하는 것을 해드릴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다고, 우리 가족 모두에게 가장 의미있는 여행이었다고, 부모님이 기뻐하고 행복해하시는 모습이 우리들에게 계속 남아서 정말 마지막 효도를 잘한 것 같다고….


 삶을 포기하고 죽음을 마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삶을 완성해가면서 죽음을 준비해 나가는 모습은 이렇게 우리에게 축제처럼 좋은 추억을 선물하고는 한다.


여기서 저만치가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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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풍


 여기서 저만치가 인생이다 저만치,


 비탈 아래 가는 버스

 멀리 환한

 복사꽃


 꽃 두고

 아무렇지 않게 곁에 자는 봉분 하나


 <홍성란시집-바람의 머리카락>(고요아침 펴냄)에서


 홍성란

 충남 부여 출행. 성균관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89년 중앙시조백일장으로 등단. 시조집 <춤>, <바람의 머리카락>, 한국대표명시선100 <애인 있어요> 등이 있음. 유심작품상(2003), 중앙시조대상(2005), 대한민국문화예술상(2008), 조운문학상(2016) 등 수상. 방송대 성균관대 강사, <유심> 상임편집위원 역임.


끝내 어쩌지 못한 마음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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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 하나


 그 옛날 천하장수가

 천하를 다 들었따 놓아도


 한 티끌 겨자씨보다

 어쩌면 더 작을


 그 마음 하나는 끝내

 들지도 놓지도 못했다더라.


 <조오현문학전집-적멸을 위하여>(권영민 엮음)에서


지은이조오현

결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법명은 무산, 법호는 만악, 자호는 설악이며, 산에 살며 시와 시조를 썼다. 시집으로 <심우도>, <산에 사는 날에>, <절간 이야기>, <만악가타집>,<아득한 성자>,<비슬산 가는 길>이 있고, 역서로 <벽암록 역해>, <백유경의 교훈-죽는 법을 모르는데 사는 법을 어찌 알랴> 등이 있다. 현대시조문학상, 가람문학상, 남명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지금은 신흥사 조실큰스님으로 내설악 백담사 무금선원에 칩거하고 있다.


엮은이권영민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교수로 재직(1981~2012)하면서 미국 하버드대와 버쿨리대, 일본 도쿄대 한국문학 초빙교수를 지냈다. 저서로 <한국현대문학사>, <서사양식과 담론의 근대성>, <한국계급문학운동사>, <한국민족문학론연구>, <정지용 시 126편 다시 읽기>, <이상 텍스트 연구>, <이상 문학의 비밀 13>, <문학사와 문학비평>, <문학,시대를 말하다> 등이 있다. 현대문학평론상, 김환태평론상, 만해대상 학술상, 서울문화예술평론상 등을 수상했고, 지금은 서울대 명예교수이며 단국대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스스로 속박해 괴로움 속에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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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禪)은 어떤 경전의 가르침으로도 전할 수 없고, 어떤 수행으로 닦아도 얻을 수 없으며, 어떤 견문으로도 이해할 수 없고, 어떤 방편으로도 들어갈 수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고 합니다.


 오직 부처 종자를 숙세에 훈습한 큰마음이 중생만이 단계를 거치지 않고 하나를 듣고는 천 가지를 깨달아 대총지를 체득합니다. 이런 다음부터는 깊은 산속에서 홀로 머물기도 하고 세간에 뛰어들기도 하면서, 종횡무진하고 자유자재함에는 그 도가 일상을 초탈하고 말과 행동에는 고정된 형식을 두지 않습니다. 달마스님은 문자를 세우지않고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켰습니다. 


 세존께서 49년 동안 설법하심은 실로 중생들이 자기에게 속아 생사의 괴로움 속에서 허망하게 자신을 속박하여 끝내는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꼴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법(心法)을 보여, 스스로 속아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도리어 그 마음법으로 스스로를 속인다면 어디에 간들 자신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겠습니까.


성철스님이 가려 뽑은 한글 선어록

<천목중봉 스님의 산방야화-선을 묻는 이에게>(감역·벽해원택, 장경각 펴냄)에서


 천목중봉(1263~1323)

 남송 말에서 원나라 초기에 활동한 고승. 절강성 항주 전당 출신으로 속성은 손씨이다. 15세에 5계를 받고 나서 <법화경>,<원각경>,<금강경>,<전등록> 등을 두루 열람했다. 24세에 천목산 사자원에서 고봉원묘(1238~1295) 스님을 참례하고 이듬해에 구족계를 받아 달마스님의 29세이자 임제슨미의 15세 법손이 되었다. 이로부터 천목산, 환산, 긍륭,변산,경산,육안산,중가산,단양,평강,오강,진강 등에 머무르면서 수행에 전념하였다. 스님의 도덕과 법력이 차츰 알려져 마침내 원나라 인종임금까지도 감화되어 `불자원조광혜선사'라 호를 내리고 금란가사를 보내오기도 했다. 

 많은 납자들을 제접하닥 영종 3년에 "나에게 한 구절이 있으니 대중에게 분부하노라. 무엇이 의지할 만한 근본이 없는 것인가"라는 임종게를 남기도 열반에 들었다.



자기와 다른것을 공격하는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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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jpg  자신의 생각과 다른 것은 공격할 대상인가, 아해의 대상인가. 자기와 다르다고 배타하고 공격하는 행위가 갈등과 폭력으로 발화되는 것이 역사다.

 인문운동가 이남곡(72) 선생이 공자의 <논어>의 일부 구절을 재해석해서 다시 내놓은 책은 ‘차이’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인에 대한 공자의 생각을 더욱 더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이남곡 선생의 삶은 차이 때문에 흐트러지고, 차이 때문에 오늘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이남곡은 전형적인 시골인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런 그가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 서울대 법대를 갔으니, 홀어머니의 기대를 한몸에 받을 법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기대에 부응하지 않았다. 농촌을 살려야한다며 농촌으로 내려가 8년간 ‘교육실천연구회’를 통해 교사운동을 했고, 남민전 사건으로 4년간 투옥됐다. 

 여성민우회 생활협동조합 창립의 주역인 서혜란이 그의 부인이다. 둘은 결혼해 첫아이를 낳은 지 6개월 만에 함께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이남곡은 50세가 되어 무소유공동체 실험을 위해 경기도 화산 야마기시(산안)마을공동체에 투신해 살았다. 그리고 60세가 되어 무소유사회가 아직은 보편적인 목표가 될 수 없다는 생각에 전북 장수에 정착했다. 된장 고추장을 만들던 서혜란과 함께 그가 매주 한번씩 <논어> 강독을 한게 인문운동과 인연을 맺는 계기였다.

 서혜란은 지난 2012년 세상을 떠나면서 사랑한 남편에게 ‘고전을 읽고 그 향기를 이웃들과 나누는 인문운동’을 제안했다. 이 선생님은 부인의 소원대로 지난해 <논어, 사람을 사랑하는 기술>을 내고, 논실마을학교에서 ‘좋은 이웃들’과 주경야독을 하며 본격적인 인문운동을 시작했다.


서혜란이남곡부부.jpg» 서혜란 이남곡 부부


 이번에 재발간된 <삶에서 실천하는 고전적인 지혜, 논어>는 <논어, 사람을 사랑하는 기술>에서 진화한 것이다.

 저자는 <논어>를 전남 보성 득량면의 한옥서당 불이학당 등에서 강의해왔다. 그러면서도 논어에 대한 이해와 확신이 더욱 깊어진 듯하다. 한때 ‘운동권’이었던 그가 우익의 뿌리로 여겨졌던 공자의 대표서를 인문운동의 얼굴로 추켜든 것이 의외가 아닐 수 없다.


 “물신의 지배와 각자도생의 차가운 이기주의로부터 벗어나 해방된 개인들이 대동세상의 빛나는 구성원으로 되는 인류의 꿈을 실현하는데 ‘논어’는 소중한 보배다.”

