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남 해남 일지암 인근 김남주 시인 생가에 함께 들른 법인 스님(맨왼쪽)과 아이들
2년 전 겨울, 내 산거에서 인문학당이라는 이름 아래 중학생 7명과 함께 스마트폰 등 문명의 도구 없이 보름 동안 지낸 적이 있었다. 그때 참가했던 제주도에 사는 학생이 2월 초순에 가족과 함께 나를 다시 찾았다. 그날은 마침 산중에 눈이 펄펄 내리고 찬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며칠째 온수가 끊기고 방안은 냉기가 감돌았다. 은근히 아이들이 걱정되었다. 요즘 애들은 유독 깔끔하고 불편한 환경을 참지 못한다. 그래서 아랫 절 대흥사에 욕실이 딸린 따뜻한 방을 권했다. 모두들 좋아할 줄 알았는데 엄마를 비롯하여 중학생 딸 둘과 초등학생 아들이 별 반응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일지암에 올라가 욕실도 없는 두평 남짓한 초당 단칸방에서 자겠다고 한다. 나의 배려가 좀 무색해졌다. 초당 앞에서 초등 4학년 수한이는 신이 났다. 어린 아이가 무거운 도끼로 나무를 패고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누나 수빈이와 수현이가 추임새를 넣는다. “우리 수한이는 체질이야, 아마 전생에 일지암 머슴이었을거야” 하하 호호. 그날 밤, 4명의 가족은 뜨끈뜨끈한 구들에 누워 도란도란 정담을 나누며 산중 설경에 흠뻑 젖었다. 신통하게도 아이 셋은 스마트 폰 없이도 즐겁게 긴긴 겨울밤을 보냈다.
다음 날은 암자에서 매월 한번씩 열리는 작은 음악회. 이른 아침부터 눈이 내렸다. 오는 손님들이 걱정되어 쌓인 눈을 치워야 했다. 애들에게 함께 하자고 하니 기꺼이 따라나선다. 무려 3시간 동안 치우는데 아이들이 짜증을 내지 않고 즐거워한다. 눈을 치우면서 내리는 하얀 눈을 바라보며 연신 감탄한다. 사흘을 지내면서 내심 놀란 것은, 애들이 책과 자연과 사람들에게 골고루 눈을 마주하고 몸을 놀리는 일을 즐거워한다는 점이었다. 틈틈 스마트폰도 만지작거렸지만 많은 시간을 소비하지는 않았다. 애들은 아주 작은 풍경에도 눈길을 주고 살피며 아름다움을 가슴으로 느끼고 있었다. 신통하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겠다.
어느 곳에 눈길을 준다는 것은 바로 그곳에 마음을 주는 일이다. 보고 듣고 맛보고 생각하는 우리는, 그 무엇과 마주하면서 의미와 재미를 생산한다. 그러므로 먼저 감각기능이 마주하는 그 무엇에 대한 ‘선택’과 ‘반응’이 각자 삶의 내용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의 눈길은 온전히 연모할 대상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다. 스티븐 나흐마노비치의 한마디가 떠오른다. “인간이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건 텅빈 상태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티브이, 술, 담배, 마약 산업은 이를 기반으로 한다. 눈과 두뇌가 두려움을 망각케하는 것이다. 두려움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화려하고 풍성한 시대에 우리들의 시선은 매우 편협하고 빈곤하다. 내면의 고독을 견디지 못해 사람들은 보다 자극적인 감각대상을 찾는다. 잘못된 선택과 그에 따른 반응의 악순환으로 일상의 시간을 연명하고 있다. ‘텅빈 충만’과 ‘텅빈 공허함’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성철 선사는 이렇게 노래했다. “보이는 만물은 관음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이라. 보고 듣고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