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명장면> 재여를 위한 변명
宰我問曰 仁者 雖告之曰 井有人焉 其從之也
재아문왈 인자 수고지왈 정유인언 기종지야
재여가 물었다. “우물에 사람이 빠졌다면, 인자(仁者)는 마땅히 그 사람을 구하러 우물 속으로 뛰어들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옹야’편 24장
1. 공문의 이단아
자공을 추억하다보면 늘 그 반대편에 어른거리는 얼굴이 있다. 재여(宰予)라는 인물이다. 변설에 능해 스승 공자로부터 자공과 함께 언어분야의 수재로 평가받았다. 두 사람은 1~2살 차이의 동년배①로서 곧잘 의기투합했다. 스승에 대한 존경심도 막상막하였다. 무엇보다 실질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세상을 바꾸고 싶은 열정이 높은 만큼 자기애도 강해서 종종 명성과 권력, 부에 대한 집념도 드러냈다. 이 뛰어난 두 제자의 운명은 여기서부터 갈렸다. 자공은 기존의 부조리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개량주의자로서- 출세 전략을 선택했다. 반면 재여는 부조리한 현실 그 자체와 맞섰다. 세상으로 나가되 투쟁적인 노선이었다.
재여의 ‘급진성’은 공자 사후 학단을 안정시켜야 할 공문의 입장에서도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역사는 그런 재여에게 두가지 오명을 부여했다. 첫째는 영원한 불량학생 이미지다. 재여가 자주 낮잠을 자므로 공자가 말하였다. “썩은 나무로는 조각할 수 없고 썩은 흙으로 쌓은 담장은 흙손질을 할 수 없다. 재여를 꾸짖어서 무엇하겠느냐!” (宰予晝寢 子曰 朽木不可雕也 糞土之墻 不可오(흙손질할 오)也 於予與 何誅)-‘공야장’편 9장②
재여가 낮잠 때문에 이런 정도의 심한 꾸중을 들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재여는 무엇인가를 도모하느라 공부를 게을리했고, 스승에게 들켜 꾸중을 들을라 치면 “낮잠 때문에”라고 싱겁게 둘러댔던게 아닐까. 요컨대 그는 학교 보다는 학교 밖의 일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는 종종 ‘세상사에 관한’ 삐딱한 질문으로 스승을 골탕먹이거나 심지어 궁지에 몰아넣기도 했다. 스승은 이런 제자의 일탈이 아슬아슬했다. “이 썩을 놈아!”라고 소리치는 공자의 목소리에서 재주는 많으나 불온한 성향의 제자를 걱정하는 스승의 안타까움이 귀에 쟁쟁하지 않은가.
재여가 남긴 두번째이자 마지막 불명예는 정변에 휩쓸려 ‘의롭지 못한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이 때의 일을 후대의 역사가는 짤막하게 기록하고 있다.
재아는 임치(제나라 수도)의 대부가 되어 전상(田常·제나라 실권자 진항의 다른 이름)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가 멸족의 화를 당했다. 공자가 이를 부끄럽게 여겼다(孔子恥之).-<사기> ‘중니제자열전’
재여는 공자가 죽기 두 해 전 제나라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죽음이 공문의 가르침과 배척된 불의한 죽음으로 평가되었다. 이로 인해 재여는 스승을 욕되게 한 불초한 제자라는 이미지가 굳어지고 말았다. 그의 이런 이미지는 후학들이 편집한 공자의 어록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논어>에는 재여가 관계된 문장이 5번 나오는데 공자가 직접 재여를 언급한 대목(선진편)을 빼면 모두 재여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것들을 종합하면 재여는 ‘불성실하고’(공야장편), ‘근거없는 말로 현혹하고’(팔일편), ‘당장의 편익을 위해 고귀한 전통을 부정하고’(양화편), ‘스승의 가르침을 의심하고 심지어 시험하려 한’(옹야편) 사람’이다.
재여는 노나라 출신으로 자(字)가 자아(子我) 또는 재아(宰我)이다. 자공과 더불어 언어에 뛰어났으며, 공자를 모시고 14년의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아 공문십철(孔門十哲)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후대의 한 왕조로부터는 제공(齊公)으로 추존되기도 했다. 재여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 중에서
2. 또다른 선구자?
나, 이생이 가까이서 본 재여는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여느 급진파 지식인의 모습을 갖고 있었다. 그에게 기성세대와 기존질서는 하나같이 불신과 전복의 대상이었다.
‘이 허위와 기만에 찬 소수 귀족 대부만의 세상. 내가 갈아엎고 말테다.’
