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공인으로 기독교는 이단에서 일약 제국의 종교로 발돋움했다. 392년에는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아예 로마의 국교로 선포했다. 제국의 공식 종교가 되면서 기독교는 세금면제 등 상당한 물질적 혜택을 누리게 되었으나 한편으로는 황제의 간섭을 초래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소집한 니케아 회의다. 이 자리에서 주교들은 예수가 신이냐 아니냐를 놓고 논쟁을 벌였고, 결국 예수가 신이라고 주장하는 아타나시우스파가 승리해 반대파인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정죄됐다.
이후 아리우스파의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추방되었고 그들의 책은 금서가 됐다.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경우는 기독교의 또 다른 분파인 영지주의에 대해 논쟁도 없이 금지뿐만 아니라 전부 파괴하고 불태워야 할 ‘온갖 사악함의 온상’으로 매도했다. 여성 사제를 인정하는 등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이고 파격적인 교리로 큰 영향력을 지녔던 영지주의는 이렇게 해서 역사에서 사라졌다. 하나의 제국을 원하는 황제들의 야심에 신앙과 양심의 자유가 박탈된 것이다.
종교의 국정화는 끔찍한 결과를 야기했다.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이교도 사원들은 폐쇄됐고, 394년에는 천년 역사의 올림피아 경기를 금지했다. 제국의 후원을 받은 기독교인들은 죗값과 징벌이라는 명분으로 이교도들에 대한 폭력과 살인을 자행했다. 유대교 회당을 불사르고 신전들을 파괴했으며, 사제들은 그들의 신이 가짜라는 것을 시인할 때까지 고문당했다. 일부는 신전 기둥에 사슬로 묶인 채 굶어죽기도 했다. 가장 끔찍한 사례는 415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독교 광신도들이 히파티아라는 여성 철학자에게 가한 테러다. 그들은 정치·종교적으로 갈등관계였던 히파티아의 머리카락을 뽑고 날카롭게 간 굴껍데기로 피부를 벗겨내는 고문을 하고 화형에 처했다.
이러한 야만적 행동은 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지속됐다. 중세에는 종교재판소를 설치해 이단으로 간주된 사람들을 축출하거나 고문해 죽였다. 종교개혁 시기인 1572년 프랑스에서는 구교도들이 바르톨로메오 축일을 기점으로 한달여에 걸쳐 신교도 수천명을 학살했고, 독일은 세계대전에 버금가는 30년간에 걸친 신구교 간의 전쟁으로 초토화됐다. 또한 신대륙에서는 스페인, 포르투갈 침략자들이 신의 이름으로 수백만의 원주민을 살해했다.
이렇듯 잔혹한 일들이 전세계적으로 벌어진 것은 타 종교와 공존을 거부하고 오로지 하나의 종교 또는 하나의 교리만 존재해야 한다는 광신이 작용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 같은 유일신 종교인 이슬람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세금만 내면 적어도 기독교나 유대교는 존속할 수 있었다. 불교의 경우는 대부분 다수파가 되더라도 소수종교나 토착신앙을 존중했다. 기독교가 그나마 억지스러운 행위를 멈추기 시작한 것은 30년 전쟁 이후다. 더 이상의 전쟁과 갈등이 계속되면 모두가 파멸한다는 교훈을 얻었기 때문이다.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오늘날 대부분의 서구사회는 정교분리를 원칙으로 다원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국론을 통일한다는 핑계로 하나의 신앙이나 역사를 강요한 것의 끝이 어떠했는지를 비싼 대가를 치르며 얻은 결과다. 그럼에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하나의 역사관을 강요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비극 중의 비극이다.
백찬홍/ 씨알재단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