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들의 이민이야기
지금으로 200 여년 전인 1800년의 독일은 지금과는 달리 살기 어려운 시기였다. 프랑스와 영국은 이미 경제적인 도약에 이르렀지만 독일의 사정은 달랐다. 베를린의 공장에서 기계가 움직이고 있었다지만 영국에 비한다면 아직 미미한 상태였다. 여전히 손으로 베를 짜고, 씨 뿌리는 농경생활이 주였고, 일부에서는 여전히 제후들에게 의존 하는 생활을 했다. 물론 하녀, 종들의 결혼 시에는 더 이상 영주의 허락 없이도 가능했을 정도로 옛날처럼 철저한 종속관계는 아니었다.
이 때 날씨도 한 몫 거들었는데 거의 5달 간 눈, 우박, 비가 번갈아 내렸던 적도 있었는가 하면, 어떤 해에는 라인강이 꽁꽁 얼어버릴 정도로 맹 추위가 기승을 부렸다. 1841~1843년 사이에는 감자수확이 45% 로 떨어졌다. 감자가 주식이었던 이들에겐 치명타였다. 이럴진 데 소 먹이 감을 상상 할 수 있겠는가? 농부들은 헛간지붕의 짚으로 소 여물 만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흉작이 계속되자 곡물 값이 2배로 뛰었고, 또 전염병까지 돌았다. 늘 그러했듯이 이런 상황에서는 부자들이야 별 상관이 없었다. 단지 농민들만이 눈물겨울 정도의 추위와 굶주림에 떨었다.
이런 기근이 장기로 치닫자 관청도 서서히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1789년 이웃의 프랑스혁명을 체험했던 터이기에 자칫하면 독일에서도 시민 폭동이 일어 날수도 있다고 여겼던 거다. 다행스럽게도 이 때 혁명 쪽이 아닌 이민을 꿈꾸는 자들이 늘어나자 관청은 적극적인 이민 장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을 뿐 만 아니라 심지어 부추기까지 했다. 만일에 터지게 될지 모를 폭동을 이런 이민을 통해서 방지를 해보자는 의도가 깔렸다.
이들이 이민을 꿈꾼 나라는 당연히 미국이다. 당시에 미국으로 이민 가기 위해 배를 타면 평균 50일이 걸렸다. 큰 배도 아닌, 아주 작은 배에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하였다. 3.3㎡(1평)에 평균 5명이 웅크리고 있었다니 얼마나 열악한 조건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특히 배 안의 물 부족은 말할 수 없는 고충 이었다. 물 부족이 다시 불결한 환경을 만들었고 이런 환경에서 콜레라, 장티푸스가 발발했다. 이들 중 한 10% 정도는 꿈의 나라 미국에 도착 하기도 전에 배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 한 예가 1853년이다. 미국으로 가는 72척의 배가 브레멘 항구를 출발했는데 이 배엔 자그마치 29,900명이 탔다. 하지만 도착도 전에 2,300명이 배에서 죽었다. 당시 배를 가졌던 선장과 이런 이민을 주선했던 자들은 떼 돈을 벌었다고 한다.
프랑크푸르트 남쪽에 있는 그로스 짐머른 지방을 한 예로 보자. 이 지방에서도 이민 붐이 일어났다. 주로 일일 노동자, 농부들, 수공업자들이었다. 350명 정도가 이민 떠나기로 정해지자 이들은 47개의 마차에 갈라서 탔다. 이 무리에는 생후 몇 달 된 아이에서부터 나이 많은 이는 71살 이었고, 산 달이 가까워 오는 두 젊은 여인도 포함 되었다. 아담·마가레드 가이쓰라 부부는 11살 먹은 아들 패터, 7살짜리 딸 안나, 겨우 두 살 된 젖먹이를 데리고 떠났는데 미국에서 지금 '가이쓰'라는 가문이 있다면 분명 이들의 핏줄일 것이다. 당시 이들은 부푼 꿈 때문에 좋은 표정으로 떠났다지만 가슴속엔 불확실한 미래를 안고 떠나는 모험가의 심정이었다.
이런 이민자들을 떠나게끔 부추기는데 관청 또한 많은 돈을 썼다. 어쨌든 많은 이민자들을 떠나 보내기 위해 마을 읍장은 5000 굴덴(돈이름)보조까지 해 주자, 이민 꿈을 품은 지원자들이 더 모여 들었고, 일주일 후 에 다시 수 백 명이 미국 이민 길에 올랐다. 당시 주민의 4분의 1정도가 떠나버렸기에 마을은 텅텅 비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관청은 이들이 떠나버리자 오히려 홀가분해 하면서 자축까지 했다고 한다. 이들의 생활 보조책임을 맡고 있었다 보니 늘 진절머리를 앓았던 터였다.