위나라 재상까지 지낸 ‘개량주의자’ 자공도 젊어서는 비슷했다. 학창 시절 두 사람은 곡부의 반체제 운동에 관여하고 있었는데 자공이 먼저 데모의 ‘시범’을 보여줬다.
곡삭제(告朔祭③)에 희생양을 쓰는 것을 반대합니다.(子貢 欲去告朔之기(食+氣)羊)-‘팔일’편 17장④
형식 뿐인 제사에 아까운 양만 바치다니요? 이따위 제례는 도대체 누굴 위한 것입니까?
다음은 재여 차례.
삼년상은 너무 기니 폐지해야 합니다.(宰我問 三年之喪 期已久矣)-‘양화’편 21장⑤
초상을 오래 치르느라 임금은 정사를 돌보지 못하고 백성들은 허리가 휩니다. 이따위 허례는 도대체 누굴 위한 것입니까?
어록에는 두 사람 모두 스승으로부터 따끔한 가르침을 받는 것으로 마무리되지만, 그들이 제기한 문제의식만큼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안티 테제’였다. 죽은 자를 떠나보내는 장송(葬送)의 의식은 예교의 핵심이자 심각한 민생 문제였다. 의례(儀禮)를 업으로 삼았던 계층에서 배태된 유가(儒家)는 장례를 후하고 오래 치르는 이른바 ‘후장구상’(厚葬久喪)을 지지하였고, 묵가(墨家)로 대표되는 반유가 측에서는 간소한 절장(節葬)을 주장하였다. 시대적으로 나중에 성립된 우화이지만 반유가쪽이 유가의 허례허식을 조롱하는 우화 속에는 당시 민중들이 생각한 유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유가들은 무덤을 도굴하면서도 곧잘 시와 예를 들먹이지. 무덤 밖의 대유(大儒)가 무덤 안의 소유(小儒)에게 물었다지?
“곧 날이 밝는데, 일은 잘 되고 있는가?”
“아직 시신의 옷을 벗기는 중인데, 가만히 보니 입에 구슬을 물고 있군요. <시>에 이르기를, ‘푸르디 푸른 보리 무덤가에 자라네, 살아서 베푼 것도 없는데 어째서 죽은 놈이 구슬을 물었는가’라고. 네 이 놈의 머리칼을 잡고 턱수염을 누르고 쇠망치로 턱을 바순 다음 천천히 두 볼을 벌려 입속의 구슬이 다치지 않게 꺼내고 말리라.”- <장자> ‘외물’편
이런 유가의 약점이 불만스러운 문도들은 형식에 얽매인 일부 예제(禮制)에 의문을 제기하였고,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재여와 자공 같은 젊은이들이었다.
(초상을 치르느라) 군자가 3년동안 예를 행하지 않으면 예가 반드시 무너질 것이며 삼년동안 음악을 익히지 않으면 음악도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묵은 곡식이 떨어지면 새 곡식이 싹터오르고, 불씨 지피는 나뭇가지도 사시에 맞춰 바뀌는 것이 한 해이니, 1년상이면 충분합니다.(君子三年不爲禮 禮必壞 三年不爲樂 樂必崩 舊穀旣沒 新穀旣升 鑽燧改火 期可已矣)
"하늘과 사시의 운행도 1년을 주기로 이뤄지고 있고, 사람살이와 농사도 한해를 단위로 행해지니 상례도 1년을 주기로 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습니까?”
이런 재여의 문제제기는 급진파의 관념적인 주장만이 아니라 당시 백성의 삶을 실질적으로 대변하고 있었다. 공자 역시 예제가 형식에 치우치는 세태를 경계했다. “예의를 다하는 것이 어디 옥과 비단 같은 예물을 말하는 것이랴”(‘양화’편 11장⑥) “예는 사치할 바엔 검소한 게 낫고, 상은 형식에 치우칠 바에는 차라리 그냥 슬퍼하는게 낫다.”(‘팔일’편 4장⑦)고 분명히 말했다. 그럼에도 공자는 재여의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이렇게 비판한다.
