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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왜 인간이 되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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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왜 인간이 되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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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탄절.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날이다. 엄청 무거운 주제지만, 날이 날인만큼 내가 평소에 생각해오던 예수 탄생의 의미를 정리해보는 것도 뜻이 있겠다 싶어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 이게 도대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둘 중의 하나일 것 같다. 무슨 엄청난 진리를 담고 있든지, 아니면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여하튼 진지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떤 식으로든지 이 말을 소화해야만 한다. 그리스도교의 모든 것이 이 말 한 마디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신화로만 보아서도 안 된다. 하느님이 실제로 피와 살을 가진 인간 예수가 ‘되었다고’ 그리스도교 신앙은 말하기 때문이다.


우선 예수는 나에게 과연 어떤 존재이기에 이렇게 평생 그에게 매달려 살게 되었는지 생각해본다. 누가 나에게 예수가 과연 어떤 존재이기에 기독교인들은 입만 열었다 하면 ‘예수 타령’을 하는가 묻는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평생 예수를 믿는답시고 살아 온 사람, 더군다나 신학, 종교학, 철학을 두루 공부하면서 교회에서 설교도 제법 많이 한 사람인데, 누가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면 어떻게 답할 것인가? 내 말에 동의는 하지 않는다 해도, 적어도 일리는 있다고 고개를 끄덕일 정도의 답을 할 자신이 있는지 자문해본다.

 

인간 앞에서는 하느님 대변하고 하느님 앞에서는 인간 대변

 

 나는 예수가 인간을 위해 하신 일을 한 마디로 ‘변호인’ 또는 ‘대리인’ 역할이라고 말하고 싶다.이런 생각을 나는 대속신앙에 대해 고심하고 있던 젊은 시절, 진보적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을 통해 얻게 되었다. 당시에 나는 그의 저술을 통해 예수의 죽음이 인간의 죄를 대속하는 죽음이라는 생각이 지닌 문제점들, 특히 그것은 예수 자신의 생각과는 너무 어긋난다는 그의 비판에 공감하면서 대안을 모색하던 중이었다. 나는 그 후 예수의 죽음의 의미는 대고(代苦)의 개념으로 이해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나는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해 한 일에 대해 큉과 대화하던 중, 대리자/대표자/대변인(Stellvertreter)이라는 개념을 접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그와 더 자세한 이야기는 나누지 못했지만, 그 후로 나는 이 개념이 예수가 그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하신 일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이론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예수는 우선 인간 앞에서 하느님을 대변한 사람이다. 하느님이 진정 어떤 분인지를 가장 확실하고 구체적으로 보여준 사람이다. 하느님은 백성을 노예처럼 닦달하고 괴롭히는 절대군주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 하느님은 무상(無償)의 은총과 한없는 자비의 하느님이라는 것, 그래서 하느님은 온종일 자식을 감시하면서 감당할 수 없는 요구를 하는 엄한 가부장이나 우리나라 엄마들 같은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어린아이 같은 신뢰로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하느님이라는 것, 세세하고 엄격한 규율로 인간을 얽어매는 율법의 하느님이 아니라 모두를 품으시고 조건 없이 용서하시는 하느님이라는 것, 그 앞에서는 아무도 의인을 자처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구제 받지 못할 죄인이라 다가갈 수 없는 분도 아니라는 것, 비천한 자를 높이고 교만한 자를 물리치는 하느님이심을 가장 확실하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대변해준 하느님의 진정한 대변자였다.


예수는 동시에 하느님 앞에서 참사람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줌으로써 우리 모두를 대표하고 대변해준 사람이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의 본래 모습을 왜곡하고 저버렸지만, 예수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대표해서 우리 모두의 가능성을 보여 주고 대변해 주신 사람, 우리가 실현해야 할 진정한 인간의 모습인 하느님의 모상을 흠 없이  보여준 사람이었다.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진정으로 인간을 사랑한 참사람으로서, 하느님 앞에서 인간의 체면과 위신을 세워준 우리의 대변인이었고 대표 주자였고 진정한 챔피언이었다. 예수 한 사람만 보고도 하느님이 인간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지 못할 정도로 그는 인간의 희망이었다.

