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정의 두 비유: 수예품(手藝品)과 수채화(水彩畵)
*북한산. 사진 조현 기자
서울시와 경기도 고양시 경계에 있는 수려한 산들의 집합체를 북한산(北漢山)이라 부른다. 주봉은 백운대이며 인수봉과 만경대와 함께 그 세개의 산이 가깝게 삼각형으로 놓여있어서 삼각산이라고 불리운다. 북한산 국립공원의 일부이지만 좀 떨어져 서울시와 의정부시 경계에 자리잡은 도봉산과 북한산의 정상인 삼각산에 주말이면 도심의 찌든 먼지를 떨쳐버리려는듯 삼삼오오 등산객들로 붐빈다.
삼각산을 뒷 병풍으로 하는 동네는 수유동과 우이동이다. 우이동은 삼각산중 두 개인 백운대와 인수봉이 멀리서보면 소귀를 닮았다해서 붙여진 동네이름이다. 수유동은 수유리라 불렀고 화계사 골짜기를 중심으로하여 북한산 계곡물이 흘러넘치는 데서 나온 이름이다. 수유동 골짜기 끝머리엔 화계사가 자리잡고 우이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끝무렵에 도선사가 자리잡고 있다. 두 계곡 중간 지점에 국립4.19민주묘지가 자리잡고 있어서 수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다.
국립4.19민주묘지는 공식이름이고 보통 4.19공원이라 부른다. 총면적은 약 3만 2천평 정도여서, 광주5.19민주묘지에 비하면 그 크기가 훨씬작지만 아담하고 관리가 잘되어 있어 시민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다. 주로 도보운동하는 근처동네 사람들이 즐겨찾는 묘소내 둘레길을 약 40분걸려 너뎃바퀴 돌면 등에 땀이 베인다. 벤취에 앉아 휴식을 취하면서 겹쳐있는 산등성 너머 저멀리 우람하게 솟구쳐있는 삼각산을 바라보며 자연과 역사와 인간과 살림을 생각하면서 잠시 사색의 오솔길을 걷는다.
무엇보다도 힘있게 우뜩 서있는 해발 800미터 남짓높이의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를 바라보거나 묘소내 노송들을 둘러 보노라면 인생구십 장수를 자랑하는 우리네 사람들 인생이 겸허해 진다. 인수봉과 백운대를 구성하는 대부분 석질은 화강암이다. 땅 속의 마그마가 분출하여 식어서 백운대와 인수봉이 되었을 것이다. 몇차례의 조산운동(造山運動)과 빙하기의 교체도 있었을 것이다. 바라다보이는 북한산의 산세중 삼각산(백운대,인수봉, 만경대)이 조성되기는 5천만년이나 1억년은 되었을 것이다. 4.19묘지공원 안 나무들 중요 수종은 압도적으로 소나무가 많다. 소나무과 식물이 출현하여 번성한 것도 지질학자들에 의하면 백악기 제4기인 250만년전인 셈이니 현생인류보다 지구상에 훨씬 오래부터 살아아온 셈이므로 지상에 출생 나이로 따지자면 인류의 대선배인 셈이다.
불교에서 강조하듯이 삼라만물이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는 말은 진실이고 우리를 숙연케한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인연생기법에 의해 조성되고, 형태와 특성을 유지하다가, 허물어져 붕괴되고, 마침네 본래자리엔 아무것도 없게된다. 작은 일년생 들꽃과 벌래들로부터 시작해서 북한산 백운대와 공원 안에서 자라는 백년이상 자란 노송들도 그 성주괴공의 법칙을 피할 수 없다. 가시적 물질계만 그런게 아니다. 제국과 문화와 이념과 종교들도 성주괴공 리듬안에 들어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우리나라를 하느님이 보우하여주시라고 애국가를 부르지만, 동해물과 백두산도 태어난 생일이 있고 없어질 날이 있다.
