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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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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병 날리는 명상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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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대로 보는 마음챙김

우울증  현대병 잡는다


-파도위얼굴.jpg» 일상적 삶의 파고 속에서도 마음챙김을 하면 스트레스와 불안, 우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다는 티베트 속담 있다

 불안한 사람 생각은 미래로  있고

화난 사람은 과거로  있다고 한다

 마음챙김은 부처 깨달음 이끈 수행법

서구에서 톻증·인지 치료로 응용

심리학교수 정신과의사 스님 모여

마음에 대한 세미나를 열었다

 마음이 경험하는 세계 실제와 다른데

덧붙이고 꾸며 착각·왜곡해 고통 불러

 생각 렌즈 거치지 않는 직접경험 위해

그대로 알아차리고 본래성 회복 필요

 


명상고수들이 말하는 치유 효과

아프리카 초원에서 숨은 사자 무리가 얼룩말떼를 공격할 기회를 노린다. 텔레비전 동물프로그램에서 익숙한 풍경이다. 마침내 사자들이 사냥에 성공하고, 얼룩말떼들은 눈 앞에서 동족이 사자밥이 되는 것을 지켜본다. 그러나 잠시 뒤면 얼룩말들은 초원에서 평화롭게 풀을 뜯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이다.


 영국 옥스퍼드대 임상심리학 명예교수 마크 윌리엄즈가 ‘평화로운 얼룩말떼’의 사진을 보여준다. 인간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그런 피해상황이 발생하지않아도,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게 인간이다. 더구나 ‘불안사회’인 지금은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란 티베트 속담이 다시 회자될 정도로 걱정이 머리를 가득 채우고, 몸에 병까지 유발한다. 번아웃(소진)증후군이나 불면증에 시달리는 것도 걱정 스위치가 좀체 꺼지지않는 때문이다. 세계보건기구가 삶의질을 떨어뜨리는 최고 원인으로 지목한 우울증 환자도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눈사과.jpg» 마음챙김은 보태거나 빼거나 왜곡하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그림 보리수선원 제공


우울증 재발 가능성 30% 낮춰

 이런 현대병의 치료법으로 서구에서 떠오른게 ‘마음 챙김’(mindfulness)이다. 걸을 때는 오직 걷는 행위에만, 먹을 때는 오직 먹는데만 집중해 번뇌망상이나 판단분별 없이 자신의 행위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게 ‘마음챙김’이다. 마음챙김이란 고타마 싯다르타와 제자들을 깨달음으로 이끈 수행법인 ‘위파사나’에서 나온 것이다. 


 이 마음챙김을 현대병 치료에 활용한 대표직인 프로그램이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마음챙김’(MBSR·Mindfulness-Based Stress Reduction)이다. 이 프로그램은 미국 매사추세츠주립대 의과대 명예교수인 존 카밧진 박사에 의해 1979년 미국에서 시작돼  미국의 수백개 병원에서 통증 치료 등을 위해 활용되고 있다. 


 이를 계승해 우울증 치료로까지 발전 시킨게 ‘마음챙김 인지치료’(MBCT·mindfulness-based cognitive therapy)다. 이 프로그램은  우울증의 잦은 재발을 막기 위해 고안됐다. 이 프로그램에선 8주동안 시디를 들으며 매일 명상기술을 연습해 생각, 감정, 감각을 알아차리게 하고, 이것들이 ‘진실’이나 ‘나’가 아니며, 단지 생각, 감정, 감각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런 알아차림이 조금씩 명료해지면 탈중심화가 일어나 생각이나 감정을 더욱 더 키우는 우를 범하지않게 된다고 한다. 이 프로그램은 우울증 재발 가능성을 30퍼센트 가량 낮춰 영국 국립보건원은 이 프로그램을 1차 치료로 권유하고 있다. 


 -붓다랏기타.jpg-마크윌리엄즈.jpg-세미나.jpg-세미나장.jpg

한국엠비에스아르(MBSR)연구소 주최로 열림 마음챙김 세미나



성공회 사제지만 심리요법으로 활용

 이 프로그램을 창안한 영국 옥스퍼드대 임상심리학과 마크 윌리엄즈 명예교수가 최근 방한했다. <우울과 불안, 스트레스 극복을 위한 8주 마음챙김 워크북>(불광출판사 펴냄) 발간에 맞춰서다. 지난달 22일엔 ‘한국MBSR연구소’ 주최로 서울  종로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마음챙김 세미나가 열렸다. 이 워크숍엔 윌리엄즈 교수와 위파사나 수행자인 보리수선원장 붓다락키타스님, 상도선원장 미산 스님, 한국명상 심리상담 연구원장 서광 스님, 정신과의사 전현수 원장, 한국 MBSR연구소 안희영 소장 등이 나와 발표하고 토론을 벌였다. 윌리엄즈 교수는 성공회 사제다. 참가자들은 ‘마음 챙김’이 불교에서 비롯됐지만, 종교적 영역을 넘어 현대병을 고치기 위해 크리스찬이건 무종교인이건 상관없이 누구나 활용할 수 있는 심리요법이라고 강조했다.


 이들 명상 전문가들이 말하는 마음챙김이 필요한 이유와 효과는 무엇일까. 먼저 붓다 락키타 스님은 ‘우리가 보는 것’의 실제를 설명했다. 그는 “물이 반이 담긴 컵을 똑같이 보고도, 한사람은 ‘반이나 남았다’라고 안심하는데, 다른 사람은 ‘반밖에 안남았잖아’라며 아쉬워할 수 있다”며 “위파사나는 더하지도 빼지도 말고 실제를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것인데, 이는 ‘지켜볼 수 있는’(마음 챙김) 힘이 있을 때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마음이 경험하는 대상이 우리가 사는 세계다”고 말했다. 우리가 아는 세계는 실제 세계가 아니라 자기 마음이 경험하는 세계라는 것이다. 그는 “(마음챙김 없이 사물을 보면) 마음이 덧붙이고 꾸미고 의미를 부여해 착각하고 왜곡하고 미혹하게 된다”고 말했다.  


 서광 스님도 ‘마음챙김’이 필요한 이유로 ‘인지 왜곡’을 들었다. 그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인지, 지각, 정서는 왜곡되거나 치우쳐 있기에 고통과 갈등을 유발한다”며 “마음챙김은 왜곡과 편견을 줄이는 정신훈련”이라고 말했다. 그는 “생각의 렌즈를 거치지 않는 직접적 경험을 위해 현재 순간에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림으로서 고통을 소멸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진을 빼는 것과 영양 공급해주는 

 미산 스님은 ‘불교 명상 수행’의 이유를 ‘몸과 마음의 본래성을 회복하기 위한 것’으로 정의했다. 그는 “생각과 감정, 그리고 오감 정보로부터 자유로운 본래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마음챙김(사티)을 바탕으로 한 집중명상(사마타)과 통찰명상(위파사나)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불교명상을 정신치료에 활용하는 전현수 원장은 “우리 마음이 현재에 머물지 못하고 과거나 미래로 많이 가 있을 때 정신 건강에 문제가 생긴다”면서 “불안한 사람은 생각이 미래로 가 있고, 화가 나 있는 사람은 보통 과거로 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 머리 속에 든 생각, 의지, 감정을 적절히 처리한다면 괴로움 없이 살 수 있다”면서 “불건전한 정신이 축적되는 것을 줄이고, 건전한 정신이 축적되도록 해 정신건강을 회복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날 세미나를 주최한 안희영 소장은 “마음챙김 프로그램이 서구 주류사회에서 받아들여진 이유는 ‘주의력을 근육운동처럼’ 표현하는 등 영적인 언어를 피하고 상식적인 언어로 접근했기 때문”이라며 “규칙적으로 매일 시간을 정해 현재에 주의를 의도적으로 가져와 매순간 알아차리기를 하다보면 뇌구조와 면역계가 긍정적으로 변화되는 결과가 미국 학계의 연구에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윌리엄즈 교수는 일상적 우울증 탈출을 위한 현실적 방법을 소개했다. 그는 “먼저 자기의 전형적인 활동을 △출퇴근 △보고서 작성 △잠 △식사 △음악 듣기 등으로 나열해보고, 이 중에서 자신의 진을 빼는 것과 영양을 공급해주는 것을 구분하라”면서 “영양을 공급해주는 건 없애고 진 빼는 일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면 탈진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가족이 시한부 선고를 받았을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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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병.jpg


 말기 환자들에게 병의 상태나 향후 진행방향을 솔직하게 이야기 해 주는 것을 통상 ‘나쁜 소식 전하기’라고 말한다. 난 이 말이 마음에 안든다. 물론 병이나 죽음이 기쁜 소식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병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하고 또 그 병이 앞으로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해주는 것을 나쁜 소식이라고 하면 그 누구도 나쁜 소식을 환자에게 알려주는 것을 불편해 하기 마련이다. 


 죽음 교육이나 호스피스 강의를 가서는 늘 강의를 듣는 대상자에게 물어본다. ‘당신들이 어느 날엔가 질병이 걸리거나 혹 죽음에 이르는 임종 말기가 되면 여러분에게 가족이나 의료진이 진실되게 상태를 이야기해주기를 원합니까?’ 거의 예외없이 ‘예’라고 대답한다. 그럼 또 묻는다. ‘그러면 여러분은 최근에 여러분 주변의 가족이나 친지, 친구들이 그런 상황일 때 백프로 진실되게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까?’ 그러면 대답은 거의 ‘아니요’이다. ‘나쁜 소식’을 못 전하겠단다. 왜 그럴까. 분명히 그 사람들도 당신들처럼 알고 싶었을텐데.... 