 그는 “예순을 넘어 논어를 접했지만, 인문운동가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활동하면서 이 점을 절실히 느꼈다”고 한다. 그는 “논어 해설서를 내고 나선 이후 논어의 내용들이 더 새롭게 다가왔다”며 재발간의 이유를 전했다.


 그가 책을 수정해야겠다고 생각하게 한 결정적인 구절은 ‘공호이단 사해야이(攻乎異端, 斯害也已)였다고 한다. 이 구절을 놓고 강독회 때 모인 사람들이 제각기 자기가 가지고 있던 책을 가지고 모였는데, 전부 ‘이단을 행하면 해로울 뿐’이라고 번역을 하고 있었단다. 그런데는 그는 공자의 사상으로 볼 때 도저히 이런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이단’을 ‘극단’으로 바꿔서 해석했다고 한다. 그처럼 ‘자기와 다른 것을 공격하는 것은 해로울 뿐’이라는 게 공자의 뜻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자기와 다른 것은 검토의 대상일 뿐 공격이 대상이 아니며, ‘무지의 자각’을 탐구의 출발점으로 하는 공자의 과학적 태도로부터 당연하다는 것이다.


논실마을학교.jpg» 전북 장수 남원 일대에서 진행한 논실마을학교


 그는 이미 공자를 ‘소통의 달인’으로 조명한 바 있다. ‘군자는 세상 모든 일에 옳다고 하는 것이 따로 없고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이 따로 없이 오직 의를 좇을 뿐이다’, ‘내가 아는 것이 있는가?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누구든 나에게 물어오면 어떤 편견도 없이 그 양 끝을 들추어서 끝까지 찾아보겠다’는 구절들이야말로 서로 다른 가치들이 공존하도록 진정한 탐구와 소통의 자세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또 하나 이남곡이 해석을 달리한 구절이 50살을 가리키는 지천명(知天命)이다. 그는 이를 처음 강독할 때는 ‘진리를 깨달았다’라는 식으로 이해했는데, 그것 또한 공자의 진리에 대한 탐구 태도와 맞지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천명을 분수(分數)로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지천명’을 ‘자연과 인간 속에서 자신의 분수를 깨닫고 실천하는 것’으로 해석하면, 더 새롭게 보이는 부분들이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중심은 가장 아픈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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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노숙인.jpg» 인도의 노숙인. 사진 픽사베이 제공


부처님의 가르침이 좋아 출가수행승의 길에 든지 어느덧 40년을 맞습니다. 제가 깃들어 수행하는 곳은 땅끝마을 두륜산 대흥사 안의 일지암一枝菴입니다. 이 암자는 뱁새는 언제나 한마음이기에 때문에 나무가지 한 끝에 살아도 편안하다당나라 시인 한산 스님의 시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일지암은 지금으로부터 250여년 전에 다산 정약용, 완당 김정희 등과 교유하면서 이 땅의 다도茶道를 다시 일으킨 초의草衣 선사가 다선일미茶禪一味의 문화를 꽃 피운 곳입니다. 우리 나라 다도의 성지입니다.

 

이 곳 일지암은 스님들도 감탄하는 수려한 풍광과 서해를 바라보는 황홀한 조망을 가진 명품 암자입니다. 산과 바다를 바라보며 마루에서 차를 마시노라면 마음에 깃든 온갖 감정의 불순물들이 일시에 사라집니다. 자족과 무위의 삶을 살기에 더없이 좋은 곳입니다.

 

그러나... 산문을 나서면 무욕과 자족으로 살아가기 힘든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먹고 사는 민생의 어려움, 불공정한 사회구조가 만들어내는 정의와 평등의 실종, 교묘한 억압구조 속에숱하게 겪는 모멸감... 그래서 붓다는 세상을 무지와 탐욕으로 불타는 집이라고 했습니다. 고오타마 싯다르타는 이 세상에 온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선언했습니다. ‘ 하늘 위 하늘 아래 모두가 존귀하다. 이 세상 사람들이 고통과 불안에 덮혀 있으니 내 그들을 구제하리라

저는 3년전부터 매주 월요일에 어김없이 산승에서 수도승으로 변신합니다. 수도승이 무어냐고요? 우리들의 은어인데요, 도를 닦는 수도승이 아니라 대한민국 수도에 사는 수행자를 말합니다.

매주 월요일, 산승은 새벽 430분에 땅끝에서 나주역으로 이동합니다. 다시 나주에서 첫 기차를 타고 용산역에 닿습니다. 이 때부터 자동으로 모드 전환, 수도승이 됩니다. 그리고 930분 통인동에 있는 참여연대에 도착합니다. 매주 월요일에 열리는 상임집행위원회에 참여합니다. 각 센터에서 올라 온 주요 현안을 논의합니다. 감시와 대안, 참여와 연대를 위한 다양한 의견과 반론이 오고갑니다. 당당한 주장과 서로를 배려하는 분위기가 참 아름답습니다.

어느 신부님이 이렇게 말했다지요. “노숙자에게 밥 한 끼를 주면 성스럽다고 칭찬하는데, 우리 사회에 많은 노숙자들이 생기는 이유가 무어냐고 물으면 좌파라고 낙인을 찍는다”. 개개인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손길도 중요하지만 정녕 지혜로운 사랑과 자비는 이 땅에 노숙자로 상징되는, 인간의 자존감을 상실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없게 하는 구조와 환경을 만드는 일입니다. 제가 감히 시민 보살을 염원하면서 좋은 세상을 꿈꾸는 벗들과 참여하고 연대하는 이유입니다.

 

한 사람의 힘’... 요즘 제가 사유하는 화두입니다. 진실과 사랑의 힘을 믿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이 모이면 그 자리가 바로 참여연대임을 깨닫습니다. 비록 부족하고 미약한 힘이지만, 참여연대 공동대표라는 직함을 가지고 세상을 바람직하게 가꾸는 일에 나 한 사람이라도 힘을 보태고, 뜻을 같이하고 가슴이 따뜻한 이웃들과 손을 잡는 일, 이것이 바로 제 방식의 자비를 실천하는 길입니다.

  

그가 밥을 구하러 가네/빈 그릇 하나 들고/한 집/ 두 집/세 집/밥을 얻으러 가네/일곱 집을 돌아도/밥 그릇이 절반도 차지 않을 때/그 사람/여덟 번째 집에 가지 않고/발걸음을 돌리네/일곱 집을 돌았어도/음식이 부족하다면/그만큼 인민들이 먹고살기 어렵기에/그 사람/더 이상 밥을 비는 일을 멈추고/나무 아래 홀로 앉아 반 그릇 밥을 꼭꼭/눈물로 씹으며 인민의 배고픔을 느끼네.

 

박노해 시인은 <구도자의 밥>이라는 시에서 석가모니의 심정을 대변합니다.어찌 붓다만이 이런 심정이겠습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 서로를 부처로 존중하며 사이 좋게지내기를 염원하는 모든 시민의 심정이 이러할 것입니다.

 

 조용히 내게 묻습니다. 내 몸의 중심은 어디입니까? 심장도 뇌도 아닙니다. 지금 아픈 곳이 내 몸의 중심입니다. 우리는 몸이 아프면 그곳에 온전히 집중하니까요. 그렇다면 부처님은 날마다 어디에 오실까요? 이 세상 가장 아프고 슬픈 곳에 계실 것입니다. 간절하게 부르는 곳에 가실 것입니다. 그래서 내곁에 있는 이웃이 부처입니다. 어느 누군가 나를 부른다면, 어느 누군가 많이 외롭고 아프다면, 그곳에 다가가 위로와 응원의 손을 잡는 그가 부처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웅전의 부처만을 볼 줄 알지, 내 곁의 부처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내 곁의 부처님들이 아프다고 합니다. 내 곁의 부처님들이 억울하다고 하소연합니다.

 

유마경의 보살이 이렇게 여민락(與民樂)의 세상을 염원합니다. “중생이 아프니 보살이 아프다

그대가 지금 바로 부처다’”라고 선언하는 화엄경에서 이렇게 기쁨을 선물하고 있습니다. “중생에게 공양하는 것이 부처에게 공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는 중생의 기쁨을 먹고 사는 분이기 때분이다

  

날마다 오셔야 하는 부처님, 어느 곳에서든 계셔야 하는 부처님.

