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서
*<Peaceful Morning> 출처 : 인터페이스리프트
왜 그리스도인인가,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 신부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가톨릭, 개신교를 막론하고 기독교인이라면 이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가톨릭 신자는 영세 받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개신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그렇지, 내가 살아서 예수 잘 믿어 하는 일 마다 복 받고, 죽어서도 다시 살아나 영원히 살아야지.
불교신자들도 왜 불교를 믿느냐고 물으면, 표현이 기독교 신자들과 다를 뿐 같은 생각을 할 겁니다. ‘이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열반에 들기 위해서.’ 불교의 근본 원리는 제법무아諸法無我라, 모든 것에는 본래 나라고 부를 만한 게 없다는 것이니 열반의 주체가 되는 ‘나’도 없을 터, 내가 열반에 든다는 생각은 제법무아와 모순됩니다. 하지만 보통의 불교신자들이 원하는 열반 역시 이 ‘나’가 소멸하지 않고 영원한 평안에 머무는 상태를 떠올리니 기독교의 영생과 같습니다. ‘소멸하지 않는 나’를 갈구하는 건 무릇 모든 생명체의 본능입니다.
나는 세월이 가면서 이 ‘영원한 생명’이란 말 뜻에 대해 차츰 달리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영생이나 열반의 주체인 이 ’나‘가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오래 동안 궁리를 해왔습니다. 개체인 ‘나’가 다른 것들과, 다른 사람들과 독립하여 원래부터 있어 왔고, 앞으로도 그 고유의 특성을 유지하면서 쭉 존속하는가. 곰곰 생각해 보니 그건 아닙니다.
태어나기 전, 원래부터 이런 특성을 가진 ‘나’가 존재할 리 없습니다. 내 윗대인 아버지, 어머니의 유전자가 합쳐져 그중에 특정 유전자가 지금의 나를 발현시킨 거고, 만약에 어머니가 다른 남자를 만났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습니다. 할아버지 대에서는 친가, 외가 네 분이 유전자를 물려주었고, 30대 조상에 거슬러 올라가면 2의 30제곱 대략 10억명의 내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있습니다. 30대 조상이면 한 대를 대략 30년 잡고 9백년 전이니 고려시대쯤 될 테고 그때 인구는 백만명이 채 안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10억명의 할아버지, 할머니?
결론은 지금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공통의 조상들로부터 유전자를 받았다는 겁니다. 공통의 유전자 풀에서 일부가 나를 형성하고, 또다른 일부가 너를 형성하고, 앞으로도 자손들을 그때 그때 만들어 갈 겁니다. 내가 음식으로 먹고 내 피와 살로 만든 동물, 식물도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나의 일부입니다. 내 생각도 수십억년 전 단세포 시절 이래 내 조상들이 겪은 경험과 생각들을 내가 전수받은 겁니다.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으로 계속 유지되는 ‘나’ 역시 그 고유의 정체성을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내가 세살 때 죽었다면 아기의 모습과 생각으로 영생을 누리고, 아흔살에 죽는다면 다 쭈그러진 몸뚱이에 제법 높은 수준의 지성을 갖춘 채로 영생을 누린다? 어느 모습이 나입니까.
이런 저런 생각 끝에 나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나’란 원래부터, 미래를 향해, 고유의 특성을 지니며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이 삼라만상의 이합집산이 나이고 너이고, 저 돼지고, 저 산 위의 바위고, 저기 흘러가는 강물이니 이 모두가 일체입니다.
바티칸 공의회 문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제2장 ‘하느님의 백성’편과 <현대세계의 사목헌장> 제2장 ‘인간 공동체’편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각각 떨어져 살도록 하지 않으시고 사회 공동체를 형성하도록 하신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또한 ‘사람을 거룩하게 하시고 구원하실 때 아무런 상호 유대 없는 개인이 아니라 모든 이가 한 백성을 이루어 진리를 따라 당신을 인식하고 당신을 거룩히 섬기도록 하신 것이다.”
요컨대 구원은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에 있다는 겁니다. 영원한 생명의 주체는 나 개인이 아닌 우리 모두라는 겁니다. 공동체 유전자 풀은 외면하고, 그 유전자 풀 중 일부가 일시적으로 모인 특정 유전자 집합인 한 개인만이 구원받고 열반한다는 건 물리학이나 생물학이 보여주는 이 세상의 실상과도 어긋납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착한 이건 악당이건, 성격이 급하건 느리건, 부자건 가난뱅이건, 이성애자건 동성애자건, 모두 모두가 다 하느님의 자녀인 줄 알라. 그래서 이 선포는 복된 소식, 복음입니다.
힌두교나 불교 화엄종에서는 바다와 물결 비유를 즐겨 씁니다. 물결은 바람 따라 잠시 일었다가도 다시 바다로 합쳐집니다. 이처럼 바다와 물결이 다르면서도 하나이듯이, 이 삼라만상 전체 또는 본체와, 거기서 비롯되어 잠시 일어났다가 도로 그리로 돌아가는 이 개체들도 다르면서 하나입니다.
나는 종교의 스승님들이나 과학을 공부하면서 이리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라는 한 개체의 영원한 생명 혹은 열반은 없나니, 이 세계가, 우리 모두가 이미 하느님 품 안이요 열반이라.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더군요. “진리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고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따라서 진리는 관계입니다.”
진리는 사랑이요, 관계라. 하느님은 수염 허연 온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절대자도 아니고, 세상을 심판하는 판관도 아니고, 우리의 기도에 놀아나는 로봇도 아니고, 사랑 그 자체이고 관계 그 자체라. 뛰어난 통찰입니다. 불교의 연기緣起도 만물이 서로 기대어 생겨난다는 뜻이니, 바로 ‘관계’입니다.
왜 그리스도인인가, 왜 불교를 믿는가.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기 위하여"
김형태 / 법무법인 <덕수> 변호사, <공동선>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