 위암으로 사망하신 배씨 아저씨는 기존의 병원에서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31년 동안 내 아내와 두 아들에게 권위 있는 남편, 아버지로 살아왔다. 그런데 내가 병이 걸리니까 특히 치유할 수 없는 암이 걸리니까 나에 대한 이야기를 나만 빼놓고 지들(의료진과 가족들)끼리 쑤근거리고 결정한다 나는 소외감과 배신감을 느껴서 더 이상 살고 싶지가 않다. 마치 내가 집안의 붙박이 장이나 통나무로 취급당하는 것 같아 31년 동안 헛 살았다는 생각이 들고 인생이 허무해진다’ 왜 우리와 함께 살았던 가장을, 아버지를 우리 집안의 대들보로, 기둥으로, 삶의 중심으로 이별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짐에도 불구하고 나쁜 소식이라며 질병이나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이야기하지 않아서 스스로를 붙박이장이나 통나무로 취급당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떠나게 하는 것일까. 이렇게 가족을 떠나보내고서는 남겨진 이들은 늘 후회를 한다. 사랑한다고 말했어야 하는 데, 미안하다고 용서를 청했어야 하는데,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보냈어야 하는 데.... 


 사망자의 27.9%가 암으로 사망한다. 암이라는 병은 치료할 기회도 주고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느끼면서부터 가족들과 함께 이별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기도 한다. 사별가족 모임을 하다보면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나 심장마비 등으로 사망한 가족들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호스피스에서 가족을 떠나 보낸 분들을 부러워한다. 당신들은 치료도 해줘보았고 떠날 것을 알고 이별준비도 하지 않았느냐면서 부러워하던 그들은 나중에는 그들을 원망하기까지 한다. 할 것 다하고 보낸 당신들은 뭐가 그리 아쉽냐고... 내 남편은 아침에 출근했다가 교통사고로 즉사하여 돌아오지 못했다고, 등산을 가겠다고 힘찬 발걸음으로 대문을 나선 딸이 실족사로 영 이별을 하게 되었다고, 수학 여행을 가던 아이들이 3년이 지나도 그 여행을 끝내고 돌아오지 않았다고.... 

 아쉬운 이별이지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떠나가는 이와 남는 이를 위해 진실을 공유하며 그 시간을 잘 보내야 하지 않을까.

  

스님이 만든 기독교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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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1.jpg» 예수그리스도의 <산상수훈>이란 영화를 만들어 모스크바영화제에서 호평 받은 대해스님



한국의 비구니 스님이 세계 4대 영화제 중 하나인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일’을 냈다.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다룬 영화로 말이다.


  <산상수훈>의 감독인 경북 경산국제선원장 대해(58·본명 유영의) 스님을 6일 서울 인사동에서 만났다. 지난달 22~29일 러시아 모스크바영화제에 참석하고 귀국한 스님은 국제 영화계의 환대가 믿기지않은 듯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산상수훈>은 8명의 신학대학원들의 문답으로 이뤄졌다. 공간도 오직 동굴 한곳으로 단순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들이 던지는 질문들이 단순하지 않다. 질문은 ‘정녕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갈수 있는가’,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최고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라면 빨리 얼른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다면서 왜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가’, ‘하나님은 인간이 따 먹을 줄 알면서 왜 선악과를 만들었는가’, ‘아담이 죄를 지었는데, 왜 내가 죄가 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어떻게 해서 내 죄가 사해지는가’ 등이다. 하나같이 기독교에서 금기시하거나, 궁금해도 물을 수조차 없던 것들이었다.


 이렇게 ‘불순한’ 질문으로 가득한 영화를 기독교 국가인 러시아의 대표영화제가 스펙트럼 섹션에 초청했다. 이 섹션은 국제적인 거장들의 신작을 초청한다. 또한 대해스님을 심사위원으로도 초청했다.


-_산상수훈.jpg» 기독교에서 금기시된 질문들을 주고 받고 있는 영화 <산상수훈>의 동굴 모습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산상수훈이> 상영되자 예상외의 반응이 나타났다. 통상 15분 내에 끝나게 마련인 ‘관객과의 대화’가 한시간 넘게 이어졌다. 그 뒤 러시아의 대표적인 신문잡지에서 대서특필 되고, 방송에 소개됐다. 러시아정교회와 가톨릭 사제와 수도자들도 보고 “놀라운 영화”라며 경탄했다. 이로인해 에스토니아의 탈린영화제, 불가리아의 소피아영화제 등 6개 영화제도 그를 초청했다. 러시아철도청은 고속열차 삽산의 객실에서 2개월간 이 영화를 상영하기로 결정했다.


 대해 스님은 이런 반응들에 대해 “우리 자신들도 영화계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다”고 했다. 모두가 재미있는 상업영화만을 고대한다고 믿고 있지만, 실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답하는 철학적이고 지적인 영화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26살에 대구 동화사 양진암으로 출가해 평범한 승려의 길을 걷던 그는 10년 전 돌연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중국 선양에서 4년간 포교하기도 했던 그는 어떻게 진리를 대중적으로 널리 알릴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가장 대중적인 영화를 만들 생각을 했단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신학도 철학도 따로 공부한 적이 없는 그가  이런 시나리오를 써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설명되지않는다. 그의 영화들은 인류 정신사의 핵을 뚫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그의 말대로 성서나 철학서를 읽는다고, 그것들을 꿰어맞춘다거나 요약한다고 만들어줄 수 있는 것들도 아니다. 한마디로 심봉사가 눈을 뜨는 개안이 아니고는 설명되기 어렵다. 


-백도빈과 대해.jpg» <산상수훈>에 출연한 영화배우 백서빈과 얘기하는 대해 스님


 그는 출가 뒤 보통의 스님들처럼 화두를 들지도 않았다. 그는 대신 불경을 보고 자신만의 수행법을 실행했다. 


 “나를 버리는 수행을 했다. 좋은 것도 놓고, 싫은 것도 놨다. 선악을 모두 놨다. 뒤돌아봐서도, 목적을 둬서도 안된다니 그저 놨다.”


 그렇게 해서 그는 ‘일체가 둘이 아닌 도리’를 깨달았다고 한다. 선도 악도, 부처도 중생도, 하나님과 피조물도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기독교적 질문도 창조주와 피조물을 구분한 상태에서는 의문에 의문을 더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의 영화들은 마치 천강이 하나의 강이 되듯 본질로 귀의하고 있다. 그는 “현상과 본질이 합일되면 의문이 풀리고, 본질의 특성인 전지전능하고 무죄하고 자유로운 본래 삶을 되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영화쪽 무학, 무명인 그가 10년간 <색즉시공 공즉시색>, <소크라테스의 유언>, <무엇이 진짜 나인가> 등 무려 91편의 작품을 쏟아낸 것이 그런 본질의 힘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만든 작품 중 61편이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했다. 


 <산상수훈>에 출연한 영화배우 백서빈은 크리스찬이다. 그는 이 영화를 마치고 “마늘만 안먹었다 뿐이지 동굴에서 사람이 되어 나왔다”고 고백했다. 대해 스님은 다음 작품은 ‘인간은 변하는가’를 다룰 것이라고 했다. 그는 ‘연금술사’를 꿈꾸고 있다.  


나만의 규칙이 품격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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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인감자1--.jpg» 땅끝마을 전남 해남에서 감자캐는 농사일을 돕고 있는 법인 스님


산중을 찾아온 벗들이 차담을 하면서 품격있는 삶을 말한다. 많이 배우고 좋은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권력과 재물에 눈이 어두워 인생의 후반부를 명예롭지 못하게 맺는 모습을 보고 하는 말이겠다. 품격있는 삶은 모두의 바람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길이다. 그러나 남에게 크게 비난받지 않는 삶은 마음먹기에 따라 그리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이웃에게 믿음과 존경을 받는다면 더없이 훌륭한 인생 성적표이겠지만, 비난과 외면을 받지 않는 삶도 그런대로 무난한 성적표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런 무난한 삶도 그리 녹록지 않다는 것이 세상사의 현실이 아니겠는가. 무엇보다도 사회라는 그물망이 욕망의 외적 확장과 경쟁을 제어하기 어렵다. 오죽하면 히말라야산을 황금으로 가득 채운다고 해도 한 사람의 욕심도 만족시킬 수 없다고 하겠는가. 다양한 미디어 매체가 넘치고 있는 시대에 자신을 과시하고 남을 모략하고 곤경에 빠뜨리는 일들도 볼품없는 우리 시대의 씁쓸한 자화상이다. 최근 어느 정당에서 발생한 제보 조작의 사건 또한 높은 학벌을 가진 사람들이 뻔한 거짓말로 세상을 속인 것이다. 유행하는 말을 빌리자면 저런 짓 하려고 그 많은 공부를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 만도 하다.


 왜 이성과 지성을 가졌다는 인간이 품격을 잃어버릴까. 그 주요한 원인은 자신을 다스리지 못한 것에 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들은 어떤 규칙을 정하여 자신을 절제하고 통제한다. 지금도 절집에 내려오는 스님들의 잔잔한 일화는 자신을 다스리고자 하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어느 큰 절의 주지를 지낸 어떤 노스님은 지금도 새벽 도량석을 손수 하신다. 도량석이란 새벽 3시에 일어나 목탁을 치고 염불하며 경내를 도는 일이다. 당연히 출가 연수가 낮은 신참이 하는 일이다. 노스님에게 왜 새벽 도량석을 손수 하시느냐고 여쭈었다. 게으름을 누르고 부지런한 습관을 기르고 겸손한 몸가짐을 갖추고자 하기 때문이란다. 또 나에게 불경의 진수를 가르쳐 준 스승님은 개인의 방에서도 가사와 장삼의 예식복을 입고 한여름에도 경전을 독송한다. 누가 보지 않아도 삼가면서 마음에 경건함을 깃들게 하고자 하는 깊은 뜻을 읽는다. 