마음에 깃든 어둠 걷어내고 참된 성품 밝히는 날.

이웃의 마음에 존엄과 자비의 등불을 밝히는 날.

간절한 마음이면 닿지 못하는 곳이 없으리니

그 간절한 한 사람의 큰 힘을 모아주십시오.

   


마음 깊은 곳에 자기만의 ‘감정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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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유형에니어그램도형.jpg [김인숙 수녀의 에니어그램] 5유형/지식을 추구하는 사람-네 번째 
핵심동기 : 지식
자신의 시각 : 탐구, 수집, 객관적
타인의 시각 : 관찰, 인색, 냉정 

5유형은 냉정한 사람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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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나 물질이 아닌 지식에 집착하는 5유형은 지식을 얻기 위해서 사람들을 회피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이들은 타인으로 인한 자신의 판단력이나 사고가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지요. 남의 말에 대해서도 냉소적입니다. 지적인 것에 대한 집착할 때의 5유형은 감정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표정이 없고 냉정하며 차가운 인상을 풍기는 오만한 이미지를 갖게 됩니다.
모든 것을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는 5유형은 지적욕구를 채워줄 것에 대해서는 탐욕적으로 덤벼들지요. 규칙을 무시하면서까지 호기심에 빠져 듭니다. 그러나 타인의 욕구에는 자신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옹호하고 호응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지나칠 때 관계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자신만의 세계로 생각과 환상이 빠질 수 있어 편향되고 옹고집스럽게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가진 것을 주기 싫어하는 구두쇠라는 인상을 주기 쉽지요. 그래서 정작 도움이 필요할 때 주변에 사람이 없습니다.

한마디 코너: 
나누지 않는 모든 것은 탐욕입니다. 

5유형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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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유형은 끊임없이 생각하고 아는 것도 회의적으로 관찰합니다. ‘왜?’로 시작된 궁금증과 물음은 자연스레 사색과 고독을 즐기게 되지요. 상대방에게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몸짓, 얼굴 등으로 잘 표현하지 않습니다. 가슴을 여는 데도 미숙합니다. 5유형은 가슴이 무장되지 않으면 자신이 무너진다고 느끼지요. 그래서 애정은 있으나  감정을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 여깁니다.

사례 1> 5유형의 부모 : 
        - 자녀들에게도 스킨십이 부자연스럽다. 
        - 칭찬과 사랑 표현을 말, 문자, 메일 등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5유형은 마음의 아주 깊은 곳에 ‘감정 보고서’를 갖고 있습니다. 깊은 절벽 아래 감정의 물이 흐르고 있지요. 다만 그것을 혼자만의 공간에서 재정리하고 평가하며 음미합니다. 이곳은 자기만의 세계이며 아무도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한마디 코너: 
백문이 불여일견. 알고 있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다르지요.
머릿속 체험은 가짜입니다. 무너지지 않는 진짜 감정을 즐기세요.

A3.jpg유형의 사랑의 표현은 지켜보는 사랑입니다. 5유형은 먼저 다가가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합니다. 말없이 친밀감을 표현하는데 익숙합니다. 이들은 가랑비에 옷 젖는 것처럼 더딘 사랑에 아주 깊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요.
듣기와 흡수 능력, 명확하고 침착하게 판단하는 5유형은 상대방의 말 한마디에도 속뜻을 금방 알아차립니다. 상대방의 식견과 견해를 존중하며 위트 있는 유머 감각으로 유쾌하게 이끌어 갈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5유형 부모의 특징-

5유형 부모는 자녀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뽀뽀나 스킨십이 부족합니다 
때문에 자녀는 양육자의 따뜻함과 안정감을 느끼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스킨십이 부족한 5유형 부모는 이런 점 때문에 자신이 진정 부모가 맞는지 의심을 하고 죄책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양육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지요. 그러나 다른 방법으로 자녀에게 사랑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자녀가 좋아하는 책, 장난감, 캐릭터, 드라마 등을 통해 자녀의 말에 호응해주면서 사랑을 전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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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가 어떤 일로 힘들어 할 때 5유형의 부모는 태연한 척 합니다 
5유형 부모의 이런 태도는 속으로 두려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하는 행동입니다. 또 감정을 표현하는 데 낯설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자녀는 자신의 상처에 부모가 공감해 주지 않는 것 같아 상처를 입습니다. 무엇보다도 5유형 부모는 감정으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자기의 경향을 깨닫고 감정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5유형 부모는 자녀의 지적 발달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자녀는 심적 부담이 될 뿐만 아니라 양육자의 따뜻한 사랑이 전해지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지요. 5유형 부모는 자신이 생각했던 지적 자녀로 키울 수 있다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를 다시 그리고픈 목사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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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가 그린 교회을 시작하며

 

이근복목사.JPG» 크리스찬아카데미 원장 이근복 목사. 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엄중한 시대에 무슨 한가로운 작업인가?

세운지 100년이 넘는 교회들을 붓펜으로 그리며 제 스스로 던지 질문입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이 다가오는지라 한국교회가 본질을 되찾기를 바라는 마음이 커졌습니다. 교회와 유럽을 혁신한 종교개혁이 근원으로 돌아가려고(Ad Fontes) 힘써서 열매를 맺었으니, 한국교회도 근원으로 돌아가는데 선교초기에 건축된 교회들을 다시 보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교회그림은 비록 밖에서 교회당을 표현하는 것이지만, 건축물에도 하나님의 교회로써 정체성이 담겨있고, 신앙공동체를 세울 때의 간절한 신앙과 민족을 향한 거룩한 기대, 복음전도의 열정이 체현한 것이 교회당입니다. 첫 예배당을 보존한 교회들이 거의 없지만, 그래도 주민들과 교인들의 마음에는 역사적 흔적은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유난히 굴곡이 많았던 우리나라 역사에서 교회는 지역사회의 구심점이고 고난의 현장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학창시절 여름방학 때 그림특별반을 같이한 친구 이철수 화백의 판화는 늘 경이롭고 부러웠습니다. 박달재 부근의 화실도 가보고, 전시회에 가서 감탄하고, 그의 큰 걸개그림을 구하여 제가 섬긴 성문밖교회(영등포산업선교회)에 게시하기도 하면서, 저도 그림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1998년 제가 사역하던 새민족교회 앞 서대문도서관에서 서양화 반원을 모집하는 현수막을 보았고, 드디어 수채화를 배울 기회를 얻었습니다. 목요일마다 두 시간씩 그림을 배우며 쉼이 있는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4년여 동안 빠지는 날도 많았고 숙제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지만, 수채화를 지도하신 심우채 화백 덕분에 기초를 닦았습니다. 동네교회를 떠나 기독교 기관에서 일하게 되자 평일에는 시간을 뺄 수가 없어서 참 아쉬웠습니다. 화가의 지도하에 수채화를 그릴 수 없어서 궁리를 거듭한 끝에 붓펜으로 그리고 채색하는 방법을 찾아내었습니다. 느낌을 위주로 산과 꽃을 그리다가 이제 교회를 그리게 된 것입니다.



새문안교회.jpg» 새문안교회 첫 예배 처소. 이근복 목사 그림


-루터의방.jpg» 이근복 목사가 그린 루터의방

 

한국교회가 문제가 많지만 앞으로는 무너져 내린 우리 사회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촛불민심에 따라 나라를 새롭게 세우는데 한 몫을 감당하길 기도하며 정성껏 그리게 됩니다.

교회는 찌든 삶에 영적 에너지를 충전하는 신앙공동체이니, 교회그림에서나마 삶이 피폐한 이들이 조금이나마 힘을 얻고 가나안교인들(교회를 떠난 이들)도 위로를 받기를 소망합니다.

관광지에서 누가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하면 겁을 먹는 제가 교회를 찍어 그린 것이고 , 그림공부도 동네에서 취미로 하였기에 제 그림이 어설프기 그지없습니다.