1846년의 기록에 하인리히 뷔히너라는 이의 얘기가 있다. 그에게 딸린 식구는 6명이었다. 그 해 봄 감자 수확량이 확 줄어들자 살길이 더 막막해지자 그는 집에다 나무장작을 쌓아두고선 으름장을 놓았다. 가족들이 이민 갈수 있는 자금보조를 해달라! 조달해 주지 않는다면 당장 집에 불을 지르겠노라고!
그의 으름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 이민길이 틀어지는 날에는 채권자 집에도 불을 지르고 살해까지 해 버리겠다는 공포감까지 조성했다. 그가 이렇게까지 된 내막은 이렇다. 이민 가기 위해 그는 전 재산을 이미 다 팔아 치웠지만 그 돈으로는 빚도 다 갚을 수 없었던 터였다. 그럼 관청이 이민 떠나시오! 라고 부추기 까지 했다는데 왜 이런 가족을 선뜻 도와 주지 않았을까? 이민을 미끼로 하는 사기행각이 더러 일어나자 이런 부추김을 자제하고 이민 떠날 이들의 상태를 면밀히 검증하고 있었던 거다. 바로 얼마 전에 이민 간다는 구실 하에 돈 50 굴덴을 챙겨 먹고서는, 이민은커녕 어디론가 홀랑 달아나 버렸던 이가 있었던 터라 책임 맡은 읍장도 선별에 신중을 가 할 수 밖에는 없었던 거다.
읍장은 이 뷔히너의 가족상황을 빠른 속도로 파악하고선 도움 주려고 힘썼고, 그의 채권자와 타협하는 중재자로 나서기도 했다. 채권자를 부른 읍장은 뷔히너처럼 빚 있는 자에겐 돈을 받을 생각을 좀 접어라! 눈 딱 감고 이민 보내 버리자고! 구슬렸다. 골똘히 생각해 본 채권자도 동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가족이 여기서 살아봐야 평생 빚 값을 능력이 없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했기 때문이다.
당시는 이런 유사한 결정을 법원에서도 했다. 42명의 죄수들을 이민 보내려고 한 것이다. 이들이 형을 살고 나와봐야 어차피 다시 도둑질이나 사기꾼으로 살아갈 확률이 크다는 것을 예견했기 때문이다. 즉 형을 살고 나와 이 마을에서 살아봐야 빵만 축낼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사회적인 짐만 될 이들이니 희망 같은 것을 바라 볼 여지가 더 이상 없다는 거다. 죄수들 역시도 이런 이민에 흔쾌히 동의했다고 한다. 이들에게 신발 한 켤레, 스타킹, 옷을 선물로 챙겨 주었고 목사들은 성경책을 특별하게 선물했다. 이 마을의 읍장은 평소 잘 알고 지낸 간덴베르거라는 선장과 손을 잡았는데, 그는 유럽과 미국 사이에 담배 무역업을 하던 배 소유주였다. 읍장은 머리숫자만큼의 배 값을 선장에게 지불했다. 어른은 71 굴덴에 12살까지의 아이들은 56 굴덴 이었지만 젖먹이는 공짜 배를 탔다는 기록까지 있다.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로스-짐머른을 떠났던 이들의 소식은 미국에서 보낸 이들의 편지로부터 흘러 나왔다. 그 사이 미국이란 땅에서 땀 흘려 부를 축척했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독일에 있던 친척들에게 자랑스럽게 편지를 보냈다. 1788년에 쓴 편지를 보면, "미국에서 거대한 농장을 소유하고 있다! 많은 소와, 28마리의 젖소까지 키운다!"등등의 내용이다. 음식에 관한 얘기로는 빵보다는 고기를 더 먹고 있다는 것과 물 보다 와인과 커피를 더 마신다는 내용이다. 가난의 상징인 빵과 물이 아니라 한 고기와 커피 와인으로 한 단계 높아진 삶을 산다는 자랑거리다.
이런 편지내용이 온 마을로 퍼져나가자 사람들은 미국만 가면 부자 될 수 있다는 꿈에 젖어 들었다. 이런 꿈과 희망을 품은 이들이 다시 미국 이민을 지원했다. 1830년에는 10,000명 가량의 독일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미국에서 성공한 이들은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모임도 만들었다. 당시의 뉴욕신문에 헤센 출신의 요한 헬드 라는 이가 큰 강당을 빌려 헤센 축제를 연다는 광고를 낼 정도였다. 이런 모임은 독일로 간 광부와 간호사들이 고향 별로 연례행사를 여는 광고와 너무나도 유사하다.
