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창] 공감이 수행이다
“어서 빨리 결정하세요. 가실 거예요, 안 가실 거예요. 뒷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잖아요.” 그날 버스터미널 매표 직원의 목소리는 높고도 날이 서 있었다. 왜 그런가 하고 사정을 살펴보니 나이 드신 어르신들과 외국인 근로자들이 행선지와 출발 시간을 빨리 못 정하고 머뭇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농촌의 어르신들은 인지 능력이 떨어지거나 한글을 모르는 경우도 있고 외국인 근로자들은 우리말이 서투르다. 소통이 빨리 되지 않자 매표 직원은 지켜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다그치고 있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종종 보게 되는 안타까운 풍경이다.
이 상황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분명한 것은 외국인이나 노인 모두 ‘본의’ 아니게 누군가에게 폐를 끼친 것이다. 매표소 직원도 처음부터 함부로 목청 돋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불편한 관계를 어쩔 수 없다고만 생각해야 할까.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 그러기에는 인간인 우리의 ‘격’이 무안해진다. 인간이란 사람과 사람의 ‘사이’를 말한다. 그 사이에는 밝은 표정과 따뜻한 기운이 오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바로 인간적인 삶이 아닌가. 길은 늘 단순하고 정직한 곳에 있다. 매표소 직원은 차표를 살 수 있게 차분하게 안내해주고, 줄을 선 사람들은 침착하게 기다려주면 된다. 왜 그래야 하는가. 그것은 불편하지 않은 자의 당연한 몫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본래 그러함의 자연스러움이다.
사람 사이를 흐뭇하고 돈독하게 하는 것은 작지만 정성스러운 배려에서 시작된다. 우열의 관계가 아닌 겸손하고 평등한 배려가 되기 위해서 먼저 이웃에게 공감하는 감성을 회복하고 키워야 한다. 공감이란 이웃이 처한 고통과 문화적 다름을 이해하고 절감하는 일이다. 모든 이해관계와 선입관을 내려놓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 가슴은 저절로 느낄 것이다. 가슴으로 느낄 때 우리의 눈은 크게 열리고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될 것이다.
조반니 베르나르도네, 우리가 잘 아는 성 프란체스코 수도자의 속명이다. 그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지만 모든 재물을 버리고 평생을 무소유와 청빈과 헌신으로 사는 길을 선택했다. 그 선택의 동기는 고통에 대한 절절한 공감과 울림이었다. 23살에 로마의 산피에트로 대성당의 순례 길에서 그는 웅장한 성전과 화려한 장식에 눈이 가기보다 가난한 거지들에게 마음이 쓰였다. 조반니는 거지를 설득해 그의 옷을 입고 거지의 신세로 성지를 순례했다. 또 고향으로 오는 길에서 만난 피고름이 낭자한 나병 환자의 손에 입맞춤을 한다. 체험 속에서 고통을 공감하고 생각이 바뀌고 그의 삶이 바뀐 것이다.
싯다르타는 태자 시절 참관한 농경제에서 심한 충격을 받는다. 생살이 타들어가는 뙤약볕, 못 먹어서 뼈만 앙상한 채 밭을 가는 하층 계급의 농부, 거친 숨을 몰아쉬는 소, 쟁기에 잘려나간 벌레들을 보고 싯다르타의 가슴은 고통스러웠다. 그는 고통이 없는 해탈과 평등의 세계를 찾아 길을 떠났다. 그의 선택은 새로운 삶의 길을 열었으며 평생을 지혜와 자비의 길을 열었다.
인간의 이기심에 착안하여 경제학을 전개한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을 저술하기 17년 전에 <도덕감정론>이라는 저술을 남겼다. 그는 이 책에서 인간은 사욕에만 매몰되지 않고 타인의 운명을 바라보고 행복을 바라는 공감 능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지금 우리는 매우 다원화된 시대를 살고 있다. 다원화 시대는 문화의 다양성 못지않게 무관심과 배타와 갈등의 위험이 늘 함께한다. 그러므로 다원화 시대의 가장 중요한 대안은 공감이다. 이웃을 이해하고 배려하며 공감하는 삶을 산다면 우리는 세속에서도 수행자다.
법인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