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인 동시에 남의 것인 공간을 찾다
들꽃갤러리를 표방하고 야생화를 기른다고 했다. 가야산 골짜기에 살고있는 내 귓가 까지 들릴 정도이니 한적한 교외에 넓은 농원과 함께 멋드러진 건물일거라고 나름 상상했다. 하지만 도착한 곳은 대구시내 수성구 한복판 주택가였다.
개량형 벽돌 기와집 마당에는 잔디가 깔리고 가장자리에는 띠풀을 위주로 한 들꽃을 아기자기하게 배치하였으며 열정적인 여름 능소화가 길 밖으로 출렁거렸다. 사실 남의 손 빌리지 않고 내 힘으로 관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내 공간이 된다. 그래서 작은 것이 아름다운 법이다.
집 담장과 이어진 노출 콘크리트 벽면에 전시회를 알리는 작은 홍보물이 붙어 있다. 인기척을 하자 나무대문이 자동으로 밀리면서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의 진입로를 겸한 좁고 긴 어두운 골마루가 나타났다. 노출 콘크리트 건축의 원조인 안도다다오(安藤忠雄 1941~ )식 건물에서 흔히 접하는 광경이다. 고베(神戶) ‘물의 사원’은 긴 곡선형 골마루를 돌아 내려가 법당에 도착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권투선수 출신인 그는 독학으로 건축공부를 했다. 평지돌출형 천재였지만 학맥과 인맥이 없는 문외한인 탓에 수많은 공모전에서 낙선을 거듭했다. 하지만 권투선수답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자신만의 독특한 건축세계를 완성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노출 콘크리트와 '빛과 물 그리고 바람'이 그의 컨셉이었다. 이제 어디서나 '안도 풍'의 건물을 만나는 것이 어렵지 않을 정도로 대중화되었고 그 역시 세계적인 건축가로 자리매김 했다. 제주 본태박물관과 원주 한솔박물관 등이 그의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강연회와 작품을 찾아다니는 마니아층이 형성될 정도로 유명인사
가 되었다.
긴 골마루 모퉁이를 꺾어 돌아서니 길다란 시멘트 의자 앞에 '물과 빛 그리고 바람'함께 하는 스무평 정도의 작은 공간을 만났다. 이층높이의 터진 천장 아래 두평넓이에 한 자 정도 깊이로 연출한 직사각형 연못에는 비가 올 때면 빗방울이 튀고, 밤이면 별빛이 쏟아지는 광경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이번 전시회 특성상 천장을 막은 탓에 바람과 빛을 만날 수 없으니 다시한번 들러 달라고 한다. 설사 비오는 밤에 오더라도 별빛은 볼 수 없을 터이니 최소한 두 번은 더 와야 이 집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대구시내 건들바위 근처 유명사찰의 차실에서 만난 사진작가 준 초이의 반가사유상 중형사진을 구입한 곳이 이 갤러리라고 들었던 기억까지 떠올랐다. 그 때 대형사진 단 한 점만 전시했다고 한다.
일본 동경대학 출신인 바깥양반은 경북대 교수를 정년퇴임하고 난 뒤 2008년 안주인을 위해 살던 집의 기존 비닐하우스 자리에 이 갤러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건축가 이현재 선생에게 작업을 의뢰했다. 물론 ‘싸고 독특하며 쓸모있게’를 요구했을 터이다. 완성 후 머슴노릇을 하고 있노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머슴의 전공인 임학(林學)과 야생화 가꾸기와 사람만나기를 좋아하는 집사람 취향과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신랑이 부인을 위해 지었고, 또 헌정했다고 하는데 사실이냐?"고 장난삼아 물었더니, "이 양반이 그렇게 소문을 내고 다닌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하긴 짓는 것과 운영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처음엔 당신 욕심 때문에 지었을 것이다. 후에 (감당이 안되어?) 부인에게 운영권을 떠넘긴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그래도 두 분사이에 묻어나는 정분을 보아하니 사실관계가 어찌되었건 그건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라 하겠다. 소화(昭和1926~1989)시대 교육을 받은 진갑을 바라보는 경상도 사내가 요즘 애들 표현대로 '상남(上男:능력있고 자상한 남자)'라는 사실은 여전히 내심 물음표였지만...
곧 안주인표 커피가 나왔다. 가운데 마련된 나무탁자에 앉아 오래된 벗처럼 두런두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풀꽃갤러리 아소'라는 이름에 걸맞게 야생화 전시회 위주로 꾸려갔지만 차츰 지역사회에 갤러리가 입소문을 타면서 현대미술 작품전시도 일년에 몇차례 연다고 했다. 나만의 공간을 주변에 이렇게 회향하는 것도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아소(我所)는 '내 것'이라는 뜻이다. 이제 '내 것'인 동시에 '남의 것'이 된 것이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고 여길 때 비로소 제대로 된 내 것이 되는 법이다. 오사카(大阪)의 츠지(辻調) 조리전문학교를 마친 아들이 운영하는 일식집 이름도 ‘아소 다이닝’이다. 오는 손님마다 ‘내 집’느낌이 들도록 만든다면 제대로 된 이름값을 할 터이다.
자기를 돌아보는 쉼표를 찍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힐링공간과 치유공간을 추구하는 중년부부와 아들의 아름다운 스토리텔링이 어우러진 반나절 ‘아소 스테이’는 함께 한 일행까지 ‘내집처럼’만들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