 

우선 지난 해 1, 크리스챤아카데미와 한겨레신문이 공동으로 진행한 종교개혁 역사인문탐방중 방문한 독일 바르트부르크성의 루터의 방의 모습과 우리나라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의 첫 예배처소를 그린 그림을 올립니다.

 

이근복 목사(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북한산 진흥왕 추사의 기 모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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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비봉에서 하늘을 이고 서있는 직사각형 비석을 만나다



-북한산순수비.jpg» 북한산진흥왕순수비. 사진 원철스님

 

사방이 희끄무레하게 밝아지기 시작한다. 길을 나섰다. 약속한 일행과 합류했지만 북한산 국립공원 입구의 차단기는 내려진 채 요지부동이다. 연락을 했더니 7시에 개방한다고 알려준다. 얼마 후 승가사(僧伽寺)에서 운영하는 셔틀버스가 왔고 운전기사는 익숙한 솜씨로 차단기를 올린다. 겨우 차 한 대가 지나갈 정도의 시멘트 포장길이다. 군데군데 헐어버린 자리는 임시로 보수를 마친 누덕누덕 기운 길이다. 절 입구에는 비봉(碑峰)까지 1km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서있다.

 

석달 전에 겨울 북한산 둘레길을 걸었다. 은평구 불광역 근처에서 출발하여 대남문 아래 문수사(文殊寺)까지 코스로 4시간 정도 걸리는 강행군이었다. 그 때도 사실상 주목표는 비봉이었다. 신라 진흥왕(재위540~576)의 순수비(巡狩碑 임금이 다녀간 것을 기념한 비석)가 자리한 까닭이다. 겨울산행은 여러 가지 이유로 무리라고 하면서 망설이는 이를 꼬드긴 당근이 진흥왕 순수비를 답사한다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추위에 3시간 이상 노출된 상태로 비봉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지친 상태였다. 게다가 비봉은 엄청난 경사를 자랑하는 육중한 규모의 바위덩어리다. 올라가는 길도 따로 없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친절한 철제사다리도 인공자일도 없는 원석 그 자체였다. 게다가 군데군데 눈까지 얼어붙은 상태다. 올라가는 것은 어찌어찌 하면 가능할 것 같은데 내려올 때는 위험천만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119신세를 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입구에서 발길을 멈췄다. 안내판만 읽은 후 눈녹은 봄날을 기약하며 아쉬움을 안고서 물러섰던 기억까지 새록새록 일어난다.

 

출발하기 전날 봄비가 내렸다. 혹여 바위산이 미끄러울까봐 내심 걱정된다. 다행이 산길은 물기가 별로 비치지 않는다. 승가사 방향에서 올라왔기 때문에 아직도 에너지가 그대로 남았다. 조심조심 두 손과 두 발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올라갔다. 오래 전부터 앞서서 다녀간 수많은 사람들이 발을 디딜만한 자리에는 자국을 겨우겨우 새겨 놓았다. 두 바위가 만나는 크랙지점에는 끼움 돌을 넣고서 사다리 기능을 대신토록 했다. 이마의 땀을 훔칠 무렵 눈 앞이 환해지며 넓다란 바위마당이 나타난다. 네 발로 기다시피 하다가 비로소 허리를 펴고 직립동물의 본래자세로 돌아왔다. 부드러운 곡선의 바위 꼭대기에 직사각형 비석이 하늘을 이고서 늠름하게 서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은 자연이 빚은 것인데 유일하게 인간이 만든 작품이다. 입구에서 발길을 돌린지 백일만에 만난 덕분에 기쁨이 배가 되었다.

 

비석은 한국평균 남성의 키와 가슴둘레 크기였다. 천고풍상에 가로로 길게 금이 갔고 일부는 파편으로 떨어져 나가긴 했지만 비석자체가 주는 포스는 그런 흠결을 덮고도 남을 만큼 감동스럽다. 2006년 제작한 복제품이기 하지만 오리지널에 버금가는 기술력 때문에 원본의 감동을 전달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이리저리 뜯어보고 또 사방팔방으로 몸을 옮겨가며 살폈다. 국보인 비석은 1972년 국립박물관으로 옮겨갔지만 비석자리는 사적지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는 구역이다. 철제사다리와 인공자일이 없는 이유를 늦게사 알아차렸다.

 

올림픽 높이뛰기 선수가 장대를 짚고 몸을 날린다면 떨어질만한 위치에 승가사 기와지붕이 보인다. 추사 김정희(1786~1856)선생이 31세 때인 1816년에 친구 김경연과 이 절에 놀려 왔다가 우연히 깨진 채 내동뎅이 쳐진 비석 덮개돌을 발견했다. 전문가답게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동안 무학대사비로 알려진 비석이 비봉에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올라가 이끼에 뒤덮힌 비면을 손의 촉감을 이용하여 더듬었다. 많이 마멸되긴 해도 적지않는 글자가 그 남아있다. 이끼를 벗겨내고 글자를 판독했다. 이듬 해 1817년 벗 조인영과 다시 찾았다. 탁본을 하고 글자를 추가 판독하여 신라의 진흥왕 순수비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금석학의 대가로써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던 것이다. 측면 빈자리에 이런 발견과정까지 추가로 새겼다. 실제로는 원본훼손이지만 진흥왕 못지않는 명성이 오히려 비석의 가치를 높인 결과가 되었다. 올해가 발견 200주년인 셈이다. 본의아니게 200주년 기념답사라는 의미까지 부여된 셈이다.

 

준비해 온 차를 함께 마시고 있는데 생활한복을 입은 50대 남성이 올라왔다. 서울에 생활근거지를 둔 채 현재 울산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등산화를 내던지고 양말까지 벗고서 바위 위에 서 있다. 묻지도 않았는데 기()를 많이 받기 위해서라고 자기의 특이한 행동을 미리 설명했다. 아마 이런 기행(奇行)을 의아하게 여긴 이들에게 더러더러 질문을 받았던 경험의 소유자인 까닭이리라. 자기가 알기로는 북한산의 많은 봉우리 가운데 비봉바위가 가장 땅속 깊숙이 박혀 있다는 설명을 곁들였다. 그래서 이 봉우리의 기운이 제일이라는 것이다.

 

하긴 북한산의 많은 봉우리 가운데 순수비 위치를 이곳으로 정한 것만 봐도 전혀 근거없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면서 동쪽 구석의 변방국가에서 한반도 주역으로 등장했다. 풍수지리학은 당시에도 제왕학의 일부였다. 신라왕실의 현재 힘찬 기상이 더욱 뻗쳐 천하를 뒤덮길 바라면서 이 비석을 세웠을 터이다. 비문의 기록에 의하면 수행원 명단에 법장(法藏) 혜인(慧忍)도 보인다. 짐작컨데 승려의 법명이다. 왕에게 이런저런 조언과 함께 순수비 위치도 자문했을 것이다. 이후 봉우리 이름도 비석봉우리(碑峰)가 되었다.

 

비봉의 자연석 한 면을 이용하여 적당히 다듬은 후 글을 새겼다면 품도 적게 들고 보존도 좀더 쉬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얇은 직사각형 비신(碑身) 위에 상부의 불안정한 구조물인 비갓까지 덮었고 하부는 나름의 고정장치를 동원하여 힘들게 세웠다. 하지만 이것을 뒤집어 말한다면 그만큼 비석 보존에 강한 자신감을 반영한 것이리라. 더불어 한강 지역에 대한 신라왕실의 엄청난 애착이 투영된 결과이기도 하리라. 왕릉을 지키는 사찰이 있는 것처럼 산곡대기 외진 곳에 세운 비석을 관리하는 부서를 두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가까운 승가사였을 가능성이 높다. 비석을 세운 시기(삼국사기 555년 북한산 순행 기록)와 승가사 창건연도(756)가 일치하진 않지만 200년동안 직접관리하다가 뒷날 사찰로 관리권을 이양할 수도 있었겠다. 조선조에 들어와 사세가 약화되고 스님네들이 들쭉날쭉하면서 그 업무의 인수인계가 제대로 되지않은 까닭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추사선생의 공덕이 진흥왕만큼 큰 것이다.

