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ntcast
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3077

페스트로 망한 베네치아가 시사하는 점

$
0
0


최근 미국에서는 흑사병 감염자 수가 증가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우리도 메르스를 겪어서 전염병이란 얼마나 무서운 병이란 걸 알았는데 이 페스트도 마찬가지다.


중세의 유럽을 휩쓴 페스트의 공포, 베네치아의 전염병은 어떠했는지 보자.
수상도시인 이탈리아 베네치아는 지금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로 붐비는 곳이다. 그러나 몇 백 년 전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었을 때 베네치아는 유럽의 어느 도시보다 참혹한 지옥으로 변한 곳이다.


베네치아는 왕성하게 무역업을 하던 교역 도시였고, 또 동양과 아프리카로 향하는 관문이었기 때문에 전염병 전파속도가 본토 유럽보다 빨랐다. 전염병의 저주는 한 번만이 아니었다. 1348~1630년에 베네치아에서는 스무 번 가량 페스트가 나돌았다.


pest1.jpg


페스트 병균은 쥐들이 주로 옮겼기에 확산을 막기가 어려웠다. 베네치아의 모든 다리가 쥐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덮인 적도 있었다. 쥐떼는 가게들이 즐비한 곳이나 알곡식을 싣고 정박한 배 안으로 돌아 다녔다. 정기 장터는 쥐들의 축제장소였다. 가게의 저울, 밀가루, 곡식, 육류, 생선을 요리조리 옮겨 다니며 마구 균을 퍼뜨렸으니 손 쓸 틈이 없었다.


먼저 유랑인과 거지들이 병들기 시작했다. 가난한 이들이 밀집해 살았던 서쪽에서 시작한 전염병이 순식간에 베네치아 전역으로 번져 나갔다. 동쪽에 살았던 부자들은 그래도 상대적으로 안전한 편이었다. 당시 뒷골목의 집들은 더러운 데다 오물도 많았고, 어둡고 습기가 차서 곰팡이가 가득했다. 지금도 베네치아의 뒷골목으로 들어서면 낡은 집들이 즐비하다. 더러운 오물은 더 이상 없지만, 그 당시의 분위기는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뒷골목은 전염병이 돌지 않을 때는 옹기종기 모여 사는 정감 어린 곳이었지만,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병마가 휩쓸고 가는 취약지대가 되었다. 골목집에 살았던 이들은 주로 베 짜는 사람, 뗏목 젓는 사람, 초 만드는 사람, 염색공, 운하 청소부, 일일 노동자, 어부, 염장이, 청소부, 창녀 등 가난한 이들이었다. 전염병의 확산은 시간문제였다.


당시 유대인은 게토에서 살고 있었다. 밤 열두 시 이후 게토 밖에 나와 있는 것이 발각되면 벌과금을 물어야 할 만큼 심하게 통제를 받았다. 두 번 이상 벌과금을 무는 경우에는 2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렇지만 유대인 의사들은 예외였다. 베네치아의 부자들이 실력 있는 유대인 의사에게 치료 받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게토에는 유대인이 바글바글 모여 살았는데 베네치아 서쪽지역에 밀집해 사는 가난한 사람보다도 네 배나 많은 유대인이 게토 안에 살았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유대인의 게토에서는 단 13명만이 페스트로 죽었다는 점이다. 게토보다 조건이 조금 더 나은 베네치아의 달동네에서는 1000여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전염병이 이곳을 비껴간 것은 하나의 기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1347~1353년에 창궐했던 페스트 때문에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죽었는데 베네치아에서는 1348년 한 해 동안 1만 명이 죽었다. 죽은 시체는 개가 파내지 못할 정도로만 얕게 땅을 파고 흙으로 덮었다. 전염병 환자의 시신을 사람들이 선뜻 나서서 묻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하루하루 불안감 속에서 보냈고 감염되지 않았던 이들이 할 수 있었던 예방책은 식초로 몸을 씻는 것이 고작이었다. 수상도시 베네치아는 시문市門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더욱 속수무책이었다.


신에게 기도하고 회개하면 병이 나을까; 1630년대 베네치아에는 다시 페스트가 퍼졌다. 몇 백 년이 지나서 또 다시 전염병을 겪게 되었다. 아직까지 병에 대한 약도 없었다. 시민들은 신의 저주 때문에 전염병이 창궐했다고 믿었다. 신에게 회개하고 윤리적인 생활을 하면 병이 나을 거라고 생각한 시민들은 문란한 생활을 금지하고 여자들에겐 남의 시선을 끄는 옷을 입지 못하게 했다. 그것만이 신의 노여움을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신앙에 매달리는 사람이 늘어나자 성당은 기도하는 사람으로 넘쳐났다. 사람들은 부적이나 성수에 매달렸다. 물론 당시 의사들도 이런저런 방법으로 약을 만들어 팔았다. 그러나 전염병은 더 크게 번져갔다. 부자들은 몸에 있는 열과 습기를 밖으로 배출하기 위해서 의사들을 불러 사혈을 해보았지만 신통치 않았다. 1630년의 사망자는 7~9월 3개월 동안 약 1200명으로 불어났고 사망자 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났다. 1630년대는 2400명이 다른 섬으로 도망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630년 10월에 이르러서야 전염병이 신의 저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베네치아 시는 구체적인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환경을 철저히 정비하기로 하고 마시는 물 공급에 신경을 썼고, 어떻게 하면 도시를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 의논했다. 시에서는 먼저 거지나 집 없는 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베네치아 출신이 아닌 거지는 섬 밖으로 쫓아냈다.