저울.jpg



 중세 가톨릭의 수도원 수도자들의 겸손하고 당당한 태도는 다름 아닌 자발적 청빈에 있었다. 영주들이 토지를 기부해도 그들은 정중히 거절했다. 대신 황무지를 개간하며 자족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었다. 어느 신부님은 항상 통장과 수중에 현금 30만원을 넘지 않게 한다고 한다. 자발적 규칙을 통하여 유혹과 욕망을 다스리고 있는 것이다.


 높은 도덕과 자족의 삶은 자신을 당당하고 품격있게 한다. 요즘 내가 세상 사람들과 함께 공감하는 인생길에서 실수하지 않는 법은 ‘길이 아니면 가지 말고 오르지 못할 나무는 오르지 말자’이다. 그리고 자신만의 규칙을 만드는 것이다. 좋은 규칙이 좋은 격을 만들기 때문에.


불교공동체 세미나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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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속공양.jpg» 타이의 불교공동체 시사아속마을에서 탁발승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재가자들


 불교계 (사)선지식도량(위원장·무위스님)이 13일 오후2~6시 서울 종로구 견지동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21세기 대안공동체의 실험과 현실’을 주제로  세미나를 연다.


 이 세미나에서는 △유정길 불교환경연대 운영위원장이 ‘한국불교공동체의 실험과 전망’을 △조현 <한겨레> 종교전문기자가 ‘해외공동체를 통해 본 공동체 성패의 조건’을 △수지행 실상사 기획실장이 ‘마을공동체와 절’을 △박승옥 공주 두레배움터 대표가 ‘한국의 지역공동체 재생운동과 불교’를 주제로 각각 발표한다.


 이어 원묵 스님(광주 선덕사 주지)의 사회로 지수걸 공주대 교수와 서재영 불광연구소 책임연구원, 김성균 지역사회연구원 연구소장, 김현주 야마기시공동체 대표가 각각 토론자로 나서 발제자들과 함께 토론을 펼친다.


 ‘선지식도량’은 “종교 인구 감소라는 위기를 맞아 지역마을공동체 활성화가 위기 극복의 대안이 될수있다고 보고, 공동체 전문가 및 활동가들을 통해 국내외 마을공동체 성공사례를 분석하고, 도·농마을공동체의 현주소를 진단해 앞으로 (불교)마을공동체 모델을 개발하고 발전을 모색하기 위해 토론의 자리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신앙의 오염물, 영적 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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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jpg

 

 20년을 한결 같이 새벽 기도와 

주 한 끼 금식을 이어가는 권사가 있었다.

 이러한 권사의 모습은 교회 성도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권사 자신도 마음 속 한 켠에는 은근한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몸이 몹시 피곤해서 

 도무지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일어나지 못하는 권사를 흔들어 깨우는 형체가 있었다.

 권사는 깜짝 놀라 일어났다.

 그리고 떠나려는 그를 잡고 물었다.

 “새벽마다 깨우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 형체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서면서 웃었다.

 권사는 그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얼굴의 형체는 사탄이었던 것이다.

 권사는 사탄에게 물었다.

 “왜 당신이 나를 새벽기도에 빠지지 말라고 깨우는 것인가?”

 사탄은 아무 말 없이 사라졌다.

 권사는 그날 예배당에서 기도하면서 깨달았다.

 ‘나는 이렇게 기도하는 데 

 새벽 기도도 안 나오는 장로님은 도대체 뭐야?’

 ‘일 년에 한 번 금식도 안 하시는 목사님은 

 어떻게 영적 훈련은 하시지?’

 ‘이 교회에는 나 만한 영적인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어!’

 ‘금식도, 새벽기도도 안 하면서 그리스도인라고 할 수 있어?“

 그날 새벽 그 동안 새벽 기도를 하면서

 어느새 자신의 영혼 한 켠에 찾아 든 교만을 발견한 것이었다.

 +

 믿음생활은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을 비교하는 순간 열등감과 교만이 

 깨진 유리로 빗물스미듯 찾아듭니다.

 교만으로 오염된 믿음은 이미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아니라

 자기만족을 향한 믿음입니다.

 말세에 믿는 자를 찾을 수 있겠느냐고 물으시던 주님은 

 교만으로 오염된 신앙인의 군중 속에서

 고독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인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관매도 벼랑 끝에서 나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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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매도아이들.jpg» 관매도 해변의 아이들. 사진 이병학 기자


  작년 가을 남쪽 바다 관매도에 갔더랬습니다. 몇 시간만 걸으면 마을들을 다 둘러 볼 정도로 작은 섬이었습니다. 사는 이들도 얼마 안 되었습니다. 따가운 가을 햇살을 받으며 산에 올랐습니다. 능선에서 바라본 섬 남쪽은 무수한 물결들이 하염없이 몰려와 하얗게 부서지는 벼랑들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벼랑과 파도.

  조선시대 함허 스님의 금강경 해설 한 대목 풍광이 거기 그대로 펼쳐져 있었습니다. 금강경 가르침을 한마디로 줄이면 ‘무상(無相)’입니다. 세상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서도 그런 것이 정말로 확고하게 실체로 존재하는 양 여기지 말라. 상(相)을 가지지 말라. 


  ‘나’라는 상, ‘너’라는 상, 내가 옳고 너는 그르다는 상, 내가 깨달았다는 상, 내가 보시를 베푼다는 상... 상(相)을 내지 말라. 


  함허는 이 무상의 반야지혜(般若智慧)를, 어디 손잡을 곳을 허용하지 않는 가파른 수미산 벼랑 꼭대기와 수없이 해안에 몰려와 부서지는 파도에 비유했습니다. 


  “須彌頂上(수미정상) 외외묘난반(嵬嵬杳難攀); 수미산 꼭대기 가파르고 아득하여 부여잡고 오르기 힘들어라”

 “大海波心(대해파심) 浩浩沒涯岸(호호몰애안); 너른 바다 파도 구비구비 끝없이 물가에 몰려와 스러지고” 

  스님이 이 남쪽 섬에 오셨더랬나?


-관매도.jpg» 관매도 전경. 사진 김성광 기자 

  멀리 망망대해가 내려다보이는 인적 끊긴 산등성이 동백나무 숲에 누워 황동규의 연작시 “풍장1”도 떠올려 봅니다. 바람에 시신 장사지내는 풍장(風葬).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튀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다오.

  바람을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다오.”


  스님은 벼랑에 부서지는 파도를 보며 ‘무상(無相)’의 반야지혜를 떠올렸고, 그 후 몇백년이 지나 시인은 무인도에서 화장도 해탈도 없이 햇빛과 바람에 살을 말리는 꿈을 꿉니다. 그리고 또 얼마가 지나 나는 머나먼 남쪽 섬 관매도 산 정상에서 스님의 ‘무상’과 시인의 ‘풍장’을 떠올립니다. 


  그러고 보면 저 옛날 스님이나 엊그제 시인이나 지금 나나 다 같은 바다로 부터 앞서거니 뒷서거니 시간을 달리해 잠시 일어난 물결이요, 저 벼랑에 부딪쳐 하얗게 포말이 되어 또 같은 바다로 돌아갑니다. ‘같은 바다.’


  작년 가을 관매도에서는 바다 멀리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그 사이로 깊은 바다 속에 잠긴 세월호를 꺼내려는 해상 크레인의 육중한 기둥이 어렴풋이 보였더랬습니다.

  그리고 올 봄. 곡절 끝에 육지로 끌려올라온 배 객실에서 옷에 쌓인 백골이, 복도에서 어금니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아이들도 함허가 돌아간,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시인과 내가 돌아갈, 저‘같은 바다’로 돌아갔습니다.


  우리가 바다로부터 잠시 일어난 물결로 바닷가 벼랑을 향하여 일렁이며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는, 저 아이들을 죽게 만든 책임도 물어야 할 게고 돈이면 만사형통이라는 우리 사고방식과 자본주의 체계도 바꾸어 나아가야 할 터입니다. 하지만 왜 이런 끔찍하고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언제나 늘,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타고르 시인은 ‘바닷가에서’란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더군요.

  “끝없는 세계의 바닷가에 아이들이 모여듭니다. 폭풍우는 길 없는 하늘을 헤매고, 배는 길 없는 바다에 난파하여 죽음이 넘치는데 아이들이 장난을 합니다. 끝없는 세계의 바닷가에 아이들의 크나큰 모임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100년 뒤에나 바닷가에 가면 늘 아이들이 뛰어다닙니다. 마치 바다에 늘 파도가 일렁이듯이 말입니다.

  벼랑으로 몰려드는 파도를 보던 스님이 바로 시인이고 또 나입니다.

  그러니 바다에서 잠시 인 물결이 ‘내가 나다’하는 상을 내지 말고, 그저 ‘바다에서 잠시 일어나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 거다’라 여기면, 저 백골로 돌아온 세월호 아이들이 좀 덜 가여울까요?      

 <공동선> 발행인 김형태 변호사

 

잔소리의 지겨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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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듣기 싫은 잔소리, 하지도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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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우리 아이는 숫기가 너무 없어서 걱정이에요.

우리 아이는 아무것도 할 생각을 안 해요.


이런 하소연을 하는 어머니들이 종종 있습니다. 자녀들이 달팽이 콤플렉스에 걸린 경우입니다. 달팽이 콤플렉스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만성적으로 우울한 상태 속에서 살아갑니다. 일 년 열두 달 옷 색깔이 늘 어두운 사람들, 일 년 내내 한 번도 활짝 웃지 않는 사람들, 사람을 만나는 것은 피곤한 일이니 차라리 집에서 혼자 있겠다고 하는 사람들. 밖으로 나오지 않아서 집으로 찾아가 보면 하루 종일 그냥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물어봅니다.


뭐하십니까?

그럼 이렇게 대답하지요.

