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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탄행복에 꼿힌 문재인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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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탄에서 문재인.jpg» 지난해 7월 부탄에서 트레킹 중인 문재인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은 부탄의 ‘행복 정책’을 도입할 것인가? 부탄과 문 대통령의 각별한 인연을 아는 사람들이 새 정부에 보내는 기대 섞인 질문이다. 

 지난해 7월, 당시 잠룡이던 문 대통령은 본격 대선 레이스를 앞두고 생각을 정리하는 여행을 떠났다. 문 대통령이 택한 여행지는 네팔과 부탄이었다. 그는 부탄에 2주일간 머무르며 체링 톱게 부탄 총리와 카르마 우라 부탄 국민행복위원장을 만났다. 문 대통령은 그들로부터 부탄의 행복정책을 소개받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문 대통령은 귀국하면서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정부가 국민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면, 정부의 존재 가치가 없다.” 부탄 법전에 나오는 글이었다.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지난해 10월, 탄딘 왕추크 부탄 보건부 장관이 ‘답방’ 형식으로 한국을 찾아 문 대통령을 만났다. 부산 롯데호텔에서 열린 두 사람의 대화에 배석한 ‘한-부탄 우호협회장’ 윌리엄 리씨는 “문 대통령께서 ‘민주당이 집권하면 부탄의 행복정책을 도입하겠다’고 그 자리에서 말했다”고 전했다. 

 한국과 부탄은 국교를 맺고 있지만 따로 대사관을 두진 않았다. 대신 ‘한-부탄 우호협회’가 두 나라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사업가와 예술인 등 1200여명이 회원인데, 문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정치인 가운데 처음으로 이 협회에 가입했다.

 특별한 인연은 최근까지 이어졌다. 지난 9일 자정께 당선 확정 직후, 문 대통령과 처음 전화로 대화를 나눈 외국 수반은 체링 톱게 부탄 총리였다. 비공식적 대화이긴 했지만 전통 강국을 두고 소국 정상과 먼저 축하 인사를  나눈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문재인과 체링.jpg» 지난해 7월 부탄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부탄의 체링 톱게 총리. 사진 문재인 페이스북 갈무리


문재인과수상2.jpg» 지난해 7월 부탄정부를 방문해 대담 중인 문재인 대통령. 사진 문재인 페이스북 갈무리


 문 대통령이 부탄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부탄은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부탄은 중국과 인도 사이에 있는 불교국가로 남한의 절반 면적에 75만여명이 사는 소국이다. 그러나 영국 신경제재단(NEF)이 2010년 ‘국민의 97%가 행복한 나라’(전 세계 행복지수 1위)라고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한 나라이기도 하다.

 그 바탕에는 2008년 국왕 직속으로 만들어진 부탄 ‘국민총행복위원회’가 있다. 부탄은 최빈국이었던 1972년부터 중진국 정도의 성장을 이룬 지금까지 국내총생산(GDP)이 아니라 국민총행복(GNH·Gross National Happiness)을 국정지표로 삼고 있다. 한 나라의 발전은 국민이 얼마나 행복한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부탄의 국정철학이다. 


 이에 맞춰 국민총행복 증진을 위한 5개년 계획을 주기적으로 수립하여 집행해왔다. ‘행복정책’의 기본은 △공평하면서도 높은 수준의 경제성장을 이루고 △이웃·동물·자연까지 행복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생태계를 보전하며 △진보적 사회에서도 지속가능하도록 전통적 가치와 제도를 진화시키고 △대중의 참여와 요구를 잘 수용하고 책임지는 효율적이고도 투명한 정부를 구성하는 등 4가지 축으로 이뤄져 있다. 

 이에 기초해 9개 영역 33개 지표를 마련해 국민행복지수를 측정하고 이를 정책에 반영한다. 9개 영역은 생활수준, 심리적 웰빙, 건강, 시간 사용, 교육, 문화적 다양성, 좋은 정부, 공동체 활력, 생태학적 다양성과 회복력 등이다. 이런 요소들이 골고루 갖춰져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후 국민행복 조사에서 ‘행복하지 않은 상태’로 드러난 이들에게 초점을 두고 맞춤형 정책을 펼친다.


 1907년 통일 왕국을 수립한 부탄은 원래 절대군주국이었지만, 4대왕 지그메 싱기에 왕추크가 “한 사람이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므로 국민들이 자신의 힘으로 결정하는 것이 좋다”며 군주제를 폐지하고 민주적 입헌군주제로 전환했다. ‘국민행복지수’를 도입한 것도 왕추크 왕이었다. 이후 행복지수는 세계적으로 번져가고 있다. 2006년 미국이 ‘국민행복지수’ 개념을 일부 받아들였고, 지난해에는 타이 정부가 ‘국민행복지수센터’를 설립했으며, 아랍에미리트도 이 정책을 도입해 두바이 정부에 행복부 장관을 두고 있다.



문재인 부탄.jpg» 지난해 10월 부산에서 만난 문재인 대통령과 탄틴 왕추쿠 부탄 보건부 장관(왼쪽)과 윌리엄 리 한부탄우호협회 회장. 사진 윌리엄 리 제공


 지난 2015년 부탄에서 2개월간 체류하며 행복정책을 연구하고 돌아와 <부탄 행복의 비밀>이란 책을 펴낸 박진도(65) 충남대 명예교수는 “이미 저성장 시대에 접어들어 성장 정책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격차사회가 된 한국도 국민행복을 국가정책의 기본 이념으로 삼을 때가 왔다”며 “국민행복을 기획하고 일자리·국가교육·농어촌 등 각종위원회를 조정할 수 있는 국민총행복위원회를 설치해 국정 운영의 나침판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잠룡 시절부터 문 대통령이 부탄의 ‘행복정책’에 큰 관심을 보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를 새 정부가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는 아직 밝혀진 바 없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행복위원회 설치 등에 대해) 아직 아는 바 없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의 선거 캠프에서 일했던 핵심 관계자는 “정책 결정 과정에서 개인적 이익과 효율만 따지는 것을 넘어 사회적 가치, 즉 ‘행복’을 염두에 두자는 것은 경제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성장’이 아닌 ‘행복’이 정책의 기본 방향으로 자리잡는 일이 한국에서도 가능할 것인가. 



일하기싫으면 안해도 되는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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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공장-.jpg» 도시락을 배달해야할 아침 9시가 다가오자 바쁘게 도시락을 담고 있는 애즈원사람들


도시락쉼.jpg» 일하는 옆에서 여유있게 휴식을 즐기는 애즈원 사람들


배달차들.jpg» 어머니도시락을 배달하는 승합차들


가게앞.jpg» 상하도 명령도 지시도 없는 회사 어머니도시락에 대해 설명하는 하야시 레이코



 50명이 일하는 회사가 있다고 하자 회사에서는 50명이 똑같이 8시간 노동을 하는  아니다누구든 하고 싶은 만큼만 일한다일하는 시간이 많다고 월급이 많은 것도 아니다하기 싫으면 언제든 집에서  수가 있다자기가 하기 싫으면 일하지 않아도 뭐라는 사람이 없다 회사의 가장  특징은 아무도 명령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여기에도 사장은 있다그러나  사장은 직책의 하나일  다른 동료들 위에 군림하는 자리가 아니다.


 과연 이런 ‘말도  되는’ 회사가 존립할  있을까특히 이렇게 명령과 지시가 없이도 조직이 굴러갈  있을까일하고 싶으면 일하고 하고 싶으면  해도 성과를 올리는  가능할까.

 이런 질문에 ‘라고 말하는 회사가 있다애즈원의 ‘어머니 도시락이다이들이 별나라에서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이들도 자본주의 시스템대로 작동하는 일본의 중소도시에서 회사를 꾸려가고 있다.


 공동체 생활을 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모두 ‘새로운 이상사회 꿈꾸지만현실은 ‘무엇을 해서 먹고살아야 하느냐 일차적 관건이다야마기시공동체에서 2000년에 나온 애즈원 초기 멤버들도 ‘먹고사니즘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면서 시행착오를 거쳤다밥줄을 해결할 거리를 찾지 못하다가 2005  시작해 지금은 연간 우리 돈으로 10억원가량을 벌어들여 스즈카의 이상실험을 가능하게 해주고 있는  ‘어머니 도시락이다.


 ‘어머니 도시락 아침 7시쯤 찾아가봤다도시락 가게 앞엔 승합차 12대가 나란히  있다하루 평균 점심 도시락 900 저녁 도시락 200 개를 공급하는 배달차다  개라도 배달해준다.


 가게엔 다양한 도시락들이 전시돼 있다안쪽은 도시락 공장이다새벽 4 반부터 밥을 하고 반찬을 만들고, 6 반부터 도시락에 담기 시작한다배달이 시작되는 9시가 다가오면서 라인에선 예닐곱 명이 부지런히 도시락을 담고 있다 한켠에선 서너 명이 의자에 걸터앉아 쉬고 있다싸다  햄과 계란말이를 먹으며 허기도 때운다부지런히 손을 놀리는 이들과 휴식을 즐기는 사람들이 한공간에 섞여 이채롭다.

 

일하고 싶은 만큼 하라는 회사

하기 싫으면 안해도 되는 회사

상하위계규율명령도 없는 일터

사장도 책임과 권한 없는 직책일 

사장은 직원들 고충 많이 경청하는 자리


실수해도 화내고 질책하기보다 위로

일터에서 자기실현하게 도와

일터를 놀이터로 만들어가는 노인들

애즈원에서 걱정 놓는 유학생들



식사.jpg» 식사하며 마음을 나누고있는 애즈원의 한일 유학생들

 

준효농장.jpg» 농장에서 포장중인 한국인 유학생 진준효씨



해먹1.jpg» 사토야마 숲에서 해먹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있는 다카사키 히로시


 ‘어머니 도시락’ 멤버는 모두 60 정도다. 20대부터 70대까지 연령대도 다양하다그들 모두가 날마다 나오는 것은 아니다주문량에 따라 20명이 일할 때도 있고 30명이  때도 있다이곳에서도 주문이 많으면 ‘알바 쓰기도 한다. ‘알바들에게는 수당을 준다그러나 스즈카 멤버들의 대부분은 따로 급료를 받지 않는다장부상으로는 급료가 있지만급료는 스즈카의 ‘오피스 들어간다오피스에서 돈을 관리한다어떻게 그런  가능하냐는 질문에 그들은 ‘ 가족끼리는  주머니를 차는  가능한데 사람이   많아진다고 그게 불가능하라는 법이 있느냐 되묻는다급료가 없을  아니라 상하 위계와 명령도 없는 회사에서 어떻게 주문량을 차질 없이 채울  있는지 불가사의하다.


 이곳 사장은 기시나미 (40)동글동글하게 ‘넉살 좋아 보이는’ 류는 이곳에서 ‘능력자 통한다그러나 진짜 능력은 그가 능력을 빙자해 권력을 쥐지 않는다는  있다그에게 물었다.


 -사장이란 책임과 권한을 지닌 자리 아닌가.

 “그냥 역할일 뿐이다우리는 서로 역할을 나누고 있을  상하가 아니다.”

 -명령이나 정해진 규율도 없이 어떻게 매일 1천여 개의 도시락을 차질 없이 만들어 배달하나.

 “규율이 없이도 지금까지 하고 있다.”

 -아무래도 각자는 부담을 가지고 있을  같다만약 어린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엄마는 아침에 이곳에  형편이  되는데도 말도 못하고 억지로 나와야 하는 상황이 되지 않겠는가.

 “내가 쉬고 싶을  쉬면 다른 사람이 화를 낼지 모른다거나 폐를 끼친다고 두려워해 얘기조차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얘기를  들어주는  사장이란 자리다일단 꺼내놓고 이야기하다 보면 처음엔 무리라고 생각되던 것들도 의외로 쉽게 해결되곤 한다.”


 이들의 목표가 회사의 성과를 내는  아니라 ‘행복이라는 것을 간과해버리면 이들의 방식을 이해할 방도가 없다.


 이들이  잘해내는 것은 아니다실수를 하는 사람들도 있게 마련이다최근엔 오후 430분쯤 100개의 도시락을 6시까지 배달해 달라는 주문이 들어왔다배달차가 현장에 530분에 도착했는데도시락을 차에서 내리다 넘어져 30개의 도시락이 땅바닥에 쏟아져버렸다도시락 가게는 뒤처리까지 끝나 모두 퇴근한 뒤였다남은 재료도 없었다일단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자 30 정도는  기다려줄  있다는 답이 왔다에스엔에스를 통해 ‘멤버들에게 비상상황이 전해졌다그러자 멤버들은 각자 집에서 저녁용으로 준비중이던 밥과 재료들을 가지고 가게에 모여들었다그래서 뚝딱 30개의 도시락을 만들어냈다가장 운전을 잘하는 사람이 20 만에 배달을 완료해 약속을 지켰다.

 

 ‘어머니 도시락에서 일하는 하야시 레이코(47) “실수하는 사람에게 비난하거나 화내지 않고여러 명이 ‘괜찮니라고 물어주었다 “비록 실수는 있었지만 함께 힘을 모아 이렇게 해내니 꽤나 재미가 있다고  좋아했다 웃었다.


 하지만 눈치를 보는 것과 배려의 경계는 모호하다사키쿠보 유코(26) 6개월  기시나미 류의 부인인 도모코로부터 “금요일  ‘조이 지킬 사람을 찾아보는데모두가 어렵다는데 유코는 사정이 어때?”라는 말을 들었다애즈원의 본부 격인 ‘스즈카문화센터’ 안에 있는 ‘조이 애즈원 사람들이 무료로 가져다 먹을  있는 식료품가정용품 등이 있는 가게다그런데 ‘불금 모두 가족과 보내고 싶어서 지원자가 없어 미혼녀인 그에게까지 청이 들어온 것이다아침엔 도시락 공장에서 일하는 유코도 금요일엔 데이트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도모코의 물음에 ‘그렇게 하겠다 했다유코는 “한번은 도시락 공장에서  사장에게 그런 애기를 했더니, ‘유코의 마음이 당시 어땠는지  얘기해보면 좋겠다 제안해 솔직하게  털어놓다 보니 마음이  개운해지고 평안해졌다 말했다.


 강요하지 않는 자세를  보여준 이는 호스트를 맡은 이치가와 노리카즈(58)였다그는 이곳 핵심 멤버로 활동한  10년이 됐지만 그의 부인은 인근에 살면서도  번도 애즈원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는데도 참여를 강요하지 않았다.


 세상적인 성공 출세를 지향하는 것과는 다르지만애즈원도 자기실현의 장이다교외에 대형마트가 버려둔 땅을 빌려 애즈원이 20 종류의 농작물을 가꾸는 농장 초입엔 특이한 과일인 ‘용과’ 비닐하우스가 있다 용과는 쓰지야 데쓰오(73)   과일을 길러보고 싶다고 해서 시작한 것이다.