 

 예수 스스로는 성자 하느님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

 

 결론적으로, 예수는 인간에게는 참 하느님의 모습을, 하느님께는 참사람의 모습을 완벽하게 보여준 분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는 진실로 하느님(vere deus)이고 진실로 인간(vere homo)이었다는 칼케돈 공의회의 기독론에 담긴 참 뜻이라고 생각한다. 공의회는 예수의 신성과 인간성 문제에 너무 집착 한 나머지 정작 중요한 점을 소홀히 했다.


나는 예수가 결코 스스로를 후세 교회가 만들어 놓은 의미에서 하느님의 아들, 즉 삼위일체의 제2격인 성자 하느님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없었다고 확신한다. 예수는 자신뿐 아니라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아들딸로서 지극히 존엄한 존재임을 가르치고 실천한 사람이다. 그는 하늘 아버지를 자신의 참 아버지로 모시고 산 사람이었고, 자신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으며 사람들을 그렇게 대접했다. 하느님을 닮았기에 인간에게는 하느님의 모습과 성품을 보여준 ‘하느님의 아들’이었으며, 하느님께는 그의 모상인 인간의 참 모습을 보여준 진정한 ‘사람의 아들’이었다. 인간에게는 참 하느님의 모습을, 하느님에게는 참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 대리자/대변인이었고,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과 일치를, 즉 신인합일을 이룬 사람이었다.


예수와 하느님 사이의 합일은 니케아 회의나 칼케돈 회의가 제정한 의미에서의 형이상학적 신인합일, <본성과 본질의 일치>는 아니었다. 예수는 그의 의지와 뜻, 행위와 삶, 의식과 인식, 사랑과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완벽한 <관계적 일치>를 이루고 사신 하느님의 아들이었고 인간의 아들이었다. 나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 이야기나 하느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성육신 사상도 예수와 하느님의 본질적 합일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만약 누군가가 예수의 신성을 거론하거나 그가 하느님이라고 말하는 것을 경건한 유대 청년 예수가 들었다면, 그것을 신에 대한 지독한 모독으로 느끼고 강하게 질책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을 동시에 지닌 반신반인의 ‘괴물’ 만들어

 

 그러면 예수는 과연 어떤 존재였기에 이런 대변자/대리자 역할을 그토록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었을까 하는 물음이 생긴다. 그가 만약 우리와 같이 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 존재였다면, 그는 결코 그런 삶을 살 수 없었을 것이 아닌가? 이러한 문제의식이 결국 예수의 신성을 거론하고 인정하게 된 배경이다. 성육신 사상이나 칼케돈공의회에서 제정된 기독론은 모두 이런 배경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다 보니 너무 나아가, 한 인격체지만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을 동시에 지닌 반신반인의 ‘괴물’ 같은 예수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렇다, 신성과 인성이 한 인간 안에 제아무리 모순 없이 교묘하게 결합되었다 하더라도, 예수의 신성은 결국 그의 인간성을 무력화시킬 수밖에 없다. 그가 인간으로서 행한 모든 일은 바로 그의 신성 때문에 가능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인간 예수로부터 모든 공을 박탈해 버리고, 예수를 우리 인간들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의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처럼 살 수 없다는 것은 처음부터 자명한 결론이다. 우리는 예수처럼 신이 아니니까! 실제로 복음주의자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한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처럼 예수의 인간성을 무력화하고 희화화하는 전통적 기독론이다.