 

등산과 더불어 비봉과 진흥대왕과 추사선생의 합해진 기()를 받으려 시간나는대로 와야겠다.  

말이 아닌 행동을 보여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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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아니라 행실을 볼 따름입니다.

 

우리 어머니는 요즈음 선거 이야기만 나오면, 65세 넘은 노인들은 선거 못하게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세금은 한 푼도 안내면서 조금만 아파도 부리나케 병원엘 가서 국가의료보험 축내는 주제에, 투표 엉뚱하게 해서 제 자식 손주들 앞길 막는 짓만 한다는 겁니다.


북에 퍼준 돈으로 핵무기, 미사일 만든다며 햇볕정책을 나무라는 노인들이 많습니다. 정치인들 말장난 탓이 큽니다. 햇볕 때문에 핵 개발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햇볕을 없앴기에 미사일을 쏘는 겁니다. 우리가 햇볕정책을 계속했더라면 북이 전 세계의 극심한 정치, 경제제재를 무릅쓰고 핵무기, 미사일 개발에 나설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북풍한설 몰아치면 나그네는 당연히 옷깃을 단단히 동여매지만 햇볕이 따스하게 내리쬐면 외투를 훌훌 벗어젖힌다는 게 이솝우화 아닙니까.


전처럼 북과 오손도손 왕래하고 경제공동체를 향해 나갔더면 지금쯤 남북은 물론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서로 을러대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싸드 배치문제도 그렇습니다. 이에 반대하면 종북이요 안보관이 의심스런 사람으로 몰아대는 것 역시 말의 유희입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싸드로는 남한 핵심 지역인 수도권을 전혀 방어하지 못합니다. 이런 마당에 중국, 러시아 견제라는 미국의 군사적 이익을 위해 우리 땅에 미군 미사일기지를 설치해 국제적 분쟁 소지를 만드는 일이야말로 우리 안보에 심각한 위험을 가져오는 행위입니다.

햇볕정책이나 싸드 배치문제를 둘러싼 말의 왜곡으로 말미암아 이 땅은 구한말 때처럼 열강의 각축장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나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을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목사 신부님들이 아무리 고상한 천사의 말씀을 전해도, 도 닦는 스님들이 무슨 고차원의 깨달음을 열심히 논파해도 전처럼 그렇게 그 말씀이나 깨달음의 거미줄에 걸려 허둥대지 않습니다. 그 분들이 쳐놓은 거미줄 말고 그분들의 현재 행실, 그 분들이 여지껏 걸어온 삶의 행적에 눈길이 갑니다.

말은 그저 말일 뿐.


말로는 그렇게도 열렬히 하느님을 받들어 모셨던 유대교 수석 사제와 율법학자들이건만, 하느님의 사랑을 행동으로 보이신 예수가 당신 스스로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했다는 이유로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러셨습니다.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셨는데...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하였다 해서당신은 하느님을 모욕하고 있소하고 말할 수 있느냐?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을 믿어라.”


스승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이어받아야 할 그 제자 기독교인들 역시 유대인들처럼, 믿어야 할 신조(信條), 을 둘러싸고 천주교, 동방정교, 무수한 개신교 종파들로 분열을 거듭하여 서로 죽이고 죽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관용과 평화의 종교라는 불교도 그보다는 덜했지만 비슷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삼유(三有)는 오직 가명(假名)일 뿐 진실한 법체(法體)가 없는데도 이 임시시설로 말미암아 분별하고 허망하게 계탁하네.” 대승경전 <능가경>에 나오는 구절로 이 세상만물이 연기되어 고정불변의 실체란 없고 그저 임시방편으로 개념, 이름을 말로 붙였을 뿐인데, 그러고나니 그 말에 상응하는 실체가 있는 양 착각을 한다는 뜻입니다.


삼유를 구성하는 기본요소들()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실론 섬의 소승불교도들과 인도 본토에서 이 <능가경>을 들고 쳐들어온 대승불교도들은 서로 엎치락 뒤치락 처절한 싸움을 벌려 상대방 책을 불사르고 추방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스승 붓다의 연기(연기) 가르침의 해석을 둘러싸고 제자들이 서로를 해치는 건 연기의 가르침에 정반대되는 행동입니다.


조선 말엽 내노라는 성리학자이자 권력자인 송시열은 <중용(中庸)>에 대한 주자의 해석에 반론을 편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敵)으로 몰았다는데 이 역시 하늘의 명을 따르라는 중용의 가르침과는 영 거리가 멉니다.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을 넘어선, 그리고 있슴과 없슴을 넘어선, 그리하여 어떤 모양을 띔 없이 그저 자비와 사랑으로 나타나는 이치(理致)’를 일컬어, 각 문화마다 혹은 하느님이라, 혹은 공()이요 부처라, 혹은 도()요 하늘()이요 역() 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그러니 그 이라는 손가락 말고,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 곧 사랑과 자비를 바라보고 이를 행할 일입니다.


그래서 노자는 간단히 행불언지교(行不言之敎)”.말없는 가르침을 행하라 했습니다.

말은 우리의 소통 수단이요, 우리가 본디 하나로 묶여 있슴을 보여 주는 징표입니다.

우리 필부필부들을 이끌고 가르치는 정치인, 종교인, 선생님들은 말 가지고 먹고 삽니다. 그렇긴 하지만 말은 그저 제대로 행함으로 이끄는 방편일 따름이니, 정치인이 아무리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말을 하여도, 신부님이 아무리 거룩한 기도의 말씀을 하여도, 스님이 아무리 도를 깨쳤노라 오도송을 읊어도, 나는 그 거미줄에 걸리지 아니하고 그 분들의 행실을 볼 따름입니다.


김 형 태 변호사(공동선 발행인)

<공동선>. 5, 6월호 머리글입니다.

중세 종교 그림들의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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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술작품의수난사>, <프란츠1세 그림> 며칠전 책장을 정리하다가 재미있는 책한권을 발견했는데, 1959년 뒤셀도르프에서 출간된 책이다. 명화에 얽힌 뒷얘기를 1894년에 출생한 프랑크아르나가 집필한 책인데, 당시에 12개국어로 번역될 정도로 굉장한 인기를 끌었단다. 이렇게 오래된 책이니, 어쩜 그사이 한국에도 잘알려져있을지도 모른다. 여러분들이 이미 읽었다면 재미로 다시 한번 읽어보시길바란다.

 

 먼저 곁가지로 우리가 잘 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그림에 관한 얘기다. 이그림을 프란츠 1세(1494-1547)가 당시에 4000 Seudi(돈단위)를 주고 구입했다. 우리는 당시의 돈가치를 잘 모르기에 짐작하기 어렵지만, 다행히도 저자가 순은으로 그가치를 밝혀주었는데, 순은 무게 12000키로그람에 해당된단다

 

 당시의 돈단위인 독일 마르크로 표시하면 400 000 라는데, 지금의 유로로는 200 000유로다. 얼마전우리네 뉴스를 보니 한국의 1979년도의 6억이, 지금의 가치로는 300억이라던데…그렇다면 위의 모나리자의 가격은 약 50년전의 마르크(유로) 가치로도 엄청난 돈인데, 약 500년 전에는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임이 틀림없다

 

 그반면에 생각지도못하게 아주 낮은 가격으로 경매된 명화들도 있었다. 1766년 영국에서 예술품경매때, 그 유명한한 스홀바인의 초상화가 단4 Pfund Sterling(돈단위)에, 다비드테니어의그림하나는 고작 12 Schilling(돈단위)에팔렸다고한다. 

 

 당시의 도자기가 경매에 나오는 적어도 50년전의 독일 마르크로 1000마르크(500유로)를 받았다고하는데..이런 유명화가들의 그림이 그때는 정말 단순한 그림종이가 팔리듯 팔려나간듯하다..