 

스즈카 시내에서 차로 20 가는 야산인 ‘사토야마 애즈원다운 상상이 펼쳐지고 있었다전통적인 방식으로 숯을 굽는 숯가마가 있고  곁에 장작더미와 오두막이 있다나무를 좋아하는 다카사키 히로시(68) 스즈키 에이지(68) 등이 야산을 빌려서 숯가마를 만들었다히로시는 “우리들의 놀이터라고 했다숯가마 옆엔  나무에 그네와 ‘해먹 매달아놓아 그네와 해먹을 타며 휴식을 취할  있게 했다그러자 숲체험을 하고 싶은 아이들이 체험학습을 겸해 찾아오기 시작했다숨바꼭질을 하고 숯가마도 구경하고 나면 오두막에 설치한 ‘주문을 받지 않는 식당에서 주문하지 않아도 라면 등을 끓여주니 아이들의 눈이 반짝이지 않을  없다숲길을 200미터쯤 걷다 보면 우리나라 산골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다랑논들이 있고 위로 장난꾸러기 노인들이 만든 나무다리가 이어진다나무다리 중간엔 멋들어진 정자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들이 이곳에서 하는  이렇게 뭔가를 설치하는 하드웨어만이 아니다. 60살이 넘은  남자가 함께 일하다 보니 의견이 달라 삐꺽거릴 때도 있다그러면 이들은 ‘사이엔즈’(과학적 탐구)식의 대화를 하며 스스로에게도 질문을 던진다. ‘의견이 다르다고  서로 멀어져야 하지’, ‘다퉈도 속마음은   가까워지고 싶다는  아닐까’.  덕에  노인이 이제   사이좋게재밌게  숲속에 동화세계를 만들어갈  있게 됐다.


 애즈원엔 한국에서  유학생도 3명이 있었다학교로 가는 유학생들과 달리 애즈원 유학생들은 사이엔즈연구소의 자아탐구 프로그램들에도 참여하지만일과 일상을 함께 하는 데서  많이 배우고 깨닫는다.

 

이곳 유학생  최고참인 박진순(38)씨는 26살에 늦깎이로 교육대학에 들어가 초등학교 교사를 했다. ‘ 좋다 교사를 때려치우고 삶을 찾아나서자 가족들의 반대가 컸다그는 “ 상대가 ( 삶의방해꾼이라고 생각했는데내가 그런 생각의 족쇄를 차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해맑게 웃었다서울 성미산학교에서 11년간 교사를  백흥미(35)씨는 “그동안 알아왔던 종교적 진리가 실제로 이해되는 느낌이라고 했다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진준효(36)씨는 밥상을 차려놔도 누군가가 먹으라고 얘기하기 전에 숟가락도 들지 못할 만큼 내성적이었다그는 “위계나 명령이 없는 일터에서 지내면서 서로 상의하며 자체보다 중요한  뭔지 알아가고 있다 말했다그는  “아직 마음을  열지 못했고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새로운 삶을 살아보고 싶다 했다.


 애즈원엔 일본의 다른 지방에서  유학생 3명도 있다 가운데 나고야시 수도국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다카하지 고지(30) “자기 소유에만 집착해 살아가는자본주의 사회와는 뭔가 다른 세계를 찾아보고 싶어 3년간 애즈원을 오가다가 이곳에서 뭔가 가능성을 엿볼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했다그는 “공무원을 그만두자 부모님의 반대가 컸고 실은 나도 걱정이 컸는데저축이 있는 나와 달리 저축도   없으면서 걱정 없이  살아가는 이곳 사람들을 보면서 ‘걱정스런  조금씩 달라져가고 있다 말했다.


 스즈카(일본)/·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한강과 함께 흐르는 문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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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호교회.jpg» 경기도 양평 문호교회. 북한강이 흐르는 것처럼 묘사. 이근복 그림

 

양수리(두물머리)를 지날 때면 이현주 목사님의 시 우리가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가 떠오릅니다. 제가 혼인식에서 자주 인용하는 시입니다.


“...... 남한강은 남에서 흐르고 / 북한강은 북에서 흐르다가

흐르다가 두물머리 너른 들에서 / 남한강은 남을 버리고 / 북한강은 북을 버리고

아아, 두물머리 너른 들에서 / 한강 되어 흐르는데

아름다운 사람아,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는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

 

문호교회가 자리잡고 있는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汶湖里)더러울 문으로, 먹물로 갈아 강물이 더러워질 정도로 공부하는 선비가 많았다는 데서 유래했답니다. 뱃길이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던 조선시대에 경성으로 진입하는 관문으로 번성하여 작은 서울로 불렸다니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1905년에 설립된 문호교회는 60년이 넘은 옛 예배당을 보존하고 있는데 벽과 축대는 돌로 되어 있습니다. 한국전쟁으로 전소된 교회를 건축할 때 교인들은 물론 주민들도 합세하여 북한강 언저리의 돌들을 옮겨온 것입니다. 그렇게 한 돌 한 돌을 옮겨지어서 이름을 한돌성전이라고 부릅니다.

문호교회는 19193.1운동을 비롯하여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고, 학당을 세우고 모임터가 되어 지역사회에서 큰 역할을 하였으니, 교회에 대한 주민의 사랑이 예배당 건축에 표현된 것입니다. 교회를 닮았는지 옛 예배당 앞의 큰 상수리나무도 가을이면 많은 열매로 주민들에게 유익함이 된다고 합니다.


문호교회에서 예배드린 일요일, 예배당 안은 생기가 넘쳤고 아이들의 조잘거리는 소리가 참 정겨웠습니다. 그날 마을 만들기를 하는 지역활동가 두 분이 찾아온 것을 지켜보며 교회의 공공성이 소중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첫 번째 올리는 교회가 고민되었습니다. 교회는 지역사회를 섬기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터라, 주민들의 사랑을 받는 소박한 문호교회를 그리게 되었습니다.

마을을 따뜻하게 품으려는 문호교회를 생각하며, 제 그림 아래에 자신을 포기하여 한강이 되려는 북한강이 마치 교회 앞을 흐르는 것처럼 그렸습니다.

 

잡초 보기를 너그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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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지난번 길희성교수의 정원가꾸기 글을 보고, 캐나다에 사는 교포가 길 교수에게 보내온 글이다.




-잡초.jpg

길 교수님께,
좋은 글 고맙게,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  저는 40 년 이상 영어권 캐나다에서 살고 있는, 이제는 오랜 직장 생활에서 은퇴하여 딸네, 아들네의 어린것들의 재롱에 푹 빠진 할머니랍니다.

"... 정말 마음이 내키기 않지만 약을 뿌리는 잔혹한 방식인데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채택하기로 결심했다."라는 부분을 읽고서, 외람되지만 이메일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잔디밭 곱게 가꾸기에 일생을 바칠 것 같이 보이는 이곳 사람들도 잔디에 약 뿌리는 게 사람이나 동물에 극히 해롭다는 것이 오래 전에 알려진 후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끈질긴 노력 덕분에 정부에서 법으로 약 뿌리는 것을 금하고 약을 팔지도 못하게 하여, 잡초 보기를 너그러이 하고 있습니다.  

약 뿌리기를 금지하는 법은 개인 집이나 공원 등의 공공장소에 다 적용되는 것이지요.  모든 것이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잔디에 물 주는 것도 금하는 지역이 있는데, 제가 사는 동네에서는 물 주기를 금하든 않든 잔디에 물 주는 집을 본 지가 30 년은 넘은 것 같습니다.  날이 가물어 잔디가 거의 죽어도 물을주지 않았더니 그 다음 봄에 잔디가 오히려 더 튼튼히 자라곤 하더군요.  호수가 많아 물이 흔한 캐나다에서 잔디에 물을 주지 말라는 것은 정수 과정에서 전기를 많이 쓰게 되니 물을 아껴서 결국 에너지를 아끼라는 것이지요.  

토론토에서는(아마 다른 지역에서도) 자기 마당의 나무도 까다로운 시 정부 규정 때문에 마음대로 자르지 못할 정도로 나무를 많이 심고 보호하게 하는 등,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태도가 퍼져 있어, 자연을 좋아하는 저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에는 저의 집을 포함하여 낡은 집(백 년이 가깝거나 넘은 집들)이 있어 너무 낡은 집은 허물고 새로 짓는 경우가 꽤 있는데, 제가 산보하며 늘 보는 재미있는 모양의 집이 있답니다.

낡아 허문 집보다 더 큰 새 집을 지을 때 법 때문에(아니면 저처럼 법이 없어도 그랬을 것 같이) 마당의 큰 나무를 비켜 가며 집 디자인을 한 집이지요.  보통 직사각형의 형태를 가진 집이 많지만, 이 집은 나무가 있는 쪽의 벽이 반달 모양으로 휘어 들어가게 디자인을 할 수밖에 없어, 집 모양이 꼭 '한 입 베어 문 쌘드위치'같답니다.   

저도 해마다 '잡초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달려드는 척하지만, 민들레를 비롯해 이름도 모르는 잡초들이 마당을 점령해 저는 늘 'losing battle'에 처해 있지요.  마당이 친구들네 것보다는 넒은 편이어서 부추, 쑥, 참나물 등 '자기 마당에서는 키우기 싫지만 얻어 먹기는 대환영하는'것들을 친구들한테 해마다 가져다 줍니다.

아, 말이 많았네요.  저는 은퇴한 후에도 백세가 가까운, 치매 증세가 있는 어머님을 돌봐 드리고, 사위와 며느리가 한국계 사람들이 아니고 보니 어린것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 위해 어린것들 돌봐 주기를 자청하는 등의 이유로 나날의 생활이 바빠 고국 소식 접하는 일에 게을렀는데, 2014년 세월호 소식을 듣고서는 말로 나타내기 어려운 충격을 받아 전보다 자주 인터넷으로 고국 소식을 읽습니다.  덕분에 한국 사회의 이모저모를 좀 더 깊이 알게 되고 좋은 글도 읽게 되어 기계치인 제가 인터넷에 대해 고마워하지 않을 수 없네요. 

정원 가꾸기를 즐기시기 바라며, 외람된 글 이만 줄입니다.  늘 건강히, 평안히 지내시며 계속해서 좋은 글 써 주시길 빕니다.

임혜영 드림            

부탄 행복명상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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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탄1.jpg-부탄2.jpg-부탄3.jpg-부탄4.jpg-부탄5.jpg


 문재인 대통령이 잠룡시절이던 지난해 7월 2주동안 방문해 감동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 히말라야의 소국 부탄국민들의 행복을 맛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 선보인다.

 한국부탄우호협회 산하 부탄문화원은 한·부탄 수교 30돌을 맞아 부탄행복아카데미를 개원하고, 그 첫번째 행사로 ‘부탄행복명상지도사 과정’을 연다.


 이 프로그램은 오는 24일부터 7월12일까지 8주간 매주 수요일 저녁 7~9시 서울 중구 세종대로21길 서울시청역앞 대한성공회 성당 프란시스코홀에서 진행한다.

 이어 8월18~25일엔 부탄현지에서 ‘국가행복지수워크숍’과 명상체험을 갖고, 수료자에겐 부탄정부의 ‘부탄행복명상 입문지도사’ 자격증을 수여한다.


 부탄행복명상지도사 과정은 전남 보성 대원사의 티벳박물관(관장·현장 스님), 사단법인 자비명상(이사장·마가 스님), 한국부탄우호협회(회장·윌리엄 리), 부탄행복연구소, 부탄국가행복위원회가 공동 주관하며, 대한성공회와 성가수녀원이 후원한다.


 이번 과정은 △행복왕국 부탄 개요(5월24일) △부탄의 정신문화(31일 현장스님) △부탄의 행복명상1-아상을 자르는 명상(6월7일· 윌리엄 리, 마가 스님, 현장 스님) △부탄의 행복명상 2-마음바꾸기 명상(14일·윌리엄 리, 마가 스님, 현장 스님) △국민을 행복하게 하라-국가행복지수(21일·부탄 국가행복위원회 남개왕축) △부탄 문화체험-싱잉볼(소리나는 명상도구) 명상(28일·명상가 천시아씨) △부탄 고승초청 수행지도 특강(7월5일·남닥 린포체) △부탄행복명상 템플스테이 1박2일(12일)로 짜여져 있다.


-스님등.jpg» 부탄행복명상아카데미를 진행할 윌리엄 리, 현장 스님, 마가 스님, 천시아씨(왼쪽부터)



 부탄은 중국과 인도 사이 남한의 절반 면적에 75만여명이 사는 소국이다. 히말라야의 티베트가 중국에, 시킴과 라닥이 인도에, 무스탕이 네팔에 합병되는 상황에서도 유일하게 독립을 지켜왔다.


 히말라야의 소국들처럼 전형적인 최빈국이었던 부탄은 경제성장과 전통을 지키는 독특한 행복 정책으로 현재 중진국 정도로, 국가총생산량지수(GDP)로만 보면, 미미한 수준이다. 그러나 국가총생산량지수(GDP)보다 국민총행복(GNH·Gross National Happiness), 즉 국민이 얼마나 행복한가에 의해 국가 발전 정도를 따져야한다는 독특한 행복정책을 펼쳐왔다. 이에 따라 영국 신경제재단(NEF)이 2010년 ‘국민의 97%가 행복한 나라’(전 세계 행복지수 1위)라고 발표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유럽경제연구소가 2014년 발표한 한국의 행복지수는 104위다. 부탄문화원은 매일 한 명의 청소년이 자살하는 불행한 나라, 말레이시아와 타이보다도 행복지수가 낮은 한국의 암담한 현실에서 부탄의 사례를 통해 행복을 재발견하기 위해 이번 과정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미국 월가에서 12년간 펀드매니저로 일하며 부탄의 금강승불교 수행을 접해 수행자자가된 재미교포인 부탄문화원 윌리엄 리 원장은 “사람들은 흔히 좋은 집에 살거나, 좋은 학교나 직장에 들어가는 등 행복의 조건을 행복과 혼동하는데, 행복은 물질적인 조건들의 집합이 아니라 주관적인 상태를 지칭하는 말”이라며 “부탄은 행복을 기술이라고 하는데, 그 행복의 기술을 익혀서 더욱 더 행복해질 수 있도록 한다”고 말했다. 그는 "부탄의 행복기술은 불자들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초월해 배울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어서 성공회 성당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키로 했다"고 덧붙였다.


 부탄에 두번 다녀온 티벳박물관장 현장 스님은 “부탄은 우리나라보다 국민소득은 크게 뒤떨어지지만, 자국의 교육은 물론 유학생들까지 월90만원 가량 학비와 생활비를 보조해주고, 병이 들어도 국가가 치료해줘 알면 알수록 놀라게 한다”며 “행복명상법 뿐 아니라 ‘살아있는’ 국가 시스템을 배울 기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또 자비명상 이사장 마가 스님은 “부탄의 행복 비결은 Small(작은 것), Slow(느리게), Smile(미소), Simple(단순함) 등 4S로 요약된다”라며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한 이기적 기복 기도에서 벗어나 다른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먼저 자비를 베푸는 일반인들의 자비심과 이를 국가 정책에서 펼치며 솔선수범하는 지도자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도 사회적 행복을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한다”고 설명했다. 