“하느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cur deus homo)라는 물음에 대한 교부시대 이래의 고전적 대답은 “인간이 하느님이 되기 위해서”라고 한다. 하지만 인간이 정말 신이 된다는 말인가? 인간의 죄를 강조하는 개신교 복음주의 신앙에 젖은 사람들은 들어보지도 못한 이야기일 것이고, 상상조차 못할 터무니없는 생각이라고 하겠지만, 엄연히 그리스도교의 정통 사상이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고 하지만, 엄격히 말해 삼위일체의 제2격 성자 하느님, 즉 로고스가 인간이 되었다는 말이지, 성부 하느님 이야기는 아니다. 인간이 하느님이 되기 위해서라는 신화(神化)의 개념도 인간이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한다는 뜻, 혹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처럼 된다는 뜻이지, 인간이 문자 그대로 하느님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핵심적인 문제는 성육신 사건을 통해서 예수에게 이루어졌다는 신인합일의 성격과 그 의미다. 전통적 성육신 사상에서는 신인합일은 전적으로 하느님 편에서 취한 행위의 결과이지 인간 예수의 영적 자각이나 체험 같은 것과는 무관하다. 예수의 신성은 탄생의 순간부터 자동적으로 주어졌으며, 인간 예수의 삶의 경험이나 노력과 무관하게 하느님에 의해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성육신의 신인합일은 또 예수의 타고난 본성에 근거한 것이기에, 오직 하느님의 독생자 예수에게만 일어난 기적이다. 인간 예수의 노력과는 무관한 신인합일, 다른 인간들에게는 불가능한 신인합일이다. 과연 이러한 신인합일의 개념이 오늘날 우리 같은 인간들에게 의미가 있는 보편적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아담 이래 우리 모두가 본성으로 타고난 하느님의 모상

 

 나는 이미 대리인/대변인 예수의 역할을 논하면서 예수에게서 실현된 신인합일의 인간적 성격에 대해 말했다. 즉 본성상의 합일보다는 관계적 합일이라는 것, 굳이 신성과 인간성의 개념을 사용한다면 예수에게는 그의 신성이 그의 참다운 인간성이고, 하느님의 모상을 흠 없이 구현한 그의 참다운 인간성이 하느님을 닮은 우리들에게 하느님의 참 모습을 보여준 하느님의 ‘아들’의 신성이다. 우리가 예수에게 일어난 성육신과 신인합일을 이렇게 이해한다면, 나는 그것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 모두에게 타당한 진리라고 믿는다.


설령, 성육신이 오직 예수 한 사람에게만 국한된 예외적 사건이라고 해도, 그것이 예수에서 실현된 신인합일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될지 의문이다. 성육신은 전통적으로 하느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일으킨 기적으로 이해되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느님이 예수의 성육신 사건을 통해 인간성을 취했다 해도, 예수의 인간성 자체에 신성을 수용하고 발휘할 만한 능력 내지 가능성이 없었다면, 그리고 실제로 그런 능력을 발휘한 그의 삶이 없었다면, 예수에게 주어진 신성은 예수 자신에게는 물론이고 우리와 같은 사람 모두에게도 추상적이고 공허한 사건일 뿐이다. 초자연적 기적이지만 무의미한 기적이다. 


나는 성육신을 통해 예수에게 주어진 신성은 일차적으로 그가 신성을 수용하고 발휘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인간성이라고 보며, 이 인간성은 우리 모두의 보편적 인간성이라고 믿는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우리 모두의 본연의 성품, 성리학에서 말하는 대로, 우리 모두가 하늘로부터 품수 받아서 성인이 될 수 있는 우리의 본성, 즉 본연지성(本然之性)이다. 아담 이래 우리 모두가 본성으로 타고난 하느님의 모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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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예수가 태어난 마구간 모형 앞에 선 어린이들. 뉴시스

 

예수가 처음부터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완벽한 존재로 태어난 건 아니다

 

 나는 이 본성을 결정론적 의미로 이해하지 않고 인간에 내재하는 어떤 성향 내지 능력으로 이해한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모상을 완전히 구현하는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과 딸이 될 수 있는 우리 모두의 가능성이라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느님을 찾고 알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성향과 능력으로서의 <영성>이며,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 수 있는 성향과 능력으로서의 <도덕성>이다. 또 이러한 영적/도덕적 성향과 능력을 <자각>하고 <자유> 속에서 실현할 수 있는 우리 모두의 타고난 능력이다. 이러한 성향은 인간으로 하여금 원천적으로 죄를 짓지 못하게 하는 결정론적인 의미의 힘이 아니라,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는 자유에 기초한 성향이고 능력이다.