재아가 나가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재여는 인을 모르는가 보다. 자식은 태어나 삼년이 지나야 부모의 품을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삼년상이 천하 사람들의 상례가 된 것인데, 재아에게는 그런 부모의 삼년 사랑이 없었다는 말인가!”(宰我出 子曰 予之不仁也 子生三年然後 免於父母之懷 夫三年之喪 天下之通喪也 予也有三年之愛於其父母乎)-‘양화’편 21장
공자에게 삼년상은 실리나 형식를 따지기 이전에 부모 자식간의 도리, 즉 인륜의 기본 문제라는 인식이 더 강했다. “공자의 인은 당시에 이미 훼손당할대로 당한 전통적 가치가 더이상 파괴되지 않도록 보존하면서 동시에 미래의 가치를 인간의 삶속에서 배양하고자 한 것”(시리카와 시즈카, <공자전>)이기에 더욱 그랬다. 자공이 고삭제에 희생을 쓰는 것이 낭비라고 여겨 양을 바치는 것을 폐지하자고 했을 때, “너는 양이 아깝지만, 나는 예가 아깝다”(爾愛其羊 我愛其禮)고 한 대답이 그것을 웅변하고 있다.
스승과 제자의 이 논쟁은 당시 예제를 둘러싼 논란이 얼마나 뜨거웠는 지를 보여주지만, 나는 이 일화가 실제로 있었던 사건은 아니라고 본다. 이는 후대의 유가들이 묵가(墨家)나 양주(楊朱)의 학설에 맞서 자신들을 정설화하기 위해 조종 공자의 권위를 빌린 것일 뿐이다. <논어>가 편집될 즈음 묵가는 유가의 강력한 비판자로서 대중들의 높은 지지를 얻고 있었다. 묵가는 이렇게 외쳤다. “수의는 세 벌로 하여 살이 썩기에 충분하게 하고, 관은 세 치 두께로 하여 뼈가 썩기에 충분하게 하며, 무덤 구덩이의 깊이는 샘이 통하지 않도록 하고, 냄새가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을 정도에서 그친다. 죽은 이를 장사지내고는 산 사람이 오래도록 상중에 있으면서 슬퍼만 하지 말라(死者旣葬 生者毋久喪用哀)”-<묵자> ‘절용’편
이밖에도 재여는 전설적인 임금으로 추앙받는 황제가 ‘사람으로서’ 삼백년을 살았다는 통설을 믿을 수 없다고 논박하였고, 귀신의 존재에 대해 강한 의문(<공자가어>)을 제기했다. 재여는 오늘 날의 기준에서 보면 인간중심의 유물론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당대의 통념과 맞섰던 사람이었다.
송나라 사람인 묵가의 조종 묵적(墨翟·서기전 479~381)이 노나라에 와서 공자의 학문을 배운 뒤 겸애(兼愛) 사상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역사적 사실(<여씨춘추>)을 생각하면, 묵적보다 1.5세대 정도 앞선 노나라 사람 재여는 어쩌면 묵가를 배태한 유가 일파의 선구였는지도 모른다.⑧
3. 마지막 질문
공자는 68세가 되던 서기전 484년 14년간의 유랑을 마치고 귀국했다. 공자의 귀국은 공자 자신의 바람과 자로, 자공, 염구와 같은 제자들의 노력에 힘입은 바 컸지만, 노나라 정계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에 가능했다. 노나라는 당시 계씨정권의 수장이었던 계환자가 죽고 아들 계강자가 정권을 계승해 있었다. 계강자는 공자와 갈등관계에 있었던 아버지와는 달리 공문을 자기의 지지세력으로 포섭하고자 했고, 그 가시적 조처로서 공자의 귀국을 허용한 것이다. 임금인 애공쪽에서도 공자의 귀국을 환영했다. 공자의 존재는 계씨정권을 도덕적으로 견제하는 효과를 내어 자신의 군주권을 회복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이때 재여는 애공 쪽과 가까왔다. 재여는 당시 중국에 횡행하던 신하에 의한 참주정치를 혐오했다. 그런 재여에게 스승의 귀국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모멘텀이었다. 국제적으로 존경 받는 현자인 공자가 계씨에 맞서 노나라 정치개혁을 지지한다면 그보다 더 큰 원군은 없을 것이었다.
공자가 귀국하자 계강자는 공자를 상부(尙父)로 예우하면서 자주 자문을 구하였다. 어느날이었다.
“나라 안에 도둑이 많아져 걱정입니다. 퇴치할 방법이 없겠습니까?”
“진실로 그대에게 탐욕이 없다면, 백성들은 상을 준다해도 도둑질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苟子之不欲 雖賞之 不竊)-‘안연’편 18장⑨
적자(嫡子)를 제치고 후계자의 지위를 차지했던 계강자는 공자의 말을 자신의 컴플렉스를 건드린 것으로 듣고 불쾌한 기색이 되어 돌아간 후 한동안 공자를 찾지 않않다. 그러자 일부 제자들이 공자가 계강자를 방문해 오해를 풀어주는 방안을 논의하자 재여가 이를 가로막았다.