 부탄행복아카데미 참가비는 80만원이며, 부탄현지의 행복워크숍 참가비는 289만원이다. 문의는 부탄문화원 (02)518-5012, 자비명상 (02)3666-0260. 혹은 페이스북 ‘부탄문화원’이나 다음카페 ‘자비명상’으로 하면된다.


욕망과도 합일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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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떠한 조건 속에서도 모든 상황과 합일할 수 있어야 한다. 족첸(티베트의 선禪)에서는 그냥 넘겨버리는 것이 없다. 긍정적인 것만큼 부정적인 것과도 합일해야만 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족첸 수행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또한 모든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만약 모든 것을 해야만 하는 것으로 느낀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제약이 된다.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바깥 세계에 있는 우리 주위의 모든 것들과 합일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우리 내부의 욕망과 합일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성이 난다면, 성냄과 합일하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그저 성이 나서 하는 일들로 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면 성냄의 에너지는 수행에 있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마찬가지로 즐거움과 슬품, 불신과 기대와 같은 모든 감정적 상태, 모든 감정적 장애들과 합일해야 한다. 그리고 깨어있을 때의 상태와 잠자는 상태 안의 모든 것들과 합일해야만 한다. 결국에는 죽음의 순간에, 죽음 그 자체와 합일해야 한다. 이것이 궁극적 합일이며, 이것이 깨달음이다.


 <티베트의 禪 >(족첸. 뗀진 왕걀 린포체 지금, 무명거사 옮김, 달라이라마 추천, 다정거사 김규현 해설. 도서출판 다래헌 펴냄)에서


가고 오지않는 사람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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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김남조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더 기다려 줍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부끄러워할 것은 없습니다.

더 오래 사랑한 것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 없습니다.

요행이 그 능력 우리에게 있어

행할 수 있거든

부디 먼저 사랑하고

많이 사랑하고

더 나중에까지 지켜주는 이 됩시다.


최후의 인간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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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는 작아졌고 그 위에 모든 것을 작아지게 하는 최후의 인간이 올라탄다...

 "우리는 행복을 발견했다"라고 최후의 인간이 말하며 눈을 깜빡인다.... 가끔씩 약간의 독을 먹으면 기분 좋은 꿈을 꾼다. 그리고 마지막에 많은 독을 먹으면 기분 좋게 죽는다.

 노동은 여전히 한다. 오락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오락이 너무 힘들지 않도록 조심한다.  더 이상 가난하지도 부유하지도 않다. 두 가지 모두 지나친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누가 아직도 통치하기를 원하는가? 누가 순종하는가? 그것도 지나친 노력을 요한다.

 목자는 없고 무리는 하나다! 모두가 같은 것을 원하고, 모두가 똑같다...

 "전에는 세상 전체가 미쳤었다"고 가장 세련된 자가 말하며 눈을 깜빡인다...

 하루 종일 누릴 작은 기쁨이 있고 하룻밤을 위한 작은 기쁨이 있다. 그러나 건강은 챙긴다.

 "우리는 행복을 발명했다"고 최후의 인간은 말하고, 눈을 깜박인다."


 니체의 <최후의 인간>에서.


충실을 추구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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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유형 도형.jpg 6유형 - 충실을 추구하는 사람

첫 번째

 

 핵심동기 :지식

자신의 시각 : 신중, 두려움, 선택갈등

타인의 시각 : 성실, 의심, 불안

 

 

6유형은 충실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충실 일러스트 김성미.jpg


 6유형은 충실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친구, 이상, 체제 등 자기가 믿는 신념에 가장 충실한 사람들이지요. 자신보다 자기가 속한 지역사회나 가족을 보호하는데 마음이 더 강합니다. 이들은 책임감이 강하며 협조적이고 순종적이지요.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공동을 위해서 소처럼 열심히 일합니다. 조직에 충성스럽고 헌신을 다하기 때문에 타인에게 신뢰를 얻습니다.

 

6유형은 엄청난 끈기와 꾸준한 노력으로 자신의 목표를 성취합니다. 관계 면에서도 다른 어떤 유형보다 오래 지속시키려 노력합니다.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현상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이들의 신념은 납득할 수 없는 권위가 있을 때 불신과 분노로 반항하고 대항합니다. 어떤 경우라도 이들은 지키고자 하는 신념을 위해 아주 격렬히 싸웁니다.

 

사례 1>앤드류 그로브 인텔의 전 회장 겸 CEO :

- 실리콘밸리의 자율과 창의성 유지를 위해 권위주의와 관료주의를 처절히

배격했다. 시장의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 있도록 직원들의 생각을

자유롭게 전달, 토의할 수 있는 건설적 대립 문화를 만들었다.

- 출처: CEO 리더십 탐구 -

 


신중 econo.jpg형은 신중한 사람입니다

6유형은 차분하고 신중한 사람입니다. 작은 일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조심스럽고 체계적으로 문제에 접근하지요. 문제 해결점인 대비가 충분하다고 느낄 때까지 꼼꼼하게 체크합니다. 이들은 스스로에게 확신이 갈 때 최종 결단을 합니다. 그러나 너무 신중하다보면 결정의 순간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사례 2>6유형 A아줌마 : 이사를 해야 한다면서 십년 째 집만 보러 다니고 있다.

- 남향이 아니어서

- 윤달이 아니어서 안 되겠어요

- 차도로와 너무 가까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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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맨 앞에 나서는 리더보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서 리더를 보필해 주는 것을 더 편안하게 여기지요. 심사숙고의 6유형에게는 미래가 불확실한 주식, 일확천금, 로또보다는 다람쥐처럼 차곡차곡 모으는 저축을 더 선호합니다.

 

사례 3>부동산 투자, 펀드 NO!

티끌 모아 태산 YES!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YES!

보험과 적금 미래를 위해 YES!

 

 

 

 

 

 

 

 

6유형은 조직, , 규칙, 규범 등을 중요시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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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유형은 직장, 가족, 학교 등 자신이 소속되고 자기와 관계된 사람들을 따뜻하게 보살핍니다. 6유형의 부모들은 무척 가정적이며 집안의 대소사도 잘 챙깁니다. 집안 문제에서 사소한 것까지 소홀히 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지 않지요. 전통을 중시하는 6유형은 자신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감을 갖습니다. 이들은 전통적인 방식이 불편하더라도 명분과 믿음이 있다면 그 권위를 순응하고 받아들입니다.

 

무엇보다 안전을 추구하는 6유형은 법, 규칙, 규범 등을 중요시 여깁니다. 분명한 원칙과 기준점이 있다면 뭔가가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테두리가 정해지면 그 안에서 지킬 것인지, 무시할 것인지를 선택하는 게 마음이 편합니다. 6유형은 일정한 형식 안에서 자유를 찾습니다.

 

사례 4> 6유형의 부모 :

- 집안 나들이, 제삿날, 생일, 결혼기념일, 어린이날, 스승의 날 등 챙기기

 

5> 6유형의 운전 습관 :

C:\Users\User\AppData\Local\Temp\DRW000027d84135.gif- 누가 있건 없건, 한밤중에도 대낮에도 신호등 잘 지키기.

제한속도 지키기.

 

 

6유형은 규칙대로 체계가 이루어지는 소속에 속할 때 안정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이들의 직업의 선택도 공무원, 사무직, 군대를 주로 택하지요.

 

하느님에게 화내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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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풀이 상담하는 가톨릭영성심리상담소장 홍성남 신부


그만큼 욕 많이 먹는 사제도 드물다

강론 다음날 전화통에 불이 났다


‘망가진 하느님과 예수’ 일화에

“정신 나간 것 아니냐”는 비난 쏟아져


 욕 먹을 일을 자처하는 건

“우리가 저 위로 못올라가니까

그분을 우리 곁으로 오게 한 것뿐”


엄격하고 경직된 신앙생활에 지쳐

개신교나 불교에 기웃거리기도 했다


40대 중반 ‘심리상담’ 공부 전까진

화를 쌓아놓고만 있던 환자


“꼴도 보기 싫으면 이혼해라”

벼랑 끝 처방도 서슴없이 한다


-1홍성남과예수.jpg» 홍신부가 양을 들쳐업고 가는 예수의 그림을 가리키며, 나는 그렇게 업고가지 못하고 내팽겨쳐 스스로 기어올라게 한다며 웃었다


가톨릭영성심리상담소장 홍성남(63) 신부만큼 욕을 많이 먹는 사제도 드물다. 그의 강의에 등장하는 ‘하느님·예수님’은 완전무결한 분이 아니다. 그의 일화에서는 ‘하느님이 과로사 직전’이거나 ‘개나 소나 천당에 가 천당이 완전히 망가졌다’거나, ‘내가 혼자 살다 죽어 총각귀신이 된 것도 억울한데 나를 힐난하다니’라고 하소연하는 예수까지 등장한다.

 그가 이번에 <챙기고 사세요>(아니무스 펴냄)란 책을 냈다. <풀어야 산다>, <화나면 화내고 힘들 땐 쉬어>에 이은 ‘신부님의 속풀이 처방전’ 시리즈 세 번째 책이다. 그의 책엔 이렇게 ‘망가진 하느님과 예수’의 일화가 가득하다. 그러니 엄숙하고 경건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가톨릭 신자들이 하느님, 예수를 농담 대상으로 삼는 이야기를 선뜻 받아들일 리 없다. 그가 본당 주임으로 있을 때 이런 일화를 들어 강론을 하고 나면 아침부터 전화가 와서 이름도 안 밝힌 채 “왜 복음대로 안 하느냐”, “정신 나간 것 아니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술자리만 찾고 상종도 안하고..

 가톨릭영성심리상담소가 있는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만난 홍 신부는 “왜 그렇게 욕먹을 일을 자처하느냐”는 물음에 “우리가 저 위로 못 올라가니까, 그분을 우리 곁으로 오게 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모든 종교들이 자기 자신을 몰아붙인다. 나를 죽이고 남을 살리는 희생과 헌신을 강조하게 마련이다. 다른 이들도 높은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인간의 마음은 여리고 약한데,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도 기대치를 더 높인다. 그러면 자신은 믿음이 부족하다고 생각돼 숨도 쉬기 어려운 신경증까지 생긴다.”

 홍 신부가 신자들의 속풀이에 발 벗고 나선 것은 40대 중반 ‘심리상담’을 공부하기 전까지 자신이 바로 화를 쌓아놓고만 있던 전형적인 환자였기 때문이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성당에 나간 그는 침묵과 절제된 수도원 수도자가 되기를 꿈꾸며 엄격하고 경직된 신앙생활을 했다. 그런데 죄에 대해 성찰하면 할수록 불안과 세심증이 심해졌다. 예쁜 여자를 쳐다볼 수도 없었다. 겉으로는 열심인 신자였지만 내적으로는 감옥살이였다.

 그는 그 후 성당에 발길을 끊었다. 개신교 교회를 다니기도 하고, 불도를 닦기도 했다. 대학도 ‘돈을 벌어보겠다’며 경제학과를 다녔다. 그러던 중 1980년 크리스마스 때 ‘종교적 환시’를 경험한 뒤 신의 존재를 알고 싶어 가톨릭신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신학을 통해 신 존재를 규명하긴 어려웠다. 그래서 사회주의 혁명가 체 게베라와 해방신학자들의 책을 탐독하면서, 노동동아리 밀알회 활동도 열심히 했다. 마침내 서품을 받고 근무한 1980년대 후반의 명동성당은 시위대와 경찰로 문전성시였다. 그러나 사회변혁에 앞장서 달라는 청년들의 요구를 들어줄 용기도 없었다. 그때 다른 성당으로 발령이 났다. 무기력증이 왔다. 그러자 술자리만 찾고 싫은 사람들과는 상종하기조차 싫었다. 철밥통을 지켜야 하나, 양심상 옷을 벗어야 하나 결단이 필요한 지경이었다. 그때 심리상담을 해주는 가톨릭수도회의 한 신부를 만났다.

 “그 신부님은 ‘신’ 얘기는 하지 않고, 자꾸 ‘내 마음’에 대해 물었다. 얘기를 하다 보니, 그가 나보다 나를 더 잘 알았다. 그게 화도 나고 신기해서, 나도 나에 대해 더 잘 알고 싶어서 심리상담대학원에 들어가 공부를 했다.”



-4-2상담.jpg-4-3홍성남강의.jpg


 “좀 더 평안하게 하느님 만나도 돼”

 그는 심리치료를 공부하면서 “내가 건강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을 돌볼 수 없다는 것과 함께 예수님이야말로 탁월한 상담가이자 심리치료사였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자신을 재발견한 것도 그 공부를 통해서라고 한다. 그는 “앞에 열 명만 있어도 말하는 게 떨려 내성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고 했다. ‘지금은 사람이 많을수록 힘이 나고, 앞에 카메라만 있으면 신나서 떠든다’는 것이다. 자기 욕구의 재발견이었다.

 그가 내담자들의 고통을 공감하고 위로하고 기다려주는 일반적인 상담가와 달리 “남편이 그렇게 꼴도 보기 싫으면 이혼하라”고 벼랑 끝으로 밀어버리는 것도 나름 용기가 생긴 때문이다. 그는 “벼랑 끝에도 아무도 구해줄 사람이 없다고 느껴야만 변하지 좀체 변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며 때로는 극약처방을 쓰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그렇게 되기 전에 평소부터 치료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람들 마음 안에 상처와 콤플렉스가 많은데도 치료받지 못한다. 콤플렉스가 누적되면 폭력적이 된다. 어려서 상처에서 피가 철철 나는데 아무도 그 피를 안 닦아줘 지금도 피를 흘린 채 살고 있다면 정신이 건강할 수 없다.”

 그는 “화를 쌓아놓지 말고 그때그때 해소하라”며 “그 대상이 하느님이어도 괜찮다”고 한다.

 “카를 구스타프 융은 목사인 아버지가 열성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데도 신을 무서워하고 우울한 것을 보면서 그 고통을 덜어주려 심리학 공부를 했다고 한다. 스페인 카르멜 수도원이 타락했을 때 개혁한 대데레사는 타고 가던 마차가 넘어지자 다른 사람들은 모두 ‘살려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하는데, 홀로 ‘이게 뭐냐’며 하늘에 삿대질을 했다고 한다. 이제 좀 더 평안하게 하느님을 만나도 된다.”


