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비티’, 사랑은 중력이다
[김원의 리얼몽상] <그래비티>, 알폰소 쿠아론 감독, 2013년작, 현재 상영 중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3.11.21 김원 | editor@catholicnews.co.kr
그럴 때가 있다. 이 넓은 세상에 나 혼자뿐인 것 같은 막막함. 그럴 때 사람들은 자기가 놓여있는 곳을 광막한 우주 공간에 비하곤 한다. 중심을 못 잡고 휘청거리는 느낌 때문에 무중력 상태를, 혼잣말만 되울려오는 듯한 상황은 진공으로 다가온다.
집, 그리운 이가 있는 곳
엄마를 잃고 8개월 후 나는 티베트에 갔었다. 생애 첫 해외여행이었다. 하늘, 매일 다른 그림처럼 펼쳐지던 그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답고 변화무쌍하던 하늘이 최고의 관광 상품이었던 그 나라. 고산증세로 거의 죽을 것 같던 순간들을 넘겨가며 하늘호수 ‘남쵸’를 거닐었다.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났다. 말이 끼어들 수 없는 진공의 아름다움이었다.
네팔과의 국경을 넘어 산을 내려오면서는 마치 엄마가 내 손을 잡고 내내 걸어주시는 듯한 신비한 체험도 했다. 어떤 바람이 나를 감싸는 느낌이 드는 순간, 확신했다. 아, 엄마구나. 내내 울면서 둥둥 떠 있는 기분으로, 그러나 또렷한 확신 속에 산을 내려오던 완전한 합일의 시간이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였다. 대한민국 영공에 가까워질 무렵, 갑자기 왈칵 눈물이 났다. 이제 ‘집’에 가는구나. 그런데 집이란 무엇인가. 나에게 집이란 엄마가 기다리고 계신 공간이었다. 8개월 전까지는 그랬다. 내가 태어난 이래 한 번도 변하지 않았던 사실이었다. 수학여행이라도 다녀올라치면 내 방을 깨끗이 치우고 한 쪽에 꽃을 꽂아놓고 기다려 주시던 엄마. 긴 여행의 끝에 늘 기다리고 있던 마중. 그게 당연했던 나의 지난 시간들. 돌아가고 있다, 집에 가까이 간다. 그런데 집을 집이게 만들어 주던 엄마의 존재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머리를 내리치는 것 같던 깨달음. 집은 집이되 이제 진정한 의미의 집은 세상에 없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내가 궁극적으로, 그리고 영영 잃은 것이 무엇인지 그때 비로소 뼈저리게 깨달았다. 엄마를 제외한 모든 다른 것들이 그대로 존재하건만, 그 순간 내게 세상은 텅 빈 것이었다. 나는 ‘집’이 없었다.
그 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나는 알게 되었다. 사람은 언젠가는 스스로 자기의 엄마도 아빠도 되어주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는 것을. 집은 다시 지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곧 우주(宇宙)
영화 <그래비티>(중력 / Gravity, 2013)가 블랙홀처럼 관객을 빨아들이고 있다. 헐리웃 대작이라는 것보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작품이며 산드라 블록과 조지 클루니가 주연이라는 ‘별’들의 명성보다, 꾸준한 입소문이 더 흥행의 비결인 듯하다.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경이롭다고. 설명할 수 없는 벅찬 기분이 든다고.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야기, 단순할 수도 있지만 실은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이야기, 결국은 인류 전체의 숙명에 대한 이야기겠지만 그럼에도 한 개인의 자유의지를 우주보다 더 크게 그려낸 이야기였다.
‘중력’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우주 공간에서 ‘끈’ 떨어진 채 사투를 벌인 사람들의 이야기다. 우주 탐사 중 예기치 않은 사고로 ‘조난’ 당하고, 남들이 버리고 간 우주정거장을, 그 난파선 같은 중간 거점들을 활용해, 불가사의한 힘에 의지해 살고자 발버둥치는 과정들이 펼쳐진다.
유일한 생존자가 된 여주인공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귀환을 위한 사투를 벌인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고독,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고의 공포, 인간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초능력,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극단의 위험들이 매순간 이어진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아름다움인 그 짜릿한 ‘갠지스 강의 해돋이’와 함께, 온 우주가 그녀의 생환을 위해 서로서로 돕고 있다는 신비한 체험들과 함께, 기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숱한 일들을 겪으며, 그녀는 결국 천신만고 끝에 여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집’도 정처도 없이 헤맸던 그녀, 살고 싶은 의지를 아무 데서도 얻지 못했던 그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게 좋아서 우주에서 일하기를 자원했던 그녀, 그런 그녀가 결국 그 광활한 우주에서 집의 의미를 깨닫고 “집에 가자!”를 외치게 된다.
모든 여행기는, 돌아와서 쓰는 것이다. 살아 돌아온 자만이 생환기를 쓸 수 있다. 우리를 살아 돌아오게 하는 힘, 그 사랑의 중력은 참으로 위대했다.
김원 (로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이 글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