앉아 있어요.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잘해주는 것을 부담스러워합니다. 조금이라도 위험이 있어 보이는 곳에는 절대로 가지 않습니다. 건드리면 달팽이처럼 머리가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립니다. 이런 성격의 형성 원인으로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지만 대체로 잔소리가 심한 양육자 아래서 자란 사람이 많습니다.


부모들이 한결 같이 하는 말이 있지요.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야.


따라서 잔소리하는 본인은 충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듣는 사람에게는 듣기 싫은 잔소리일 뿐입니다. 물론 사람이 성장하는 데 늘 좋은 소리만 듣는다면 그것도 문제입니다. 자칫하면 천방지축이 될 수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잔소리는 몸에 좋지만 입에는 쓴 약의 기능을 합니다. 다만 모든 일이 그렇듯이 잔소리 역시 너무 많이, 자주 사용하면 부작용만 생깁니다. 우선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하면 하는 사람은 안 그럴지 몰라도 듣는 사람은 지겹습니다. 그래서 잔소리가 시작되면 달팽이처럼 자기 안으로 쏙 들어가서 아예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또 잔소리를 지속적으로 들으면 무기력증에 빠집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실험을 했습니다. 낮은 벽 하나를 세워두고, 개에게 전기 충격을 주어 건너편으로 피하게 하다가 나중에는 양쪽 모두에 전기 충격을 주었습니다. 결국 개는 전기 충격이 가해지는데도 피할 생각은 않고 배를 깔고 엎드려 꼼짝 않고 있더랍니다. 무기력에 빠진 것이지요. 잔소리는 전기 충격과 같습니다.

 

잔소리를 많이 하는 부모는 강박증적인 성격을 가진 경우가 많습니다. 완벽하지 않으면 용서가 안 되는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잔소리가 심합니다. 쉽게 말해 자기 속을 들볶는 사람이 남의 속도 들볶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지나친 요구를 하는 사람이 남에게도 그렇게 합니다. 이런 부모는 자기 불만의 배출구로 가장 만만한 자녀들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잔소리가 심한 사람은 대개 무능력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자녀가 자신의 무능력함을 알고 비웃을까봐 먼저 비현실적인 요구, 즉 잔소리를 퍼붓습니다. 얼마나 심한지 정신을 못 차릴 지경입니다. 아이는 이런 부모를 존경할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도 그렇게 못하면서하고 속으로 분노를 쌓아갑니다.


내가 네 나이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어쩌구, 너는 나 때보다 훨씬 좋은 여건에서 그것밖에 못하냐 저쩌구하며 아이를 주눅 들게 하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부모가 있습니다. 오죽하면 아이들 앞에서 과거 자랑이나 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부모의 긍지가 아닌 열등감의 발로입니다.


잔소리의 부작용은 심각합니다. 아이들 잘되라고 하는 소리라지만 잔소리가 요구하는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아이의 마음속에는 불안이 늘어나고, 권위적인 어른에 대한 반항심이 생깁니다. 정신적인 압박감 때문에 무기력증에 걸립니다. 못 다 한 일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 삶을 즐기지 못합니다. 잔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거짓말 대신 병적인 양심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동네 마당 청소 문제로 토론이 벌어졌는데 한 아줌마가 목청을 높였습니다.

사람들이 청소를 안 해서 동네 꼴이 아주 더러워졌다니까. 도대체 왜들 동네를 사랑하지 않느냔 말이야.


이때 건강한 사람이라면 콧방귀를 뀌고 맙니다.

너나 잘하세요. 왜 우리한테 난리야.

하지만 병적인 양심을 가진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자책합니다.

맞아. 나는 나쁜 사람이야.


그리고는 아무도 나오지 않은 마당에서 자기 혼자 청소합니다. 그러니 만성피로가 따라다닙니다. 쉬는 시간 없이 자신을 채찍질하기 바쁘기 때문이지요. 어린 시절부터 부모가 하던 잔소리가 몸에 배어서 이제는 스스로에게 잔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잔소리 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합니다. 어떤 신부가 신자들에게 변화하라고 들들 볶아대다가 자기 성질을 못 이겨 죽었다고 합니다. 그 신부가 죽은 날 신자들은 장례를 하는 뒤에서 잔치를 벌일 정도로 기뻐했다고 하는데, 어쨌든 이 신부가 살기는 열심히 살아서 천당에는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천당에 가보니 고칠 점이 너무나 많아 만나는 사람마다 잔소리를 해대고 다녔지요. 견디다 못한 천당 주민들은 민원을 내고, 차라리 천당을 떠나겠다고 이주 신청을 위해 줄을 잇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하느님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이 나타나시기만 하면 득달같이 달려가 천당이 왜 이 모양이냐며 이러쿵저러쿵 잔소리를 했지요. 하느님 역시 견디다 못해 연옥에나 갈까 하다가 마지막으로 신부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 친히 붓글씨로 쓴 현판을 주셨습니다. 현판에는 한문으로 행할 시(), 죄 벌(), 일할 노(), 말 마()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하느님,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하느님은 친절히 대답해주셨지요.

옛날 당나라의 한 나그네가 길을 가는데 농부가 밭을 갈다 지친 말에게 채찍질을 하더란다. 그래서 농부에게 교훈을 줄까 하고 사자성어를 써서 농부에게 주었느니라. 행할 시, 죄 벌, 일할 노, 말 마. 일하는 말에게 벌을 가한다는 뜻으로 그렇게 살지 말라는 소리이지.

신부는 그것이 욕인 줄도 모르고 자기 집 문 앞에 떠억 하니 걸어놓고 살았다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소리는 백해무익합니다. 자녀가 잘되기를 바란다면 차라리 입을 다물고 말없이 기도해주는 편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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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라마가 매일 하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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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3.jpg» 종교 달라도 이렇게 친밀할 수가. 파키스탄 국경지역 누브라 방문한 달라이라마가 환영 나온 무슬림들 중 한 할아버지의 염소수염을 잡아당기며 장난을 치고 있다.


이곳 다람쌀라는 심한 우기로 연일 비와 찐한 운무속 입니다.

인도에서 유일하게 우기가 없는 지역, 아니 비가 내리지 않는 곳이 라닥 지방 입니다.

달라이라마 존자 노구에 건강이며 여러가지 이유로 우기철에는그쪽 방문과 당신 정진의 시간으로 보내시지요.

누브라 지방은 바로 파키스탄 국경과 맞닿은 지역이라서 아주 민감한 곳이기도 합니다.

저도 그쪽에 매년 들어가는데 미리 특별 허가서(1 주일)를 얻고, 가는 도중에 가며오며 대여섯번 검문검색을 당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제가 애정을 가지고 가는 곰빠()이 세군데 기가막힌 자리에 있답니다. 또 히말라야 주 능선을 넘는데 고개는 만년설로 세계 최고 높은 차량 고개로, 칸둥라(5608m)를 넘어야 합니다. 가끔은 한여름에도 폭설로 며칠간 두절되기도 하지요. 인도 군인들이 늘 비상 대기 한답니다.

 

-달라이1.jpg» 달라이라마가 군용 헬기로 이동하는 중

 


-달라이2.jpg» 험한 고개 넘어 법문을 듣고자 많은 주민 차량이 고개를 넘어간다.


 

-달라이4.jpg» 파키스탄 국경이라서 무슬림 신도들이 많은데 그들도 달라이라마에 대해서는 순수한 마음으로 환영을 나온다.



-달라이5.jpg» 절 밑에 마을 학교 아이들이 피리소리에 맞춰 환영 노래를 부른다.


 

-달라이6.jpg» 달라이라마를 보는 얼굴들에 모두가 감사와 희열, 감동이 베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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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많은 유명인사가 있지요만 달라이라마는 사람을 위한 성직자로 우리에게 늘 빛과 희망이다.

당신께서 많은 나라를 다니시며 불교 말씀 보다는 미래의 인류를 위한 두가지 말씀 , 인간성의 향상과 종교간의 화합을 가장 중요하게 강조한다.

달라이라마가 늘 하는 말을 요약하면 이렇다.

 

행복은 부처가 줄 수 있는 기성품이 아니다. 행복은 당신의 행위로 부터 나온다.

 

세 가지 R을 따라야 한다.

자신에 대한 존중, 타인에 대한 존중, 자신의 모든 행위에 대한 책임감입니다.

Follow the three Rs : Respect for self, Respect for other, Responsibility for all your actions.

 

성공여부는 성공을 위해 무엇을 포기해야 했는가라는 것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늘 반복해서 말씀드리는거지요만 또 다시 한번!

 

매일 매일, 깨어날 때 생각하라,

오늘은 내가 살아있어서 행운이고,

나는 소중한 인생을 가지고 있고,

나는 그 소중한 인생을 낭비하지 않겠노라고.

 

순종하다 돌연 반발하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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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jpg 6유형 - 충실을 추구하는 사람

네 번째

 

핵심동기 :충실

자신의 시각 : 신중, 두려움, 선택갈등

타인의 시각 : 성실, 의심, 불안

 

 

6유형은 문제발생 시 타인에게 투사(책임전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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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에 매달리는 6유형은 위험의 감지를 누구보다 잘 느낍니다. 그런데 이들은 어떤 문제가 발생하거나 발생할 것 같으면 그 원인을 내 안에서 찾지 않고 타인 즉 밖에서 찾으려 합니다. 핑계를 잘 대고 잘되지 않으면 남탓으로 돌립니다. 남에게 투사(책임전가)를 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남에게 질책 당할까봐 미리 선수치는 방어적 공격입니다.

 

사례 1>6유형이 운전을 할 때 :

도로가 많이 막혀 다른 길로 갔으나 그곳도 차가 막혔다.

6유형 : 네가 오자고 해서 왔는데 더 막히네.

친구 : 너도 동의했잖아.

6유형 : 무슨 소리야. 네가 얘기 안했으면 이쪽으로 안 왔지.

 

사례 2>6유형 엄마가 접시를 깸 :

옆에 있던 딸 : 아유, 깜짝이야.