 “문 대통령은 착한 아이 콤플렉스”

 그는 세대별로 다른 심리 특성을 설명한다. 나이 든 세대는 공동체 의식과 충성, 우애, 효도 같은 교육을 받으며 자라 모든 잘못을 자기 탓으로 돌리며 스트레스를 쌓아와 신경증이 강하다고 한다. 반면 과보호를 받고 자란 젊은 세대는 자기밖에 모르거나 손해 보는 일을 조금도 하려 들지 않고, 주변 사람들이 모두 나를 편안하게 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성격 장애’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는 “‘성격 장애’가 심하면 뭐든 자기 마음대로 다 하려고 하고, 이런 사람들이 권력을 잡으면 온 국민이 죽어난다”면서, ‘본인을 왕족쯤으로 생각하는’ 박근혜 전 대통령을 이런 부류로 설명했다.

 그는 이와 달리 “문재인 대통령의 경우 경건한 ‘수도자 콤플렉스’에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가진 성향으로 분류할 수 있다”며 “고통받는 사람들을 끝까지 도와야 하고, 자신을 돌보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성향이어서, 힘들면 주위에 하소연도 하고, 휴식과 수면, 소화 등을 잘 챙겨야 한다”고 권했다.

 홍 신부는 상담가 25명과 함께 도반모임 카페(cafe.daum.net/withdoban)를 통해 인터넷 상담을 해주고,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대면상담과 전화상담을 하루 5명씩 해주기도 한다. 상담신청 전화는 (02)727-2516, 문자신청은 010-5032-7422. 


나의 꼴을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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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jpg» 사과를 팔고 사는 모습. 사진 픽사베이 제공


울퉁불퉁하거나 크기도 다르고 색깔도 다르며 벌레 먹은 자국도 있는 그런 사과는 요즈음 거의 볼 수가 없습니다. 1981년 처음 독일에 왔을 때는 한국서 먹던 새콤달콤한 홍옥이나 국광 같은 사과가 참 그리웠습니다. 그런데 그사이 한국에는 ‘후지’라는 놈이 사과의 세계를 완전히 점령해버려 사과의 맛도 일색이 돼버렸네요. 기후 때문에 토종 과일의 종류가 그리 다양하지 못한 독일에서 사과는 아주 중요한 과일입니다. 매일 사과를 하나 먹으면 심장이 튼튼해진다는 말도 있지요. 신종 사과의 개발과 저장 방법은 그래서 독일 농부들에게 아주 중요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유기농 직거래장엔 정말 다양한 종류의 독일산 사과들이 저마다 예쁜 이름을 달고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가득히 쌓여 있습니다. 우리 식구가 제일 좋아하는 사과의 이름은 엘스타입니다. 홍옥처럼 색깔이 예쁘진 않지만, 새콤달콤한 맛이 홍옥을 가장 닮았어요. 갓난아이 때부터 초등학교 입학할 때까지 딸아이와 매주 두 번 열리는 시장에 가는 일은 거를 수 없는 소중하고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농산물뿐만 아니라, 가게를 임대해서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을 수 없는 수공예가들은 1미터 남짓한 자리에서 스스로 만든 소품들을 가지고 나와 팔면서 발판을 다지는 장으로 삼기도 합니다. 


 거긴 사람도 물건도 생기에 넘치고, 흥정이란 게 없는 독일인데 에누리와 덤이 가능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물건을 통해 얼굴을 맞대고 소통하는 자리인 거죠. 한국에 오는 서양인 관광객들에게 시장이 꼭 가야 할 장소로 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민얼굴 같은 생기 있는 분위기와 규격화되지 않은 다양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마치 찍어낸 듯 생채기 없이 반짝거리며 질서정연하게 플라스틱 포장 안에 담겨 있는 과일과 채소들은, ‘다름’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획일화와 규격을 벗어나면 ‘틀렸다’고 불안해하는 마음과 참 닮은 것 같습니다. 개성의 주장은 빈껍데기 선전문구일 뿐, 유행은 쓰나미처럼 덮쳐서, 다양한 스타일의 ‘교복’ 내지 ‘제복’을 입혀놓고는 지나가 버리고, 곧 다음 쓰나미가 덮칩니다.


 우리는 무의식 중에 왕따 당하지 않기 위해 우리 자신의 ‘꼴’은 잊고 스스로를 왕따하며 살고 있는 게 아닐까요. 세월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몸과 마음의 주름은 억지로 펴버리고, 머리칼은 모두 까맣게 물들여버려서 얼굴과 나이의 균형이 깨져버린 모습들이 ‘보통’이 되어버렸습니다. ‘자연’이라는 말 속에 이미 담겨 있듯이, 자연에는 일부러 만들어진 규격 없이 서로서로 있는 그대로 섞이고 흩어지면서 생겨나고 스러집니다. 하나하나가 그 나름대로 완벽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주어야 할 선물은 규격화된 잣대가 아니라 바로 스스로의 ‘꼴’을 읽을 줄 아는 독해력입니다.




마을의 할머니 호위무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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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누리-.jpg


“애기 아빠, 전에 말한 거 아직 유효해요?” 기다리던 말씀이다. 할머니 집 위층으로 이사하면서, 부탁드렸었다. 나중에 할머니 집을 마을학교로 쓸 수 있게 해 달라고. 마음에 두셨다가 물으신 거다. 할머니는 오래 살아 정든 집을 떠나면서 시세보다 많이 낮은 가격에 주셨다. 애정이 담긴 집이 좋은 일에 쓰이는 게 좋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마을에 특별한 애착이 있으셨다. 통반장 오래 하며 마을 수도, 전기 다 놓으셨다고 한다. 터줏대감 텃세가 꽤 있어 힘들어하는 분들도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잘해주셨다. 산 아래 한적한 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와서 마을을 위해 이것저것 하는 걸 좋게 보셨다. 교통 불편하고, 초등학교도 멀고, 어린이집 하나 없는 곳이다. 신혼부부는 잠시 살다 아이 학교 보낼 때 되면 떠나는 마을이었다. 처음 그곳을 돌아보던 날, 부동산에서 큰길 주변 집 몇 개 보여주고는 돌아서는 우리 부부에게 큰 기대 없이 던지듯이 말씀하셨다. “저 오르막 위에 낡은 집 하나 있는데, 온 김에 보고나 갈래요?” 그 할머니 집이었다. 한눈에 여기에 살겠다고 마음먹었고, 밝은누리 인수마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마을 어린이집 초기에 아이들 운동 수업을 맡았다. 아빠들이 아이들과 운동하고 놀았다. 손녀 데리고 나오시는 한 할머니와 자주 마주쳤다. 조그만 식당을 운영하는 분이셨다. 아빠들이 아이들 산책 데리고 나와 노는 모습이 좋아 보이셨단다. 몇 가정 어울려 공동육아 한다는 얘기도 흥미롭게 들으셨다. 얼마 뒤 손녀는 어린이집에 함께했다. 몇 년 지나 식당을 그만두신 할머니는 어린이집 밥상 선생님으로 오셔서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함께하신다. 


 호랑이 눈빛 미륵보살 청룡빌딩 할머니. 주변 사람들과 골목 떠나갈 듯 싸우시는 걸 여러 번 보아왔다. 부동산에서도 그 건물 거래는 꺼렸다. 10년 넘게 그 건물에 세 들었던 우리에게, “할머니랑 안 싸워요?” 하고 물을 정도였다. 우리에게도 고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잘 지냈다. 오히려 든든한 호위무사 역할을 해주셨다. 마을서원에서 새어나가는 아이들 소리가 시끄럽다고 이웃분이 지나치게 항의한 적이 있다. 사과도 통하지 않던 그때, 할머니가 나타나셔서 우렁차게 “아이들이 다 그렇게 노는 거지” 하며 물리치신 일은 아이들에게 잊히지 않는 쾌거(?)였다. 


 폐지 줍는 할머니가 계셨다. 마을학교 아이들 산책 시간에 만나면, 무척 귀여워하신다. 아이들은 예뻐해주는 사람을 잘 알아본다. 하루 산책 선생님으로 와 주시길 부탁드린 적이 있다. 할머니는 여느 때와 달리 머리도 하시고 멋진 옷을 차려입고 오셨다. 자식들에게 괜한 일 한다고 타박도 받고 도움 되는 얘기도 들으셨단다. 손가방은 사탕이 한가득이었다. 몹시 긴장하셨지만, 행복해 보이셨다. 나중에까지 그날 참 고마웠다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다. 돌아보니 밝은누리는 할머니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할머니들 고맙습니다!

세상 중심에 성소수자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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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jpg» 사진 픽사베이 제공

 

사월과 오월을 넘어 유월도 산중은 초록의 향연입니다. 산에 오래 살다보면 절로 알게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산색이 아름다운 이유가 단지 자연의 빛깔이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할까요? 답은 화이부동(和而不同)에 있습니다. 숲은 서로 섞이고 함께 하면서도() 자기만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不同), 개성과 조화의 신비입니다. 그런데 조화의 원칙과 묘미는 고유한 자기만의 모습을 가지고 있을 때 가능합니다. 숲은 저마다의 자태와 빛깔을 가진 온갖 나무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장엄하고 아름다운 은 그 실체가 없습니다. 숲이 실체가 없다는 것은, 숲은 많은 나무들이 없이는 결코 숲이라는 이름을 얻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도 그렇습니다. 땅과 주춧돌, 기둥과 서까래와 지붕없이 이라는 존재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 무엇이 있으므로 그 무엇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자연과 만물의 이치가 이러할 것이고 사람 사는 세상이 또한 그러할 것입니다.

푸른 나무들도 자세히 보면 같은 모습이 아닙니다. 그 푸른 빛도 표정과 온기가 저마다 다릅니다. 형형색색! 저마다 다른 것들이 건강하게 함께 모여 살아야만 정녕 자연도 사람도 아름답습니다.

 

부처님 오신날도 어느덧 한달이 지났습니다. “차별없는 세상, 우리가 주인공”. 올해 불교 조계종의 봉축 표어입니다. 봉축 표어는 사회의 염원을 담아 제정합니다. 이러한 염원을 담아 조계사에서 열린 법요식에는 세월호 희생자와 미수습자 가족, 성소수자, 이주 노동자, 장기해고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을 대거 초청하여 앞자리에 모셨습니다. 이들을 모신 뜻과 상징이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그런데 더 눈여겨 보면, 성소수자들을 법요식에 초대한 발상과 용기가 제게는 무엇보다도 큰 감동이었습니다. 차별 없이 일체 중생을 보듬고 손잡는 일이 종교의 당연한 책무입니다. 그러나 지난 역사와 지금의 현실을 보면 많은 불자와 국민이 지켜보는 법요식에 성소수자들은 초대한 일은, 오랜 전통과 뿌리 깊은 보수적 관념이 지배적인 종교문화에서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불교계가 부처님 오신날에 성소수자, 이주 노동자, 장기 해고자들을 귀하게 모신 것은 그것이 부처님의 뜻에 일치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픈 그곳이 몸의 중심이고 세상의 중심이듯이, 부처의 마음은 외면 받고 편견 받는 사람들에 머물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부처님의 탄생 선언이 새삼 그 의미가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저마다 다른 이름 다른 모습을 가진 모든 존재가 무엇과 바꿀 수 없이 귀하고 귀하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그 존재들이 차별 받고 당당한 주인공으로 살고 있지 못한 현실을 부처는 아픈 가슴으로 통찰합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염원합니다. “이 세상 중생들이 고통에 신음하고 있으니 나는 마땅히 그들의 고통을 소멸하리라”.

 

부처는 1인칭의 고유명사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이 시대의 부처는 시민이라는 이름을 가진 보통명사입니다. 지혜와 자비를 실천하는 이들이 바로 부처입니다. 보통명사의 부처들은 이 세상 모든 생명들이 절대적으로 존귀하고 삶의 주인공이라고 통찰합니다. 바로 부처의 지혜입니다. 그런데 그 주인공들이 사회적 편견과 법과 제도의 불합리와 불공정으로 인하여 이유 없이 혐오와 배제를 당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시민은 차별 속에서 당하는 모멸감을 소멸하고 자존감을 회복시키는 일을 화두로 삼아야 합니다. 바로 보통 부처, 시민 부처의 자비입니다.

 

조계종은 몇 년전부터 차별금지법 제정을 일관되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차별없는 세상, 상생과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부처의 뜻을 이어받는 시대적 원력입니다. 이천육백여년 전, 석가모니는 혁명가였습니다. 그 당시에 인류의 집단적 무지와 폭력이라고 할수 있는 계급차별과 양성차별을 사상적으로, 문화적으로 부정하고 해체하였습니다. 부처는 사랑과 자비를 이렇게 구현했습니다.

 

촛불혁명의 정신으로 민주정부가 개혁적인 일들을 하나하나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대통령의 선언이 성소수자들에게 해당하고 적용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 시대의 시민 부처와 시민 예수들의 애정과 관심이 그들의 가슴에 촛불이 되기를 염원합니다.

 

# 우리가 말하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해 차별 해소와 평등을 말할 때 먼저 우리는 그들에 대해 미안해하고, 부끄러워해야 하고, 사과하고, 겸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그 동안 그들에 대해 잘 못 생각하고 잘 못 처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와대 비서동을 위민관(爲民館)에서 여민관(與民館)으로 개명한 의미가 새삼스럽다.

 

* 이글은 참여연대에서 발행하는 월간 <참여사회> 6월호의 여는 글이며 휴심정과 공유합니다.

