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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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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짜로 산타클로스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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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창] 산타클로스를 만났다

 

호인수 인천 부개동성당 주임사제

 

 

지난해 봄, 예수부활대축일 한 주 전에 나는 천주교 <인천주보>의 ‘오늘의 말씀’ 난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최근에 저는 은퇴한 지 얼마 안 되는 우리 교구의 한 선배 신부님께 봉투를 하나 받았습니다. 자그마치 천만원입니다. 은퇴하면서 돈을 너무 많이 받았다, 이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다며 저를 보고 알아서 필요한 사람에게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하기 민망한 말이지만 적지 않은 사제들이 받는 데 익숙하지 주는 데는 더디고 짜거든요. 게다가 공금도 아닌 쌈짓돈이니 은근슬쩍 생색을 낼 법도 한데 그는 끝내 제 등 뒤에 숨어버렸습니다. 겨우 심부름이나 하는 제가 이렇게 신나는데 선뜻 쌈지를 내놓은 선배나 그것을 받을 사람들은 올 부활절을 얼마나 눈부시게 맞을까요?”

한 해가 저물어 성탄절이 가깝던 어느 날, 점심이나 같이 먹자며 우리 집에 온 그 선배는 또다시 내게 봉투를 하나 건네면서 내일이 사제 서품 40주년이 되는 날이라고 했다. 세상에! 이번에는 갑절인 2천만원이었다. 추측건대 그동안 수고 많았다, 축하한다며 정성껏 준비한 봉투를 슬그머니 주머니에 찔러준 마음씨 착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터다. 내가 건네받은 돈의 출처야 물으나 마나 그들이었겠지만, 일단 자기 주머니에 들어온 조금도 하자 없는 깨끗한 돈을 아무도 봐주지도 알아주지도 않는 데서 조건 없이 선뜻 내주는 모습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렇게 흔치 않은 일이 내 앞에서, 한 번도 아닌 두 번씩이나 벌어졌으니 도대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자다가도 몇 번씩 벌떡 일어나 앉아 곰곰이 생각했다.

 

산타편집.png

*산타를 만나다. EBS <세계테마기행> 핀란드 편 중에서


하나. 매우 진부한 표현이지만 선배나 나나 태어날 때는 말할 것도 없고, 공부를 마치고 사제가 될 때도 지금에 비하면 가진 게 없는 빈털터리였다. 우리의 소유는 거의 다 그 후에 생긴 것이다. 신앙인답게 말한다면 세상의 재물이나 권력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해서 잠시 주어진 것인 만큼, 물이 낮은 데로 흐르듯 더욱 요긴하게 쓰일 곳으로 흐르는 것이 순리다. 그것들의 자연스런 흐름을 인위적으로 막아서는 안 되고 막을 수도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게 ‘내 것’인 줄 알고 밖으로 새나가지 못하게 움켜쥐려고 되지도 않는 용을 쓴다. 안타까운 일이다. 와중에 지혜로운 선배는 흐르는 물길을 따라 내려왔다.

둘. 선배는 그렇게 내게 온 산타클로스다. 그는 여느 산타들처럼 한밤중에 와서 양말 속에 선물이나 넣어주고 두 손 탁탁 털며 홀가분하게 돌아간 것이 아니라 백주 대낮에 와서 선물보따리와 함께 큰 숙제를 내 어깨에 지워주고 갔다. 의도는 분명했다. 너도 그 보따리를 지고 저마다 각기 다른 선물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찾아 신발이 닳도록 헤매는 또다른 산타가 되라는 것이었다. 아, 나는 그 깊은 속뜻을 뒤늦게야 비로소 깨달았으니…. 하기야 지금껏 나는 산타의 선물을 받고만 살았지 내가 산타가 되어 선물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은 못하고 살아왔으니까.

셋. 선배는 후배인 나를 철석같이 믿었다. 돈의 액수나 원하는 사용처를 적은 메모는커녕 우쭐한 표정이나 흔한 당부 한마디도 없었다. 오히려 혹시 더 필요한 데가 있으면 말해라, 더 줄 수 있다고까지 귀띔했다. 내가 그 돈을 받아 누구에게 얼마를 어떻게 사용하든 개의치 않을 것이고 추호의 의심도 없이 믿을 거라는 표시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옛말이 그에게만은 부질없어 보인다. 그 앞에서 내가 만일 떡고물이라도 챙기려고 꼼수를 쓴다면 나는 산타는 고사하고 사람도 아니지. 나는 새 세상을 꿈꾸는 산타클로스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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