엄마 : 어떡해. 이 비쌀 걸. 너가 옆에 있어서 접시를 깬 거잖아.

: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못함)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기 어려워하는 6유형은 사건과 감정이 만나면서 두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첫 번째 모습은 공격하는(대항형) 6유형입니다. 순간적으로 욱하고 폭발하지만 그 감정이 오래가지는 않습니다. 두 번째는 이 상황을 순응하는(순응형) 6유형입니다. 푸념 섞인 혼잣말로 계속 구시렁거립니다.

 

이것이 지나칠 때 관계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6유형은 자신을 지킬 방패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나 타인과 가족들은 어이가 없고, 때론 기가 막혀 할 말을 잃게 합니다. 나중에는 탓을 당할까봐 피하게 됩니다.

유형을 떠나서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미룰수록 타인에게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더군다나 깍듯하고 모범생 이미지였던 6유형이 이런 모습을 보일 때는 다른 이들보다 충격이 훨씬 더 큽니다.

 

 

한마디 코너:

투사를 자신에게 돌려보세요. 용기 있게 마주해야 진짜인 나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되도록 긍정적인 생각을 하십시오.

 


3-.jpg6
유형의 사랑의 표현은 유순하고 온유하며 부드럽습니다. 신의가 깊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보호합니다. 이들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친절로서 자기 의견을 전달합니다.

 


6유형은 타인과의 유대관계를 중요시 여기지요. 타인과 긴밀하게 의논하고 분석하면서 깊은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며 이해하려 노력합니다. 6유형의 사람들은 같이 있을 때는 존재의 가치를 잘 알 수 없으나 그가 없을 때 그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집니다.

 

 

 

-6유형 부모의 특징-

 

6유형 부모는 매우 가정적입니다.


 6유형의 부모는 자녀를 바라볼 때 항상 지켜주고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큽니다. 왜냐하면 매사에 불안을 안고 사니까요. 그러다보니 자녀의 고민, 경험, 우정 등을 미리 미리 예방하고 차단하여 해결책을 주려 애쓰며, 사소하고 자질구레한 일까지 걱정합니다. 이런 부모의 지나친 관심은 자녀 입장에서는 부담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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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유형 부모는 예기치 않는 일들을 대할 때 마음이 안절부절 못합니다.

두려움이 많은 6유형 부모의 심리는 자녀에게도 그대로 노출됩니다. 불안감이 늘 조성된 성인으로 자라날 가능성이 크지요. 이것은 자녀의 자신감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매사에 안전을 추구하는 6유형 부모의 시선으로 자녀를 바라본다면, 자녀는 실패도 경험할 수 없고 모험의 기회도 놓칩니다.

 

6유형 부모는 모범적이고 책임감이 강합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6유형 부모의 대부분은 예절바른 아이, 어른들의 말에 순종하며 따르는 아이로 키우고자 노력합니다. 자신처럼 자녀에게도 확실한 사회 규범, 상식을 중시하며 눈에 튀는 말, 행동 등을 언질 시킵니다. 이러한 염려로 6유형 부모는 자녀의 칭찬에 인색합니다.

 

항상 긴장감과 경계심을 풀려고 하지 않은 6유형 부모는 즐겁게 놀지도 못하며 노는 것으로부터 도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자녀들도 영향을 받아 초조함, 불안감, 반발심을 느끼게 됩니다. 어렸을 때는 순종적 아이였으나 사춘기부터는 반발심이 올라와 부모를 거부하며 사사건건 부딪치게 되지요.


나쁜 습관에서 벗어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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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습관을 버리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오래된 습관은 바로 버릴 수 없으니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 정말 하고 싶을 때는 하세요.
• 깨어있으면서 하세요. 알아차림이 AWARENESS 습관에서 벗어나게 하는 주요원인 입니다. 
• 안 하고 싶을 때는 하지 마세요. 안하고 싶은데도 습관으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에게 불친절한 행동입니다. 
• 잘 모를 때는 스스로를 설득해 보세요. 설득이 안되면 하세요.
• 습관이 내것이라고 개인화 하지 마세요. '나,''나,''나,'개념을 내려놓세요. 
• 자책은 자제해도 됩니다. 이미 옳고 그름을 알고 있습니다.
• 발원하세요. '습관을 버리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세요.

언젠가는 습관에 피곤해질 겁니다. 깊은 인식이 올 겁니다. 그때는 버리가 쉽습니다. 그때까지는 습관에 빠지고 고통스러워하고 그리고 반복을 하게 됩니다. 스스로에게 친절하게 하면 어느 날에 습관의 악순환에서 자연스럽게 벗어날 것입니다.

공동체, 싸움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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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상.jpg» 관계의 '적정선'은, 편안한 듯하나 실상은 피상적이고 공허하다. 공동체에는 '적정선'의 관계를 넘어서는 '모험'이 필요하다. 사진 정동철 제공


적정선 너머의 샬롬
고지전의 기념비
잠자리에 누웠는데 어둠 속에서 아내의 이런저런 푸념이 흘러나온다. 옆집 자매와 점심 식사를 함께했는데, 마음이 상한 모양이었다. 음식이 넘쳤으면 좋았겠지만 모자라서 생긴 문제였다. 살림살이에 익숙지 않은 새내기 주부들이 흔히 하는 실수다.

자려는데 잠이 오지 않는 것은 단순히 낮에 아내가 겪은 속상함에 대한 깊은 공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막 출항한 배와 같은 공동체가 항구를 빠져 나가기도 전에 의사소통에 적신호가 들어온 느낌이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시계를 보니 아직은 희망이 보이는 자정 전이었다. 그날 밤 두 자매는 관리사무소 앞에서 단둘이 만나 긴 대화를 나누었다.

이 일화는 울산광역시 언양읍 반천리 일대에서 전해오는 전설 같은 이야기이다. 이 전설 같은 이야기를 공동체가 수시로 되새김질하는 이유는 공동체 내에서 여러 가지 갈등이나 다툼을 유발할 만한 불씨가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론 이런 불화에 우리가 어떤 자세로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상기시킨다. 어느 전쟁이든 교두보가 될 만한 고지를 점령한 전설 같은 이야기가 한두 가지쯤은 전해 온다. 우리 공동체의 갈등 해법은 이 고지에 남겨진 기념비적 사건으로 일축된다.

공동체의 목표는 거창하지 않다. 우리를 만드신 이의 섭리를 따라 살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거창한 미션들과 마주치게 된다. 하지만 삶의 궁극적 지점은 행복이다. 만약 이 땅에서의 미션의 끝지점이 행복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우리를 기만한 것이다. 그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쉼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내 아버지 집에 우리가 쉴 곳이 많다고 하셨으며, 이 땅에서 고난의 행보를 할지라도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지기 못할 것이라고 보증하셨다.

물론 그 행복은 개인에 국한된 단순한 행복은 아니다. 그의 나라의 행복은 자기를 부인하여 전체의 행복을 경험하며 지금의 가시밭길을 지나 최종적으로 행복의 나라로 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우리의 전 여정과 영역의 주인이신 주님이 항상 함께하심으로 가시밭길 같은 고난의 시간을 신비로운 치유의 손길로 잊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은 또한 최종적 미래의 시점에서만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공동체는 매순간 또는 최종적으로 행복하기를 기대한다. 그렇게 소박한 꿈을 꾸며 함께 살아보려고 모였는데 현실은 만만치 않다.

공동체를 방문하는 이들로부터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내부 갈등에 관한 것이다. 대체로 어떤 갈등이 있으며 어떻게 해결하는지를 궁금해 한다. 이들의 속내는 무엇일까? 역시 갈등은 피하고 싶은 것이고, 관계는 어려운 것이며, 나는 그런 상황을 넘어설 자신이 없으니 좀 쉬운 방법은 없는지 묻는 건 아닐까? 누군들 다툼이 즐겁고 갈등이 익숙할까?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심성 안에는 모두와 잘 지내고 싶은 의지가 있다. 그래서 적정선을 지키고 싶어한다.

미워하지 않을 거리, 원망하지 않을 거리, 부딪치지 않을 거리… 그만큼을 유지하면 별 문제없이 친절한 이미지를 서로에게 남길 수 있다. 멀리서 좋아보였던 사람이지만 다가갈수록 충격과 실망, 수치와 분노에 휩싸였던 경험이 저마다의 적정선을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이 적정선이 보장해주는 관계가 바로 피상적 관계라 생각한다. 겉보기엔 다툼이 없는 편안한 관계인 듯 보이나 실상은 외롭고 공허한 관계이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지만 오래 머물러서도 안 될 관계의 상태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적정선을 넘어 충만의 바다에서 항해하는 모험을 권면한다. 성경에 200회 이상 언급한 인생의 이상적 상태인 샬롬은 단순히 별 문제 없이 편안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샬롬’은 완전하다, 온전하다, 꽉 찼다는 뜻을 가진 ‘실람’이라는 명사의 동사형이다. 완전히 꽉 찼다는 것이 무엇일까? 어쩌면 우리는 한 번도 이런 관계를 경험한 적이 없을지 모른다. 오직 ‘관계의 끝판왕’ 삼위일체만이 순도 100%에 이르는 상태를 경험하실 것이다. 우리는 도달하지 못할 경지이다. 갈망하지만 도달하지 못하리라는 체념으로 항구에 배를 묶어둔들 무엇이 잘못이겠는가? 그러나 바다로 나가지 않는 공허함을 견디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어느 날엔 갑자기 불어닥친 태풍우에 정박해 있던 배들끼리 부딪혀 상처를 입는 황당한 일을 당하기도 한다. 이러나 저러나 인생은 순탄하지 않다.