죽음으로써 산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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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세 양림교회


 광주양림교회_기장.jpg»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교회


 광주양림교회_합동.JPG»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합동) 교회


  광주양림교회_통합.JPG»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통합) 교회

광주에 도착하니 37주년 5.18 민중항쟁, 촛불로 잇는 5, 다시 타오르는 민주주의의 현수막이 옷깃을 여미게 했습니다. 구한말 양림동의 유림들이 개방적이었던 덕분에 선교사들을 통하여 지역문화가 발전하였고 뛰어난 문화예술인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이 동네에 유진 벨 선교사에 뿌리를 둔 세 양림교회가 있습니다. 이름은 똑같지만 두 번(1953, 1961) 분열하여 교단이 다릅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통합) 교회는 고색창연한 적벽돌 건물이고,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합동) 교회는 현대식 건축물이며,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교회는 언덕위에 성처럼 서 있습니다. 다행히 1997년 이후, 해마다 10월에 세 양림교회가 돌아가며 연합찬양예배를 드리고 세 목회자가 강단교류로 다른 교회에서 설교를 합니다. 또 봄가을에는 세 교회의 장년부 회원들이 함께 양림동 선교사 묘역과 주변을 청소하고 돌본다니, 분열의 상처를 딛고 공존하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예장통합 양림교회 곁에 역사적인 오웬기념각이 서 있는데, 의사이자 선교사였던 오웬이 세운 이곳에서 광주역사상 첫 번째로 거행된 문화행사들이 많았습니다. 오페라, 독창회, 연극이 처음으로 열린 곳이니 가히 광주 신문화의 발상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역사문화마을답게 보존된 두 고택(이장우, 최승효)에서 한옥의 아름다운 풍모를 본 후, 아기자기한 상점들과 미술관을 둘러보고, ‘광주의 어머니조아라 여사의 기념관을 지나 호남신학대학 옆 동산에 오르니, 아름드리 상수리나무들이 서 있고 선교사묘원이 있었습니다. “당신들은 죽음으로써 살았습니다.”라는 글귀가 있는 이곳에 스물두 선교사들이 안식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은 교육, 의료, 사회봉사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과 5.18 민중항쟁의 증언이 되었답니다. 얼마 전 조선의 테레사로 불린 서서평(엘리자베스 셰핑) 선교사의 일생을 그린 영화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를 보며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학교(한일장신대의 전신)를 세우고, 여전도회를 창립하고, 대한간호협회를 창설하여 세계간호협회에 가입시킨 맹렬여성이었지만 묘지의 사진은 가냘프기 그지없었습니다. 1934, 풍토병과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을 때 남루한 침실에는 반쪽짜리 담요, 동전 몇 개와 강냉이 두 홉이 남아있었습니다. 얼마나 자신을 비우며 사랑으로 헌신하였던지 광주 최초로 시민장으로 거행된 장례식에 수많은 한센병자들과 가난한 이들이 서서평의 마지막 길을 애달파했다고 합니다. 동산묘원 옆 수피아여중고는 3.1운동과 여성운동의 본거지로서 광주학생운동 때에 무기휴교 당하였고, 신사참배반대운동으로 폐교당하는 등 민족의 고난에 동행하였습니다.

 

다시 양림동으로 들어가니 건물 벽에 최후의 만찬-양림이란 대리석 조각품이 보였습니다. 양림동이 낳은 대표적인 인물들을 재조명하려고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본 따서 만든 작품으로 역사적으로 기억해야 할 분들이었습니다. “빈민운동의 아버지였던 최흥종 목사는 포사이드 선교사의 지극한 사랑에 감동받아 한센병자들의 친구이자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3.1운동 주도하여 옥살이를 하고 광주 YMCA와 여수 애양원, 소록도 자혜의원을 세우며 작은 예수로서 살았습니다. 조아라 여사는 수피아학교 시절 광주독립학생운동을 벌였고 광주 YWCA를 세워 섬기다가 5.18 만중항쟁의 수습대책위원으로 일한 것 때문에 옥살이도 하였는데, 군사정권 시절에 가장 안전했던 YWCA에서 회의가 잦았는데 거기서 뵌 적이 있습니다. 중국에서 항일투쟁하며 작곡활동하여 중국3대 음악가로 불리는 정율성 선생, 고독의 시인 김현승(아버지 김창국 목사는 양림교회 목사), 그리고 유진 벨, 서서평 등 선교사 등 열두 분이 예수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이분들은 아직도 한이 서린 광주에 대하여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떠나기 전 자동차로 무등산 자락을 둘러보았는데 무등산은 마치 어머니처럼 아픈 역사를 넉넉히 품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못난이 잘난이 함께 사는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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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공동체 탐방조현의 공동체마을 체험기

 못난이도 잘난이도 함께 살아가는곳


-1.연찬-.jpg» 야마기시공동체 가운데 처음 생긴 가스가야마공동체의 공동부엌에서 일하는 식생활부원들이 연찬을 하며 속마음을 꺼내놓고 있다.

 

일본 야마기시 공동체의 본부 격인 도요사토는 애즈원에서 차로 불과 20~30 거리에 있었다애즈원에서 방문자들을 담당하는 이치가와 겐이치가 차로 도요사토까지 바래다주었다이치가와는 도요사토에서 나온  7 만에 도요사토에 처음 들어온다고 했다야마기시에 뼈를 묻을 생각으로 살아오던 사람들조차 중년을 넘겨 광야로 나갈 수밖에 없을 만큼 야마기시는 숨쉬기 어려운 공동체가  것일까


 도요사토는 한때 3천명이 사는 세계 최대 공동체의 명성에 걸맞은 위용을 여전히 자랑하고 있었다대학 캠퍼스나 아파트 단지 못지않게  지어진 건물들과 아름다운 정원거대한  사육장과 야외 경기장대농장이 펼쳐져 있었다야마기시에서 떨어져 나와 인근 스즈카에 만들어진 애즈원커뮤니티가 이제  출발한 신생 중소기업이라면도요사토는 굴지의 기업이라고  만했다하지만 도요사토에 사는 이는 이제 500 규모로 쪼그라들었다한때 세계 전자업계 선두였던 소니의 몰락과 비교할  있을까그러나 소니는 다시 살아나고 있다과연 야마기시는 어떨까.


 야마기시 공동체는 야마기시 미요조(1901~61) 양계장에서 발견한 상생의 원리를 깨닫는 ‘야마기시즘 특별강습 연찬회 출발했다이후 이런 깨달음을 삶에서 실현해보자는 ‘실현지 1961 가스가야마에 탄생했다야마기시 미요조는 1961 사망했지만실현지는 전세계로 퍼져나가 일본스위스브라질타이독일오스트레일리아, 미국  50여곳에 만들어졌다


 이상사회 실험의 모델로 여겨지던 야마기시는 밀레니엄인 2000 전후  위기를 맞는다위기는 엉뚱한 곳에서부터 찾아왔다. 1995 아사하라 쇼코 교주의 옴진리교가 일본 도쿄 지하철에 사린가스를 살포해 13명의 사망자와 5000명의 중경상자를 낳은 충격적인 사건이 터졌다그러자 일본에선 공동체생활을 하는 유사종교집단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졌다야마기시는 어떤 종교 교리나 신념 또는 아집이 없는 ‘고정되지 않는 전진 주창했지만일반인들에겐 유사종교단체와 달라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3.도요사토.jpg-2.식사-.jpg-도요식당1.jpg-도요식당2.jpg-식당2.jpg-식당3.jpg-식당4.jpg-식당5.jpg-식사1.jpg



한때 세계 최대 공동체 야마기시

개인 욕구 수용 못하고 소통 안돼

3천명 공동체 5백명으로 줄어

갈곳 없는 노인들이 주로 남아

속마음 털어놓는 연찬 되살려


권력화했다던 조정위원들도 민의수렴

얼마남지않은 젊은층들 즐겁게

야마기시 떠난 동료들도 돕는 배려

외부의 차가운 시선도 달라져

거센 우환 지나 여유 평화 넘쳐


 지난 2009 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3부작엔 신흥종교집단 ‘선두 후카다 교주가 나온다후카다 교주는 암살기술자 아오마메에 의해 호텔방에서 미세한 침에 찔려 살해된다후카다는 암살을 알면서도 태연하게 죽음을 맞을 만큼 카리스마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1Q84> 나온  신흥종교집단 ‘선두 모델이 야마기시라는 소문이 돌았다그도 그럴 것이 하루키의 와세다대 스승으로 알려진니지마 아쓰요시 교수가 도요사토 공동체에 입회한 것이 크게 보도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니지마 교수가 사망한 후에도 부인은 지금까지 도요사토에 살고 있다.


 사린가스 사건 이후 공동체에 대한 매스컴의 비판 기사가 늘었다야마기시는 아기 때부터 아이들을 모아 함께 양육했다 10시부터 오전 10시까지는 공복을 유지하는  좋다는 ‘니시요법 따라 초등학생들한테도 아침을 먹이지 않았다그런데 이것이 아이들을 억지로 굶기는 아동학대라며 집중 부각되고야마기시를 비판하는 여론이 비등했다그러자  전까지 야마기시의 유기농 제품을 공급받으려 읍소했던 유명 백화점들이 태도를 바꿔 야마기시 제품 판매 코너를 일제히 폐쇄하기 시작했다 와중에 거품경제가 무너져 세수 확보가 절실했던 세무당국은 야마기시 참여자들의 기부나 무보수 노동을 탈세로 간주해 압박했다


  과정에서 야마기시 이후 공동체를 이끌던 스기모토 도시하루가 1999 도요사토의 포도밭에서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야마기시 공동체가 무려 수백억엔을 보유하고 있었던 사실이 알려졌다스기모토가 공동체를 성장시킨 주역이긴 했지만공동체원들의 자유를 제약하며 지나친 내핍생활로 이끈 것이 아니냐는 내부 비판도 제기됐다.


 가장 비판적인 이들은 야마기시 안에서도 엘리트로 꼽히는 이들이었다. 야마기시즘 특강회를 이끌거나 사상과 교육, 방향을 결정하던 이들이 2000년 ‘야마기시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며 이탈해 시작한 게 스즈카의 애즈원이다. 이후 엑소더스 행렬이 이어졌다. 더구나 처음 공동체에 들어올 때 전재산을 냈던 이들이 그 재산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대법원까지 간 소송에서 처음 낸 재산의 3분의 1 정도를 돌려주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이를 두고 야마기시 사람들은 공동체의 방향과 정책을 결정하던 주역들이 자성은커녕 공동체를 비난하고 나갔다며 한탄하기도 했다.  

 

그런 태풍이 휩쓸고  도요사토는 의외로 평화로웠다어디로도 떠날  없는 노인 세대가 많이 남았지만자포자기나 남은 자의 비감은 보이지 않았다아름다운 일본식 정원이 보이는 드넓은 도요사토 공동식당의 분위기와 음식도 어느 고급 호텔 레스토랑 못지않았다다만 자신이 먹을 만큼 가져다 먹고설거지를 스스로 하는  다를 뿐이었다외부의 비판 이후 아이들에게도 아침식사를 거르지 않고 먹이는  공동체  변화는 뚜렷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축사의 현대화였다도요사토에선 ‘와규 유명한 흑소 3천마리를 기르고 있는데사람 손이 가지 않아도 되도록 모든 사육과정을 자동화했다고령사회 일본에서도 더욱 고령사회가  젊은 노동력이 부족한 공동체에서 앞으로도 생산활동에 지장이 없도록 자동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오늘날의 야마기시 공동체에는 ‘잘나가던’ 과거와 달리 젊은이들이 많지 않다도요사토엔 노동력의 주축인 20~50살이 51명이다따라서 이들의  부담이 적지 않다이들이 우리  10만원에 불과한 1만엔의 용돈을 받으며개인적 자유를 구가하기는 쉽지 않은  이곳의 삶이다그러나 윗세대를 무조건 따르라는  예전 분위기였다면지금은 ‘귀한   젊은이들에 대한 배려가 크게 달라졌다

  

-3.낙농부.jpg-3.윤성준.jpg-가스.jpg-가스낙농1.jpg-가스애들1.jpg-도요세탁2.jpg-도요애.jpg-도요직판.jpg-성준부부.jpg-세탁1.jpg-세탁2.jpg-세탁3.jpg-오성순.jpg


경기도 화성 야마기시 마을에서 자라 2009년부터 도요사토에 살고 있는 윤성준(43)씨는 “젊은이들이 너무 외롭지 않게 함께 모여 일하게도 한다 말했다지난해 스위스계 일본인 공동체원 가지야마 하이디(25) 결혼한 윤씨는 도요사토 정문 앞에 지역민들을 위해 2014 문을  직판장의 책임자를 맡고 있다윤씨는 “고가의 유기농보다는 지역 먹거리 정도로 만족하는  요즘 일본의 분위기여서 공동체에서도 유기농이 아닌 일반 농축산물을 생산하지만 유통마진 없이 저가에 판매해 지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했다야마기시에 대한 외부의 편견도 다시 누그러지고 있는 셈이다직판장은 시내와는 떨어져 있는데도 장바구니를  사람들로 붐볐다. 


 도요사토에서 차로 30 거리에 있는 최초의 야마기시 공동체 가스가야마의 사육장에서 일하는 야마사키 아키히사(32) “같은 또래 4명이 밤이면 자주 모여 술도 마시면서 스포츠와 영화 이야기를 하며 즐겁게 지내고 있다 했다.


 야마기시 공동체는 매사 속마음을 털어놓고 얘기하는 ‘연찬 통한 ‘무고정 전진 내세웠다그러나 이탈자들이 가장 심각한 문제로 제기한 것이  연찬이다형식만 남고 진정한 소통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특히 의사 결정을 하는 ‘조정위원 권력을 쥐고서는 여행을 가고 싶다는 등의 개인적 욕구를 수용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스가야마 공동식당에서 일하는 10명이 모여 진행하는 식생활 연찬을 보니활기가 넘쳤다그들은 점심 200명분저녁 240명분의 메뉴를 무엇으로  것인지 유쾌하게 논의했다다음날 인근 학교 운동회에 군고구마를 가져다주자는 제안과 단풍축제의 이동판매소에 ‘나도 가보고 싶다 바람도 나왔다집을 옮기고 싶다고 신청한   달이 지났는데 소식이 없다거나남자들이 숙소 1층에서 담배를 피워 연기가 올라와 싫다는 불만도 제기됐다 여성은 “몸이 좋지 않아 4일간 일을 쉬었는데 내일부터는 나오겠다 말하며, “예전엔 쉬고 싶거나 뭔가 하고 싶어도 분위기 때문에 쉽게 말을 꺼내기 어려웠는데지금은 거의 마음을 꺼내고 있다 했다.


 중학교 교사를 하다가 야마기시에 합류해 일본인 남성과 결혼해  아이를 두고 있는 오상순(57)씨도 도요사토의 조정위원이다조정위원은 도요사토에서 6개월마다 10명이 뽑힌다오씨는 “공동체 인터넷을 통해 하루 수십통의 크고 작은 제안이 들어온다 “자신의 제안이 거부당해도 다시 제안할  있고최종적으로는 자신이 결정할  있도록 도우려고 한다 했다공동체가 개인적 욕망 실현의 장이 아니라 함께 행복한 이상사회를 만들려는 곳인 만큼 모든 욕구를  수용할 수는 없지만좀더 개인과 사회의 욕구의 조화를 위해  애쓰게  것이다.