pest2.jpg


예전에는 죽은 자의 옷이나 이불 등을 사고파는 행위가 많았다. 당시의 가난을 생각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상행위로 인해 전염병이 더욱 전파될 수 있다는 것을 비로소 인식하게 되었다. 베네치아의 건강관청은 아직 건강한 자와 이미 죽은 자, 병에 걸린 자를 구분하여 사람들을 격리시키기로 했다. 건강한 이들은 누오보 섬으로 보냈고, 시체들과 이미 병에 걸린 사람들은 베치오 섬으로 그들의 재산과 함께 보냈다. 베치오 섬에는 신음소리와 구역질나는 냄새가 진동했고 시체 태우는 연기가 그치지 않았다. 시체는 구덩이를 파고 던져 버렸다. 구덩이의 시체 가운데는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자들이 꿈틀거리기도 했다. 물과 음식 조달이 어려운데다 간병인도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 최악의 상황이 약 400년 전 베네치아에서 실제로 일어났다. 남아 있는 통계자료에 의하면 1630년 11월에 1만 4000명이 죽었다고 한다.


1630년 누오보 섬으로 간 약 1만 명의 사람들은 섬 여기저기에 임시 거처를 짓고 기거했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행복했다. 혼탁하고 냄새나는 공기를 정화하기 위하여 로즈마리를 태웠다. 배로 들어오는 물건은 소금물과 식초로 소독했다. 의사들도 뾰족한 덮개를 쓰고 치료를 했다. 감염을 막기 위해 그 안에 공기 정화를 해주는 약초를 넣었다


언제 감염되어 죽을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사람들의 민심은 어떠했을까? 그때도 소위 사재기란 것이 있었을까? 물론 있었다. 생필품을 미리 구입해 집에 저장해둔 사람이 많았고, 외부와 완전히 격리된 생활을 하거나 옆의 섬으로 이주한 부자도 있었다. 이때 2만4000명이 베네치아를 떠났다. 빵, 기름, 고기, 생필품, 초 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없는 자들의 고통은 더욱 심해졌고 빈곤한 상태에서 페스트 감염의 두려움은 더욱 커져갔다.


이런 상황에서 물 만난 고기처럼 활약을 했던 부류들이 있다. 검정이나 빨간 옷을 입고 시체를 옮기는 직업인이 그들이다. 이들은 시체를 옮기며 물건을 훔치고 약탈을 일삼았다. 특히 부유한 집에 시체를 치우러 갔을 경우, 그 죽음의 집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되었다. 가끔 살아 있는 자들의 물건에 트집을 잡아 훔치기도 했다, 만약 물건 주인이 반항을 하면 그를 밀어서 시체들이 실려 있는 수레에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 버렸다. 평소에는 두 개의 눈을 가져야 정상이라고 말하지만, 비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외눈박이가 왕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바로 그와 같은 상황이었다. 시체 치우는 이들의 횡포는 심해졌고 그들의 수입은 더욱 짭짤해졌다. 허가 없이 이상한 약을 제조해서 팔았던 이들이나 페스트를 치유해 준다고 속였던 야바위꾼들도 수입을 많이 올렸다. 그런 그들도 병에 전염되어 한 순간에 모든 것이 허사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오늘 헛간에 곡식을 잔뜩 쌓아두고, 내일 죽어버리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성서 말씀처럼 말이다.


1631년부터 페스트로 죽는 사람들의 숫자가 2000명으로 줄어들었다. 전염병은 서서히 사라졌지만 그 후유증은 엄청났다.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찾은’ 이래 베네치아는 유럽 제일의 무역항이라는 위상을 점점 빼앗기고 있었다(우리는 지금까지는 신대륙을 ‘발견했다’라는 표현을 정석으로 여겼지만, 이게 잘못되었다는 것이 최근의 이론이다. 없었던 신대륙을 콜럼버스가 발견한 것이 결코 아니고 인디언들이 평화로이 살고 있었던 곳인데 우연히 유럽인들이 찾게 되었을 뿐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빼앗은 것이지만. 그러므로 ‘발견했다’라는 표현은 서양 중심주의 사상이라는 것을 밝히고 싶다). 거기에 페스트 같은 큰 전염병이 돌고 나자 베네치아의 상업 시장은 완전히 얼어붙었고, 서서히 내리막을 길을 걷게 되었다.


지금은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이는 세계적인 수상도시가 이런 참담한 역사를 말없이 품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 페스트는 어마어마한 재앙이었다. 지금 전쟁이나 질병, 기아로 죽어가며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자. 그리고 저 무시무시한 자연재해―지진, 해일, 화산 폭발, 홍수-들을 보면 평화와 안전이 얼마나 중요한 삶의 기본바탕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이렇게 구축된 바탕 위에서 의식주를 갖추고 산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 아닌가?


*『중세의 뒷골목 풍경』(양태자 지음, 이랑) 중에서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3077

Trending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