사실 우리의 체념과 달리 샬롬은 우리를 감싸고 있다. 죄가 우리를 갈라놓기 전에, 그리고 완성될 그의 나라에서, 그때 샬롬은 우리의 흔한 상태이고 그럴 것이다. 다만 지금이 문제다. 우리가 사탄의 제의에 손을 내밀어 하나님을 거역하기로 선택한 이후부터 관계는 죄로 오염되어 도저히 다가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를 극복할 희망은 없는가? 놀랍게도 우리 주님이 몸소 보여주신 묘안이 있는데 그것이 우리의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신의 한 수는 십자가이다.

내가 성경에서 만난 예수님은 관계에서 그리 매끄러운 주도자가 아니셨다. 훅 들어오는 돌직구를 던지는 남자였고 쌍욕하는 분이셨고 무리와 다투시는 분이며 구설수에 휘말리는 분이셨다. 요즘 국회인사청문회에 나오셨다면 앞뒤 맥락 없는 기사로 뽑아낼 만한 그의 어록 몇 마디만으로도 인성 검증에서 탈락할 위기에 놓일 분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온전한 사랑이었음을 십자가에서 증명했다. 관계를 위해 우리가 노력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오해와 모욕과 폭력과 슬픔을 이기고 성큼성큼 다가서는 것이다. 사탄은 다가서는 우리 앞에서 발악할 것이다. 험한 꼴 보지 말고 편안한 관계에 머물러 있으라고 경고하고, 욥에게 그랬던 것처럼 상해를 입힐 것이다. 손해를 끼칠 것이다. 누명을 씌울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죽으려 할 때 진심을 보게 될 것이다. 그때, 잠시 ‘샬롬’이다. 애쓴 시간과 노력을 생각할 때 순간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을 경험한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의 인생은 갈림길에서 헤어진 앞차처럼 서로 이해불가의 상황으로 접어든다. 순간, 그것은 결코 부실한 경험이 아니다. 카메라의 셔터가 순간을 엄청난 시간으로 확장하는 힘을 가졌듯이 두려움 없는 사랑, 완전한 희생, 샬롬의 순간은 우리 마음 속 스냅사진 한 장으로 남아 무모해 보이는 관계의 모험을 감행하게 한다. 우리는 그것을 기독교라고 믿는다. 그리스도가 좋다고 말하면서 관계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몸으로 따르지 않는 무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나는 정말 모르겠다.


싸움의 기술
행복하려고 모인 공동체가 돈독해지기 위해 제일 먼저 익혀야 할 것은 역설적이게도 싸움의 기술이다. 좋은 이미지만 보이려고 적정선을 지키는 것을 넘어설 때 부대끼는 싸움, 이런 우리를 가만히 놔둘 리 없는 사탄과의 싸움, 싸움이 일상이 되고 때로 상처가 깊어 물러서고 싶을 때 품안에서 샬롬의 순간을 꺼내보며 희망을 잃지 않는 것, 이것이 싸움의 기술이다.

공동체 내부에는 크고 작은 갈등들이 있다. 한창 아이를 키울 때다 보니 육아 방식에도 불씨는 존재한다. 관대한 부모와 엄격한 부모의 차이는 아무리 적절한 태도를 공유해도 극복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때론 애들이 심하게 다투어서 어른들을 민망하게 할 때도 있다. 물론 어른들이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점을 도출해 내기도 전에 아이들은 화해의 공식적 절차도 없이 언제 그랬냐는 듯 해맑게 놀고 있다. 아이들이 취학 시기가 되면, 교육을 논의하던 중 서로의 다른 기대치를 보게 된다. 내 아이가 대상이다 보니 말 한마디에도 예민해진다. 때론 공동체 일의 분배와 재정운영에 대해서도 긴장이 흐른다. 모든 수입을 한 통장에 모아서 사용하다 보니 수입이 부족할 때는 염려로 인해 정서적인 위축감을 경험하기도 한다. 일하는 방식과 이상의 충돌도 더러 있는 일이다.

그럴 때마다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 말고는 왕도가 없다. 조금씩 빨리 자주 얘기할 때 큰 싸움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언젠가 알게 될 것이다. 이 싸움은 우리의 지략과 화력으로는 맞설 수 없는 것이었다는 걸…. 싸움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어서 싸움에 능하신 주님이 우리의 수고와 비교할 수 없는 승리를 주신다. 그리고 샬롬의 관계 안에서 우리는 누구도 패자가 아니다. 오직 사탄만이 어둠속에서 슬피 울 것이다.

갈등
갈등(葛藤)은, 문자대로 해석하면 칡과 등나무가 얽힌 상황이다. 밤을 세워 얘기를 해도 쉽게 풀 수 없는 얘기가 우리에게도 존재한다. 생각해보면 칡과 등나무가 얽혀 자라기 전에 자주 조금씩 전지를 했어야 했다. 밖에 나가기 싫은 긴 장마철이 지나고 푹푹 찌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황량했던 대지가 녹지로 변해 있는 것을 목격할 때가 있다. 여기에 언제 이렇게 밀림이 생겼지? 하며 의구심에 잎사귀를 들춰보면 등나무와 칡이 서로 부둥켜 안고 깊은 갈등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을 본다.

글머리에서 우리 공동체에 내려오는 전설 같은 이야기의 교훈을 경시하고, 관계를 돌보는 자잘한 싸움을 쉬고 있을 때 이런 일이 생긴다. 방법은 하나뿐 찬찬히 살펴야 한다. 잎사귀 몇 장, 줄기 몇 개를 제거한들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잎사귀에서 줄기로, 가는 줄기에서 굵은 줄기로, 굵은 줄기에서 뿌리로…. 거기를 잘라야 한다. 그러고 나면 머지않아 밀림이 고엽제를 맞은 양 황폐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작년 이맘 때 우리 공동체는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깊은 대화를 시작했다. 중요하고 긴 논의는 한 집에 모여 애들을 재우고 나서 판도라의 상자를 열듯 시작된다. 그날은 공동체 영토의 매입, 건물의 리모델링, 네 가정의 올인 멤버 이주가 주요 사안이었다. 몇 차례 이어온 화두였고 신중해야 할 주제였으며, 흔쾌히 만장일치가 되기 전에는 끝이 나지 않을 얘기였다. 한참을 토론하던 중 내가 먼저 이번 일은 안 되겠다고 찬물을 끼얹었다. 이 일에 찬성하는 몇 사람이 주저하는 다른 이를 설득하는 형국이 이어지면서 무엇인지 모를 긴장이 내재된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열심히 설득하여 일이 되게 할 수는 있겠지만 내가 그 짐을 지고 갈 것이 두려웠다. 공동체의 형이라는 위치가 때론 자유로운 감정의 표현을 가로 막을 때도 있지만 그런 시간이 지속되어 나도 모르게 피해 의식이 생길 때가 있었다. 솔직하면 다투게 될 것이 분명했지만 나와 아내는 솔직해지기를 연습한다.

나의 싸늘한 감정 표현에 반응은 다양했다. 안도하는 사람, 분노하는 사람, 실망하는 사람 등. 그러다 이야기의 불씨가 부동산 매입이 아니라 관계의 문제로 옮겨 붙었다. 서로에 대한 섭섭함, 긴장감, 답답함이 드러났고 감정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오랜 시간 대화를 이어갔다. 그 사이 나는 열 번도 넘게 후회했다. 형답지 못한 얄팍함으로 공동체를 다투게 하고 수렁에 빠뜨렸구나 생각했다. 또 한편 우리 공동체를 덮고 있던 풍요와 평화가 무성한 칡과 등나무의 이파리였다고 생각했다.

길고 두려웠던 그날 밤 우리는 어둠 가운데 더듬더듬 잎사귀에서 줄기로 줄기에서 뿌리로 문제의 근원을 찾아갔다. 힘든 시간이었지만 모두 잘 견뎌 준 덕에 서로의 마음속에는 그럼에도 결별하지 않는다는 배수의 진을 발견하고 희망을 얻었다. 베란다 창으로 해가 떠오르고 나서야 아침인 줄 알았고 대화는 끝이 났다. 그날 결정하려 했던 안건들은 모두 부결되었다. 저녁에 만나 아침에 헤어진 우리는 폭탄을 맞은 듯 황폐해졌다.

나도 이제 하룻밤의 강행군으로 3일간 탈진하는 나이가 되어 견디기가 어려웠다. 잠이 없었던 밤을 뚫고 나온 아침, 자가운전으로 출근을 하다가 앞서 있던 트럭의 꽁무니를 박는 사고를 냈다. 분명 앞차가 멀찍이 있었는데 눈을 한 번 감았다 떠 보니 내차의 보닛이 트럭의 적재함 아래에 끼어 있었다. 다행히 급히 브레이크를 밟아서 인명사고는 없었지만 콕 부딪힌 느낌에 비하면 보닛이 너무 험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차량이다 보니 사고를 낸 나는 미안하여 얼굴을 못 들었고 전 날 함께 밤을 세운 탓에 험하게 찌그러진 차를 보는 전우들의 심정도 편치는 않았을 것이다.

싸움에서 돌아온 용사의 찌그러진 철모 같은 자동차가 우리의 마음을 이어준 것일까? 아님 다시 한 번 전의를 불사르게 해준 것일까? 우여곡절 끝에 부결되었던 안건들이 극적으로 되살아났고 두렵고 떨리는 영토 매입과 리모델링의 대업이 추진되었다. 쉽지 않은 일이고 심호흡이 필요한 일이며 지금보다 더 많이 다투게 될 것이 뻔한 일이지만 놀랍게도 그렇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살림을 합치기 전 반천리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그려냈던 공동체의 연애시절은 지나갔다. 지금의 싸움은 풋풋함과는 거리가 먼 묵은지 같은 갈등들이 원인이다. 그래도 마주앉으면 우린 또 가족이다. 묵은지를 건져 올릴 때마다 막막한 벽 앞에 서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나는 돌아가지 않고 싸움을 걸어 볼 생각이다. 하루이틀 싸울 거 아니니까, 헤어질 것도 아니니까 싸우는 거다. 나는 오늘도 품 안에서 그날의 치열했던 싸움과 순간의 샬롬을 꺼내 본다.