자유는 진정한 영성과 도덕성의 필수조건이다. 강요된 영성과 강요된 도덕성은 진정한 영성도 도덕성도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유에 기초한 인간 본연의 성향과 능력으로서의 영성과 도덕성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아무리 많은 죄를 짓는다 해도 결코 파괴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이 점에서 나는 아우구스티누스나 루터 같은 신학자들과 달리, 현실적 인간이 모두 죄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에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존재라는 의지의 예속성이나 원죄 개념 같은 것을 믿지 않는다. 나는 인간 예수의 신성이 죄를 지을 수 없는 본성적 필연성이 아니듯이, 죄를 짓는 우리의 현실적 인간성 역시 죄의 본성적 필연성을 뜻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본성이든 유전이든, 선이든 악이든, 나는 결정론적으로 이해되는 성선설이나 성악설 같은 것은 인정할 수 없다. 


여하튼 나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나 성육신 사건이 ‘사실’이라 해도, 예수가 이러한 온전한 인간성, 즉 자유 속에서 하느님의 아들 됨을 자각하고 실현할 수 있는 성향과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임을 말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예수가 처음부터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완벽한 존재로, 그야말로 ‘죄를 지을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났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또 예수가 자신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을 하느님의 자녀로 보았을 때도 역시, 우리가 실제로 하느님의 아들답게 사는 존재라기보다는 그렇게 살 수 있고 될 수 있는 가능성 내지 능력을 본성으로 가지고 태어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동시에 그렇게 <되어야만 할> 존재임을 뜻한다고 본다. 예수 자신이 이러한 구별을 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예수가 다소 모호하게 사용한 하느님의 아들 개념에 두 가지 뜻, 즉 사실과 당위로서의 의미가 함께 존재한다고 믿는다.
예수는 우리 모두가 하늘 아버지를 모신 하느님의 아들딸이라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누구든 자기 형제자매라고 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아들딸이라는 그의 말은 직설법적 의미뿐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그렇게 되라고 촉구하는 명령법적 의미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는 다 된 인간, 우리는 되어가는 그리스도

 

 인간은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영적/도덕적 가능성을 본성의 성향과 능력으로 갖추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이러한 자신의 본성을 망각하고 배반하는 죄를 지으며 산다. 하지만 우리의 죄가 우리의 본래적인 영적/도덕적 능력으로서의 인간성을 파괴하지는 못한다. 우리의 본성이 죄로 더럽혀지고 손상될 수는 있지만, 영적으로 살고 싶은 성향과 도덕적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완전히 사라지는 법은 없다. 우리가 짓는 죄가 하느님이 우리에게 부여한 영적/도덕적 성향과 능력을 결코 파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를 짓도록 결정되어 있는 존재도 아니고, 죄를 짓지 못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존재도 아니다. 우리가 타고난 도덕적/영적 성향과 능력은 자유 가운데 행사될 수 있고 실현되어야만 한다. 