“굳이 선생님이 먼저 가실 필요가 있는가? 가르침을 받으려면 제깐놈이 찾아와야지 왜 선생님이 먼저 허리를 굽히는가?”
재여가 완강히 반대한다는 소식을 들은 공자는 웃으며 말했다.
“여가 너무 흥분했구나. 산을 떠나 십리를 가도 매미소리가 귓가에 쟁쟁하더라는 말이 있다. 때로 정치란 상대방이 호응해 오도록 하는게 더 나을 때가 있는데.” (違山十里 혜(蟲+惠)고(蟲+古)之聲 猶尙存耳 政事無如膺之矣. <설원> ‘정리’편을 인용해 구성)
재여가 반계씨 투쟁의 핵심인물이었다는 증거는 애공과 재여가 나눈 암호같은 대화 속에도 남아 있다.
임금인 애공이 화재로 소실된 사(社·토지신을 모신 제단⑩)를 새로 짓는 일에 대해 묻자 재여가 말하였다. “하후씨는 목재로 소나무를 사용했고, 은나라는 잣나무를 썼고, 주나라 사람들은 밤나무를 썼습니다. 밤나무를 사용한 이유는 백성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哀公問社於宰我 宰我對曰 夏后氏 以松 殷人 以柏 周人 以栗 曰 使民戰栗)
후세의 분석가들은 애공과 재여가 계씨정권을 “전율케(두려움에 떨게) 할”, 즉 계씨정권을 타도하거나 무력화시킬 모종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 했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본다.(유보남, <논어정의>) 그러나 결론적으로 공자는 이런 친위쿠데타 움직임을 지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이뤄진 일은 말하고 싶지 않다. 이미 끝난 일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겠다. 다 지나간 일이다.(子聞之 曰 成事不說 遂事不諫 旣往不咎) -‘팔일’편 21장⑪
공자는 4대째에 접어든 계씨정권이 결코 호락호락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애공은 계씨를 제압할 깜냥이 못되는 위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의협심 하나로 덤벼드는 재여는 위험천만이었다. 공자는 재여가 무모한 싸움에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공자의 이런 속마음까지 생각하지 못한 재여는 스승의 태도가 무척 실망스러웠다.
‘스승님도 한때는 혁명을 꿈꾸지 않으셨던가? 아, 이제 저 분도 소심한 노인에 불과한 것일까…’
한동안 모습이 보이지 않던 재여가 어느날 연찬에 참석했다. 모두들 그를 반겼다. 공자도 오랫만에 재여를 보니 흐뭇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재여의 표정은 줄곧 굳어 있었다. 연찬이 거의 끝나갈 무렵 재여가 공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 우물에 사람이 빠졌습니다. 인자(仁者)라면 마땅히 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우물 속으로 뛰어들어가야 하는게 아닙니까? (宰我問曰 仁者 雖告之曰 井有仁(人)焉 其從之也)
이것은 명백한 도발이었다. 스승을 백척간두에 세워놓고 밀어붙이는 심문이었다. 팽팽한 긴장감에 모든 사람들이 숨조차 쉬지 못했다.
‘아, 재여가 오늘로 끝장을 보려는구나…’
평소와 달리 웃음기 없는 얼굴로 공자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어찌 그리 할 수 있겠느냐? 군자는 <우물까지> 가게 할 수 있어도 빠지게 할 수는 없다. <그럴듯한 말로> 군자를 속일 수는 있어도, 바보로 만들 수는 없다!(子曰 何爲其然也 君子 可逝也 不可陷也 可欺也 不可罔也)-‘옹야’편 24장⑫
‘여야, 너의 바람이 무엇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렇다고 인(仁)을 미끼로 써서야 되겠느냐? 내가 미끼를 물면 너는 그것으로 무엇을 낚을 참이더냐…’
정적 속에서 공자의 눈과 재여의 눈이 마주쳐 불꽃을 튀겼다. 이윽고 공자가 일어나 자리를 뜨자, 재여는 멀어져가는 스승의 등 뒤를 향해 절한 뒤 한참을 더 엎드려 있었다. 그것이 우리가 본 재여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 중에서
4. 재여의 최후
재여의 죽음에 대해서는 당시에도 이론이 분분했다. 재여는 어떻게 죽었기에 공자가 부끄러워했다는 말이 남았을까.
