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혼자 그 곳에 갈 줄은 몰랐어요
하자랏 이맘 후세인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의 넋을 기리는 무하람
<당당뉴스> 2013년 11월 18일 김형민dan21@hanmail.net
이슬람의 새해, 무하람으로 부터 시작
이슬람의 새해인 무하람(Muharram)이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11월 3일 시작된 이슬람의 새해는 한 달 동안 무하람축제를 통해 이뤄집니다. 무아람 축제는 이슬람의 큰 종파인 수니파와 시아파 중 시아파의 축제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무아람 축제 기간 동안 시아파는 이슬람을 창시한 무함마드(Muhammad)의 외손자인 이맘 후세인(Imam Hussain)이 순교를 기리며 각종 행사를 합니다.
사실 파키스탄은 시아파 무슬림보다 수니파 무슬림이 많은 나라라서 무하람이 와도 그다지 축제분위기가 없답니다. 오히려 축제분위기 보다는 경찰병력을 배치하여 시아파 무슬림들이 있는 지역을 보호 경계하는 것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제가 있는 사르코다지역도 시아파 모스크가 있는 곳과 시아파 무슬림들이 밀집해 살고 있는 지역에 많은 경찰 병력이 배치되어 있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폭동과 과격한 행동을 방지하기 위해서랍니다. 시아파와 수니파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 이란같은 나라의 경우는 시아파 무슬림들이 대부분이라서 여러 가지 축제가 펼쳐 진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우리가 잘알고 있듯이 쇠사슬 끝에 칼을 자신의 몸에 내리치면서 행진하는 것입니다. 이 때 이들은 “야 후세인, 야 후세인”이라 외치면서 행진하는데 이 말은 “후세인이여, 후세인이여”라는 뜻으로, 후세인의 억울한 죽음에 동참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수니파 무슬림들은 시아파들이 자신의 몸에 칼채찍질을 하는 것을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몸은 알라(하나님)께서 주신 신성한 것이기에채 채찍질을 하며 피를 흘리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라고 비판합니다.
무하람 풍경
하자랏 이맘 후세인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의 넋을 기리는 무하람이 지난 금요일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지난 목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이틀 동안 사르코다의 모든 상점들과 학교, 은행 등이 문을 닫았습니다. 파키스탄에와서 만난 아쉬프라는 친구는 일년 내내 단 한번도 가게문을 닫는 것을 본적이 없는데 무하람기간 이틀동안은 문을 닫아, 내일 왠일인가 물어보니 “이맘 후세인의 죽음을 존중하고 기리기 위해서”랍니다. 그는 수니 무슬림입니다.
무하람 행사는 시아무슬림들이 주축이지만, 수니 무슬림들도 ‘이맘 후세인’을 존경하고 그의 죽음에 모두 동참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 지난 목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이틀 동안 열린 무하람 행사
지난 금요일, 이 날은 이맘 후세인이 야지드에 포위되어 물이 차단된 후, 10일 째 되는 날로 후세인과 그의 추종세력 72명이 모두 몰살된 날입니다. 샤르코다에서도 시아 무슬림들이 추축이 되어 큰 행사가 있었습니다. 제가 알고 지내던 파키스탄 친구들은 거의 모두 수니 무슬림들이라서 이날 행사를 보는 것 자체를 싫어하여, 저 혼자 이들의 행사가 열리는 곳으로 갔습니다.(수니 무슬림들은 자신의 몸을 가학하여 피는 흘리는 행위를 코란에 어긋난 행위로 봄)
사실 지난 해에는 무하람이 있기 전에 한국에 귀국하는 바람에 이 행사를 경험하지 못해, 올 해는 한국 들어가기전에 꼭 경험해 보고 싶기도 하여 위험스럼지만 발걸음을 옮기기로 하였습니다.