나는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개념이 우리가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짓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본성이라고 생각하며, 이것은 예수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예수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죄의 유혹을 받았으며,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는 자유로운 존재였다. 예수와 우리의 차이는, 우리는 현실적으로 죄의 유혹에 넘어가지만 예수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는 이런 점에서 우리와 같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 본연의 영성과 도덕성의 성향/능력을 지니고 태어난 존재일 뿐 아니라, 실제로 그 능력을 온전하게 발휘함으로써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고>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답게 산 사람이었다.
예수는 무엇보다도 하늘 아버지를 모시고 철저하게 자신을 비운 삶을 산 하느님의 진정한 아들, 하느님의 ‘효자’였다. 첫째 인간 아담이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하느님의 모상을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의 죄를 범하는 데 오용했다면, 둘째 아담 예수는 자유를 철저히 자신을 비우고 낮아지는 데 사용함으로써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룬 ‘새로운 존재’였다.


예수는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라는 무죄성의 교리 역시 예수가 죄를 범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 그건 사람이 아닐 것이다! - 우리처럼 죄를 범할 수 있지만 우리와 달리 하늘 아버지와의 강력하고 지속적인 연합과 자기 비움을 통해서 죄를 범하지 <않는> 참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이 그의 신성과 무죄성의 참 뜻이며, 이것이 그가 이룬 성육신과 신인합일의 진정한 의미라고 나는 생각한다.
달리 말하면, 예수의 신성은 그의 인간성을 무력화시킨 것이 아니라 <완성>했다. 예수의 신성은 그의 완전한 인간성이다. 이런 뜻에서, 신학자 칼 라너의 말 대로, 그리스도는 다 된 인간, 우리는 되어가는 그리스도다.

 

성육신의 신인합일은 오직 예수에게만 일어난 예외적 사건일까

 

 사실, 인간 예수의 고뇌와 삶을 무시한 성육신 이야기나 신인합일의 사상은 우리에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한다. 추상적이고 공허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의식한 예수의 깊은 자각과, 온갖 죄의 유혹을 물리치고 자신을 비워 죽기까지 하늘 아버지께 순종한 그의 삶을 도외시한 성육신 개념은 인간 예수의 구체적 모습을 사상해버린 잘못된 성육신 이해다. 인간 예수의 인격과 행위와 삶을 오직 그의 동정녀 탄생과 성육신 ‘사건’이라는 기적을 통해서 그의 의사와 무관하게 주어진 ‘신성’에 돌리는 것은, 예수의 진정한 인간성과 그가 인간으로서 행한 모든 사역과 성취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성육신은 하느님의 자기 비움, 자기 부정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하느님의 자기 부정이 인간의 자기 부정과 만나지 않는 한, 진정한 의미의 신인합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예수에게나 우리들에게나 마찬가지다. 신인합일이 예수 자신의 경험이 되고 우리 모두의 가능성이 되려면, 적어도 복음서들이 전하고 있는 인간 예수의 아빠 하느님 신앙과 삶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예수의 신인합일은 하느님이 인간이 되는 자기 비움 못지않게, 인간 예수의 자기 비움의 삶이 수반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복음서에는 별로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세례자 요한에게 나아가기 전까지 그가 겪었던 인간적 고뇌와 고민, 방황과 좌절 같은 것, 그리고 세례 후 광야에서 하신 그의 기도와 금식 등, 수행으로 얻은 그 자신의 체험적 진리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예수의 신인합일은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자각하고 모든 인간을 하느님의 자녀로 인식하고 산 그의 삶의 <결과>지 탄생과 더불어 자동적으로 주어진 완결될 사건이 아니라는 말이다. 크리스마스 날에 <갑자기> 일어난 기적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를 통해 <점차로> 실현된 것이다.


성육신 사건이 몇 백번 일어난들 우리 영혼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말은 불경한 언사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그렇다, 성육신의 신인합일을 인간 예수의 노력 없이 하느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일으킨 사건으로만 보는 견해나, 오직 예수 한 사람에게만 일어난 예외적 사건으로 보는 견해나, 불충분하고 무의미하기는 매한가지다. 신인합일의 성육신은 우리 모두에 내재하는 본성적 가능성이며, 우리 모두에게도 실현될 수 있고 또 실현되어야만 하는 보편적 진리다. 모든 사람이 본래 하느님의 아들/딸이라는 것, 그리고 또 그렇게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 예수 자신이 대담하게 선언하고 실천한 단순하고도 심오한 진리임을 기억하자.