국립4.19공원묘지 둘레길을 돌다가 벤취에 앉아 땀 식히며 백운대와 인수봉을 바라보면서 “시간이란 무엇인가?”라고 생각해 보곤 한다. 우선 어쭙잖은 지질학적 지식교육을 받았기에 백운대와 인수봉이 형성된 이후 오늘까지 흐른 나이와 시간에 관하여 사색하는 70세 중년의 나 자신을 비교하면 도대체 게임이 않된다. 백운대와 인수봉은 비바람과 시간의 흐름을 견뎌온 흔적이 인수봉 화강암 암벽에 뚜렷이 흔적으로 각인되어 있지만, 인간나이 칠팝십년에 이마에 생긴 주름살을 거기 비하면 순간 찰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백운대와 인수봉은 자기나이를 묻지도않고 알지도 못하지만, 순간을 살고가는 사람은 백운대와 인수봉의 나이가 자기보다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을 안다.
인수봉과 늙은 소나무와 발등을 기어오르는 개미는 시간의식이 없고 시간이 흐른다든가 반복된다는 자각이 없지만 사람에게는 그것이 있다. 시간을 묻는 사람의 그 정신, 자기의식, 더나아가서 시간의식을 가지고 만물이 <성주괴공>한다고 갈파하는 사람의 <순수의식>은 무엇일가? 시간의 본질을 묻는 인간정신의 능력, 더 나아가서 사물을 본질직관하는 사람의 <순수의식>이란 것이 머리통 해골바가지 안에서 2백만년이상 진화발달해온 뇌신경 신경세포들의 부수현상인가? 아니면 정신과 순수의식은 뇌세포와 중추신경계가 자연환경속에서 생물체로서 살아남기 위하여 자기를 조직해가고 정신능력으로 꽃피어나게 했던 바탕이고 새로움의 창발적 유인력 인가?
닭이 먼저인가 계란이 먼저인가 수수께기 같아서 그 문제는 뒤로 놔두고 본래의 물음 “시간이란 무엇인가?” 다시 되돌아가 본다. 도대체 우리가 일상적으로 당연하다고 여기는 객관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이라는 것이 실재하기라도 한 것인가? 사람이 세상 살아가면서 편리하라고 만들어낸 관념이 아닐가? 첨으로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 상공 고도 5만미터이상 새털구름도 저 아래 내려다보이는 높이보다 더 높은 고공비행을 하던 경험을 하는 경우가 있다. 운동을 감지하려면 비교물체가 있어야 하는데, 허공에서 내려쪼이는 햇빛의 직사광선아래서 비행기는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 서있는 듯한 착각을 느낀다. 비행속도를 지구 자전속도에 맞춘다면 태양 햇살도 항상 같은 위치일 터이니 운동도 없고 시간이 정지된 듯한 느낌을 갖는다. 그래서 자연과학자들은 시간의 독립적 실재성을 생각하지 않고 시공연속체(時空連續體)로서 물질의 운동을 구성하는 백터(Vector) 곧 크기와 방향을 가진 양(量)이라고 생각한다.
여하튼 시간개념은 철학에서나 자연과학에서나 운동, 변화, 생성, 소멸등과 관련된 추상적 개념이다. 어떤 형태의 운동도 없고 변화가 없다면, 그결과 어떤 형태의 생성이나 소멸도 없다면 <영원히 고요한 침묵의 현재>만 있을지언정 시간개념은 있을 수 없다. 풀이나 나무가 자라고 시들어 죽는 것을 경험하고, 사람이 어린아이였다가 늙어 쭈그러진 얼굴로 죽는 것을 경험하고, 쇠가 녹슬고 바위가 흙으로 변해가는 것을 경험하기에 시간이 흐른다는 경험을 갖는다. 그러나, 다시한번 생각해본다. 운동과 변화가 있다고 해서 시간개념이 자연스럽게 당연하게 그 실재성을 가지는 것일가? 운동과 변화가 시간의 흐름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느끼는 ‘사람의 마음’이 없다면 시간이 있을가? 이 문제를 골돌하게 생각한 사람은 4세기 중반 북아프리카 카르다고에서 살았던 어거스틴(St. Augustine, 354-430) 이었다.