미국으로 건너간 23살의 하인리히 레만이라는 청년도 1844년 동생과 함께 목화무역업으로 크게 성공 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보따리 장수의 아들이었던 룁 스트라우스 얘기도 빠지지 않는다. 당시에 그는 엄마와 두 여동생을 데리고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는데 이 가족은 청바지사업으로 크게 성공했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즐겨 입는 ‘Levi’ 라는 상표가 바로 이 가족들 기업이다.
그 이후에도 독일인들의 이민은 끝이 없었다. 1820~1920년 사이에는 독일인 1,000,000명이 넘게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물론 1900년대부터는 더 이상 가난 때문에 떠난 이민은 아니었다. 대다수가 보다 나은 조건 속에서 일하고 더 많은 돈을 벌고자 했던 주로 전문 직업인들이었다.
2000년대에 들어선 지금도 독일인들의 이민길은 여전히 이어진다. 2006년에는 18,242 명의 독일인들이 스위스로, 13,200명은 미국으로, 10,300명은 오스트리아로, 9,300명은 영국으로, 9,100명은 폴란드로, 8,100 명은 스페인으로, 7,500명은 프랑스로, 3,600은 캐나다로, 3,400명은 네덜란드로, 3,300명은 터키로! 합 144,815명의 독일인들이 이민을 떠났다. 2009년에도 마찬가지다 734,000 명이 독일을 떠났다. 특히 스위스는 독일인들이 가장 선망하는 나라인데 주된 이유는 독일의 무거운 세금을 피하기 위함이다. 그 한 예가 유명한 테니스 선수인 보리스 베커다. 스위스에 거주하는 그는 독일에 오면 아주 비싼 호화 호텔에 머문다.
이들의 이민이 우리의 이민사와도 좀 유사하다. 우리 역시 때로는 망명 처로, 때로는 곤궁한 생활을 벗어 던지기 위해 신천지를 찾아 나섰다. 1902년 12월 102명이 인천항을 떠났다고 한다. 하와이 농장에서 일할 사람을 찾는 모집광고에 따른 이민그룹이었다. 그 이후 약 3년 동안 65척의 배가 7000명 가량을 하와이에 실어 날랐다. 그 다음은 태평양을 건너는 여성들이 그 부류였다. 먼저간 한국인 남성 노동자와 결혼하기 위해서였다. 대략 1940년 대부부터는 일부 부유층만이 해외 이민을 할 수 있었고 또 빠질 수 없는 이민은 미군과 결혼했던 미군부대 여성들이 1950년경 떠났던 이민이다.
미국이 아닌 유럽도 보자. 정부는 독일정부로부터 차관을 얻는 조건으로 1963년부터 광부·간호사를 독일로 보냈다. 이 분들이 독일에 많은 고생을 하였다. 고생 끝에 낙이라고 이 들은 독일에서 2세들을 참 잘 키워냈던 편이다. 한국인들의 높은 교육열이 독일 땅에서도 마찬가지로 꽃피웠던 것이 그 이유 일 것이다. 많은 2세들이 의사, 교수, 약사, 변호사, 회계사, 사업가로 활동하면서 한국인의 위상을 독일 도처에서 높이고 있다. 최근엔 독일 가톨릭에선 2세 신부까지 나왔다. 같은 시기에 노동 이민으로 왔던 터키인들에 비해서도 한국인들의 교육열은 상당히 높다는 평을 받곤 한다. 물론 터키인들 중에도 2세 교육에 가치를 둔 이들도 있다. 하지만 한국인의 교육열에 비해서는 열세다.
이젠 우리 이민의 성격도 바뀌었다. 대략 1990년대 중반부터가 아닐까? 잘 살아 보자는 구호로 떠나는 이민은 더 이상 아니다. 이젠 먹고 살만해졌으니 더 살기 좋은 환경을 찾아나서는 이민이다. 주로 은퇴한 노년 부유층들이 주축을 이루면서 주로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로 옮겨갔다. 2000년 대 경에 또 한번 변화가 있었다. 한국보다 생활비가 적게 드는 동남아로 이주하는 중산층들이 생겨났다. 주로 필리핀, 태국 쪽 이었다. 이렇게 우리의 이민사도 살펴보니 100년~200년 전의 독일과 참 유사하다. 이런 양국의 이민사를 통해서도 느껴진다. 늘 삼각형의 꼭지점을 오르려고 하는 인간의 긍정적인 발버둥이 보여지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