파발을 타고 전해진 급보는 제나라 실권자 전상이 난을 일으켜 제간공을 시해하였다는 소식이었다. 뒤이어 공문에는 재여가 제나라 정변의 와중에 불의(不義)를 꾀하다가 일족이 몰살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공문은 아연 긴장했다. 얼마 뒤 공문은 공자가 재여의 의롭지 못한 죽음에 대해 유감을 표시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 후 공자는 조정에 나가 애공에게 군주를 시해한 전상을 주벌할 것을 주청하였다.(‘헌문’편 22장) 나는 그 때 공자의 강력한 분노에는 재여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도 일정부분 작용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자 제나라 변란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전해졌는데, 나, 이생이 들은 바는 이러하였다. 재여는 제간공이 노나라에 망명중일 때 알게 되어 친해졌는데, 그가 임금이 되자 제나라 조정에 출사하게 되었다. 간공은 권신 전상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최측근인 노나라 출신 감지⑬를 전상과 함께 공동 재상으로 삼았다. 감지의 일족인 재여는 감지 진영의 핵심인물 중 하나였다. 어느날 전상의 친척이 살인죄를 저지른 것을 기화로 전씨 세력을 치려던 감지 진영은 오히려 전상의 선제 기습을 받고 괴멸 당했다. 이 난리 때 재여가 죽었고, 간공도 달아났다가 곧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좌전> 노애공 14년조를 인용해 각색) 공문은 당시 사건의 자세한 전후맥락을 모른 채 재여가 전상 진영에 가담하였다가 잘못되어 죽은 줄 알았던 것이다.
재여의 삶과 죽음을 생각할 때면 나는 가끔 예수의 제자 유다를 떠올리곤 했다. 재여는 공문십철의 한 사람이었고, 유다는 12사도의 한 사람이었다. 스승이 도덕적인 지도자로서만이 아니라 정치적 메시아로서 민중을 억압에서 구해주기를 염원했다. 한 사람은 스승을 사랑하면서도 끝내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해 스승을 배신했고, 한 사람은 자기 이념을 위해 스승을 부정하고 떠났다. 한 사람은 자살했고, 한 사람은 살해됐다.
5. 같은 뿌리, 다른 가지
재여는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나름대로 자기의 시대정신을 실천하려 했다. 재여가 자기 이념만을 위해 헛된 공론(空論)을 일으키고 사리사욕을 위해 의(義)를 이용한 사례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는 인간적인 결함에도 불구하고 진정성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공자를 사랑했다. 스승의 인(仁)을 끝까지 회의했지만, 이상주의자로서 스승의 인격 또한 끝까지 흠모했다.
오랜 유랑 끝에 노나라로 돌아오던 길에서 재여와 자공이 나눈 대화를 나는 잊을 수 없다.
“내가 이런 저런 일로 선생님을 불편하게 한 일이 많았지만, 그런 의혹을 통해 오히려 선생님의 진면목을 더욱 잘 알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감히 말하지만 우리 선생님은 요임금이나 순임금보다 훌륭합니다.”(以予觀於夫子 賢於堯舜遠矣)
자공이 화답한다.
“사형은 언제부터 그렇게 느끼셨습니까?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인류가 생긴 이래 우리 선생님 같은 분은 없을 것입니다."(自生民以來未有夫子也) -(<맹자>‘공손추 상’편⑭)
스승의 수레를 따라 나란히 걸어가던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선하다.
<원문 보기> *<논어명장면>은 소설 형식을 취하다 보니 글쓴 이의 상상력이 불가피하게 개입되었다.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논어를 새롭게 해석해보자는 글쓴 이의 취지를 살리면서 동시에 독자들의 주체적이고 다양한 해석을 돕기 위해 원문을 글 말미에 소개한다. 소설 이상의 깊이 있는 논어읽기를 원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2014년 11월호 연재부터 <논어> 원문보기에 인용할 한글 번역본은 <논어정의>(이재호 정해,솔)와 <한글세대가 본 논어>(배병삼 주석, 문학동네)이다. 표기는 이(논어정의)와 배(한글세대가 본 논어)로 한다. 이밖에 다른 번역본을 인용할 때는 별도로 출처를 밝힐 것이다. 영문 L은 영역본 표시이다. 한문보다 영어가 더 익숙한 분들의 논어 이해를 추가하였다. 영역 논어는 제임스 레게(James Legge. 1815-1897. 중국명 理雅各)본을 사용하였다. ***<논어>는 편명만 표시하고, 그 외의 문헌은 책명을 밝혔다.
① 재여의 생몰은 미상이다. 따라서 정확한 나이를 알 수 없으나, <수사고신여록>(이재하 옮김)의 각주에 ‘장대년의 <공자대사전>에 공자보다 29살 아래’라고 나온다. 구성의 필요상 이를 따른다.