 

가스가야마에서 만난 기타오지 요리노부(65) 고교 시절 학생운동의 리더였다당시 시국사범으로 감옥에 갇힌 그는 “오히려 밖에서 느끼지 못하는 자유를 감옥에서 느꼈다 18살에 야마기시에 합류했던 계기를 전했다야마기시는 외형상 지도자를 내세우지 않지만 기타오지는 스기모토 이후 주요 지도자  한명으로 꼽힌다그는 “도쿄대 출신들을 비롯한 야마기시의 우수한 인재들이 스즈카로 빠져나갔는데그들이 내게도 함께  것을 권유한  보면나도 우수한 인재인 모양이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우수한 분들이 빠져나간 이곳엔   없는 노인과 장애인들이 많고화가 나면 자기 분뇨를 벽에 칠하는 분도 있다나는 그렇게    없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좋다


 애즈원은 구태에 빠진 야마기시를 비난하며 나갔지만오히려 야마기시에선 자신들을 버리고 떠난 이들에 대한 배신감을 토로하거나 비판하기보다는 야마기시즘을 실현하는 애즈원 같은 곳이 곳곳에 생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하기도 했다특히 이들은 초기 경제적 자립에 고심하는 애즈원이 만든 거름공장의 거름을 사주며 자립을 도와주기까지 했다거센 태풍이 야마기시를 변화시킨 계기가 되었다신생 커뮤니티 애즈원이 신선한 생기로 반짝인다면야마기시 공동체엔 성숙한 여유와 평화의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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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사토·가스가야마(일본)/·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스스로를 달빛 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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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제應制라고 했던가. 임금이 신하에게 글을 의뢰하는 것을 말한다. 그처럼 이 책은 대부분 상전(?)들의 부탁으로 쓴글이다. 청탁받은 그날부터 전전긍긍이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마감이 가까워질 무렵 섬광처럼 글 고리가 스쳐 지나간다. 책을 읽다가 신문을 보다가 혹은 차를 마시다가 그것도 아니면 그냥 멍때리다가 번쩍하는 그 고리를 낚아채야한다. 이후 씨줄과 날줄이 얽히며 사이사이에 살이 붙는다탈고한 뒤 잠깐이나마 해탈의 경지를 맛보기도 한다. 글로 인하여 윤회輪廻를 반복한다고나 할까.

 

그런데 해가 갈수록 섬광의 횟수는 잦아들고 섬광을 기다리는 시간은 길어진다. 글 만드는 일은 시간이 흐를수록 버겁기만 하다. 이제 응제는 샘물 곁의 바가지가 아니라 긴 밧줄을 드리워야 하는 두레박이 되었다. 우물은 날로 깊어지고거기에 맞추어 두레박줄도 하루하루 그만큼 길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응제마저 없다면 우물물은 고사하고 샘물마저 퍼올릴 생각조차 않을 것이다. 응제 때마다 지나가는 혼잣말로 절필을 운운하다가도 한편으론 혹여 두레박줄 길이가 모자랄까 봐 새로 새끼줄을 꼬아서 곁에 감춰두곤 했다. 이런 자기모순이 서너 해만에 또 한 권의 소박한 책을 만든 바탕이 되었다.

 

글자 한 자가 점점이 모여 한 줄이 되고 한 줄이 줄줄이 모여 한 편의 글이 되고 편편의 글들이 모여 한 권의 책이 된다. 수많은 별들이 모여 은하계를 이루지만 내가 발 딛고 서있는 곳은 단 하나의 지구별일 뿐이다. 또 그 안에서 한 평의공간이면 충분하다. 좁쌀처럼 흩어놓은 많은 글 가운데 한편 아니 한 줄이라도 남들에게 공감을 일으키는 구절이 있다면 장강長江의 청량한 물 한 모금 역할은 할 터이다. 잡서의 한 줄이 남들에게 한 줄기 섬광으로 이어진다면 때로는 경서經書나 사서史書 노릇을 대신할 수도 있겠다.

 

몇 년 만에 또다시 종로에서 도심 생활을 하고 있다. 산과 도시가 둘이 아닌 또 다른 의미에서 심리적 선농일치禪農一致의 삶이라는 과감한 해석을 달아야 했다. 옛사람들은 벼슬살이를 위해 고향 농촌을 떠나 시정市井으로 몸을 옮길 때 나름의 해소책을 마련해 두었다. 그림으로 산수를 대신하고 화분으로 동산과 정원을 대신하고 책으로 벗을 대신한다고 했다.


그래서 필자도 책상 정면에는 강렬한 원색의 동해 일출 사진을 배치하고 측면에는 흑백목판본 대동여지도 장백산 부분을 걸어두고서 선인들이 위로 삼아 하던 도회적 삶의 일부분을 흉내 낸다.

 

천만 명의 도시인은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덩달아 곁의 수도승首都僧까지 바빠진다. 망중한忙中閑이라고 했다다시금 한가한 시간의 귀함을 알게 된다. 그 와중에서 시비를 일삼는 얘기는 귀에 들리지 않으면서 독서할 시간이 있고 글을 쓸 여유가 있으니 이만하면 더 이상 바랄 것도 없겠다.


글을 응제토록 해준 신문잡지사의 선지식들께 두 손 모아 감사드린다.


20176월 어느 날 우정국로 우거寓居에서 원철


 

 

 

걸어다니는 정신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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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걸어다니는 ‘정신병원’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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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어린 시절부터 청년기까지를 어리바리하게 살았습니다. 마치 우물 안 개구리처럼 내 안에 매몰되어 살았고, 온실 안의 식물처럼 현실감 없이 공상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말귀도 못 알아듣고(지금도 그렇지만) 사오정처럼 딴소리하기 일쑤였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나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당연히 대화 상대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내게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못하고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들 탓만 했습니다. 그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대신 내 안에 더 높고 견고한 벽을 만들었지요. 벽 안에 나만의 세상을 만들어놓고는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낮에는 공상, 밤에는 꿈으로 붕 뜬 삶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군대를 가게 되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난생처음 몸으로 사는 삶을 살았고, 공상이 아닌 현실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울증과 불안증, 강박증과 결벽증, 분열증…… 걸어 다니는 정신병원이었던 제가 정신병원에 입원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대한민국 군대 덕분이었습니다. 덕분에 우물 밖으로 조금 머리를 내밀 수 있었지요. 


 하지만 제대를 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병이 도졌습니다. 다시 시작된 방황은 어느 때보다 심각했습니다. 아무 일도 안 하고 방 안에 틀어박혀 하루하루 시간만 죽였습니다. 그러다가 절에 들어가서 수도승이 될 생각을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아주머니가 저를 물끄러미 쳐다 보더니 그러더군요. 

 “얼굴에 신기가 있어.”

 그 말에 박수무당이 될까를 진지하게 고려해보기도 했습니다. 

 

 결국 신학교의 문을 두드리게 된 것은 어려서부터 성당에 다닌 경험 때문이었을 겁니다. 신학교에만 들어가면 내 인생의 모든 숙제가 풀릴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신학교생활은 또 다른 물음의 연속이었고, 그 물음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신부가 된 후에도 계속 되었습니다.  힘들어서 신부 노릇 못하겠다고 징징대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 마음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책을 읽기도 하고, 스승을 찾아 헤메기도 했지만 답답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 누구도 시원한 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꼭 집어서 “당신 문제가 이런 것이니 이렇게 해보시오” 하는 말을 듣고 싶었는데, 정작 돌아오는 말은 이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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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이 약해서 그러니 굳건한 믿음을 가지세요.”

 “하느님 뜻에 따라 살면 됩니다.” 

 “기도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답답함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심리 상담을 받을 기회가 생겼습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상담을 받으면서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가슴속이 뻥 뚫렸습니다. 비로소 내가 가진 문제들을 볼 수 있었고, 그 문제들의 원인을 알 수 있었고, 그러니 당연하게 해결책이 보였습니다. 인생의 숙제가 풀린 기분이었습니다. 그렇게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수십 년을 걸치고 있던 죄책감의 옷, 열등감의 옷, 원망의 옷, 허위의 옷을 다 벗고, 맺히고 꼬인 것들을 풀고 나니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 심리학에 푹 빠져 상담심리학을 공부했습니다. 대학원에 들어가 시간과 체력을 쪼개가며 공부하는데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교우 분들을 대상으로 상담을 하기 시작했지요. 그러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적지 않은 분들이 나와 비슷한 문제로 고민하고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성심리상담의 관점에서 교우 분들의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다가 고약한 일을 겪게 되었습니다. 제가 있던 본당 주변이 재개발 되면서 온갖 협잡꾼들, 투기꾼들과 전쟁아닌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성당을 빼앗길지도 모르는 불안감에 병이 생기고 다시 우울감이 도져 마음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오기가 발동했습니다. 그 동안 공부했던 온갖 심리치료기법을 동원하여 저의 마음을 추스르며 위급한 성을 지키는 장수의 심정으로 그들과 싸웠습니다. 그 결과 지금 성당은 번듯한 모양으로 새로 지어져 많은 교우들에게 평화를 주고 있습니다.

 

 5년 여에 걸친 긴 싸움에 지친 저는 1년 휴식을 취한 후 비로소 많은 분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보직을 부여 받았습니다. 가톨릭영성심리상담소가 바로 그곳입니다. 

 이곳을 찾는 분들에게 제가 “요즈음 뭣 때문에 힘드세요?” 라고 물으면

 “돈이 없어서요.” 혹은 “몸이 아파서요” “가족이 힘들게 해요”라는 대답이 대부분입니다.

 ‘제 안의 문제로 힘들어요’라는 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만난 많은 분 중 몇몇 분들은 돈이 좀 없어도, 건강이 안 좋아 누워 있어도, 가족 중 분란을 일으키는 이가 있어도 크게 동요하지 않고 마음의 평화를 지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은 ‘자신이 마음’이지 다른 어떤 것도 아니라는 걸 아시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힘든 원인 중 첫 번째는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마음이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안타깝게도 스스로를 채찍질 합니다. 그런데 그런 행위는 대게 부모, 학교, 사회로부터 잘못 교육받아 잘못 형성된 양심과 도덕, 그리고 심지어 신앙이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감옥에 갇힌 내 마음부터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힘들면 힘들다고, 아프면 아프다고도 하십시오. 그렇게 여러분의 마음부터 챙기십시오. 

 괜찮습니다. 아무도 여러분에게 뭐라 할 사람 없습니다. 그동안 저보다 마음의 병이 심한 사람 본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거리의 청소년에게 필요한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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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청소년들에겐 엄마의 자궁이 필요합니다

[레드레터 크리스천] 길거리 청소년들과 더불어 밥 먹는 써나쌤오선화 작가

 

                                             오지은 기자 ohjieun317@goscon.co.kr

 

오선화1.jpg» ▲ 오선화(39) 작가 ⓒ복음과상황 이범진



오선화(39) 작가를 홍대 인근 카페에서 만난 건 원래 가벼운 독자 인터뷰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의 사사로운 삶을 하나씩 더듬어가다 어느덧 인터뷰는 무겁고 진지한 분위기로 바뀌기 시작했다. 두 아이의 엄마이자 본업이 동화 작가인 선화 씨가 우연히 길거리 청소년들의 이 되고 이 되어주기 시작한 건 6-7년 전 놀이터에서부터였다. 그들에게 오늘의 양식이 되어 주고, ‘엄마의 품을 빌려주었다. 그렇게 그는, 채 꽃을 피워보기도 전에 기성세대가 만든 나쁜 사회의 소용돌이 속에서 꽃봉오리를 희생당하는 성장기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숨을 틔워 주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밥이 제일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하는 선화 씨를 아이들은 써나쌤이라고 부르고 선화 씨는 아이들을 내 새끼’ ‘우리 새끼라고 부른다.

 

SNS를 보니 청소년들과 밥 먹는 사람으로 소개되어 있던데요.

말 그대로 청소년들과 밥 먹는 사람이고, 그들에게 밥 먹일 돈을 벌어요. 대학에서 소설을 전공했고, 동화 작가예요. 대학 졸업 후 결혼을 했는데 임신을 하고 우울증을 겪으면서는 태교 동화를 쓰고, 작은 태교학교를 만든 적도 있고요.

 

왜 청소년들과 밥을 먹게 됐나요.

그냥 어느 날 동네 놀이터에서 껄렁껄렁한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 중에 치킨 먹고 싶다는 소리가 들려서 치킨 사줄까물은 게 시작이었어요. 그렇게 만나게 된 친구들과 계속 밥 먹고 만나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애들이 배고프면 나를 찾아와요. 6년 정도 됐네요. 치킨을 매개로 교회로 불러서 교회 안에서 반을 만들어 아이들을 돌보기도 했어요. 어떻게 이렇게 아이들이랑 연결이 되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서 하나님한테 묻기도 했지요.

 

교회로 전도를 한 건가요?

치킨 사준다고 하면 만나주니까 교회로 불렀어요. 그런데 아이들을 교회에 부르고 보니 (그전엔 나도 몰랐는데) 교회에 폭력적인 요소가 너무 많더라고요. 예를 들면 중등부’ ‘고등부로 나누고, 다시 학년별로 아이들을 나누는 경우만 해도, 학교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에게는 상처에요. 제가 대학 운동권 출신이었는데, 운동하던 레이더가 교회에서 다시 세워졌어요.(웃음) 그 안에서 풀뿌리 운동(?)을 하기로 했고요.

 

교회 내 풀뿌리 운동이라고요?

교회 안에서 시선이 안 좋았어요. 소위 날라리아이들을 데려온 것도, 같이 다니는 것도 눈총을 받았어요. “누가 비전 없는 청소년들을 데리고 왔느냐하는 분도 있었고요. 욱 하는 에너지로 교회에 새로운 반, 학년 없는 비전반을 만들었죠. 첫 비전반 아이들은 이제 다 청년이에요. 군대도 가고, 직장 다니는 아이도 있고, 해외에 있는 아이도 있고, 신학대에 간 친구도 있어요. 수감되거나 연락이 끊긴 아이들도 있고요.

 


오선화2.jpg» ▲ "교회 안에서 시선이 안 좋았어요. 소위 ‘날라리’ 아이들을 데려온 것도, 같이 다니는 것도 눈총을 받았어요. “누가 비전 없는 청소년들을 데리고 왔느냐” 하는 분도 있었고요." ⓒ복음과상황 이범진


 

오선화3.jpg» ▲"사실 아이들을 교회로 데려가는 게 갈수록 회의적이에요. 지금은 교회 밖에서 만나고, 찾아가서 드리는 예배를 드려요. 제가 교회 선생님인 건 밝히지 않고 만나는 아이들이 더 많아요." ⓒ복음과상황 이범진


 

교회에 적응하기 힘든 친구들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교회의 굳어진 체제에 실망하고 떠난 친구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요. 하나님을 아직 잘 모르겠다며 떠났다면 더 많은 가능성이 있을 것 같은데, 교회 자체에 반감이 생기는 경우는 상처가 더 클 거예요. 저 말고, 청소년 일을 하는 다른 분들도 힘들어 하는 부분이에요. 예를 들면, 요즘에는 아빠나 엄마가 없거나, 혹은 아빠나 엄마가 바뀌는 일은 매우 흔하잖아요? 결혼식을 보는 것처럼 흔한 경우죠. 그런데 아직까지 교회 안에는 드문 일이에요. 아빠와 성이 다른 아이가 교회에서 무언가를 작성하다가 그 사실이 알려져서 부담스런 시선을 느끼고 떠난 사례도 있어요. 교회는 정말 많이 굳어져 있지요. 사실 아이들을 교회로 데려가는 게 갈수록 회의적이에요. 지금은 교회 밖에서 만나고, 찾아가서 드리는 예배를 드려요. 제가 교회 선생님인 건 밝히지 않고 만나는 아이들이 더 많아요.

