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
거의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오후 다섯 시쯤 되면 뭔지 모를 이상한 평안이 찾아왔다. 아마도 곧 캄캄한 밤이 되면 모두가 나만큼 캄캄해질 거라는 생각이 그 해거름 녘을 가장 평화롭게 하지 않았을까 하고 그때의 감정을 더듬어본다. 그 시절 도서관에서 루 살로메의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책을 빌려 읽었다. 책 내용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방황과 고민으로 가득했던 책의 전체 분위기가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내게 퍽 매혹적으로 다가왔었다.
유일하게 기억하는 한 문장이 책의 마지막에 있었는데,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라는 말이었다. 책을 다 읽고 뭔가 대단한 기분으로 목사님에게 가서 질문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나요?” 목사님은 성경은 읽지 않고 쓸데없는 책에 빠져 있다고 호되게 꾸중하셨다. 그 후로 루 살로메의 끝나지 않은 방황을 마치 내가 나서서 이어가야 할 것처럼 내적인 방황이 깊어 갔다. 대체 나는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여기서 왜 이렇게 힘들게 헤매고 있을까? 어차피 죽을 건데 힘들게 살지 말고 죽은 것처럼 가만히 누워 있으면 어떻게 될까? 끝없는 질문들이 속으로만 계속 파고들었다.
그러다가 스물두 살 때 교회 언니에게 ‘큐티’라고 하는 성경 읽기 방식을 소개받았고, 그날부터 거의 매일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실제로는 놀기 좋아하고 게으르고 누가 억지로 시키는 일은 하기 싫어하는 내 기질로 봤을 때 지금까지도 이처럼 꾸준히 뭔가를 하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이는 오랫동안 훈련되고 길들인 어떤 습관의 힘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나는 어떤 습관을 잘 갖지 않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지속적으로 큐티를 해오는 것은, 매일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또 묵상한 것을 기록하면서 내가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리고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그 주소를 알아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본회퍼의 말처럼, 나를 둘러싸고 있는 큰 배경을 보고 비로소 그 배경 속 어디 즈음에 내가 왜 서 있는지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듯 성경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큰 배경을 보는 것과 같았다. 나의 성경 읽기는 마치 뿌연 안개 속에서 길을 잃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무서워하다가 하나씩 표지판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다행한 시간이었다. 조금 전까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길에서 누군가 다가와 ‘여기 이쪽’이라고 안내해주는 길표를 만나는 시간이었다. “이 텍스트에 어드레스가 있는가?”라는 도전적인 질문처럼 성경은 하나님이 내게 말을 걸어오시는 특별한 말 걸기였고, 나 역시도 성경 읽기를 통해 하나님께 나만의 말 걸음을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 때도 없이 할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지나 대학원에서 상담을 공부할 때였다. 자존감에 대해 공부하던 중에 ‘wanted baby’와 ‘unwanted baby’가 언급되었다. ‘wanted baby’는 임신을 원하는 부모가 태중에서부터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태어난 그 아이는 자존감이 높지만, ‘unwanted baby’는 원치 않은 임신을 한 부모가 태중에서부터 아이를 원망하기 때문에 아이의 자존감이 낮다는 내용이었다. 수업 중에 자신이 어떤 아이로 태어났는지 어린 시절의 분위기를 되짚어 가면서 대화하는 시간에 뜻밖에 많은 학생들이 ‘unwanted baby’였음을 고백했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바로 외할머니 손에 맡겨져서 중학교를 다닐 때까지 부모와 떨어져 지냈으니 그 상황만 생각해도 나는 ‘unwanted baby’였다. 그런데 문득 그즈음 읽고 묵상했던 에베소서 1장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우리가 창세 전에 택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또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한다는 하나님의 계획이 사도 바울의 찬송으로 고백된 내용이었다. 나는 내 육체의 부모로부터는 ‘unwanted baby’였고, 내 영적 부모인 하나님으로부터는 ‘wanted baby’였음을 고백할 수 있었다. 그만큼 하나님의 원함이 부모의 원치 않음보다 더 강했다고. 그리고 다시 한 번 내가 어디에서 비롯되었으며 또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 후로도 지속적인 성경 읽기와 이런 주소 확인들을 거듭하면서 여러 순간의 크고 작은 흔들림을 견딜 수 있게 되었다.