 당시 이런 그림들을 사들인 가문은, 자손들이 대대로 분명 부자로 살것임이 틀림이 없을것이다. 만약에 그사이 이런 명화들을 엿으로 바꾸어먹지않았다거나, 귀찮다고 쓰레기통에 버리지만않았더라면…


 본론으로 들어와, 오늘은 르네상스의 한작품을 보면서 얘기를 풀어보도록 하자. 그의 이름은 안토니오코레끼오(Antonio da Correggio:1489-1534)다. 그의 작품중에는 <Linda mitdem Schwan>(<Linda und Schwan>)인데, 번역하면 <오리와 함께 있는 린다> 아니면 그냥 <린다와 오리> 라는뜻이다. 


 암튼 의역을 좀하자면 <오리와 놀고있는 린다>라고보면 되겠다. 바로 아래의 작품이니, 그림을 한번 보고서 다음 얘기로 넘어가자.

 

 이그림이 그려진 연도는 약 1530 년경이다. 1603년 스페인의 루돌프 2세(Rudolf 2: 1552-1612) 황제가 이 그림을 구입했다고한다. 이 그림은 1648년 다시 스톡홀롬으로 몰래 옮겨졌다고한다. 누가? 무엇때문에? 라는설명이 없다. 글맥락에서 사용한 단어로보니 아마도 선물은 아닌듯하고, 누군가가 다른 물건속에 은근 슬쩍끼어서 가져간듯하다.

 

 하지만 후에 크리스티네여왕이 이 그림을 다시 로마로 보낸다. 이렇게 보내진 이 그림은 한장소에있었던것이 아니라, 로마의 여러 귀족들의 손을 거쳤다하니 이집 저집을 마치 발이 있는듯이 많은 여행을했다는거다. 

 

 영화에서 보면 귀족들의 저택 벽에는 명화들이 참 많이 걸려있다. 이그림 역시 이런저런 폼으로 여러 귀족들의 집에서 장식용이 되었을것이다. 문제는 이작품은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것이 아니었고, 상황에 따라서 그림을 변형시키거나 손을 댓다는 사실이다. 

 그예를 들어보자. 역사에서 ‘경건한’ 왕으로 잘 알려진 루드빅히의 손에 들어갔을때다. 그는 이 그림을 보자말자, 윤리도덕적인 이유를 들이대면서 자르기까지했다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는나와있지않다.

 

 하지만이왕의이름에 “경건한” 이라는 부수적인것이 붙는다는것을 생각하면 어느부분인지는 우리가 짐작할수는 있겠다. 바로 요염한 모습의 레나가 오리를 안고있는 이 모습이 퇴폐적으로 보였겠지않겠는가?

 

 그는 레나의 머리를 없애기까지했단다. 너무나 가톨릭 종교의 경건함에 물들었던 그는 이런 그림을외설로 보았던것이 틀림없겠다. 다행하게도 후에 궁중화가인 ChaelesCoypel이 이 그림을 다시 짜맞추고하면서 원형대로 복구했다고한다.

 

 이런 수난당한(?) 그림을 프리드리히대제(1712-1786)가 다시 구입하였고, 1830년 이래로 이 작품은베를린의 박물관에 안착해 잘살고 있다. 아르나우는 자기 저서에서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은 위조품에 대해서다.

 

 사실 이 작품의 3분의 1가량은 몇세기를 지나면서 다른주인을 만날때마다 이런저런 핍박(?)을 당했으나, 이런 작품을 위조품이라는 단정은 못내리겠단다. 하지만 확실하게 말할수있는것은, 이 작가가 1530년경 그릴때 의도했던것과는 약간 달라진 모습일게라는거다

 

 그렇다! 이 그림은 도대체 몇년간의 여행을 했던가? 1530년경에 태어나 1830년 베를린에 안착하기까지는 300년이걸렸다.

 이 그림을 한번 소유해본 이들은 이미 다 죽었지만, 그림은 남아서 동양인인 우리와도 직간접적으로만나고있다.

  

 독일 살았을때의 일이 떠오른다 난 예전에 베를린의 미술관에서 어쩜 이 그림을 보고서도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당시 미술관을 찾았을 때, 온통 나의 관심사는 카스파 프리드리히의 그림에만 집중했기때문에 더? 아는만큼 보이고, 보이는만큼 사랑한다는 말을 이런 상황일때 대입시킬수 있을것이다

 

 그리고 류시화의 책 제목처럼 “지금 알고있는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도 마찬가지일듯하다. 아! 생각하면 할수록 참으로 아쉽다.

 아래는그의작품들입니다.


삶의 잡초 어떻게 관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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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jpg» 픽사베이 제공


정원 가꾸기 단상

 

정원이나 뜰을 가꾸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봄이나 여름철 이런저런 일로 바빠서 잔디에 신경을 쓰지 못하다 보면 어느 새 마당이 엉망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쑥밭이 된다는 말이 있겠는가? 마당을 온통 쑥이 점령해버린다는 것을 두고 하는 말에서 비롯된 표현일 것이다. 여하튼 나도 마당일을 하다 보면 요즘 쑥이란 놈이 정말 번식력이 왕성하고 강인한 것임을 실감하고 있다. 웬만한 잡초는 그냥 손으로 뽑아 버리면 되는데, 쑥은 맨 아랫부분을 한 손으로 단단히 붙잡은 다음 살살 좌우로 약간 흔들고 조심스럽게 뽑아야 뿌리까지 딸려 나온다. 뽑힌 뿌리의 길이에 따라 놀라움과 만족도가 정비례한다. 그나마 이것은 운이 좋은 경우이고 보통은 뿌리는 놔둔 채 포기하기 일쑤다. 쑥 다음으로 고약한놈은 민들레 그리고 망초 순이다. 그 외에도 예쁘고 앙증맞은 노랑, 파랑, 하양 등 각종 색깔의 꽃이 달린 풀들이 엄청 많지만 나는 요것들에게는 비교적 관대한 편이라 운 좋은 놈들은 종종 화를 면하고 목숨을 부지한다. 뽑는 나도 일관성이 없으니 그때의 나의 시간적 여유나 몸 컨디션, 그리고 기분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좌우된다.


사실 우리 인간의 편견 때문이지 쑥, 민들레, 망초에게 무슨 잘 못이 있다고 학대하겠는가? ‘잡초라고 분별해서 차별대우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 한 짓거리라는 생각이 들어 뽑을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고 가벼운 죄책감마저 느끼게 된다. 게다가 요즘은 몇 분 만 일을 해도 허리, 무릎까지 아파와 나이를 탓하곤 한다. 급기야 내년부터는 그나마 6년 동안 유지해 온 마당 관리를 아예 포기 하려고 중대결심을 했다. 남은 길은 두 가지 선택 밖에 없다. 하나는 온갖 풀들이 마음대로 자라도록 놔두고 생명력이 강한 놈들이 지배해도 하는 수 없다는 생각에 관리하지 않고 개입하지 않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정말 마음이 내키기 않지만 약을 뿌리는 잔혹한 방식인데,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채택하기로 결심했다.


자연에 맡기는 전자의 방식은 경제정책으로 말하면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 하고 시장이 작동하는 원리에 맡기는 자유방임주의’(laissez-faire)이다. 또 자식 키우는 일로 말하자면, 부모가 아이들 일에 사사건건 간섭하지 않고 아이들이 커서 철이 들 때까지 지켜보면서 인내로 기다리는 교육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너그러운 교육 정책이다. 실은 자신들도 젊어서는 마찬가지로 자식들에게 엄격했었겠지만 오랜 경험에서 나온 말이니 무시할 수 없다. 나도 할아버지 반열에 들고 보니 이제 좀 알 것 같고, 젊은 시절 아이들에게, 특히 맏이에게 더 많은 기대를 하면서 엄하게 했던 일이 후회되지만, 이미 지나 간 세월을 어찌하겠는가.


