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은 많이 허물어지긴 했지만, 2,5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우뚝 서 있는 신전의 기둥과 극장 터가 옛 위용을 말해준다. 신전 터 입구에 팽이 모양으로 높이 1미터 가량의 옴팔로스가 있다.
‘세상에 이 보잘것없는 것이 지구의 배꼽이라니.’
하지만 그리스인들에겐 그리스 세계의 운명을 결정하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었음에 틀림없다. 실제 이곳 무녀의 말 한마디에 따라 그리스의 운명이 좌지우지되었다. 아테네가 페르시아 대군과 맞설 때도, 알렉산드로스가 동방 원정에 나서기 전에도, 이곳에서 아폴로 신에게 자신들의 명운을 먼저 물었다. 무녀의 입을 통해 나온 말을 놓고 해석하며 각 나라는 전쟁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어떤 전략을 구사해야 할지를 논의했다.
그리스 세계에서 무녀와 델포이는 그리스의 운명에 무척이나 중요한 구실을 했다. 그래서 기원전 6세기 무렵엔 그리스의 12개 도시국가가 인보동맹(隣保同盟)을 맺고 스물네 명의 대표단을 구성해 신전을 관리했을 정도다. 인보동맹은 신전이 무너지면 재건사업을 했는데, 이집트 왕인 아마시스도 막대한 기부금을 낼 정도로 델포이의 영적 영향력은 대단했다.
무녀는 질문을 받으면 춤을 추며 무아지경의 황홀 상태에서 개인과 국가의 운명이 희극이 될지, 비극이 될지를 점쳤다. 그러면 말인지 신음인지 모를 그의 신탁을 델포이의 사제들이 해석했다.
“무녀의 가슴이 오르내린다. 그녀가 신음하며 흐느끼는 동안 신이 그녀에게 깊숙이 들어가 다른 모든 생각을 절멸시켜 미래의 통찰력을 스며들게 한다. 신의 황홀경에 사로잡힌 그녀는 인간의 모든 경험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고양된다. 모든 시간과 공간과 하나가 된다. 그렇게 영원한 진리를 흘끗 보고 돌아와 인간의 의심을 풀어준다.”
서정시인 핀다로스는 델포이 무녀의 공덕을 기리는 10여 편의 시를 써서 어떻게 아폴론과 무아경의 합일 상태로 들어가 예언을 하는지 말해 준다.
나라의 운명을 쥐고 흔들었으니 자연히 세상의 돈과 황금이 그에게 몰려들었다. 그녀는 델포이 사제집단의 하수인에 불과했다는 설도 있지만, 그가 한때 왕 못지않은 명성을 떨쳤다는 것은 분명하다. 델포이는 그리스를 중심으로 한 고대사회의 영적 중심지였고, 모든 것은 아폴론을 대신하는 그녀의 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무녀의 영적 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화가 리디아 왕국 크로이소스 왕의 실험이다. 지금의 터키 지역인 소아시아의 강자 리디아 왕국을 기원전 560년쯤부터 지배한 크로이소스 왕은 지중해 세계의 여러 신전 가운데 가장 정확하게 ‘점을 치는 곳’(신탁)이 어디인지 알아내려고 시험을 한다. 왕은 가장 신뢰할 만한 신전 일곱 곳을 시험 대상으로 정했다. 이 일곱 신전의 무녀들에게 사절을 보내서 왕이 지정한 날에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했다.
사절들이 답변을 듣고 왔을 때, 왕은 델포이 신탁이 가장 정확히 맞췄다며 우승자로 선언했다. 역사가 헤로도투스가 인용한 델포이 무녀의 답변은 이렇다.
“나는 해변의 모래알을 세어 바다를 측량한다. 나는 벙어리의 말을 이해하며 벙어리의 말을 듣는다. 솥과 뚜껑이 모두 청동으로 만들어진 냄비 속에서 등딱지가 단단한 거북이가 양의 살코기와 함께 부글부글 거품을 일으키며 끓고 있는 냄새가 난다.”
크로이소스 왕은 그날 바로 양고기와 거북이 찜 요리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전혀 대국의 왕답지 않은 일을 하고 있었음에도 무녀가 정확히 묘사해냈다는 게 역사가들의 전언이다. 왕은 감격한 나머지 금괴 117개와 금사자상과 금은 그릇과 같은 엄청난 선물을 델포이에 보냈다고 한다.
이후 델포이 무녀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게 된 크로이소스 왕은 다음 질문을 던진다.
“내가 페르시아를 공격해도 좋겠는가?”
무녀 피티아는 유명한 답을 남긴다.
“왕이 만약 페르시아로 진격한다면 강력한 제국 하나를 멸망시킬 것이다.”
그러나 페르시아를 공격한 왕은 철저히 패배하고 불행한 최후를 맞는다. 이 예언에 대해 헤로도투스는 무녀를 옹호한다.
“무녀는 ‘왕이 페르시아를 진격할 경우 자신의 제국을 멸망시킬 것이다’라고 한 말을 크로이소스 왕이 오해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피티아를 모욕하는 것은 신성모독으로 여겨졌다. 결국 알 듯 모를 듯한 신탁을 해석하고,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자는 무녀인가, 아니면 의뢰인인가.
점쟁이 말을 듣다 망한 대국이 서양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중원 역사상 가장 큰 대제국을 일궜던 진나라도 그런 예언을 믿다가 낭패를 본 경우다. 진시황 시절 진나라에는 ‘호(胡)’에 의해 무너진다는 예언이 흘러 다녔다. ‘호’란 ‘오랑캐’를 뜻하기도 한다. 진시황은 북방 오랑캐를 막는다며 역사상 최대의 사업을 벌여 만리장성을 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시황이 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진제국은 멸망하고 만다. 그가 대권을 물려준 막내아들 이름이 바로 호해(胡海)다. ‘호(胡)’는 오랑캐가 아니라 자기 아들이었다. 이에 조선 연산군 때 임희재는 이런 시를 남겼다.
불지화기소장내(不知禍起蕭墻內)
재앙이 담장 안에서 일어나는 줄도 모르고,
허축방호만리성(虛築防胡萬里城)
오랑캐를 막는다고 헛되이 만리장성을 쌓았네.
<그리스인생학교>(조현 지음, 휴) '6장 최고의 예언신전, 델포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