 

장소 없이 만나는 게 쉽진 않을 텐데요.

대림동에 원룸을 얻어 사랑방을 운영한 적도 있어요. 청소년들이 쉬기도 하고 상담도 하고, 엄마 아빠가 싸워서 오갈 데 없으면 와서 자고 갈 수도 있게요. 지방에서 자해하고 찾아오는 친구들도 있어서 재울 수 있는 공간으로 썼어요. 한 편으론 (우리집이 좁기도 하지만) 이 일을 지속적으로 하려면 내 가정을 지키면서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같은 공간을 쓰면 가족들이 힘드니까요. 우리 애가 둘인데 어릴 때부터 청소년들이랑 같이 컸어요. 동네 언니 오빠가 가방도 다 들어주고, 재미있게 잘 컸죠. 날라리들이랑 애들을 놀게 하면 어떡하느냐는 분들도 있는데, 그런 질문을 듣고서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구나놀랐어요. 이 친구들이 계속 들락날락거리는 걸 집주인이 안 좋아해서 결국 쫓겨났죠. 지금은 카페에서 만나기도 하고, 놀이터, 치킨집 등에서 만나고 있어요. 때론 공간을 빌려주는 분들도 있고, 지금은 그들이 부르는 곳으로 제가 가지요.

 

그런 식으로 옮겨다니기가 불편하진 않나요?

이렇게 게릴라식으로 아이들을 만나는 게 저한테는 맞는 방식이에요. 하나님과 나만 하는 일로, 야인처럼, 광야성을 띠고 하는 게 좋아요. 교회에서도 해보고 공간을 따로 만들어보기도 했는데, 오히려 견제하는 분들도 생기고요. 지방 아이들도 있는데, 제가 있는 곳으로 오게 하는 것보다는 찾아가는 게 더 맞아요. 우리 새끼들 중에 공고 다니면서 지금 기술사 자격증 준비하는 친구가 있는데, 바빠서 예배를 못 드렸다고 해서 한동안 밤에 만나서 치킨집에서 조용히 예배를 드렸어요. 콜라로 애찬하면서요. 그 예배가 가장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그 예배가 정말 좋았죠. 정해진 공간 없이 제가 찾아가는 게 좋아요.

 

그 친구들 법 먹일돈 벌려고 일한다고 했는데요.

하나님, 우리 새끼들 치킨 값은 벌게 해주셔야죠라고 하나님한테 계속 말했어요. 책 인세나 대학 선배들이 알바로 주는 잡지 외주기자 일로는 돈이 안 되니까요. 그러다 청소년 강의가 처음 들어오고, 학교에서도 특강 문의가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청소년들에게는 사실 전문 강사보다는 자기들 마음을 아는 사람, 그들의 언어로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교회도 새 친구 축제 같은 거 할 때 일반 기독교인 강사를 찾다가 제가 쓴 책들을 보고 연락해와요. 그런 식으로 연결되어 강의를 나가요.

오선화4.jpg» ▲ "‘혼밥’ ‘집밥’이라는 말이 자주 쓰이는 것도, 서로 어울려 함께 밥 먹는 일이 그만큼 결여되어 있다는 방증이지요. 그러면서 우리 사회가 더욱 강퍅해진 거 같아요. 애들 만나다 보면 밥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더 들죠. 제 정체성은 ‘같이 밥 먹는 사람’이에요." ⓒ복음과상황 이범진



밥을 같이 먹는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밥이 가장 중요해요. 저도 청소년기를 암울하게 보냈어요. 어머니가 남대문 새벽시장에서 장사를 했고, 아버지는 음주가무에 워낙 능하신(웃음) 분이라서 어릴 때부터 혼자 밥 먹는 일이 많았거든요. 동생들도 다 챙겨야 했고요. 밥이 공평함의 시작이라고 어느 순간부터 쭉 생각해왔어요. 밥 못 먹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서부터 정의를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밥은 사람에게 기본 중의 기본이니까요. 과거 서울시가 무상급식을 하지 않겠다고 했을 때 가장 화가 났었어요. 밥으로 장난치는 사람이 제일 싫어요. 아직도 정말 많이들 굶어요. 제가 만나는 아이들 중엔 누군가와 밥을 같이 먹는 게 처음인 경우도 많아요. ‘혼밥’ ‘집밥이라는 말이 자주 쓰이는 것도, 서로 어울려 함께 밥 먹는 일이 그만큼 결여되어 있다는 방증이지요. 그러면서 우리 사회가 더욱 강퍅해진 거 같아요. 애들 만나다 보면 밥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더 들죠. 제 정체성은 같이 밥 먹는 사람이에요.

 

같이 밥 먹으면서 체감하는 우리나라 청소년 상황은 어떤가요.

너무 아파요. 초기엔 60-70%가 사회와 어른의 책임이라고 생각했었다면, 지금은 100% 사회와 기성세대의 문제라는 결론을 낼 정도로 아이들이 정말 많이 아픕니다. 저는 평생 이 일을 하며 살겠지만, 결코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사실을 갈수록 뼈저리게 체감해요. 사회 구조가 변하지 않으면 안 돼요. 아이들 문제의 모든 근원이 어른과 사회라는 건, 예를 들어 우리는 이혼 가정이에요라고 말하는 아이들이 많은데 그들이 발생시킨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아이들은 착해서 자기 잘못이 있다고 여겨요. 희생되는 거죠. 지금은 소년원도 불우한 아이들만 들어가는 곳이 아니에요. 사교육 잘 받고 외국어를 몇 개 국어씩 하는 아이들도 탈선해서 들어가요. 어른들이 너무 누르거나, 혹은 너무 보호하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아이들의 아픔에 너무 동화되다 보니 어른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는 한동안 못 가겠더라고요. 어른들이 미워서요. 교회 오후예배 특강을 가면 어머니들 너무 미워요라고 시작할 정도로요. 저도 올초 상담을 받았어요. 우리 애들의 아픔과 울분이 제 안에서 사그라지지가 않아서요. 아픈 아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대다수 희생자가 청소년이어서 세월호 참사가 더 피부로 다가왔을 것 같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면, ‘지금사랑하는 수밖에는 우리 사랑을 장담할 수가 없겠단 생각이 들어요. 안산에 두 번 연속 특강을 간 이후에 세월호 참사가 났습니다. 강의를 들은 아이들 중에도 세월호 탑승자가 있었어요. 얼마 전엔 한 친구를 상담하는데,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다면서, 자기 이야기를 들어줬던 친구가 세월호에 탔었다고 하더라고요. 그 아이는 유일한 친구를 잃은 거예요. 세월호는 제게도 절실히 와닿는 일이에요. 그러다 보니 마음이 잘 조절되지 않을 때도 있어요. 유독 교회에서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이야기는 하면 안 된다거나, 세월호 배지를 달면 안 된다고 그래요. 답답하고 억울한 점을 나열하자면 밤을 새워야 할 정도죠.

 

교회에 가장 결여된 것이 무엇일까요?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품는 힘이 없어요. 우리 시대는 자궁의 힘이 필요한 시대 같아요. 보통은 아버지의 부재로는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경우가 드물어요. 그러나 엄마에 대한 결핍과 상처는 다른 것으로 채워지기가 어려워요. 내 새끼들 중에도 엄마의 부재를 겪은 아이들의 상처가 더 깊어요. 여자 아이들은 엄마의 부재가 더욱 크죠. 처음 브래지어를 구입하거나 위생팬티를 사는 일부터 해서, 성적인 문제를 어디에다 털어놓겠으며, 임신이라도 하면 누구한테 말할 수가 있을까요? 어느 날은 우리 딸 위생팬티를 사면서 다른 아이 것까지 사서 건넸는데, 그 아이가 고맙다면서 울어요. 저도 엄마의 부재를 겪었는데, 과연 한국교회 안에 그런 모성이 있나요? 교회에 그런 품이 있나요? 교역자도 거의 남자, 강사들도 다 남자, 제가 볼 땐 여성은 없다 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부계 중심이에요. 하나님은 여성도 남성도 아닌데 말이죠. 국회에 아직도 여성 의원이 부족하지만, 교회는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에요. 지금은 엄마가 필요한 시대, 언니가 필요한 시대인데 말이에요.

 

자궁의 힘이 필요한 시대라는 얘길 하셨는데요.

그 힘은 여성이 타고나는 것 같아요. 제가 엄마의 부재를 겪고 애기도 낳은 엄마라서 느끼는 특수성일 수도 있겠지만, 여성주의와 무관하게 이미 여성이 갖고 태어나는 힘이라는 걸 느낄 때가 많아요. 미혼모 친구도 같이 산부인과에 가서 임신 사실을 확인하면, 일단 아이를 뱃속에 가질 수 있다는 감격을 느껴요. 임신을 하면 아기는 아주 작은 점이지만, 그 자체로 감격이고 생기자마자 내 새끼로 받아들여져요. 출산할 때까지 품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자궁은 제게 보여주신 하나님 마음이기도 하고요.

 

구체적으로 풀어 주신다면요.

보통 작가는 한 장르로 쭉 가야 경력이 쌓이고, 소위 장사도 더 잘 되거든요. 그런데 동화로 쭉 가게 하지 않고 태교이야기를 쓰게 하시고, 청소년을 주제로 쓰게 하시니까 하나님한테 물었던 적이 있어요. 왜 이렇게 여러 가지를 같이 하게 만드시느냐고. 그때 하나님이 주신 생각이 자궁이었어요. 자궁을 보여주시더라고요. 내가 너에게 임산부를 주든, 청소년을 주든, 네 자궁에 주면 모두 다 네 새끼라고 하시면서요. 정말 그렇더라고요. 임산부여서 품지 못할 것도 없고, 청소년도 노랑머리든 파랑머리든 빨강머리든 내 자궁에 품으면 내 새끼 되는 거잖아요. 교회에도 이런 자궁의 힘이 필요해요.

 

 

사실 엄마라는 건 정말 너무 힘든 일이에요. 농사짓는 게 더 수월할 거 같아요. 안 해봐서 그런 말 한다고 하셔도 어쩔 수 없지만, 제가 해온 모든 일 중 엄마 노릇이 가장 힘든 일이었어요. 정답도, 기준도 없이, 무조건적인 품이 되어주어야 하니까요.

 

하나님과 친밀해보여요.

제가 겪은 엄마의 부재를 하나님이 채워주셨어요. 정말 따뜻했지요. 하나님 말고는 어디 이야기할 데가 없었어요.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빠는 교회를 반대했고, 아빠에게서 독립하고 싶어서 일찍 시집을 갔는데 이번엔 시댁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요. 노트북 살 돈도 없어서 글을 다시 쓴다는 엄두조차 못내던 때도 있었고요. 양쪽 집에 경제적 원조를 해야 하는 입장에서 주부 모니터 알바로 살림 비용을 충당하기도 했어요. 남편은 그동안 제 일을 응원하면서도 마음은 모르겠다고, 그런데도 제가 6년이나 하니까 오래한다고 해요.(웃음) 지금은 많이 생겼지만, 제가 모태신앙도 아니어서 신앙의 동지가 늘 있던 것도 아니었어요. 날라리 친구들 만난다고 온갖 말 듣고, 제가 하는 건 다 지지받지 못했죠. 내편이 하나님밖에 없었어요. 워낙 제가 틀이 없는 사람이라서 기도도 따지듯이 했다가, 대화하듯이 하다가 그래요. 길 다가가도 미친 사람처럼 하나님께 말 걸고 물어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처럼 틀이 없어서 살아가는 게 힘든 아이들을 만나게 하시는 것 같아요. 늘 물어보고 나서 시도하고, 길이 아니면 돌리실 거라고 믿어요. 맞으면 계속 가는 거고요.

 

엄마의 부재를 겪었다고 했는데, 문득 어떤 분이셨는지 궁금하네요.

유일한 친구였어요. 아버지는 잘못을 교정하는 이미지라면, 엄마는 잘못을 저지르고서 이미 아파서 울고 있는 나를 그냥 안아주는 분이셨죠. 아빠가 때리고 나가면 엄마가 된장을 발라주셨어요. 의학적으로는 좋지 않다지만, 회복이 됐어요. 제가 우리 아이들에게 진짜 엄마는 되어 주지 못하더라도, 그런 된장만 될 수 있다면 아이들을 살릴 수 있겠다 싶어요. 똑똑한 소리하는 건 제 역할이 아니에요. 이미 지식은 채워주는 곳이 너무 많아서 아이들이 더 잘 알고 있고요. 아이들은 결코 가르치는 교육으로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신앙생활은 언제부터 시작한 건가요.

어릴 때부터 이상하게 교회 가고 싶은 맘이 있었어요. 아버지의 외가는 기독교인이 많은데 아버지가 워낙 교회를 싫어하셔서 가기가 어려웠어요. 아버지의 작은아버지가 목사가 되자마자 돌아가셔서 교회 다니면 죽는다가 할아버지 입버릇이었고, 아버지는 교회가 보이면 침을 뱉을 정도였어요. 교회 간다고 하면 무조건 맞았어요. 그런데 이모할머니들이 워낙 저를 교회 다니게 하려고 하셨어요. 교회를 나가게 된 건 동네에 새로 생긴 개척교회 목사님 덕분이었어요. 그 목사님이 전도하러 다니다 우리집 앞에만 오면 머리가 아프셨대요. 하루는 아버지 혼자 집에 있을 때 전도하러 왔는데,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어 보니 주보를 건네면서 교회 나오시라고 하니 아버지가 됐다면서 손사래 치다가 주보를 떨어뜨리셨지요. 아버지가 주보를 주워주며 예수쟁이 싫어하니 다신 오지 말라고 얘기하다, 얼핏 주보에 적힌 목사님 성함을 봤는데 같은 오 씨더래요. 따져 보니 한 본관 조카뻘이고, 행패 부린 것도 미안하고 해서 딸을 보내겠다고 하신 거지요. 그게 제가 교회 나간 계기예요. 그렇게 해서 19살부터 교회를 다니게 됐지요.

 

대학생 때 운동권이었다고 했는데, 교회 생활이랑 잘 맞던가요?

데모하던 친구들은 워낙 더불어마인드가 강해요. 저는 성경에 그 마인드가 깔려 있다고 봤거든요. 게다가 민중가요와 찬송가가 너무 비슷하다고 느꼈고요! 그러니 교회 가면 너무 좋고, 자연스레 빠져들었어요. 어릴 때부터 소외된 이웃에 관심이 많았는데, 하나님이 주신 마음 같아요. 우리집도 없는 형편에 집에서 몰래 뭐 가져가서 어려운 할머니들 가져다 드리고 그랬거든요.

