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니 참 좋다
2014.1.17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정청라 | editor@catholicnews.co.kr
거의 열흘 가까이 서울 친정에 다녀왔다. 갈 때마다 번번이 다시는 못 올 곳이다 후회를 하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가족이 있어 그리워지는 곳. 원래는 친지의 결혼식 때문에 가려고 마음을 먹게 된 건데, 이왕 가는 거 이런저런 볼 일을 보려고 친구와의 약속도 잡고, 듣고 싶은 교육도 신청했다. 신랑은 풀짚 공예 박물관과 헌책방 투어를 계획했고 요즘 한창 공룡과 화석에 관심이 많은 다울이는 뼈다귀 박물관(자연사 박물관)에 가자며 노래를 불렀다.
그리하여 다섯 시간 넘게 기차 여행을 하며 거대한 도시로 진입! 서울이 가까워질수록 뿌옇게 흐려지는 하늘을 보며 안개인지 스모그인지 진실로 궁금해 하며 친정집에 도착했다.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외가 쪽 친척들이 모두 모여 있어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 모인 사람들은 밤이 늦도록 흩어질 줄 모르고, 긴 여행에 지친 우리 식구도 늦게까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그날 밤 다랑이에게 탈이 나고 말았다. 자다가 깨어 자꾸 보채기에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온몸이 불덩이였던 것이다. 다랑이는 열이 오를 때마다 자지러지게 울며 땀을 내어 가까스로 몸을 돌보고 있었다. 그런 다랑이를 지켜보며 익숙한 삶의 공간을 크게 벗어나면〔脫〕 이렇게 탈이 나는구나 싶었다. 기억을 거슬러보니 두 돌 전까지는 다울이도 서울에만 오면 이렇게 아팠는데, 지나간 일이라고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날 밤을 넘기고 난 뒤로는 다랑이 상태가 점점 좋아졌다. 하루 이틀은 보채고 내 곁을 떠나지 않더니 점차 활동 무대가 넓어져 배밀이로 온 집안을 누비고 다녔다. 덕분에 친정엄마에게 다랑이를 맡기고 절기에 대한 교육을 받으러 다녀올 수 있었다. 오랜만에 옛 친구들과 만나 마음껏 수다를 떨 수도 있었다. 모처럼 맛보는 자유, 내가 얼마나 바라고 바랐던가.
ⓒ정청라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리 기쁘지 않았다. 교육을 받을 때나 친구들을 만날 때나 사람이나 상황에 집중이 잘 안 되고, 내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풀어내기가 어려웠다. 처음에는 사람을 거의 안 만나고 살다가 오랜만에 만나니 긴장이 돼서 그런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잡다한 게 널리고 널린 도시라는 공간이 ‘집중’에서 멀어지게 하고, ‘진심’을 길어 올리기 어렵게 한다는 걸 깨달았다.
없어도 될 것이 널리고 널려, 정작 있어야 할 것은 숨어버린 도시. 꼭 해야 하는 일은 적당히 해치우고 안 해도 될 일이나 쓸 데 없는 일에 열중하는 사람들. 돈을 벌거나 돈을 쓰거나, 둘 중 하나에 머물지 않으면 존재 의미를 잃는 공간.
밖이 아무리 추워도 움츠리지 않고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비닐하우스 같은 공간 속에서 나는 점점 숨이 막히고 답답해졌다. 자기 뜻대로 박물관이며 헌책방과 도서관을 드나들던 신랑도 집에 돌아오면 “아이구, 죽겠다. 도저히 못살겠다”하며 드러누웠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시골쥐라 그런 건지는 몰라도 서울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런 곳에서도 잘 지내는 사람들이 대단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물론 가까이서 지켜보니 그리 잘 지내지 못한다는 게 눈에 보였다. 우선은 몸부터가 말이 아니었다. 소화불량이나 변비는 일상이요, 만성 두통과 허리 통증에 시달리고 있기도 했다. 나부터도 며칠 머물러 있는 동안 몸이 점점 더 무거워지고 똥 누기도 힘들어졌다. 정말 오랜만에 소화가 안 되는 느낌을 맛보기도 했고, 밥 때가 되어도 배가 고픈 줄을 모르는 신기한 체험도 했다.
안 되겠다 싶어서 다울이와 조카아이를 데리고 뒷산에 올랐다. 뒷산에는 유아 숲 체험장이 조성되어 있어서 아이들과 함께 놀기에 좋았다. 연못이 얼어 있어서 거기에서 썰매도 타고 나무 할아버지를 꼭 끌어안고는 할아버지 목소리를 들어보기도 했다. 그러는 가운데 아이들은 산삼을 먹은 듯 펄펄 날아다니고, 나도 비로소 깊은 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그것으로 집에 돌아오기까지 며칠을 버텨낼 수가 있었다. 우리 집이 얼마나 그립던지, 얼마나 돌아가고 싶던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는데 서울에 다녀온 뒤로 나 사는 곳이 더욱 새롭게 보인다. 밖이 추우면 더 빨리 식는 구들과 두꺼운 이불을 덮지 않으면 찬 기운이 감도는 집안 공기, 날마다 지어 먹는 돌솥밥과 밥 달라고 애절한 눈빛을 보내는 곰별이까지, 나를 무기력함에 빠지지 못하게 하는 이 모든 상황이 고마울 따름이다. 돈을 벌거나 돈을 쓰지 않아도 내 몸 하나 부지런히 놀리면 영위되는 이 공간이, 내게는 일확천금을 끌어안고 온실에 갇혀 사는 삶보다 훨씬 더 복되게 느껴진다. 돌아오니, 참 좋다.
정청라
귀농 7년차, 결혼 5년차 되는 산골 아낙이다. 유기농 이웃들끼리만 사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두 해 전에 제초제와 비료가 난무하는 산골 마을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왕고집 신랑과 날마다 파워레인저로 변신하는 큰 아들 다울이, 삶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 작은 아들 다랑이, 이렇게 네 식구가 알콩달콩 투닥투닥 뿌리 내리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이 글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