눈에서 배에 채우는 읽기로
목욕을 시켰는지 목에 뽀얗게 분을 바른 아이가 있다. 사람의 알인 아이가 하나 해질 무렵 골목길 문간에 나앉아 터질 듯한 포도 알을 한 알씩 입에 따 넣고 있었다. 한 알씩 포도라는 이름이 그의 입 안에서 맛있게! 지워져 가고 있었다. 이름이 지워져 간다는 것이 저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니! … 아이는 마지막 한 알까지 다 먹었다. 마침내 포도라는 이름이 완전히 지워졌다. 아이가 말랑말랑하게 웃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자라 있었다. 이름이 뭐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아이는 이제 자러 갈 시간이었다.
〈포도를 먹는 아이〉라는 시다(정진규, 《알詩》).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 성경을 읽는다는 것도 포도 알을 한 알씩 입에 따 넣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포도 알을 입안에 넣었을 때 포도의 에너지가 구체화하듯이 말씀도 단지 눈으로 읽는 글자가 아니라, 입에 넣고 먹어서 배에 채우고 소화를 시켜 행동으로 나타나야 할 실제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눈으로 흘려 읽는 책이 아니라, 생명의 양식으로 매일 섭취해야 할 음식처럼 성경을 대하기까지 내게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항상 글자에 굶주려 있었던 어린 날에는 부엌에 놓인 성냥갑 뚜껑의 커다란 글자부터 시작해서 동그란 약통 뚜껑에 쓰인 ‘안티푸라민’이라는 글자, 그리고 할아버지가 읽는 〈매일미사〉까지 거의 닥치는 대로 읽어댄 것 같다. 성경도 주일학교에서 주는 질 좋은 연필과 공책을 받기 위해서 항상 친구들보다 앞서서 열심히 읽었다. 그렇지만 당시 성경은 내게 ‘그냥 읽는 책’이었다.
그러다 20대에 들어서면서 시작한 큐티를 통해 성경은 그냥 읽는 책이 아니라, 책을 읽은 내가 그렇게 ‘되는 것’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책을 읽어서 아는 것으로 그칠 수 없었다. 그렇게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된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했다. 그것이 ‘진짜 독서’인 큐티의 지난한 과정인 것이다. 이 힘든 과정을 우리는 신약의 요한과 구약의 에스겔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요한은 박해 중에 갇힌 섬에서 천사를 통해 작은 책을 갖다 먹으라는 요청을 받고 그 책을 먹었다(계 10:9-10). 에스겔도 같은 명령을 받았다(겔 2:8-3:3). 요한과 에스겔이 책을 먹는 과정을 보면서 읽는 행위가 단지 눈에서 그치지 않고, 먹어서 소화해야 할 중요한 음식임을 깨닫는다. 그들이 책을 먹자 그것이 입에는 달지만 배에는 쓰게 되었다는 것은, 성경을 읽은 이상 입안에서만 달콤한 맛을 즐기는 데 그칠 수 없다는 말이다. 성경을 읽은 내가 성경의 내용이 되고, 더 나아가 그 내용을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왕들에게 다시 전해야 했는데(계 10:9-10), 그 내용은 씹으면 씹을수록 쓰디쓴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었다. 그러므로 성경 읽기는 읽을수록 더 잘 소화하고 완전히 체화해야 하는 부서짐의 힘든 과정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처음 큐티를 할 때는 거의 매번 귀에서 사랑의 종소리가 들릴 정도로 나의 성경 읽기는 밀어로 쓰인 연애편지를 읽는 것 같았다. 개인적인 기질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이 밀월 기간이 다른 사람보다 꽤나 오래 지속되었다. 그러던 중에 대통령 한 분의 죽음 이후로 내적인 파열들이 심해지면서 조금만 움직여도 사지육신이 아픈 것처럼 나의 큐티는 단어 하나에도 곧잘 발끈하거나 반대로 쉽게 움츠러들곤 했다. 그리고 4·16을 지나면서 총체적으로 개인 성경 읽기에 변화를 가져왔다.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이 더는 나 혼자서의 읽기가 될 수 없고, 읽는 순간 그것을 쓴 자와 더불어 공적인 사귐의 자리가 마련되고 더 나아가 내가 전하려는 자들과도 더 큰 나눔의 공적장소가 만들어지기 때문이었다.