사르코다의 가장 큰 시장 내에서 열리는 이 날 행사는 삼엄한 경비 속에서 치러 졌습니다. 여기 저기 경찰 병력이 촘촘히 배치되었으며, 모든 차량들을 차단하기 위해 바리케이트를 설치하였습니다. 전 무사히 경찰들의 시선을 따돌리고 행사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이 곳에서 2년을 있다보니 어느 정도 요령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시아 무슬림들은 거의 모두 검정색 옷을 입고 한무리씩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행사가 진행되기를 기다리는 모습이었습니다. 한 명의 무슬림이 저의 생김새가 틀린 것을 알아채곤 어디에서 왔냐고 묻기에 한국에서 왔다고 알려주니, 저쪽에서 행사가 지금 진행중이니 그쪽으로 가라며 손가락으로 안내해 줍니다. 그가 가리킨 쪽으로 가니 50여명의 시아 무슬림들이 거리에서 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야 후세인, 야 후세인, 후세인을 왜 죽였는가?”
윗옷을 벗은 맨 몸에 자신의 손을 높이 들어 가슴을 내리지면서 “야 후세인~”을 외치고 있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이들의 퍼포먼스를 보거나 사진을 찍거나 혹은 따라서 자신의 가슴을 때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휴대폰 카메라를 빼어들곤 사진과 동영상을 계속해서 찍었습니다.
이들의 퍼포먼스는 맨 앞 무리의 청년 10여명이 노래를 하면, 거기에 맞추어 이뤄졌습니다.
어떨때는 낮은 목소리로 가슴을 약하게 두드렸으며, 또 어떤 때는 감정에 복받쳐 높은 목소리에 가슴을 아주 쎄게 내리지는 모습은 마치 오래도록 함께 연습한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하는 몸 짓은 머리카락이 설 정도로 무섭거나 혹은 강렬한 무엇인가를 느끼에 하였습니다. 사진을 한 참 찍고 있는데 또 역시 한 명의 무슬림이 저를 부릅니다. 역시 어디에서 왔냐? 뭐하고 있냐? 등을 묻습니다. 갑자기 십여명이 넘는 무슬림들이 저를 둘러쌓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왔다. 오늘 하자랏 이맘 후세인의 행사 사진을 찍고 있다”라고 하니, “좀 보자”고 하여 보여줬더니 ‘괜찮다’고 대수롭지 않은 듯 가버립니다. 그가 가니 주위에 몰려 있던 모든 무슬림들도 각자 자신을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이들의 퍼포먼스가 진행되는 동안 또 다른 쪽에서는 가족인 듯 보이는 사람들이 슬픔의 눈물을 흘리고 조용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 날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가족단위로 온 사람들이 많아 보였습니다. 여자들도 모두 검정복장을 하였고, 아이들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칼날이 달린 쇠채찍으로 자신의 몸을 자학하는 퍼퍼먼스를 보기까지는 좀 더 기다려야 할 것같고 분위기가 달아오르면 어떤 불상사도 발생할지 몰라 이 정도로 경험했으면 됐다 생각하고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곤 릭샤가 운행가능한 장소로 걸어가던 중, 경찰이 저를 세웁니다. 행사장에 들어가는 내내 한번도 검문에 걸린적이 없는데 다 끝나고 나오는 길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어디서 왔냐?”
“한국에서 왔다”
“여권 있냐?”
“여권 없다”(여권이 비행기표를 사기위해 며칠 전 저의 파키스탄 친구인 네임이 가지고 가버렸기에 소지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어디서 사냐?”
“뉴 세틀레이트타운에서 산다”
“왜 파키스탄에 왔냐?”
“여기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다” 등등 한 참을 묻고 나서 하는 말이
“이곳으로 들어오는 동안 경찰들이 검문검색을 안하더냐? 어떻게 들어왔냐?”라고 합니다.
눈치를 보니 검문검색을 안했다고 하면 커다란 문제가 생길 것 같아 “경찰들이 가는 곳마다 검문검색했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이 날 행사 때문에 자신들이 설치해 놓은 임시 사무소까지 같이 가지하기에 동행을 하여 갔습니다. 그곳에서도 또 다시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파키스탄 친구인 무하마드 네임과 임띠아즈를 전화로 연결하고, 네임이 여권을 가지고 온 후에서야 임시 사무소에서 나올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경찰서까지 같이 가야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또 경찰서까지 함께가서 처음부터 신문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난 후 오후 4시가 넘어서야 드디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 이틀 동안 사르코다의 모든 상점들과 학교, 은행 등이 문을 닫았다. 차량들을 차단하기 위해 바리케이트를 설치하고 경찰 병력이 촘촘히 배치하여 검문검색을 철저하게 한다.