정원 관리, 경제 정책, 아이들 키우는 방법 사이에 유사점이 있지만, 중요한 차이점도 간과할 수 없다. 첫째, 친환경-생태주의자들은 대체로 자연계에 대해 개입을 최소화하는 불간섭주의 내지 자유방임주의를 선호하지만, 경제 정책에도 그대로 맞지는 않을 것 같다. 자연은 무한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 인간이 파괴한 질서를 심지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서 강원도 산불 소식이 들려 우리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본래 상태로 회복시키는 놀라운 복원력이 있지만, 파괴된 경제 질서도 그럴지는 의문이다. 더군다나 인간의 탐욕은 자연계의 특정 종이 지닌 지배력과 달리 한이 없고 수많은 동료 인간들에게 극심한 피해와 고통을 안겨준다. 같이 사는 법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막강한 자본력과 기술력을 앞세워 전 세계 시장을 석권하며 심지어 자연계마저도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손상을 입히기 때문에 인간과 자연 모두의 공멸을 걱정할 정도가 되었다.


자식교육은 부모마다 다르겠지만, 역시 강온 양면 정책을 적당히 구사하는 것이 상책이 아닐까 하는 것이 나의 개인적 생각이다. 특히 어머니는 약, 아버지는 강으로 가는 것은 아마도 피해야 할 최악이 아닐까 한다. 차라리 그 반대가 나을 것 같지만 아내와 남편이 보조를 맞추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중도의 지혜를 사회정책, 경제정책에도 적용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이며, 이것도 물론 일리가 없지는 않다. 다만 우리나라의 경우, ‘중도라 해도 지금까지는 자유방임주의, 시장주의의 장점보다는 정경유착이나 관주도의 성장정책 같은 시정되어야 할 단점이 더 많았고 그 한계에 봉착했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근심 걱정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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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jpg» 픽사베이 제공


믿는 것 만큼 우리가 행복하고, 믿지 않는 만큼 불행함을 우리는 세상살이에서도, 신앙살이에서도 느끼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을 새롭게 뜬다면, 우리는 부활의 삶을 온전히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6,47)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형성되려면, 서로 상호성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초대하시고, 우리는 진리를 갈구하는 열망으로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하는 상호성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돌보아 주시고 우리를 당신 제자로 부르시어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 하십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산 위의 마을에서 함께 지내게 된 이유, 계기가 다양할 것입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그 바탕에 있는 핵심은 우리 인간의 한계성과 삶의 갈증을 느끼며 불멸의 진리와 영원한 생명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은 눈뜨면 대개가 힘겨운 일들 뿐입니다만. 오죽하면 삶은 끔찍한 삶과 비참한 삶, 둘로 나눠진다고 말했겠습니까?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내 앞에 어려운 일 보네
  주님 앞에 이 몸을 맡길 때
  슬픔 없네 두려움 없네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우리 앞에 어려움을 본다는 것은 삶이 그 만큼 끔찍하고, 비참한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런 삶에서 우리가 마냥 근심과 두려움에 떨고만 있을 것인지, 아니면 믿음을 회복하고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맡길 것인지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성가의 가사처럼 우리는 당연히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겨야 합니다.

  성경에 걱정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는 단어가 1000번 이상 나온다고 합니다. 
  걱정과 두려움은 우리의 신앙을 부식시킵니다. 
  걱정과 두려움은 하느님 나라 건설에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걱정과 두려워하는 마음에는 믿음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걱정과 두려워하는 마음은 불신앙과 같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 대부분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것은 내일에 대한 걱정 때문에, 두려움 때문에 , 하느님께 자기자신을 온전히 의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탄의 무기 중에 탐욕, 험담, 교만 보다도 더 강력한 무기는 근심걱정이라고 합니다.

 이 글은 산위의마을 공동체 홈페잊(http://www.sanimal.org/)에 실린 수행담입니다.


왜 가장 중요한 나에 대해 생각안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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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공장이 지난 3월부터 5월말까지 매주말 토~일요일 1박2일간 강원도 홍천수련원에서 20시간을 독방에서 온전히 자신만을 마주하는 성찰 프로젝트 참여자들이 행복공장 홈페이지에 소감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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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 대해 이렇게 오래 상각해 본적이 없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가, 내가 살아오면서 어떤 기억들을 간직 했는가. 나는 무엇에 행복을 느끼는가. 나의 몸, 생각들을 깊게 들여다 본적이 있는가. 20시간 독방에서 나를 그리고 나를 중심으로 한 관계들을 생각해 보았다. 답을 내릴 수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답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온전히 나를, 나만을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20시간이 지나간 지금, 이제야 내가 나를 조금은 알게 된 것 같다. 물론 잠도 많이 자고 너무 잘 쉬었다. 근데 배가 좀 고팠어요..ㅎㅎ


끝났다. 무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주체할 수 없었던 힘든 시간과 답답하게만 느껴졌던 너무나 단촐 한 좁은 공간. 조금씩 익숙해지는 이 시간과 공간과의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이제야 익숙해져 가는데, 이제야 편안해져 가는데.. 이 공간에서 가졌던 시간과 12일 동안 지냈던 이 공간은 나에게 그리움으로 남을 것이다. 행복공장과 함께 했던 이 릴레이 성찰 프로젝가 내 삶에 힘을 줄 것이다. 마음의 편화와 여유로움을 찾아 갑니다.


오랜만에 휴식다운 휴식을 가질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나를 정리해보는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출소를 하면 한결 편한 마음으로 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밤하늘 쏟아질듯 한 별도 좋았고, 아침 상쾌한 공기도 좋았습니다.


삼촌에게 릴레이 성찰독방 24시간이란 프로그램을 소개받고 별로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여기 오면 핸드폰도 컴퓨터도 TV도 아무것도 없이 핸드폰을 끼고 사는 내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라는 의문과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렇게 걱정을 많이 했던 것과는 달리 릴레이 성찰 24시간동안 핸드폰, 컴퓨터 등 전자기기가 없어서 불안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던 것 같아서 너무 좋았고, 그리 인해 좀 더 온전한 나와 대면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비록 뭔가 정리가 되고 결심이 선 것은 아니지만, 나의 내면에 그런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가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전반적으로 좋았습니다. 자기소개 시간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이름표도 싫어요^^. 소감문도 의무 작성이 아니라는 점이 표기되고 쓰는 이가 조언하는 차원에서 작성케 하면 좋겠습니다. 절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선택적 설명 듣기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종교가 없는 저로서는 다소 신경이 쓰입니다. 좋은 기회 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랜만에 절을 하니 뚝!! 여기저기 몸이 비명을 지릅니다. 역시 몸을 사용해야 어디가 문제인지 알 수 있나봅니다. 가만히 앉아 있으니 오만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감정도 생기고 마음이 어지럽습니다. 몸과 달리 마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무엇이 문제인지 들여다 볼 틈이 생기나봅니다. 몸은 움직이되 마음은 내려놓기 위해서 절 명상에 좀 더 힘써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살펴서 좀 더 현명하게 대화도 하고 감정표현도 하리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창문 건너 보이는 산에 무리지은 소나무들. 생존을 위해 무리 짓는 게 자연의 생리인 모양입니다. 사람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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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혼자 독방에서 잘 견딜 수 있을까 걱정도 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두려움 보다는 마음의 편안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자기가 어떻게 생각하고 사물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결절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여유가 없던 현실에서 짧은 시간이나마 나를 되돌아보고, 주위를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된 것에 대하여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행복공장 홍천수련원에서의 프로그램을 이미 여러 번 참가했기 때문에 솔직히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12일 쉬는 시간으로 몸과 마음을 힐링 하는 정도로 생각했다. 아름다운 자연 따스한 봄날이 주는 선물 또한 감사했다. 심지어 오는 길에 봄볕이 너무 좋아 딴 데 가고 싶은 충동도 느꼈다. 몸이 많이 피곤한 상태인지라 몇 시간은 잠을 이기지 못한 것 같다. 꿈에서 그동안 내가 힘들게 한 일이 나타나 깊게 잘 수도 없었다. 몸이 여기저기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역시 108배는 나의 몸과 연혼을 깨우는 귀한 힘이 있다. 집에 가서 이제부터 꼭 무슨 일이 있어도 108배를 하기로 결심했다. 워크북을 하나씩 하는데, 80세의 내가 현재에 나에게 편지하는 부분에서 글을 쓰면서 눈물이 쏟아져 나와 주체할 수 없었다.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동안의 후회와 감사와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생각나며 정말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이 글을 쓰면서도 계속 눈물이 흐른다. 이제 나가서는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을 더 많이 사랑하고 아껴주고 품을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어떤 상황이 주어져도 기쁘게 받아들이며 불편하지 않으며 더 많이 감사를 찾을 수 있는 내가 되었으면 한다. 24시간 릴레이 성찰에 참여할 수 있어 너무 소중한 체험 감사한다.