②공야장편 9장 宰予晝寢 子曰 朽木不可雕也 糞土之墻 不可오(흙손질할 오)也 於予與 何誅 子曰 始吾於人也 聽其言而信其行 今吾於人也 聽其言而觀其行 於予與 改是 이-재여가 낮에 누워 있으니 스승께서 이렇게 꾸짖었다. “썩은 나무에는 글씨와 그림을 새길 수 가 없으며, 썩은 흙으로 쌓은 담장에는 흙손질을 할 수가 없으니 내가 재여에 대하여 무엇을 책망하겠는가.”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처음에슨 사람들에 대해서 그 사람의 말을 듣고 그 사람의 행실을 믿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는 나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의 말을 듣고서는 그의 행실을 자세히 살펴보려고 하니, 내가 재여 때문에 사람보는 태도를 고치게 되었다.” 배-재여가 낮잠을 잤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삭은 나무에는 무얼 새길 수가 없고, 썩은 흙으로는 담을 바를 수 없다. 저 녀석을 어떻게 혼을 내줄꼬! 선생님 말씀하시다. 일찍이 내가 사람을 대함에, 말을 들으면 그것이 실천될 것으로 믿었다. (헌데) 요즘 내가 사람을 대함에, 말을 듣고서도 실천의 여부를 살피게 된 것은 재여 저 녀석 때문이다. L-Tsai Yu being asleep during the daytime, the Master said, “Rotten wood cannot be carved; a wall of dirty earth will not receive the trowel. This Yu!-- what is the use of my reproving him?” The Master said, “At first, my way with men was to hear their words, and give them credit for their conduct. Now my way is to hear their words, and look at their conduct. It is from Yu that I have learned to make this change.”
③곡삭제(告朔祭) 음력 초하룻날에 조상에게 고유하는 제사. 이때 노나라에서는 곡삭제 때 제사 의례를 생략한 채 희생양만 바치고 있었다.
④ 팔일편 17장 子貢 欲去告朔之기(食+氣)羊 子曰 賜也 爾愛其羊 我愛其禮 이-자공이 초하룻날 사당에 고유(告由)하는 제사에 쓰는 양을 없애려고 하니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사야. 그대는 그 양을 아까워하느냐. 나는 그 예의를 아까워한다.” 배-자공이 곡삭의 희생양 제도를 없애려 하였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얘야, 넌 그 양이 아까우냐? 난 그 ’예의 정신’이 아깝구나. L-Tsze-kung wished to do away with the offering of a sheep connected with the inauguration of the first day of each month. The Master said, “Ts’ze, you love the sheep; I love the ceremony.”
⑤양화편 21장 宰我問 三年之喪 期已久矣 君子三年不爲禮 禮必壞 三年不爲樂 樂必崩 舊穀旣沒 新穀旣升 鑽燧改火 期可已矣. 子曰 食夫稻 衣夫錦 於女安乎. 曰 安. 女安則爲之 夫君子之居喪 食旨不甘 聞樂不樂 居處不安 故 不爲也 今女安則爲之. 宰我出 子曰 予之不仁也 子生三年然後 免於父母之懷 夫三年之喪 天下之通喪也 予也有三年之愛於其父母乎. 이-재아가 스승님에게 물었다. “삼년상은 기간이 너무 긴 편입니다. 군자가 3년 동안 예절을 행하지 않으면 예절은 반드시 무너질 것이고, 3년 동안 음악을 익히지 않으면 음악은 반드시 허물어질 것입니다. 묵은 곡식은 벌써 다 없어지고, 새 곡식은 이미 익었으며, 불씨 만드는 나무도 고쳐 불을 붙이게 되었으니 (삼년상을) 1주년만 하면 될 것입니다.”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부모의 상을 당하고서) 쌀밥을 먹고, 비단옷을 입는 것이 그대의 마음에 편안하냐?”하니 재아는 “편안합니다”하였다. 스승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그대가 편안하게 여긴다면 그대로 하려무나. 군자가 부모상을 당하고 있을 적엔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달지 않으며, 즐거운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 않으며, 거처하는 곳이 편안해도 편안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것을 하지 않고 있는데, 지금 그대는 이런 것을 마음에 편안학 여기고 있으니 그렇다면 그대의 마음대로 하려무나.” 재아가 밖으로 나가니 스승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재여는 인덕이 없는 사람이구나. 자식이 태어난지 3년이 되어야만 부모의 품을 벗어나게 되니 (그런 까닭으로 부모의 은혜를 갚기 위한) 삼년상은 천하 사람들의 공통적인 상기(喪期)인데, 재여는 3년 동안의 사랑이 그의 부모에게 있었는가.” 배-재아가 물었다. 삼년상은 한 해로도 충분히 길다고 봅니다. 군자가 3년동안 예를 집행하지 않으면 그 예는 반드시 무너지고, 3년 동안 악(樂)을 펴지 않으면 그 악은 반드시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또 일년이면) 묵은 곡식은 이미 떨어지고 햇곡식이 상에 오르고, 불쏘시개도 새로 장만합니다. (그러니 상도) 한 해로 충분할 것입니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부모가 죽었는데도) 거…쌀밥 먹고, 거…비단옷 입어도, 넌 편안하단 말이지? (재아가) 말하였다. 편안합니다요! 네가 편안하다면, 그렇게 해라. (그러나) 군자란 상을 치를 적엔 맛난 것을 먹어도 달지 않고,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 않으며, 집에 있어도 편안하지가 않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인데, 지금 너는 편안하다니 그렇다면 그렇게 해라. 