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담배 중독서 벗어나면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중독 해결사 허근 신부
허근(65·사진) 신부는 자타가 공인하는 중독 해결사다. 술, 마약, 도박, 게임 중독자들은 다른 사람의 말은 잘 듣지 않아도, 허 신부의 얘기는 잘 듣는다. 동병상련 덕분이다. 가톨릭알코올사목센터 소장인 그 자신이 한때 구제 불능으로 꼽히던 알코올 중독자였기 때문이다.
6대째 가톨릭을 신앙하는 집안에서 자란 그는 허영엽(서울대교구 홍보실장)·영민(화정성당 주임), 두 동생과 더불어 3형제 신부로 유명하다. 1980년 사제 서품을 받고, 서울대교구장 비서로 김수환 추기경을 모실 때까지만 해도 술 한모금 입에 댈 줄 몰랐던 그는 82년 해병대 군종신부로 가면서부터 앉은자리에서 소주 대여섯병과 맥주 한상자씩을 ‘까는’ 술고래가 됐다. 16년을 주독에 빠져 몸과 정신이 만신창이가 된 그는 결국 98년 폐쇄병동행을 택해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았다. 그는 99년 퇴원하면서 서울대교구 지원을 받아 시작한 가톨릭알코올사목센터를 통해 해마다 4천여명을 구제해왔다.
한때 알코올중독자였던 허신부
동자동에 ‘사랑평화의집’ 열고
쪽방촌 주민·노숙인 돕기 나서
도시락 나눠주는 일부터 시작
“가족관계 회복·사회생활 복귀 등
동기부여 돼야 중독 유혹 이겨내”
그는 지난달 19일 서울역 맞은편 동자동에서 가톨릭사랑평화의집을 열고 쪽방촌민과 노숙인 중독자들을 돕겠다고 나섰다.
“빈곤이 배고픔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물질만이 아니라 정신적 빈곤에 이어 도덕적 빈곤, 영적인 빈곤으로 이어져 갈수록 깊은 구렁텅이에 빠져드는 게 문제다. 가난하고 소외된 데 대해 원망과 분노가 쌓이면서 더 큰 정신적 위기를 맞게 된다.”
서울역 주변 노숙인들은 서울시에서 지원하는 ‘따스한 채움터’ 등을 통해 배고픔은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가 나선 이유는 더 심각한 정신적 빈곤을 막아보기 위함이다.
사랑평화의집은 지난해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을 앞두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자”는 염수정 추기경의 제안으로 서울대교구 소유인 서울역 앞 3층 건물을 활용해 시작했다. 20여평 정도인 1층에선 노숙인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2층에선 집단치료를 하고, 3층에선 개인치료를 해보기로 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알코올중독사목센터에는 스스로 중독 사실을 인정하고 찾아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치료하기 때문에 효과가 좋았다. 반면 노숙인들은 대부분 자발적 치료 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 더구나 몸이 아프거나 술중독에 빠져 밥조차 먹으러 오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도움이 절실한 형편이었다. 900여개의 쪽방촌에 살고 있는 1200여명 가운데 상당수가 복지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대치3동·세검정·상계동 성당 봉사회 등의 지원을 받아 쪽방촌에 도시락을 나눠주는 일부터 시작하고 있다. 이를 통해 한명 한명 단중독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돕는 단계로 나가갈 계획이다. 하지만 말을 강까지 데리고 갈 수는 있지만 물을 강제로 먹일 수는 없듯, 결국은 당사자의 의지가 단중독의 필수다.
“스트레스가 심해지지 않게 도와주면서 단중독의 분명한 목적을 심어줘야 한다. 자녀 등 가족과의 관계를 회복하겠다든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겠다든지, 목적이 분명하면 동기 부여가 되기 때문에 중독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허 신부는 연초부터 바람이 불기 시작한 금연의 동기가 그저 ‘담뱃값 인상’이라면 ‘(니코틴) 단중독’의 동기로선 약하다고 본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든 다른 이유가 생기면 얼마든지 다시 피우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건강이나 가족을 위한 배려 같은 동기 부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알코올 단중독 프로그램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녀들과 관계가 좋아지는 등 변화에 자신도 놀라곤 한다. 퇴근 뒤 술 마시는 것 외엔 다른 삶을 몰랐던 이들은 독서나 취미 생활 등 다양한 삶을 체험하면서 다른 세상을 맛보게 된다. 한 단중독자는 단지 술만 끊었을 뿐, 아이들에게 공부하라는 말 한마디 해본 적이 없는데 두 아들이 모두 명문대에 들어갔다고 한다.”
무엇엔가 중독된 이들에겐 ‘그것’이 삶의 전부여서 ‘그것’ 없는 삶을 생각하기 어렵다. 알코올 중독자들도 마찬가지다. 술이 없다면 인간관계를 이어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경제위기가 오면 중독자가 더 느는 것을 아는 허 신부는 올해 들어 그런 핑곗거리가 더 횡행할 거라며 안타까워한다. 그러면서 미사 때 포도주조차 마시지 않으면서도 행복한 삶을 되찾았던 그는 단언한다.
“중독에 빠져 있느라 그것 아닌 삶을 살아본 적이 없지 않으냐. 한번 살아보라. 술 안 마시고 담배 안 피우는 세상으로 가보지 않았으니 이제 가보라. 그러면 자녀와 아내들이 그토록 좋아하고 존경하고, 건강해지고, 독서를 할 수 있고, 맨정신으로 깊게 교류할 수 있고, 영적으로 충만해지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