돌아오는 길에 네임이 말을 꺼냈습니다.
“목사님 사실 엊그제부터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는데, 무하람 9,10째 이틀 동안은 절대 밖에 나가지 말라고 했었는데, 목사님 혼자 그 곳에 갈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무하람 행사가 있는 장소는 경찰들도 아주 위험하게 생각하는 곳이에요. 왜냐하면, 탈레반들은 시아 무슬림들을 무슬림으로 생각하지 않아서 이들은 죽어도 된다고 생각, 무하람기간 동안 폭탄테러가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에요. 특히 오늘은 라호르, 가라치 등 큰 도시가 다 전화불통지역으로 선포되었어요. 정부에서도 테러에 대비에 전화통화를 차단시켜 버린거에요. 만약 사르코다도 전화불통지역이 되었다면 우리들하고 연락도 안되어 경찰서에서 계속시간을 보냈어야 할 꺼에요.”
옆에 있던 임띠아즈가 껄껄 웃으면서 거듭니다.
“미스터 김, 어떤 사람이에요? 자신들도 위험해서 잘안오는데 겁도 없네요. 외국인들은 조심해야 해요. 일전에 미국인 중에 CIA 요원이 있었는데 그 사람사건 아시죠? CIA로 생각하여 테러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리고 미스터 김은 이제 내일모레면 한국가는데, 사르코다 경찰서에서 그 사람 이상하다. 왜 무하람에 검문에 걸리자마자 한국으로 도망갔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하며 잔뜩 겁을 줍니다.
네임이 또 말합니다. “임띠아즈와 저는 아마 한 달 동안정도 또 여기저기에 불려 다닐꺼에요”라고 말하며, 껄껄 웃습니다. 이 날 겪은 일들은 저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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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암 후세인
661년 시핀 전투(시리아와 이라크의 경계 근처에서 발생한 제1차 이슬람내전, 마지막 전투는 코란을 앞에 두고 서로간의 유무죄를 평결하는 것으로 결판 남)이후 이슬람세계의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당시 시리아를 통치하고 있었던 무아위야를 칼리파(이슬람 공동체의 통치자,코란에서는 아담과 다윗에게 같은 말을 씀)로 인정하였다.
당시 무아위야가 칼리파가 되기 전 이슬람의 창시자인 무하메드의 대를 이은 초대 칼리파 4명중 하나였던 알리는 시핀 전투에 판결에 불만을 품고 자신들만의 세력을 구축, 제2대 칼리파로 하산을 3대 칼리파로 후세인을 선출하면서 대를 이어갔다.
무아위야의 아들인 야지드는 제2의 칼리파가 된 이후 또 다른 세력인 후세인에게 복종과 충성을 요구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낄 후세인은 메카인 하람 사원으로 피신하였다.
후세인은 4달을 피신한 후 쿠파의 카르빌라로 이동하였다. 야지드는 680년 이슬람의 새해 첫날 이곳으로 군대를 파견하여 후세인과 추종세력들을 포위, 9일 동안 물공급을 차단한 후 10일째 되는 날 침공하여 후세인과 모든 추종자들을 죽였다.
시아파 무슬림들은 정통 칼리파였던 후세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매년 새해 첫날부터 무하람에 접어들고, 10일째 되는 날은 후세인의 흘린 피를 기념하며 자신의 몸에 칼채찍질 행진을 하는 절정에 이른다.
시아파 쿠슬림들이 정통 칼리파로 알리와 그의 계승자만을 믿고 따르며 기념하는 것과 달리 수니파 무슬림들은 정통 칼리파 4명 모두를 인정하며 따른다. 그러므로 시아파에게 이 날은 아주 중요한 날인 반면 수니파 무슬림들에게는 고통스럽고 참혹한 날이라는 것은 인정하고 기념하지만 시아파만큼은 아닌 것이다.
*이 글은 <당당뉴스dangdangnews.com>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