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이야르 드 샤르댕
‘神의 영역’
*출처:미항공우주국
철광석이 산소를 만나면 붉게 녹스는 현상이, 해바라기가 해를 따라 고개를 돌리는 현상으로 나타나며, 강아지는 맛있는 먹이를 주는 주인을 졸졸 따라다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행동은 선택으로 나타난다.
“왜 선택이어야 하는가?”
여기에서 ‘선택 행동’은 어른으로 성장함에 따라 자기중심 행동에서 타자중심 행동으로 이행하는 행동을 뜻한다. 그렇다고 모든 어른이 타자중심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때로는 어린이들보다 더 강한 자기중심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언제나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잘 수 있는 삶이 “왜 인간에게는 항상 허용되지 않는가?” “누가, 무엇이 선택의 기준을 정하는가?”
인류에게 있어서 위 ‘선택 행동’에 대한 의문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언제부터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늑대가 새끼 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숫염소와 함께 뒹굴며, 새끼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는 세렝게티의 평화로운 모습을 인식하였을 때부터 인류는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남겨놓은 돌조각과 몇 개의 뼈 조각 그리고 시커멓게 그을린 동굴 속에서 우리는 그들의 삶의 일부를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그 중에, 적어도 수십만 년 전부터 인류는 꽃이나 간단한 부장품을 함께 매장하는 장례풍습이 있었다. 그들의 장례풍습은 그들이 사고했던 세계관에 대한 정보이며 당시 삶의 모습과 사회상을 반영하는 정보의 보고이다.
이 장례풍습은 인류가 내세를 인식했다는 의미이며, 이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연속성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이 시간의 연속성 가운데 어떤 형태이든지 자신들의 존재와 의미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인류의 의식 수준으로 현상(감각)인식 외의 세계에 관한 올바른 이해는 거의 불가능하여 초자연적인 능력의 결과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의식은 후대에 형이상학과 존재론의 이원론으로 발전하여 초자연적인 능력의 본질을 보다 구체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神의 영역’이다.
고대인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도 현상(감각)인식만으로는 이해 할 수없는 영역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지금까지 인류는 위 의문에 대한 답을 ‘영혼과 육신’이라는 이원론에서 쉽게 이해되었지만, 이 ‘이원론’의 근원이 神의 창조 외에 달리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지급까지 ‘神의 영역’에서 해석 되어 온 세상과 인간의 본질이, 칸트에 의해 인간에게 보편적이고 필연적으로 내재된 질서를 선험으로 인식함으로써 인간중심으로 ‘神의 영역’을 역으로 해석하였다. 그를 이어 헤겔은 현상이 빙산의 일각임을 인식하여 시간의 연속성과 변화의 축적성을 관념론에서 피력하여 현대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물질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생물에서도 일어나고, 인간에게도 일어난다.”는 진리를 알아듣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후 마르크스로 대변되는 유물론은 앞 장에서 말했듯이 현상이 본질임을 간파했지만 관념론 유물론의 한계를 안고 있었다.
형이상학과 존재론에 바탕을 둔 스콜라 철학은 물론 근대 철학이, 정적인 세계관으로서 ‘시간의 축적’이나 ‘물질, 생명, 정신으로 이어지는 연속성’ 그리고 ‘전체와 부분과의 관계현상’이 독립성이며 동질성과 동시성을 띤 우주질서를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종적인 ‘神의 영역’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정보 사회에서 ‘정보의 개념’은 지식 외에 다른 어떤 의미로도 정의를 할 수가 없었다.
별, 산, 생명이 걸어온 엄청난 과거 등이 한곳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인정하고서도,
우리 자신은 마치 고정되어 있는 듯한 착각 속에 아직도 빠져 있다.
- 샤르댕
샤르댕은 예수회 사제로서 스콜라 철학(가톨릭 신학)뿐만 아니라 근대 철학에도 정통한 분이었다. 과학자로서 샤르댕이 인식한 현상은 ‘~으로 되어 왔고’ ‘~로 되어가는’ 동적인 세상이었다. 오늘날에도 세상을 인식하고 있는 스콜라 철학의 ‘삼위일체론’과 ‘연기론’의 불교철학이, 그의 동적인 세계관에서 형이상학과 존재론의 이원성(二元性)이 한 마디로 ‘개체의식의 확장’으로 인식된다.