재아가 (핑하니) 나갔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재아의 불인(不仁)이라니! 자식은 난 지 3년이 지나고서야 부모의 품을 벗어날 수 있는 것. (그러므로) 대저 삼년상이란 하늘 아래 ‘공통된 상례’인 것을. 저 녀석도 부모로부터 3년간의 보살핌을 받았더란 말인가! L-Tsai Wo asked about the three years‘ mourning for parents, saying that one year was long enough. “If the superior man,” said he, “abstains for three years from the observances of propriety, those observances will be quite lost. If for three years he abstains from music, music will be ruined. Within a year the old grain is exhausted, and the new grain has sprung up, and, in procuring fire by friction, we go through all the changes of wood for that purpose. After a complete year, the mourning may stop.” The Master said, “If you were, after a year, to eat good rice, and wear embroidered clothes, would you feel at ease?” “I should,” replied Wo. The Master said, “If you can feel at ease, do it. But a superior man, during the whole period of mourning, does not enjoy pleasant food which he may eat, nor derive pleasure from music which he may hear. He also does not feel at ease, if he is comfortably lodged. Therefore he does not do what you propose. But now you feel at ease and may do it.” Tsai Wo then went out, and the Master said, “This shows Yu’s want of virtue. It is not till a child is three years old that it is allowed to leave the arms of its parents. And the three years‘ mourning is universally observed throughout the empire. Did Yu enjoy the three years’ love of his parents?”
⑥양화편 11장 子曰 禮云禮云 玉帛云乎哉 樂云樂云 鐘鼓云乎哉.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예절이다, 예절이다 말하지만, 옥과 비단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음악이다 말하지만 종과 북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예라, 예라 하지만 폐백을 두고 하는 말이겠느냐? 악이라, 악이라 하지만 악기를 두고 하는 말이겠느냐? L-The Master said, “‘It is according to the rules of propriety’, they say.-- ‘It is according to the rules of propriety’, they say. Are gems and silk all that is meant by propriety? ‘It is music,’ they say.-- ‘It is music’, they say. Are bells and drums all that is meant by music?”
⑦팔일편 4장 林放이 問禮之本 子曰 大哉 問. 禮 與其奢也 寧儉 喪 與其易也 寧戚. 이-임방이 예의의 근본에 대해서 물으니 스승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훌륭하구나, 그 물음이여! 예의는 사치한 것보다는 차라리 검소한 것이 나은 편이며, 상례는 형식을 차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슬퍼하는 것이 나은 편이다.” 배-임방이 예의 본질을 여쭈었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대단하구나 그 질문! 예는 사치하기보다 검소한 것이 낫고, 상은 짜인 것보다 슬픈 것이 나으니라. L-Lin Fang asked what was the first thing to be attended to in ceremonies. The Master said, “A great question indeed!” “In festive ceremonies, it is better to be sparing than extravagant. In the ceremonies of mourning, it is better that there be deep sorrow than a minute attention to observances.”
⑧유가 학파 중 가장 민중주의적 입장을 드러낸 제자는 자장이다. <장자> 도척편을 근거로 묵가가 이 자장 학파에서 배태되었다고 보는 학설이 있다. 자장은 재여보다 19살 아래이다.
⑨안연편 18장 季康子患盜 問於孔子 孔子對曰 苟子之不欲 雖賞之 不竊. 이-계강자가 도둑의 피해를 근심하여 공자에게 물으니,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다만 당신이 탐욕을 부리지 않는다면, 비록 백성들에게 상을 주어 도둑질을 하라고 하더라도 백성들은 도둑질하지 않을 것입니다.” 배-계강자가 도둑떼를 근심하여, 공자에게 물었다. 공자가 대하여 말했다. 정녕 당신부터 탐욕을 부리지 않는다면, 백성들은 비록 상을 준다 한들 도둑질하지 않을 것이외다.
