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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마음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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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는 누구에게나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농부 판화가 이철수씨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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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평의 논밭을 손수 가꾸며 자연의 생명들과 더불어 마음공부를 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이철수 화백.


“벼 베기 전날은, 논에 날아오는 참새들에게도 너그러웠습니다. 그래, 오늘이 마지막 밥상이다. 많이 먹어라.”
가을의 문턱, 노란 들녘에서 판화가 이철수(61)씨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글을 올렸다. 너그럽다. 충북 제천시 백운면 평동리 그의 ‘문전옥답’은 마음을 노랗게 물들일 만큼 샛노랗다. 풍년이다. 아흔아홉섬 가진 사람이 가난한 사람의 한섬조차 못 뺏어 안달하는 세상에서 참새에게조차 너그러워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농사꾼 흉내를 내는 한량이 아니고 땀 흘려 논밭을 일구는 진짜 농사꾼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1970~80년대 저항의 횃불
30여년 전 산골행 농사 몰두
한때 그림 손놓다 ‘마음’에 눈떠
3년째 원불교 교조의 ‘대종경’ 판화작업
10월말 서울 시작으로 전국 순회 전시
외로움과 불안 벗어날 길은 마음공부


문전옥답 코앞의 그의 집에 들어선 순간, 녹록지 않은 이씨의 성격이 보인다. 어찌 농사꾼이 이처럼 정갈하게 집을 가꿀 수 있으랴. 정원수며 잔디마당은 정갈한 학생의 머리 같다. 농기구는 말할 것도 없고 부지깽이 하나 어질러진 것이 없다. 열댓평 텃밭이 아니라 무려 1700평의 논밭을 일구는 농사일에, 판화작업까지 하는 이씨 부부의 일거리를 본다면 정원사를 두엇쯤은 두어야 가능할 성싶은 500평 집의 풍모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을 두 부부가 감당한다. 그러면서도 그 여유라니. 천리까지 향기를 피우는 천리향의 마음밭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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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가 논밭농사 말고 3년째 심혈을 기울여 지은 마음농사가 있다. <대종경> 판화다. <대종경>은 100년 전 원불교를 연 소태산 박중빈(1891~1943) 대종사의 언행록인 교전이다. 대표적 판화가로 어느 종교에도 얽매이지 않고 세인의 마음을 치유해온 그가 원불교 교전으로만 3년간 씨름해온 것이 보통일은 아니다.


그의 원불교와의 인연은 3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2년 결혼한 그의 아내가 장모를 따라 원불교 교당에 다니고 있었다. 일요일이 되면 아내와 함께 원불교 중구교당에 갔다가, 때마침 벽화를 그리게 된 동월교회로 가 허병섭 목사, 영화감독 이장호, 연주가 김영동 등과 어울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중구교당의 창타원 보현 교무의 인격에 끌리긴 했지만, <대종경>까지는 맛들이지 못했다. 그러다 결혼 2년 만에 산골로 들어오면서 원불교와의 인연도 끊겼다.


그런데 4년 전 원불교백년기념성업회를 맡고 있던 김경일 교무가 찾아왔다. <대종경> 판화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보현 교무와 함께였다. 이씨가 “내게 이 일을 하게 하려고 여기까지 함께 오셨느냐”고 묻자 보현 교무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러나 이씨가 형님처럼 모시던 고 권정생 선생의 <몽실언니> 삽화작업도 늦추고 있는 중인데다, 법정 스님이 생전에 당부했던 <무문관> 판화작업 등 구상한 일만도 태산처럼 쌓여 있던 터라 다른 작업은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러다 김 교무가 놓고 간 <대종경>을 별생각 없이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대종경>이 그의 애초 구상을 송두리째 뒤바꾸고 말았다. 대종사의 언행은 자신을 신비하게 우상화하기 마련인 종교서적이 아니었다. 종교가의 뜬구름 잡는 식의 얘기와는 전혀 다른 ‘사실적’인 마음공부법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때부터 <대종경>이 너덜너덜해지도록 읽고 또 읽으며 한장 한장 그림을 그렸다. 그가 <대종경>의 한 말씀 한 말씀을 씹고 또 곱씹고, 걸으면서도, 일하면서도, 잠자면서도 소화하고 녹여냈다. 수많은 마음밭에 뿌릴 밑거름이 무려 300여장이나 됐다. 그 밑그림 가운데서 고르고 골라 203점을 판화로 떴다.