 

제 모토는 지금천국을 사는 거예요. 교회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제 마음이 지옥이어서 너무 힘이 들었어요. 그런데 불현듯, 엄마가 천국에 있고 내가 믿는 하나님도 천국에 계시니 내가 여기서 천국을 살아야 그들과 같이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부터 지금 천국을 사는 사람이 인생 모토가 되었습니다. 지옥 가운데 있는 우리 아이들을 만나면 가슴 아프지만, 그럼에도 어떻게 천국을 사는가를 늘 고민해요. 제 모든 강의 주제이기도 하고요. 상황이 변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지금 천국을 주셨다는 게 제 믿음이고, 아이들도 그 길로 초대하고 싶어요.

 

오선화5.jpg» ▲ 오선화 작가가 집필한 책들. 30종이 넘는다.

 

힘이 들 때가 있을 텐데요.

체력과 건강 상태가 많이 안 좋아지긴 했어요. 탈모에 수면장애도 있고 공황장애도 왔었고, 불면증은 그냥 달고 살아요. 아이들 재판이 있고, 합의를 해야 하고 그럴 땐 제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해요. 피해자 만나서 빌고 또 빌어야 하거든요. 제가 벌레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강의할 땐 좀 있어 보이기도 하는데 말이죠.(웃음) ‘맨날 지기만 하고 이러다 뽕빨나겠다생각이 들면 로마서 837절 말씀을 떠올려요.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새번역)

 

간신히 이기게만 해달라고, 어떻게 맨날 지냐고 하나님께 묻는 저에게, 이기고도 남는다는 말씀은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자존감을 회복하는 계기였지요. 제가 사람들 앞에서 벌레처럼 빌지언정,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으면 안 되겠더라고요. 갑을관계로 생각할 필요가 없어졌고, 이 싸움이 결코 내가 지는 게 아니구나 하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잠언 169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개역개정)는 말씀도 신혼시절 힘들 때부터 쭉 품고 살아가요. 어려운 제 형편에 스스로 자존심이 너무 상해서 자식을 똘똘하게 키우려고 무진 애를 썼는데, 아무리 애써도 도대체 우울한 마음은 없어지질 않더라고요. 처음으로 아이를 떼놓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을 때 류승완 감독의 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를 봤는데, 엔딩 후 블랙아웃 때 뜬 구절이 그 말씀이었죠.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어요. ‘내가 하나님을 가두어놓고 스스로를 옭아매다보니 마음의 평화가 없었구나했죠. 그때부터 하나님께 묻는 습관이 생긴 거예요.

 

지금 하는 일을 언제까지 계속 하실 생각인가요.

저도 모르겠어요.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지만 매일매일, ‘오늘하고 있어요. 그렇게 시간이 흘러왔어요. 사실 교회에서 비전반을 처음 시작할 때는 우리 애들이 스무 살 되면 졸업시킨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럴 수 없었어요. 지속적으로 돌봄이 필요했으니까요. 그래서 지속의 영성을 고민합니다. 일회성 만남은 아이들에게 별 도움이 못 돼요. 시간이 쌓여야 한 사람의 마음이 열리는 법이죠. 아이들이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죽겠다고 자해하는 친구를 구해달라면서 제게 데려와요. 어른들은 누가 옆에서 죽어가도 잘 모르거나 그냥 내버려 두는데, 아이들은 서로를 살리려고 하지요.

 

이 글은 <복음과상황>(http://www.goscon.co.kr)에 실린 것입니다.

원불교 향타원 박은국 종사 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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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타원박은국.jpg» 향타원 박은국 원정사


 원불교 교조이신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의 친견제자 초대 원불교 서울교구장을 지낸 향타원 박은국 원정사가 6일 오전6시에 부산 배내청소년훈련원에서 열반했다. 세수 95세, 법랍 77년


 고인은 1923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 1940년 전무출신을 서원하고 1986년 부산교구장으로 봉직하다 1992년 퇴임해 배내청소년훈련원에서 수도해왔다.

 고인은 소태산 대종사를 친견하고 유업을 받들어 평생을 원불교 교화의 터전을 닦는데 헌신하며 일심원력과 근면검약한 수도자의 자세로 원불교 안팎의 존경을 받았다.

 고인을 오랜 기간 모신 김순익(61. 용암교당)교무는 ‘평생을 기도와 선(禪)으로 득력을 하고 현실 생활에서 그 힘을 실현 한분’이라고 고인을 회상했다.

  고인은 10년 전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공산주의자에 대해서도 반공 멸공보다는 구공(공산주의자를 구제함)해야한다'고 한 대산 김대거 종사의 말을 빌러 "누구도 죽여서는 안된다. 다 살려야 한다"며 구활창생을 주창했다.

 장례는 원불교 교단장으로 치러지며, 빈소는 전북 익산 원불교 중앙총부 향적당에 마련됐다. 발인은 6월 08일(목) 오전 10시 30분 원불교중앙총부 반백년기념관에서 진행된다. 장지는 익산 금마 원불교 영모묘원이다.  (063)850-3365


우리가 함께 사는게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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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열 ‘초교파 수도공동체 테제’ 수사


결점 투성이 우리가

 함께 살아내는  기적

-신한열수도복.jpg» 지난4월 타이완에서 청년들의 기도모임을 이끌고 있는 신한열 수사. 사진 데이비드 판 제공


1980년대 박종철과 한집서 하숙

최류탄 맞은 이한열과 같은 이름

민주화운동 두주역과 인연


그러나 테제의 독신수도자로 다른길

26살에 잠깐 머물려고 갔다가


사람을 긴장시키지 않아서 좋아

어느덧 30 몸담고 있다


 나치 학살  유대인 숨겨주고

전후엔 독일군 포로를 맞이했다


 국적 종교 성향 다른 100여명 모여 산다

개신교 가톨릭 불교도 무신론자

1 내내 젊은이 모임도 연다


 누군가가 얘기하면  끊지 말고 

 10초씩은 침묵하며 기다려라

 

 

둘이 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그런데 국적종교성향이 다른 이들이 함께  사는 일이 녹록할  없다그런데도 서로 존중하는 일치의 삶으로 세계인들을 치유하는 공동체가 있다프랑스 동부 작은 마을 ‘테제

 1940 스위스 출신의 로제 수사가 시작한 에큐메니컬 수도공동체인 테제(국내에서는 ‘떼제 알려짐) 2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학살을 피해 도망쳐  유대인들을 숨겨주고전후엔 독일군 포로들을 맞이했다개신교회 출신들이 시작했지만 점차 가톨릭 출신들도 입회했고 오늘날 30개국에서  수사 100여명이 그리스도교 초교파 남성 독신수도자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테제의 수사들은 일체의 기부나 헌금을 받지 않고 자기들이 만든 도자기와 기념품을 공동체에서 팔아서 살아간다그러면서 20여명의 수사를 브라질방글라데시쿠바한국세네갈에 파견해 화해와 일치를 돕고 있다.

 테제가 유명해진 것은 젊은이들의 성소가  때문이다일요일부터 다음주 일요일까지 일주일 단위로 연중 계속되는 젊은이 모임엔 주당 5천여명이 모일 때도 있다 모임엔 개신교·가톨릭뿐 아니라 무신론자불교도까지도 함께한다


 

박종철과 한때 같은 집에 하숙

  테제에 한국인 신한열(55) 수사가 처음  것은 1988 26 때였다. 3개월간 예정으로  체류는 이제 30년을 앞두고 있다그가 <함께 사는 기적>(신앙과지성사 펴냄) 출간했다그의  책이다방한 중인 그를 만나 “ 테제 수사의 삶을 택했느냐 물었다그는 “사람을 긴장시키지 않은 분위기 때문이었다 했다.

 대구에서 태어나 자란 그가 서강대에 다니던 1980년대는 억압과 긴장의 시대였다그가 하숙하던 신촌 서강대 정문 앞집엔 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박종철이 대입 재수를 하면서 형과 함께 머물렀다그는 부산 말씨의 박종철을 조용하고  예의 바른 친구로 기억한다아침에 수돗가에서 세수할 때면 간혹 먼저 나와있던 종철이는 “행님 먼저 하이소라고 양보하곤 했다고 한다 인연으로 박종철이 물고문으로 죽은  그는 부산의 종철이 부모님 댁을 찾고사찰의 제사에도 참석했다그는 1987년엔 민주화시위 도중 사망한 연세대생 이한열의 장례식에도 참석했다대학 4학년 2학기 때부터 가톨릭의 <생활성서기자로 활동하면서 노숙자와 일용직 노동자진폐증 환자  고통받는 이들을 찾아 취재를  것도 종철이와 한열이가 못다  것을 조금이나마 대신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테제에서 ‘한열 불리는 그는 한국인 청년들에게 “저는 이한열이 아니고 신한열입니다라며 ‘이한열 되새겨주지만요즘 청년들은 이한열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아 서글퍼지곤 한다.

 그는 지금도 상처와 아픔의 현장을 찾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지난달엔 개신교·가톨릭 청년들과 함께 제주에서 ‘평화와 화해의 순례 했다그는 제주 4·3학살을 피해 민간인들이 숨어 있던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의 좁은 천연동굴인 큰넓궤에 들어갔다가 어둠 속에서 바위에 갈비뼈를 부딪혀 골절상을 입었다.



 밖보다   내부투쟁 시작

 그런 그가 수도자의 삶을 택했을  고국의 친구들이 “그곳에서 도무지  하고 있느냐 아우성을  만했다하지만 그는   투쟁을 선택했다밖을 향한 투쟁이 아니라 내부를 향한 투쟁의 시작이었다끼리끼리만 아니라 타인들과 함께한다는 것은 끝없는 자기 수련을 요하는 것이었다.

 그가 테제살이를 시작한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프랑스 수사가 너무 까칠해 무서웠다그는 결국 테제의 지도자인 로제 수사에게 이를 고백했다그러자 로제 수사는  수사의 힘들었던 삶을 설명해주며, ‘관계의 어려움이 한열의 잘못 때문이 아니다라고 말해줬다훗날 보니  수사는 아픈 형제들 곁을 밤새 지키곤 했다겉보기와 달리 따스한 마음도 있는 사람이었다

 갈등의 대부분이 상대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안다는  중요성을 깨닫는 계기였다. 10년째 개신교·가톨릭인이 함께 만나는 모임과 한국·일본·중국인들의 청년 모임을 이끌어온 그는 “직접 만나보면누군가로부터 들은 편견과 달리 같은 인간이고 그들도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놀라는 경우가 많다 했다.

 그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무슬림들에 대해 갖는 편견도 만나지 않고 대화하지 않고 알지 못하는 데서 기인된 것이라고 본다프랑스에서도 무슬림에 대해 가장 배타적인 곳은 무슬림 난민이 가장 적은 곳이어서 무슬림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는 지역이라고 한다그는 최근 옛소련 점령지였던 라트비아에서 4개월간 지내면서, “우리나라에서 태극기를  노인들도 그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했다.


 -신한열제주.jpg» 제주에서 열린 평화와 화해의 순례 중 공동기도. 사진 이주현 제공라트비아에서 노인들이 옛소련 점령 시대를 그리워하는  보았다자기들이 그래도 젊은 시절무엇인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절과 일치한다광화문에 태극기를 들고 나온 이들도 존재감을 상실해버린 현재가 아니라 존재감 있던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일  있다.”



 관계 소통 경청의 기술 필요 

 한국에서 살아온 세월 이상을 떼제에서  그는 특히 한국인들이 관계에 힘든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한국인들은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어떻게 말할까 등을 지나치게 의식하고남에 대해 지나치게 관심이 많다친척들가족들간에도 선을 넘지 않은 것이 좋다지나친 관심과 간섭이 관계의 피로를 가져온다건전한 거리가 필요하다우리를 이를 ‘거룩한 무관심이라고 부른다 하나는 표현이다물어보거나 들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문제다. ‘그걸  말로 해야하나 상대가  이해해주기를 바라며 기대를 높이는 것도 필시 실망과 상처로 이어질  있다.”

  그가  하나 강조하는 것은 질문과 의문과 회의다. ‘나는 하느님이 있는지 모르겠다거나 ‘도무지 기도가 안된다 말도 꺼내놓도록 한다그는 깊은 신앙보다는 질문을 가지고 테제에 오라고 권한다그리고 어떤 질문이든지 하라고 한다그는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성경조차 모든 질문에 시시콜콜 답해주지않는다고 말한다삶은 너무도 복잡하고 도무지 해답을 찾을  없는 경우도 있따.  세월호 사건과 역사의 고통들에 대해어떻게 교리문답하듯 답해줄  있느냐는 것이다대답 없이 같이 앉아있어주고같이 아파해주고함께 침묵해줄수밖에 없을 때도 많다는 것이다그런데도 질문하라는  그의 권유다.

 “솔직한 질문이 준비된 답보다 낫다.”


-떼제2.jpg» 매년초 종신서약을 갱신하는 수사들. 사진 테제공동체 제공-테제1.jpg» 프랑스 테제공동체 공동기도. 사진 테제공동체 제공-떼제1.jpg» 테제공동체에서 동료들과 침묵기도중인 신한열 수사. 사진 이주현 제공

 

이념갈등보다   장애는 무시·차별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테제에선 공동기도와 노래침묵 말고도 소그룹 대화를 중시한다소그룹은 7~10명으로 구성돼 하루  시간씩 대화를 한다테제가 제시하는 대화의 기술이 남다르다.

 “‘베를린이 프랑스의 수도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도 틀렸다고 하지 마라 생각은 다르다고만 말하라이곳은 토론하고 논쟁하는 곳이 아니다누구의 얘기도 틀리지 않다옳다 그르다를 따지지 말고 충분히 들어라누군가가 얘기하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견을 말하기도 하는데그러지 말고 10초씩은 침묵하며 기다리라상대에게 반응하지 않고자기 느낌을 말하라 한다대화에서  사람이 얘기를 독점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그래서 선출된 애니메이터(그룹장) 주요 역할은 너무 장황한 얘기는 중지시키고 골고루 얘기를 하게 한다연필을 나눠 주어  연필을 넘겨받은 사람만이 대화를   있도록 하기도 한다.”

 북녘 동포 돕기에도 애썼던 그는 이념갈등보다 더욱  장애를 편견으로 인한 무시와 차별이라고 본다

 강남이 강북을서울이 지방을한국인이 북한인과 동남아시아인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것이 더욱  일이다통일도 이념갈등에 매몰된 노인들이 아니라 젊은이들이 만들어갈 텐데그들이 편견·차별을 당연시한다면 이념갈등보다 더욱  일이다.”

 그래서 그는 “김일성대학과 김책공대 학생들이 포항공대에서 공부하고북한 의대생들이 남한 의대에서 실습하고남한의 학생들이 북에서 공부해 서로 만나서 알아가고친구와 동창이 되어 벽을 하나씩 넘어가야 한다 말했다

 그가 말하는 기적은  위를 걷거나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그는 “결점과 자기모순을 지닌 우리들이 함께 살아내는 것이 바로 기적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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