 

정동철
1971년생으로 울산대학교에서 산업디자인을 공부한 뒤 IVF(한국기독학생회) 캠퍼스간사로 14년 동안 섬겼다. 지금은 ‘디자인잇다’ 대표로 일하면서, 몸된교회 전도사로 섬긴다.


이 글은 <복음과상황>(http://www.goscon.co.kr)에 실린 것입니다.


밥 한끼를 나눈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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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 한 끼를

나눈다는 것은

내 마응을 주는 것이다


 일운 스님의 <마음 밥상>(모과나무 펴냄)에서

편이 아니라 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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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가복음 9: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대의를 앞세워 편을 가르고, 올바름을 독식하려는 태도는 상대의 반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적대에 기초한 삶은 `편'을 만들지만, 환대로 나아가는 삶은 `곁'이 됩니다.

 함께 아파하며 모인 곳에서 서로에게 울타리가 되어 주는 사람, 

`편'이 아니라 `곁'이 되는 사람의 너른 마음이 그립습니다.


<예수는 여기 계시지 않다> 2017년 한국기독교 부활절맞이 묵상집(동연 펴냄)에서.

왜 서쪽에만 극락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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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옳거니 그르거니 내 몰라라

 산이건 물이건 그대로 두라

 하필이면 서쪽에만 극락세계랴

 흰 구름 걷히면 청산인 것을


  법정


 <시작할때 그 마음으로-법정이 우리의 가슴에 새긴 글씨>(책읽는섬 펴냄)에서


마르지 않는 산 밑의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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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지 않는 산 밑의 우물

 산중 친구들에게 공양하오니

 표주박 하나씩 가지고 와서

 저마다 둥근 달 건져가시오


 옛 수도인들은

 이런 삶의 운치를 지니고

 맑고 향기롭게 살았었네


 법정이 현장에게


 <시작할때 그 마음으로-법정이 우리의 가슴에 새긴 글씨>(책읽는섬 펴냄)에서

루터가 말한 개혁이란 회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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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터의 95논제


 1.우리의 주님이시며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회개하라..."(마4장17절)라고 말씀하셨을 때, 믿는 자들의 온 삶이 회개가 되기를 원하셨다.

 

 2.이 말씀은 성례전적인 회개의 의미로(즉 사제들의 직무에 의하여 거행되는 고백과 보속의 의미로) 이해될 수 없다.


 3.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오직 내적인 회개만 의도하는 것은 아니며, 만일 육신을 죽이는 여러 가지 일들을 외적으로 일으키지 못한다면, 참으로 내적인 회개는 어떤 회개도 아니다.


 4.그러므로 자기 증오, 곧 참된 내적인 회개가 머무는 한, 즉 형벌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머문다.


  <루터로드>(구영철 지음, CBS북스 펴냄)에서

우리 함께 망가져보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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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명상으로 함께 망가지고

더불어 시끌벅적한 삶터로

 -소란3.jpg» 전환마을운동을 전국에 확산하는 `은평전환마을'대표 소란씨



농업문명 중심으로 생명력 복원

퍼머컬처라는 생태철학 바탕

 기존 마을을 생태적으로 바꾸는

공동체운동의 새로운 흐름


 그가 가는 곳은 어디나 장터

소란스럽다고 붙여진 이름이 소란

 다양한 학교 열어 함께 공부하고

자투리땅과 텃밭에 농사지어

 간장 된장도 담가 먹고 팔고

일반인 대상 밥풀꽃 식당도 운영


 따로 리더나 위계질서 없이

활동가 10  100여명이 함께 

 누구든 뭐든 해보고 싶으면 당장

하다 안되면 다른 방식으로 얼른

 

`은평전환마을'대표 소란씨

서울 은평구 구산동 일대에선  달에 두세 번은 살풀이춤이 펼쳐진다몸에 켜켜이 쌓인 스트레스를 춤으로 풀어내는 공동작업이다작은 공간에 수십 명이 모여 서너 시간씩 춤명상을 한다나무토막 같은 몸치라도 좋다 앞에선 절대로 망가질  없는 뻣뻣한 사람들도 일단   감고 흐름에 몸을 맡기다 보면 놀라운 변화를 체험한다어느 순간 몸에 쌓인 분노와 상처와 두려움까지 ‘’ 하고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다이웃에 대한 경계심과 두려움이 한꺼풀씩 벗겨지면서 ‘가까이하기엔 너무도  당신 ‘함께해도 좋을 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처럼 소란한 축제를 만드는 주인공이 바로 ‘전환마을은평’ 대표 소란(41)씨다본명은 유희정인데 친구들이 그가 가는 곳은  장터처럼 시끌벅적해진다고 붙여준 활동가명이 ‘소란이다.

  아니나 다를까그가 서울 은평에 정착한  불과 3 만에  일대가 ‘소란스러워지고 있다. 17 전환마을은평의 센터 격인 은평구 연서로15길에 있는 ‘밥풀꽃으로 소란씨를 찾았다전환마을은평에서 운영하는 소박한 식당이기도  이곳이  소란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산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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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동권으로 살다 지쳐 영국 유학

 소란씨는 대학생  노동현장에 나가 일하고, 2000년대 초엔 여성해방연대를 만들어 급진적인 영페미니스트 운동을  이른바 ‘운동권이었다운동조직 안에서도 성폭력 문제가 적지 않았던 당시 그는 가해자들을 주로 상담했다피해자의 상처 치유도 시급하지만 가해자의 불건강한 상태를 치유해 건강한 공동체 멤버로 돌려보내는 것도 간과할  없었다그러나 가해자들을 오랫동안 상담하는 사이 자신의 심신도 지쳤다자신의 치유가 시급해진 그가 풍광 좋고 쉬기 좋은 곳을 검색하다가 알게  곳이 생태주의자의 고향 슈마허대학이 있는 영국의 토트네스란 마을이었다.


 그는 2009년부터 슈마허대학에서 석사과정을 하면서 3년간 토트네스 마을운동가로 활동했다토트네스는 전환마을운동의 산실이었다전환마을운동은 최근 10여년 사이 유럽을 중심으로 세계적으로 급격히 확산되고 있는 생태공동체운동의 새로운 흐름이다. ‘계획적인’ 생태공동체마을들을 만들기엔 땅값이 너무 올랐기에새로 마을을 만들기보다는 기존의 마을들을 생태적으로 전환시키자는 운동이다.


 전환마을운동은 퍼머컬처(Permaculture) 생태철학을 기초로 하고 있다퍼머컬처는 인류 최초의 문명인 농업문명을 중심으로 자연과 인간이 본연의 생명력을 복원해 함께 살아가기 위함이다.


 토트네스에 정착해 살고 싶었던 그를 다시 한국으로 끌어들인 것은 2010 그의 고향 강화도에서 시작된 구제역이었다강화도에서 소를 키우며 생태적인 삶을 살던 작은어머니가 어느  구제역이 발생해 기르던 소들이 하루아침에 도살당하자  충격으로 자살을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그로 인해 한국을 오가며 고민하던 그에게 슈마허의 은사는 “머리로 생각만 해서는 답이 없다 “뭔가 바꿔보고 싶다면 현장으로 가라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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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산·남양주·영암  전국 확산

 그는 공유지를 퍼머컬처 방식의 도시텃밭공원으로 만들려는 은평의 활동가들과 만나면서 이곳에 정착했다그는 이곳에서 퍼머컬처학교를 비롯해 다양한 학교를 열어 생태철학과 삶의 기술들을 가르친다퍼머컬처학교와 자립자족학교잡초라도충분한풀학교 등이었다그와 10~30명씩 모여 공부를  이들이 자투리땅과 텃밭에 함께 농사를 짓고야산에서 풀을 뜯어 야생초 밥상도 차려 파티도 열었다열세 종류 벼를 키워  쌀로 열세 가지 떡과 술을 담가 먹고동네 장터에 내다 팔기도 했다콩을 심어 장과 된장도 담가 먹고 팔기도 했다이곳 밥풀꽃 식당에 공급되는 대부분의 생산품도 그들이 생산한 것들이다벌써 전환마을은평에만 활동가 10명을 비롯해 100여명이 함께하고 있다.


 퍼머컬처학교는 은평뿐 아니라 간디학교가 있는 충남 금산 남이와 경기도 남양주 두물머리전남 영암 선애빌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전환마을운동은 따로 리더나 위계가 없고한두 사람이라도 뭔가 해보고 싶은 이들이 중심이  쉽게 시작하고잘되거나 못되거나 평가 기준도 없고 안되면  다른 방식으로 전환하기도 하기에 자연스럽게 번져가고 있다.


 하지만 보통 나이대가 비슷한 친구그룹이나 같은 취미로 모이는 동아리와 달리 마을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하기 마련이다따라서 동양의 명상을 많이 하는 토트네스에서도 손을 잡고 서로 교감하는 ‘조율 함께 춤명상을 중시한다고 한다.


 이들이 주로 추는  오행춤이다오행춤은 다섯 단계로 되어 있다처음엔 조용한 음악으로 시작한다이어 스타카토가 많은끊기는 음악이 나오고 세번째엔 카오스로 몰아넣는 음악에 맞춰 자신을 최대한 끌어올려 춤에 몰두한다네번째는  세상에 처음 태어난 아기 같은 느낌을 갖는다마지막엔 춤을 추는지 쉬는지 모를 정도로 고요해진다 시간의 오행춤은 사람의  생애와 비견된다이렇게 추고 나면 기진맥진해  시간 정도는 그대로 앉아서 고요하게 쉬어줘야 한다그러다 이를    반복하기도 한다 달에 두세 번은 이런 이벤트를 연다.