최근엔 원불교 최고 어른인 좌산 상사가 찾아와 이씨의 판화로 쉽게 재탄생한 <대종경>을 음미했다. 좌산 상사는 다음날도 발걸음을 해 다시금 판화를 한장 한장 넘기며 이심전심을 보였다.


그가 대종사의 마음과 이렇게 쉽게 계합할 수 있었던 것은 기실 오랜 농사로 온갖 생명과 함께한 덕이었다. 그는 말씀이 대종사와 예수와 부처의 입을 빌리기는 하지만, 모든 생명의 소리가 한 근원에서 나온다는 것을 믿게 됐다. 하루에 세번 옷을 모두 갈아입을 만큼 흠뻑 땀에 젖으며 부대낀 자연으로부터 마음으로 전해들은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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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집을 말끔히 개조한 집과 깔끔한 잔디마당, 그리고 문밖 그의 논에 노란 벼가 보인다.


그는 애초 ‘도’(道)와는 상반되는 것으로 여기기 십상인 ‘저항’의 화톳불이었다. 1970~80년대 시위가 있는 곳엔 이철수의 판화가 있었다. 검경의 덫을 감수하면서 뜻을 좇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뜻이 좋아도 사람은 다 그러지 않았다. 어느 곳이나 별사람이 다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피해 숨어든 곳이 산골이었다. 경북 의성에서 농민운동을 하던 김영원 장로의 농장에서 2년 동안 그가 농사일을 배우며 산에 가 나무를 하는 동안 아내는 개울에서 얼음장을 깨고 빨래를 하고 군불을 지펴 밥을 했다.


2년 뒤 ‘울고 넘는 박달재’ 너머인 이곳에 와서는 본격적인 농사일을 하며 판화를 그렸다. 그러다 독일 판화전시회에 갔다. 그런데 그곳의 한 지식인이 이씨의 그림에 전체주의적인 요소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 동료가 “원래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이니 개의치 말라”고 위로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넘겨지지 않았다. 귀국해서도 그의 말이 화두처럼 목에 걸려 삼켜지지도 뱉어지지도 않았다. 그림도 더는 그릴 수 없었다. 그렇게 1년 반을 폐인 아닌 폐인으로 보냈다.


이씨는 “자연 속에서 산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하버드대 출신으로 25살에 버클리대학의 최연소 교수가 되었던 ‘테드 카진스키’를 예로 들었다. 카진스키는 월든 호수에 오두막을 짓고 산 헨리 데이비드 소로처럼 교수직을 2년 만에 그만두고 현대문명을 거부한 채 야인생활에 들어갔으나 테러리스트가 되어 돌아왔다.


그래서 그가 귀착한 곳은 ‘마음’이었다. 도시에 있거나 시골에 있거나, 놀 때나 일할 때나 자신을 지켜줄 그 마음이었다. 자연이나 사람과 어떻게 만나 어떤 관계를 맺게 하는지 결정하는 그 마음이야말로 유일한 귀의처였다.
그때 자주 만난 이들이 그가 ‘사람 농사’의 대인으로 꼽는 원주의 장일순 선생과 충주에 살던 이현주 목사, 안동의 권정생 선생 등이었다. 장일순 선생은 그에게 “뭘 하려고 너무 애쓰지 말라”고 했다. 일에 대한 강박을 해소해주는 그런 감로수를 마시며 그도 안심을 되찾아 갔다.


“사람들이 가난한 이들을 경멸하고 자신이 이룬 성취를 뽐내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그도 불안해하며 위태롭게 벼랑 끝에서 살아가긴 마찬가지 아닌가. 오히려 잘 살펴보면 성취를 이룬 요소들이 우리의 마음을 잃어버리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이미 100년 전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고 주창한 소태산 대종사의 마음에 100퍼센트 공감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물질적 부를 이뤄봐야 마음을 잃어버리면 허전함과 외로움과 불안함을 결코 벗어날 수 없어서다. 그래서 그는 사회참여자든, 부자든, 빈자든 누구라도 마음을 다잡기 위한 공부심, 즉 수도의 마음을 놓쳐서는 안 되기에 마음공부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자살자가 늘어나는 것도 본마음을 잃어버려 ‘자기 긍정’을 못하기 때문”이라며 “마음공부를 하면 농사짓거나 자연을 거닐면서도 생명들과 대화하며 늘 상대와 나의 새로운 것을 발견하느라 무료하거나 외로움을 느낄 틈이 없다”고 말했다.


이철수 <대종경> 판화전은 10월21일~11월3일 세종문화회관을 시작으로 대구, 광주, 익산, 부산, 대전에서 잇따라 열린다.


제천/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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