읽어서 뭘 하겠다는 것인가에 대한 답이 궁색하지 않으려면 최소한 내가 읽은 것에 대해 내 기쁨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도 같이 웃을 수 있는 공적 즐거움이 있어야 했다. 함께 즐거워하기, 그것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기 위해 먼저 우는 자리에 서는 것부터였다. 하지만 청소년 시절의 지독한 궁핍과 방황 속에서 빠져나와 어느 순간 삶의 견결한 평화들을 누리기 시작한 자로서 다시 혼돈과 눈물과 신음의 자리에 선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적어도 내게는 말씀을 먹었을 때 입에 달았지만 배에 내려갈수록 쓴물이 올라오는 것과 같은 시간들이었다.
끙끙 앓아가며 점점 알아가기
요 몇 해 동안 내 성경 읽기의 분위기를 말한다면, 평론가 김현의 책제목처럼 ‘행복한 책읽기’에서 ‘책읽기의 괴로움’으로 옮겨간 것 같다. 분명하지 않은 세계 속에서 확신을 말하며 사는 것이 미안하고, 방황하는 사람들 속에 발을 들여놓으려고 하지 않은 채 저기를 보고 같이 가자고 말하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결핍을 주는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권여선의 《봄밤》이라는 소설을 보면 알코올 중독으로 지독한 고통을 견디며 죽어가는 동생을 외면하던 신앙 좋은 언니가 마지못해 병원을 찾아가서 “막내야, 기도해! 언니도 기도할게.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셔! 영원히…”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무심코 소설을 읽다가 ‘기도’ ‘하나님’ ‘사랑’ ‘영원’이라는 단어들을 접하면서 얼굴이 붉어졌는데 그것은 우리 교회 안에서 은혜롭게 사용되는 단어들이 이 세계 사람들의 언어로 다시 번역되어 읽힐 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외계언어처럼 이상하게 들려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 단어가 지닌 한계가 아니었다. 다만 그 단어가 말해진 장소가 평소 교인이 발을 들여놓기 꺼려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 단어를 말하는 교인의 실제 마음이 단어들과 조금도 화합하고 있지 못한 것이었다.
“기도해” “나도 기도할게” 라는 이 말이 실제 그 기도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 곁으로 한 뼘도 다가서지 못한 채 왜 이렇게 ‘겉도는 말’이 되었을까. 그동안 우리는 듣기 거북한 단어들을 하나씩하나씩 제거해버리고, 어느 순간 우리끼리 우리 안에서만 맴도는 말들에 만족해하면서 우리에게 기분 좋은 단어 몇 개를 쉬지 않고 재생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우리끼리 있을 때는 뭔가 대단한 말 같지만 실상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교회 안에서만 ‘맴도는 말’의 소비자들이 아니었을까. 지금이라도 고통이라는 현실에 겉도는 말을 하지 않기 위해서 나의 성경 읽기는 점점 더 괴로운 과정을 견뎌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견딜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기도’라는 말에, ‘사랑’이라는 말에, ‘영원’이라는 말에 맴돌지 않고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이태 전 여름, 기차 안에서 문학잡지를 읽다가 소설가 한강의 작품에 대한 인상적인 평론을 읽었다. “학문이 의사처럼 사회적 징후를 관찰하고 진단할 때, 문학은 환자로서 최선을 다해 사회를 앓는다. 다른 세상을 상상하기에 앞서 이 세상을 가능한 넓고 깊게 경험해보려 애쓰는 문학은 경미하거나 부분적인 증상(symptom)으로만 파악되는 다음 세상을 먼저 앓아버린다. 그럴 때 문학은 글이 아니라 차라리 몸이고자 한다.”(신샛별, 〈창작과 비평_여름〉, 2016)는 글이었다. 그는 한강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작가가 미리 세상의 증상을 앓아낸 것을 같이 앓아내는 것이라고 했다. 밑줄을 치며 여러 번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적어도 문학은 지금 그 나름으로 문학의 구실을 하려 애쓰고 있구나 하며 안도했다. 그렇다면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성경 읽기는 소설 읽기와 무엇이 어떻게 다르며 또 같을지를 생각하며 조금은 불안했다. 