 

배반할 수도 있는 존재 인간 출현은 하느님 편에서는 일대 모험

 

 우리는 성육신의 보편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시야를 훨씬 더 넓혀서 하느님의 자기 비움과 자기 비하를 근본적으로 다시 조명하고 이해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하느님의 자기 비움은 단지 예수의 성육신 사건에서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자기 부정과 자기 비움은 하느님이 넘쳐흐르는 자신의 존재와 선을 온 피조물에게 나누어주는 창조의 과정 전체를 통해 일어나는 현상이며, 사랑의 하느님 자신의 본성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도 자신을 부정하고 비우는 창조주 하느님의 성품 자체에 기인하는 보편적 성육신의 일환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보편적 자기 부정, 자기 제한, 자기 초월은 138억 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을 경과한 진화적 창조의 과정을 통해 출현한 인간 존재에 이르러 첫 번째 정점에 도달했다. 하느님의 자기 비움은 자신의 모상을 지닌 인간의 출현과 더불어 질적으로 심화되었다. 하느님이 자신의 존재와 생명뿐 아니라 자신의 존엄성과 자유까지도 인간과 나누었기 때문이다. 자유가 있기에 선과 악이 가능한 존재, 자유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찾고 그의 뜻을 따를 수도 있고 그를 배반할 수도 있는 불확실한 존재 인간의 출현은 실로 하느님 편에서는 일대 모험과도 같았다. 인간은 바로 이러한 모험의 산물이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비워 하느님께 순종할 수 있는 존재다.


물질에서 생명이 출현하는 하느님의 장구한 진화적 창조 과정은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영적 존재,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 수도 있고 하느님을 등지고 살 수도 있는 자유로운 존재 인간의 출현에서 일단 정점에 이르렀다. 이런 점에서, 우주 138억년 진화적 창조의 엄청난 진통 끝에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호모 사피엔스)이 출현했다는 사실은 2,000년 전에 일어난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나 성육신 사건보다도 훨씬 더 놀라운 기적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출현이 없었다면 예수의 성육신과 신인합일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온 인류가 그리스도처럼 되고 성인이 되는 날을 종말의 꿈으로

 

 하느님의 모상 호모사피엔스의 출현이 기나긴 진화적 창조의 첫 번째 꼭지 점이라면, 이 하느님의 모상을 흠 없이 구현한 예수 그리스도와 인류 종교사를 꽃으로 수놓은 진인/성인들의 출현은 진화적 창조의 두 번째 꼭지 점이다. 나는 이것이 진화적 창조 전 과정의 목적이고 의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화적 창조의 전 과정은 필경 하느님이 자기를 닮고 자기와 하나가 되는 아들딸들을 낳기 위한 진통의 과정일 것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이에 대해 물을지도 모른다. 이건 시대착오적인 지구 중심적 세계관이고 철 지난 인간중심주의가 아니냐고. 그렇다. 하지만 우리가 세계와 인생에 대해 ‘의미’라는 것을 물을 수 있고 물어야만 하는 존재라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생명체들 가운데 의미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존재는 인간뿐이다. 의미, 목적 같은 개념 자체가 이미 인간이 사용하는 개념이고 인간만의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나는 온 인류가 그리스도처럼 되고 성인이 되는 날을 종말의 꿈으로 품고 있다. 우주 138억년의 역사가 최종적 완성을 보는 날에 대한 희망이다. 하느님과 인간과 자연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우주적 화해의 공동체가 실현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새로운 창조, 새로운 천지개벽의 꿈이다.


글을 마치면서 크리스마스에 너무나 엉뚱하고 엄청난 생각을 하지나 않았는지 자성하게 된다. 하지만 크리스마스라는 게 원래 그런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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