샤르댕 사상의 대부분이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1천여 년 전 신라와 고려로 이어지는 고승들의 세계관이었다. 단지 ‘연속된 윤회’가 고승들의 철학이었다면 샤르댕의 ‘연속된 진화’가 고승들과의 차이이다. 당시 인류의 의식 수준이 정적인 세계관이었기 때문에 ‘연속된 윤회’를 충분히 이해하지만, 오늘날에서도 불교철학은 여기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스콜라 철학 또한 같은 처지에 놓여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출처 : 인터페이스리프트
그러나 오늘날 과학지식의 발달에 힘입어 우리는, 보다 넓고 긴 시간의 축적 속에서 “자연 안에서 인간의 위치”를 되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마치 어린이가 성장하면서 세상을 다시 보는 것과 같이... 세상을 다시 보기위해서는 지금 서있는 자리에서 한 발작만 옆으로 비켜서서 주위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빙하가 대양으로 흘러가 다시 바닷물이 되고, 이 바닷물이 어느 날 북극이나 남극으로 흘러가 다시 빙하가 된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만약 인간이 무기질과 같이 상태변화만 하는 존재라면, - 만약 누구든지 자신의 나이가 137억 년 + 알파이며, 물질과 생명과 정신의 연속성 위에 서있는 자신을 인식하고 있다면, 지금까지의 세상과 같게 보일까? 이것이 샤르댕이 우리에게 던진 질문이다. - 앞 선 철학자들의 사고만이라도 충분하다.
샤르댕의 ‘개체의식의 확장’이란 한 개의 의식 확장에 머무는 현상이 아니라 하나로 수렴되는 의식으로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대상을 통해 개체를 인식함으로써 내면의 확장을 꾀했지만, 대상의 인식을 넘어 대상과의 키메라를 통한 수렴을 샤르댕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그 본질을 인식해온 예수의 삶 - ‘소멸하는 생성’이다. 그 본질이 스콜라 철학과 칸트와 헤겔에 의해 현대인의 사고를 정지시키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실은 마르크스의 말마따나 물질화(행동)가 안 되는 에너지(관념)는 현상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물질이 어떤 물질이가에 달려있기는 하지만.......
그에게 있어 생물의 진화는 種의 진화가 아니라 생명권과 정신권의 진화이며 정보로 인식되는 사회이다. 즉 정보의 바다 - 에너지이다. 여기에서 사회는 개미나 꿀벌 같은 同種 집단생활 영역이 아니라, 적어도 두 種이상 여러 생물종이 함께 살아가는 공간이다. 인간 빙하는 북극이나 남극에 국한되는 존재가 아니라 금성이나 화성 아니 더 먼 은하계조차 자신의 영역으로 확장하는 존재이다. 오늘날에는 축적된 과거의 인식만으로는 ‘神의 영역’을 온전히 알아듣지 못한다. 샤르댕의 ‘神의 영역’은 과거가 아니라 확장되고 증대되는 의식이며 수렴하는 미래이다.
오늘날 우리는 샤르댕의 저서 ‘우주의 찬가’ 서문을 통해, 예수께서 빵과 포도주를 들고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 이다”가 무슨 뜻인지 보다 더 잘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주여, 다시 - 이번에는 에느의 숲속이 아니요, 아시아의 대초원 한가운데서 - 빵도 포도주도 제단도 없는 그대로, 나는 이것들, 상징을 초월하여 실제 자체의 맑은 장엄성에로 높이 올라가고자 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사제로서 지구 전체를 제단으로 하고 그 위에서 세계의 영위와 고통을 당신에게 바치고자 하나이다.”
그는 빵과 포도주에서 물질과 생명과 정신으로 이어지는 ‘神의 영역’을 인식한 것이다. 인간 같은 작은 공간에도 이렇듯 위대한 정신이 존재하는 데, 하물며 거대한 우주공간의 정신은 어떨까? 상상이나 되는가? 이것이 샤르댕의 ‘神의 영역’이다.
“물질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생물에서도 일어나고, 인간에게도 일어난다.”와 ‘소멸하는 생성 즉 사회성’이 진리라면, 우리는 인간의 본성과 이성을 정의하기 전에 물질과 생명현상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필요하다. 여기에 모든 답이 들어있다.
앞으로 몇 장을 통해 그의 사고의 전개를 살펴보겠지만, 여기에는 인문학과 더불어 전문 과학지식이 필요하다. 필자의 과학지식의 한계로 내 수준에 맞는 글이기 때문에 이 글에 관계되는 다른 전문 과학자들의 저서를 많이 읽기 바란다.
“현상은 살아남은 것들이다. 소멸하는 생성을 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