요즈음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나 또한 하루를 나만을 위해 보내기는 매우 힘들다. 맞벌이로 주말만 기다리는 아이들을 외면하기 또한 심적으로 매우 부담스럽다. 그런 와중에 여기를 오게 되었다. 물론 아이들이 아직도 눈에 밟힌다. 사실 학기 초로 이것저것 신경 쓸 일도 많고 아이들이 적응을 잘 하는지 걱정도 된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회사가 끝나고 집에 오면 저녁을 차리고 숙제를 봐 주기 급급해 아이들의 일상을 묻기도 힘들다. 또한 나도 사실 피곤하다. 그러는 와중 기온차가 커서 그런지 감기까지..하하.. 여기서는 정말 오로지 나를 위해 약을 먹고 쉬고 잠을 잤다. 밥을 차려줘야 된다는 등의 신경 쓸 일이 없어 나만을 위한 시간을 보냈다. 몸도 괜찮아 지니 명상을 할 수도 차를 느긋하게 마실 여유도 생겨 마음의 휴식도 충분히 해서 몸도 마음도 매우 가뿐해 진 것 같다. 이렇게 아무생각 없이 하루를 보내고 쉰 적이 있는지 의문이 생긴다. 나와 같이 지친 우리 신랑도 여기에 와 봤으면 한다. 몸도 마음도 쉬었다 가길 소망한다.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온 세월을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창밖의 경치를 바라보면서 앞으로 남은 삶에 대한 여러 가지 다짐도 해봅니다. 이 좋은 곳에 쓸데없는 마음의 짐은 좀 내려놓고 가겠습니다. 108배 올리고 먹는 아침 감사한 마음으로 먹었습니다.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됨에 감사하고, 기회가 되면 다음에 다시 한 번 찾아오겠습니다.


혼자 살아보지 않아서 혼자 여행한 적도 없어서.. 갖고 싶었던 시간이다. 계속해서 생각하기, 생각 멈추기.. 죄를 짓지 않아도 독방에 감금되는 시간이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사춘기 아들에게 권하고 싶다. 20시간이란 시간은 참 짧네. 자기도하고 먹기도 하고, 그 사이 108배도 2번이나 하고 명상도 하고.. 시계 없이 자인의 흐름에 내 몸의 리듬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른 아침 108배로 몸과 마음을 깨우니 좋았다. 그러나 힘든 시간이다. 훈련 안 된 몸과 마음이 아침 먹고 뻗었다!! 도대체 이 안 되어있는 내게는...


실로 오랜만에 온전히 나에게 주어진 20시간의 선물! 귀한 선물을 어떻게 쓸까 잠시 생각하다 깊은 잠에 빠졌네. 얼마가 지났을까 다이어트 하기 딱 좋은 저녁식사, 집에 돌아가서도 실천하고 싶을 정도로 만족스럽게 먹고, 환하지도 어둡지도 않은 창밖 산등성이를 보며 내가 살아온 삶에 누군가가 꼭 상을 주었으면 하고 생각할 때가 있었는데, 오늘 그 상을 받은 것 같은 위로가 되는 그럼 밤이 길게 이어지고 요란한 꿈까지 꾸어 주의를 걱정시켰네. 듬직한 동생덕분에 선물로 주어진 나에 24시간 평생 두고두고 얘기하며 웃고 살 것 같아 감사드립니다.


퇴계는 세속에 물듬이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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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본디 산야의 기질이라.

 고요함을 사랑하지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네.

 시끄려운 것을 좋아함은 진실로 옳지 않고,

 고요함을 좋아하는 것도 하나로 치우치는 것일세.

 그대 큰 길로 가는 사람을 보라!

 서울에 살면서도 구름 낀 산과 같다네.

 의에 편안하고 곧 이것을 실천하여,

 갈 만하면 가고 또한 돌아올 만하면 돌아온다네.

 단지 두려운 것은 쉽게 세속에 물드는 것이니,

 차라리 돈독하고 고요하게 말을 닦으리.


 퇴계 이황의 <화도집음주이십수> 중 5번째 시.

틱낫한은 수행자에게 이것을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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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어갈 때 수행자는 마땅히 자기가 걷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앉아 있을 때 수행자는 마땅히 자기가 앉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틱낫한의 <거기서 그것과 하나 되시게>(나무심는사람 펴냄)에서.

진짜 나는 단순한 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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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체란 대상에 대해 분별하는 무지가 사라진 뒤웨 남아 있는 단순한 의식이며 그것이 바로 진아다. 

 실체는 현상계에 구애받지 않으며 아무런 체(Body)도 가지고 있지 않고 그 안에서 불행이란 찾아볼 수 없다.

 

이 실체가 외면으로 나타난 모습이 바로 침묵인데, 깨달은 사람들은 

그것이 진정한 지혜의 최종적 상태이며 어떠한 것에도 방해받지 않는 상태라고 선언하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라마나 마하리쉬 말, 이호준 옮김, 청화펴냄)에서

정의의 강조보다는 욕심을 줄여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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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絶聖棄智(절성기지)면 民利百倍(민리백배)요 絶仁棄義(절인기의)면 民復孝慈(민복효자)요

絶巧棄利(절교기리)면 盜賊無有(도적무유)니 此三者(차삼자)는 以爲文(이위문)하여 不足(부족)이니라.

故(고)로 令有所屬(영유소속)일진대 見素抱樸(견소포박)하고 少私寡欲(소사과욕)이로다.



재주를 끊고 지혜를 버리면 백성의 이익이 백배가 되고, 인을 끊고 의를 버리면 백성이 효도와 사랑으로 돌아가고, 교를 끊고 이를 버리면 도적이 있을 수 없다. 이 세가지는 글로 부족하다 생각되므로 속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소를 나타내고 박을 품어 사사로움을 적게 하고 욕심을 적게 한다.


[대의]

다스리는 사람이 재주와 지혜를 버리게 되면 백성의 행복과 이익은 백 배로 늘어나고, 인애를 끊고 정의를 버리면, 백성은 잃었던 본래의 자애와 효행으로 돌아가게 된다. 다스리는 사람이 얄팍한 기교를 부리지 않고 욕심을 버리면, 이 세상에 도둑질 같은 범죄는 결코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이 세 가지 얘기로는 생각하는 것을 다 설명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말을 덧붙인다면, 본바탕 그대로의 나를 지켜서 사사로운 감정을 억제하고, 자신을 위한 욕심을 적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재주와 욕심을 완전히 비워버리는 상태, 즉 무지무욕의 상태에서 소사과욕할 것을 역설했다.

노자는 인간의 소박을 무엇보다도 존중하였다. 노자에 잇어 소박이란 물질문명의 허례와 허식을 버리는 것을 의미하고, 인간의 근본적인 자연을 인위적으로 속박하여 후천적으로 왜곡하는 모든 미혹되고 망령된 허구로부터 벗어난 인간의 바람직한 자세를 말한다.


노자가 말하는 소박한 삶에서의 인간의 바람직한 모습은, 문명이나 문화의 혜택을 받지 않고 관념이나 사상 등의 번거로움에서도 벗어난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와 같은 것이다.



<노자 도덕경>(노자 지음, 동양고전연구회 편, 나무의꿈 펴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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