 몸으로 풀면 굳었던 마음도 절로

 여러 세대가 관계하다 보면 정서적 베이스가 다르기 때문에 이해하는 속도에도 차이가 있어서 ‘ ‘ 듣는 경우가 많아요오해도 많고요그러나 이렇게 몸으로 풀면 굳었던 마음도 풀어지곤 하지요.”


 한국인들에겐 좌선명상이나 마음공부에 비해 몸명상이 익숙지 않고 처음엔 어색해하는데도 그가 춤명상을 권하는 것은  자신의 변화를 실감했기 때문이다.


 “‘운동 하면서도 안에는 분노가  있는 경우가 많았어요그런데 지금은 아닌  같아요지난 5 미국대사관 앞에서 경북 성주 소성리 주민들의 사드 반대 집회 사회를 봐달라는 부탁을 받았어요예전 같으면 분노에  목소리로 분위기를 이끌었을 텐데 지금은 그런 분노는 나오지 않는 거예요물론 사드 배치의 불합리성을 전달할 수는 있었지만요오래 묵은 화는 춤추면서 많이 풀려 나가 버렸나 봐요.”


 그가 시끄러운 소란이 아니라 ‘작은 난초’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자리에서 함께 흐트러지고 망가지고 나면 서로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전환마을은평’ 사이트 www.facebook.com/transitioneunpyeong/



아기 일찍 떼어놓는게 선진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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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 와서 사는 동안 궁금했던 것 중의 한가지는, 무슨 연유로 이 나라 사람들은 그리도 일찍 짝을 찾아나서고, 때와 곳을 가리지않고 몸으로 사랑의 표현을 해야하는가 였습니다. 마치 늘 배고프고 목이 마른 듯하다는 느낌이 어렴풋했는데, 제가 스스로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유치원과 학교등을 통해 깊이 깔려있는 문화의 차이를 보니 납득이 가는 면이 있습니다.

북유럽과 독일엔 전통적으로 아기를 업고 일한다거나 안고 다니는 문화가 없었습니다. 80년대 중반 정도 부터 달라진 면도 있지만 아직도 대부분은 갓난 아이조차 엄마 곁이 아니라 침구에 따로 누이고, 여유가 있는 집에선 다른 방에 재웁니다. 정해진 시간에 젖먹이고 정해진 시간에 놀이터에 가고, 정해진 시간에 겨울이나 해가 긴 여름이나 무조건 자게합니다. 밤에 자다 깨어서 아무리 울어도 엄마의 품에 갈 수 없는 아이들은 스스로 체념을 터득하며 ‘강인’해지도록 훈련받습니다. 두런두런 엄마가 손님과 얘기 나누는 소리를 들으며 엄마의 무릎을 베고 잠들었던 그런 기억은 독일 친구들에게는 없더군요. 손님들이 오면 아이들도 신나하고 서로 뒤섞여 놀다가 여기저기 쳐박혀 잠이 들면 들쳐업혀 집으로 가곤하는 했는데, 그런 모습은 독일에선 보기 어렵습니다. 아이와 어른은 늘 따로 따로 입니다.

우리 말의 ‘엄마’인 ‘마마’는 원래 라틴어로 ‘젖’입니다. 새끼 원숭이가 엄마 원숭이에게 딱 달라붙어 젖을 빨며 나무와 나무 사이로 이동하는 모습을 ‘동물의 세계’에서 보셨겠지요? 산업화가 200년 밖에 안된 소위 선진국의 현대인들은 그건 미개한 모습이라고 치부하는 것 같습니다. 엄마의 등에, 옆구리에, 가슴팍에 붙어서 뱃속에서 들었던 엄마의 심장박동을 느끼며 사람 새끼도 원숭이 새끼도 두 발을 떼고 스스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그렇게 의지하면서 세상을 배웁니다. 

인간으로 생겨나 첫 열달을 엄마 뱃속에서 자라난 아이가 더이상 지낼 수 없이 좁아진 뱃속을 떠나 세상으로 나올 때 그 허전함이 어떨지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서양이 아닌 많은 문화권에서는 갓난아이를 꽁꽁 싸고, 업고서 모든 일을 했습니다. 꼭 엄마가 아니더라도 대식구인 집안에서는 누구라도 아이를 안아주고 업어주었지요. 충분히 젖을 먹은 아이는 아무리 젖꼭지를 들이대어도 더 먹지 않는 것 처럼, 충분히 보호감을 느낀 아이는 서둘러 그것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서양에서 정서불안과 행동장애가 많은 아동들과 청소년의 심리를 연구하다 유아의 성장발육에 중요한 것으로 ‘패팅’이라 이름하는 신체접촉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이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바로 엄마(혹은 아빠)의 등딱지나 옆구리에 매달려서 보호받고 있다, 격리되지 않았다는 그 존재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최근, 프랑스의 직장여성들이 잠정적, 만성적인 우울증에 걸려있다는 연구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한 돐도 되기 전에 아이를 유아원에 맡기고 직장일을 하는, 혹은 해야만하는 엄마들이 '본능적'엄마 노릇을 하지 못하면서 오는 우울증이라는 거였습니다. 말하자면 아이만 엄마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엄마도 아이가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아무리 유아원에서 잘 한다고 해도 엄마나 가족의 손길을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살을 부대기면서 정서적 안정감을 갖추어야 할 유아기에 아이들은 너무 일찍 혼자서 고투하는 방법을 익혀야만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유아원에서 일찍부터 사회성을 키운다는 것은 기만이라는 것을 어린아이들을 유심히 관찰만해봐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유아원의  증설이 아니라, 아이가 태어나 첫 3년동안은 엄마에게 재정적인 보장과 직장으로의 복귀가 보장되어야 아이와 ‘엄마’로서의 여성에게 모두 정서적 안정감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회야말로 삶을 풍요롭게 하는 선진의 사회라고 믿습니다. 눈앞의 생산성과 성과만을 보는 사회는 제가 보기엔 아직 미개사회입니다.

꿈도 함께 꾸면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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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꾸는 꿈은 현실을 물들인다. 지루한 반복, 생기 없는 열심에서 건져내고, 설레게 한다. 고독한 상품으로 길들여진 깊은 잠에서 깨어나 새 삶을 향한 모험을 감행한다. 꿈은 현실을 물들이고 새 꿈을 낳는다. <밝은 누리>는 몇 년에 한 번씩 꿈 나눔을 한다. 홀로가 아니라 함께 이룰 꿈을 꾼다. 잃었던 꿈이 살아나고, 처음 꾸는 꿈으로 설레기도 한다. 재밌게 나누다보면, 꿈은 어느새 현실이 된다


온 생명이 더불어 사는 삶을 꿈꾸며 함께 공부하며 살기 시작했다. 생명평화는 결혼 임신출산 육아, 먹고 자고 입고 노는 지극히 일상적인 삶 속에서 구체화된다. 구체적인 삶의 과제들을 함께 해결하며 꿈이 스며든 삶을 산다. 하늘을 공경하고 생명을 사랑하는 삶, 생명평화를 꿈꾸는 부모들과 젊은이들이 함께 모였다. 꿈은 곧 현실이 되었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시작으로, ‘마을초등학교’, ‘생동중학교’, ‘삼일학림’(고등대학통합과정)으로 이어진다. 꿈을 먹고 자란 아이들이 어느새 동지가 되어 함께 새 꿈을 꾼다. 밥 한 끼 차분히 제대로 먹을 수 없는 현실이다. 인스턴트, 패스트푸드, 한 끼 떼우기... 밥을 대하는 가슴 아픈 현실이다. 생명을 살리는 밥상을 일상 잔치로 모시려는 이들이 모여 꿈을 나눴다. 꿈은 아름다운마을밥상이 되어 우리를 살린다. 마을에서 차 마시며 책도 보고 작은 공연도 하는 꿈들이 모여 마을서원마을찻집 마주이야기를 열었다


잘 하는 게 다른 이들이 함께 꿈을 나누니 차도 맛있고, 작은 음악회도 열고, 아기 데리고 맘 편히 가는 예쁜 찻집이 된다. 노래하고 춤추고, 이것저것 만들어 나누길 좋아하는 이들이 함께 꿈꾸니 마을창작소’, ‘마을공작소가 열린다. 삶터 일상이 다양한 마을잔치로 흥겹다. 흙 나무 돌로 자연과 어우러지는 집짓기를 꿈꾸는 이들이 모여 생태건축 흙손을 만들었다


생명을 살리는 하늘땅살이(농사), 기도와 노동이 하나 되는 삶을 꿈꾸는 이들이 하늘땅살이움터를 일군다. 농촌과 도시마을이 서로 살리는 꿈을 현실로 누리며 산다. 현실에 스며든 꿈은 새 꿈을 낳는다


20세기 인류의 오만과 죄를 짊어진 고난의 땅 한반도가 평화를 증언하는 땅으로 부활하는 꿈을 꾼다. 제국주의 식민지배, 분단과 전쟁, 냉전과 생태계 파괴를 고스란히 겪은 한반도가 영구평화지대로 회복되는 꿈, 동북아 생명평화공동체를 꿈꾼다. 강력한 군사력이 평화를 지킨다는 오래된 거짓에서 벗어나, 사랑과 섬김으로 하나 되는 평화를 꿈꾸며 기도한다. “칼을 쳐서 보습을,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 성령이 임하면 꿈을 꾼다고 했다. 생기 마른 역사와 문명은 꿈꾸지 않는다.


현실이 강제하는 힘에 길들여지고, 메마른 꿈이 신기루처럼 떠돈다. 어린이와 젊은이조차 꿈꾸지 못하고, 상품으로 길들여진다. 고독한 개인, 상품으로 내몰린 삶에서 벗어나, 함께 꿈꾸며 꿈을 현실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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