작가들이 이것은 글이 아니라 차라리 몸이고자 하는 심정으로 시대와 함께 끙끙 앓아내며 쓴 작품을 그와 동일한 고통으로 대하는 독자들의 성숙한 태도는 우리의 성경 읽기 자세를 충분히 고쳐 앉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성경 읽기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쌓고 있는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시선이 오늘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잘 보고 있는가? 함석헌 선생은 “앎은 앓음”이라고 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앎은 이 세계 사람들의 죄로 끙끙 앓고 계시는 하나님의 앓음을 알고 있는지 묻고 있는 말이다. 혹자는 큐티에 대해 굳이 ‘개인 성경 읽기’라는 단어적 의미를 강조하면서 사(私)적인 성경 읽기의 범주에 가둬두기도 한다. 하지만 성경을 읽는다는 것, 그리고 묵상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사적인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큐티를 통해 개인의 영성이 깊어지면 그만큼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가고 그 앎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내 마음과 시선이 같이 따라 움직이는 삶을 의미한다. 성경을 제대로 읽는다면 하나님의 신음과 현실세계의 앓음을 알고 또 같이 앓게 될 것이 분명하다.
《드웰》(dwell, 성서유니온)이라는 책의 서문에 영성이라고 부르는 ‘들숨’과 선교라고 부르는 ‘날숨’이 설명되어 있다. 여기엔 하나님과 함께 사는 들숨의 삶과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에 참여하는 날숨의 선교에 대한 실제적인 고찰이 담겨있다. 이 ‘들숨’의 영성과 ‘날숨’의 선교는 성경 읽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영성과 선교, 이 둘은 별도로 구분하여 설명될 수 없는 긴밀한 관계로서 “세상을 위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지녀야 할 선교적 영성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성경 읽기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경건의 독서가 있다면, 그와 더불어 이 경건이 실현되어야 할 공적 장소에서의 참여적 독서, 세계감(世界感)적인 독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감(感)을 잡는 읽기
세계감(世界感), 한 시인의 글에서 발견한 단어였지만 지금 우리의 성경 읽기에서 반드시 필요한 개념이라고 생각했다. 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바른 관점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이 세계와 나를 온전히 느끼는 ‘감점’(感點)의 회복이 더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성경 읽기가 우리로 하여금 하늘의 좋은 것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땅의 신음을 온몸으로 느끼는 관계로 이어지기를 기대하고 싶다. 매일 성경을 읽는 사람들을 통해서는 그들이 맛본 좋은 것으로 이 땅의 어느 한 자리가 좋게 바뀌는 선교 현장이었으면 한다.
개인적으로 처음 성경 읽기의 즐거움은 내 삶에 제대로 된 각(覺)을 세워주었다. 어디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주소를 찾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각(覺)은 올바른 관(觀)을 씌워주었다. 더 깊은 성경 읽기를 통해 이 세계를 하나님 나라의 안목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나의 성경 읽기가 관(觀)으로 세계를 분별하면서도 하나님의 뜻과 따로 놀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과 같이 가는 감(感)을 잡는 독서이기를 소원한다.
지금 이 순간도 하나님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감(感)을 잃지 않기 위해 다시 매일 성경을 읽는 괴로움에 즐거이 참여한다. 이렇게 나는 매일 성경 읽기를 통해 조금씩 더 앓아가며 더 알아가는 중이다.
김주련
읽는 인간이고 싶다. 읽다가 쓰고 다시 읽고의 시간이 쌓이면서 계절이 읽히고 내가 읽히는 것이 좋다. 성서유니온에서는 <매일성경> 편집과 책을 만들다가 지금은 대표가 되어 새로운 세계를 읽고 있다. 지나면 지금 여기서의 나는 어떻게 읽힐까 두려워하면서.
이 글은 복음과상황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