어거스틴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표현한 그 실재를 당시 그리스도교 용어를 따라 사람의 ‘영혼’이라고 불렀다. 영혼은 데카르트가 말하는 정신의 본질적 특징인 ‘사유적 순수실체’로서 질량이나 성질을 지닌것이 아니라 오로지 순수하게 생각하고, 희망하고, 사랑하고, 회상하는 능력을 지닌 ‘비물질적 피조물’이다. 어거스틴은 창조주를 닮아 사람을 지으셨다는 ‘하나님의 형상’이란 바로 영혼의 독특한 능력을 말한다고 본다. 어거스틴은 사람이 경험하는 ‘흘러간 과거시간’, ‘다가올 미래시간’, ‘지금 누리는 현재시간’이 객관적 실재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이 기억과 기대, 다시말해서 회상하고 희망하는 영혼의 능력 때문에 시간개념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흘러간 과거라는 시간이 실재했던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영혼안에 ‘기억, 회상’의 흔적이 과거라는 시간개념을 창발시킨다. 아직 존재하지 않지만 내일도 해가 뜨고 새해가 동틀 것이라는 ‘기대, 희망’ 때문에 미래라는 시간이 현재를 향하여 다가오고 있다는 관념을 만든다고 보았다. 그러나, 인간에게 가능한 것은 <지금, 여기>라는 순간과 찰나 뿐이다. 피조물 인간은 시간의 주인이 아니다 시간을 소유할 수 없다. 순간 순간 선물로 받는 것 뿐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고 없으며, 미래는 아직 도래하지 않아서 없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가 바통 텃취하고 만나서 갈라지는 순간의 찰나이다.
시간개념은 비유컨대, 영화관 필름같아서, 영화필름은 순간순간 따로 따로 직혀진 필름의 영상이 시각작용에 의하여 연속적 사건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다. 성 어거스틴의 시간론을 들으면서, 그리고 현대 자연과학자들의 사물운동의 중성적 백터로서 시간관을 생각하면서, 다른 한가지를 강력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에게 “시간이 흐른다”라는 시간의식은 단순한 ‘영혼’의 기억과 희망의 정신능력이나,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방향성을 지닌 운동량”만으로 생기(生起)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의식은 사람만이 지니는 ‘의미추구의 삶’, ‘뜻을 만들고 이루려는 의지’ 때문에 가능하다. 추구하는 의미와 뜻이 무슨 거대한 애국이나 세계살리기 같이 거창할 필요는 없다. 시들어가는 화초를 살려보려는 의지, 자녀를 바르고 건강하게 양육하고픈 모정의 뜻, 작은 사람공동체안에 바르고 따뜻한 인정이 흘러넘치게 하려는 소망 등등. 시간의 흐름은 사람이 지닌 뜻을 추구하고 실현하려는 의지의 이어감이고 계승이다. 진선미를 이루어 가보려는 의미추구의 삶에서 시간은 찰나이거나 허무의 공허함을 벗고 생기를 띄고 실재로서 작동한다.
대자연의 우주물리적 과정부터 시작하여 지구역사, 그리고 인류역사의 전체과정을 의미추구의 삶, 혹은 가치창조의 과정으로 볼것인가 아니면 ‘성주괴공’의 영원한 다르마의 법칙운동으로 볼것인가? 전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역사란 수예품 창작행위”에 비유되고, 후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역사란 화포나 종이위에 화가의 그림그리기 행위”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가 생각해본다.