⑩사(社)는 토지신을 제사하는 장소이지만 신수(神樹)나 신목(神木)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에서는 제사뿐만 아니라 재판이나 처형도 이뤄졌다.(<한글 세대가 본 논어>에서 재인용)
⑪팔일편 21장 哀公問社於宰我 宰我對曰 夏后氏以松 殷人以柏 周人以栗 曰 社民戰栗. 子聞之 曰 成事不說 遂事不諫 旣往不咎. 이-애공이 사에 대하여 재아에게 물으니 재아는 이와같이 대답하였다. “하나라에서는 사에다 소나무를 심었고, 은나라에서는 잣나무를 심었으며, 주나라에서는 밤나무를 심었으니 (밤나무를 심은 이유는) 백성들로 하여금 전율(두려워서 벌벌 떪)하게끔 하려는 것입니다.” 스승께서 이 말을 듣고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러우진 일인지라 말할 필요가 없으며, 끝난 일인지라 바로잡을 필요도 없으며, 이미 지나간 일인지라 책망할 필요도 없어졌다.” 배-애공이 재아에게 사직을 물었다. 재아, 받잡고 아뢰었다. 하나라에선 소나무로 삼았고, 은나라에선 잣나무로 삼았으며, 주왕조는 밤나무로써 삼았습죠. 백성들로 하여금 전율케 하려 함이지요. 선생님 듣고서 말씀하시다. 다 된 것이라 말 못하겠고, 다 끝났으니 꾸짖지도 못하겠고, 이미 지나갔으니 나무라지도 못하겠구나. L-The Duke Ai asked Tsai Wo about the altars of the spirits of the land. Tsai Wo replied, “The Hsia sovereign planted the pine tree about them; the men of the Yin planted the cypress; and the men of the Chau planted the chestnut tree, meaning thereby to cause the people to be in awe.” When the Master heard it, he said, “Things that are done, it is needless to speak about; things that have had their course, it is needless to remonstrate about; things that are past, it is needless to blame.”
⑫옹야편 24장 宰我問曰 仁者 雖告之曰 井有仁(人)焉 其從之也 子曰 何爲其然也 君子 可逝也 不可陷 可斯也 不可罔也. 이-재아가 스승에게 물었다. “인덕이 있는 사람은 비록 누가 와서 ‘우물 안에 사람이 빠져 있다’고 말해도 따라서 우물에 들어가 사람을 구하겠습니까?”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어찌 그렇게까지 할 수야 있겠는가. 군자는 우물에 가서 다른 사람을 시켜 구제하게 할 수는 있지만 우물 안에 들어가서 구제할 수는 없으며, (이치 있는 말로) 남을 속일 수는 있지만, (터무니 없는 말로) 남을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다.” 배-재아가 물었다. 인자란 비록 “우물 속에 ‘인’이 있다”고 일러줘도 그 말을 좇(아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이겠네요? 선생님 말씀하시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느냐. 군자란 (우물까지) 가게 할 수 있을지언정 (우물 속에) 빠뜨릴 수는 없고, (우물 속에 인이 있다고) 거짓말할 수 있을지언정 (우물 속에 빠지도록) 속일 수는 없을 것이다. L-Tsai Wo asked, saying, “A benevolent man, though it be told him,-- ‘There is a man in the well’ will go in after him, I suppose.” Confucius said, “Why should he do so?” “A superior man may be made to go to the well, but he cannot be made to go down into it. He may be imposed upon, but he cannot be fooled.” *井有仁(人)焉; 이 장의 인(인)에 대해서는 사람 인으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 옛부터 있어왔다.(<논어집주>)
⑬감지는 노나라 출신으로 제간공 즉위 후 전상과 함께 공동 재상이 되었다가 전상의 난때 죽은 사람이다. 그의 호가 자아(子我)여서 재여와 동일인물로 여겨졌다.(<좌전>) 그러나 필자는 두 사람이 동일인물이 아니며, 감지는 재여가 속한 일족의 유력자로 추정한다. 재여는 감지가 화를 당할때 같이 죽은 것으로 본다. 노나라 공실의 묘역이 있는 지역 이름이 ‘감(門+敢)’인 것에 착안하면, 감지(止)는 감 땅의 호족이었을 수도 있다.
(…)宰我曰 以予觀於夫子 賢於堯舜遠矣. 子貢 曰 見其禮而知其政 聞其樂而知其德 由百世之後 等百世之王 莫之能違也 自生民以來未有夫子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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