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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래기를 말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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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래기를 말리며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정청라  |  editor@catholicnews.co.kr

 

해마다 가을걷이가 채 마무리도 되기 전에 겨울을 맞는다. ‘어어, 조금만 더 기다려 주면 좋겠는데……’ 하고 허둥대는 사이 겨울이 불쑥 찾아오고 마는 것이다. 머릿속으로는 겨울 오기 전에 안방 창문에 커튼도 새로 해 달고 겨울옷 정리도 해야지 하는데, 당장 급한 일이 아니고는 그냥 넘어가게 된다. 날이 추워지니 일단 땔감 하는 일이 바쁘고, 그러다 보면 덜 끝내고 남겨둔 일은 끝장을 보기도 어렵다.

무만 해도 그렇다. 밭에 무를 반쯤 덜 뽑고 남겨두었는데 느닷없이 비가 오는가 싶더니 우박이 내리고, 우박이 내리는가 싶더니 눈이 쏟아지는 게 아닌가. 눈까지 맞으면 안 되겠다 싶었는지 신랑은 서둘러 비옷을 입고 밭에 나가 무를 뽑아 왔다. 일단 뽑아오긴 했는데 나무하랴 쌀 고르랴 일이 많아 뽑은 무를 그대로 처박아두고 며칠이 지났다.

우리 집에 놀러오신 앞집 아주머니가 답답하다는 듯이 채근을 하신다. “시래기 안 해? 빨리 해. 무시 잎싹 다 시들어 버리겄네.”

할 일은 제대로 못 하면서 잔소리 듣는 건 지독히도 싫어하는 나는, 아주머니가 가시자마자 무부터 정리하기로 했다. 다랑이를 들쳐 업은 채 쪼그리고 앉아 무 꽁지를 잘라 무는 무대로 이파리는 이파리대로 따로 모으고, 불을 때서 솥에 물을 끓였다. 그리고는 무 이파리를 넣어 숨이 죽을 때까지 삶는데, 양이 많은 터라 몇 번에 걸쳐 그 과정을 되풀이해야 했다.

 

시래기.jpg
처마 밑에 매달린 곶감과 시래기. 보기에도 좋고 먹을 수도 있으니 ‘그림의 떡’과는 차원이 다르다. ⓒ정청라


마침내 모든 일을 마치고 데친 무 이파리의 물기를 꼭 짜서 빨랫줄에 널었다. 그제야 겨우 허리를 펴고 “아이구, 허리야” 하는데 이럴 수가! 내 눈앞에 한 폭의 그림이 펼쳐져 있는 거다. 빨랫줄에 가지런히 매달린 시래기가 어쩜 그렇게 아름다운지! 뿌듯함과 황홀함에 시래기에서 눈을 못 떼고 있는 그때, 어느 틈엔가 불쑥 찾아오신 앞집 아주머니가 흐뭇하게 시래기를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아따, 보기 좋다. 그새 시래기 해서 널었네. 인자 다 마르면 한 뻔에 먹을 만큼씩 살그머니 묶어서 뒀다가 시안에 두고두고 해 먹어. 국도 끓이고 나물도 하고……. 징하게 맛나.”
“네. 시래기만 있어도 겨우내 반찬 걱정 없겠어요. 지난 겨울엔 아주머니한테 시래깃국 많이 얻어먹었는데……. 얼마나 맛있게 먹었다고요.”

그랬다. 지난 겨울엔 무 농사가 변변치 못했던 까닭에 시래기도 귀해서 앞집 아주머니가 한 그릇씩 갖다 주시는 시래깃국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시래깃국에 밥을 말아 김치를 얹어 먹으면 잔칫상이나 뷔페 음식도 부럽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맛있기만 한 게 아니라 삼 년 묵은 시래기는 암도 낫게 한다고 할 정도로 우리 몸에 약이 된다고 하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전에 어떤 분께 우리나라 사람들이 남북전쟁 이후 모진 세월을 굳세게 견뎌낼 수 있었던 게 다 시래기나 우거지 덕분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먹을 게 귀하니 시래기나 우거지를 주구장창 먹어야 했는데, 알고 보니 거기에 천연 ‘신경안정제’ 성분이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시래기와 우거지가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치유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인데, 정말 놀랍고도 재미있는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버리지 않고 야무지게 갈무리하면 무 이파리는 그 자체로 보물이 된다. 시래기로 거듭남으로써 썩지 않고 오래가며 우리 몸은 물론 마음까지 어루만지는 명약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 그 어떤 값비싼 약재라 한들 그 앞에서 큰소리를 칠쏘냐.

비단 시래기뿐이 아니다. 먼 데서 찾을 것 없이 흔하디흔한 먹을거리가 다 보약이다. 또한 그 자체로 아름다움이고, 알뜰함이다. 그러니 시골살이 햇수가 늘어날수록 낯익은 보물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정청라
귀농 7년차, 결혼 5년차 되는 산골 아낙이다. 유기농 이웃들끼리만 사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두 해 전에 제초제와 비료가 난무하는 산골 마을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왕고집 신랑과 날마다 파워레인저로 변신하는 큰 아들 다울이, 삶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 작은 아들 다랑이, 이렇게 네 식구가 알콩달콩 투닥투닥 뿌리 내리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이 글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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