수예(手藝)란 손으로 하는 기예로서 특히 자수(刺繡)나 편물(編物)을 말한다. 수예품이란 자수나 편물의 노력 끝에 얻는 작품을 말한다. 특히 자수는 수놓는 바탕직물에 수예 바늘을 꼽아박아서 바탕직물과 색상, 무늬, 모양새들이 이루어지면서 이미 바탕직물과 수실은 서로 얽히고 설켜 돌이킬수 없는 한 몸이 된다. 수놓은 바탕직물은 그 옛날의 순수바탕직물이 아니다. 바늘로 찔리고 매듭으로 홈치고 겹쳐지면서 말하자면 사람의 문신처럼 쉽게 분리할 수 없게 된다. 대체로 말하면, 그리스도교의 시간관과 역사이해는 그와같은 비유에 가깝다. 창조주 하나님이 대자연과 인류역사의 자수행위에 의해 ‘존재의 바탕’인 하나님의 마음이 상처도 받고 아름다움도 맛보고 영광스럽게 된다. 우주자연과 역사와 인간의 운명도 단순한 오색 색실로 바구니에 담겨있지 않고 자수와 편물이라는 예술적 창조작업에 참여한다. 그래서, 역사와 우주사와 개인사와 사회사는 아무리 하잘것 없는 것일지라도 의미를 갖는다.
다른한편 우주발생과 역사창조 과정을 성주괴공으로 보자는 힌두교-불교적 실제관의 참뜻은 인간의 가당치 않는 허망, 야망, 치명적 탐욕과 집착을 경계하려는 뜻이 더 강하다. 그러나, 힌두교-불교적 실재관에서 보면, 수레바퀴가 상징하듯이 시간과 역사는 성주괴공을 반복하는 괘적의 흔적에 불과하다. 시간과정에 결정적 의미를 두지않는다. 그렇다고 힌두교나 불교적 실재제관이 현실을 가볍게보는 허무주의를 가르치는 종교가 아님은 찬란한 불교문화유산이 잘 증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관념을 예술행위에 빗대어 비유하자면 불교적 실재관은 “역사란 화포나 특수 종이위에 그림 그리기”로 비유하고 싶다.
캔버스(canvas)란 화포(畵布)를 말한다. 특히 서양화에서 유화(油畵)를 그릴 때 쓰이는 천이다. 무명이나 삼배 따위의 천에 카세인이나 아교를 바르고, 그 위에 아마유와 아연화 따위를 덧칠하여 만든다. 그렇게 만든 화포 위에다 유화를 그리지만, 만약 수채화를 그린다면 화포가 아니라 종이위에 그린다. 수채화는 그림물감을 물에 풀어서 종이 위에다 그리는 것이다. 수채화는 물감이 물에 쉽게 녹고 플어진다는 성질과 색의 투명성을 사용한다. 종이는 수채화 물감을 쉽게 빨아드리고 물감은 흰종이를 물들인다.
화포위에 유화, 종이위에 수채화를 그릴 때에 화포나 종이는 그림의 바탕이지만 자수나 편물처럼 물감 때문에 그 바탕이 본질적으로 손상당하거나 변하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비유하면 ‘월인천강’(月印千江) 같아서, 강물이 흔들리면 모두 살아질 그림들이다. 시간과정이란 캔버스나 종이위에 그림들이고 강물에 비췬 달 그림자 이다. 따라서 시간과정 속에서 뜻의 실현이나 의미의 추구는 별 관심이 없다. 그런것들은 도리혀 집착으로 보인다. 마음의 초탈과 초연한 자유정신이 돋보인다. 그러나, 중생의 아픔에 동병상린하는 보살정신은 살아있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르게 잡아돌리려고 역사와 시간과정에 뛰어드는 모험정신은 약하게 마련이다.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역사와 시간과정’이란 본질적으로 집착에 기초한 허상이라고 보는 시간관 때문이 아닐가?
국립4.19민주묘지 문닫을 시간이 가까웠다고 방송과 함께 녹음된 음악이 흘러나온다. 벤취에 앉았던 사람들이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선다. 해가 서산에 기운다. 잠시 상념에 잠겼던 방문객도 정신을 차리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큰나무 그늘에 가리고 풀잎에 가리워 있던 이름모른 작은 노랑꽃 두서너개가 “안녕히 돌아가세요 !” 작별인사를 건낸다. “너희들 예쁘구나, 잘있어!”라고 나도 인사를 건내고서 문닫고 있는 정문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