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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를 맺자는 숲, 숲을 이루자는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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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씨를 맺자는 숲, 숲을 이루자는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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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 서론 부분에서 인생과 역사의 관계에 대하여 말한다. 역사이해란 일차적으로 사실에 뿌리박아야 하는데, 사실에는 개인적 생활체험과 사회적 역사체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 양자의 불가분리적 관계를 “씨를 메기자는 것이 숲이요, 숲을 이루자는 것이 씨다”라고 은유적으로 말했다. 이 은유에서 숲이란 집단적 인간공동체로서 국가사회를 말하고 씨란 개별적 나무, 곧 개인 생명을 의미하지만, 더 깊이 보면 개별 나무의 최종 결실체를 씨라고 표현함에 주목해야 한다. 단순한 수량적인 개체가 아니라 전체를 자기 안에 품고 있는 신성불가침한 인격체로서 씨라는 것이다.


20세기 미국의 지성인들 중에서 개인과 집단, 개인생활과 공동체 사회생활, 그 양자 간의 관계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보여준 학자로서 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와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이 있다. 니부어의 저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와 <인간의 본성과 운명>, 그리고 윌슨의 저서 <지구의 사회적 정복자>와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는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사회적 갈등문제 해결에 많은 시사점을 주는 명저들이다. 두 학자의 깊은 통찰은 어떤 면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어떤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라인홀드 니부어의 인간과 역사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통찰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지닌 ‘자기초월능력의 역설’이다. 니부어에 의하면 인간은 그의 몸이 자연의 산물이지만 동시에 자연을 초월하는 정신적 능력을 지녔으며, 이 능력은 곧 인간의 창조성과 자기파괴성의 원인이 된다고 하였다. 다른 한편, 초지일관 자연선택과 두뇌의 물리화학적 법칙에 제약되고 의존하는 존재로서 인간을 보는 윌슨의 ‘자연주의적 인간론’은, 인간정신의 자기초월능력이 자기반란을 일으키는 역설적 모순을 간과하기 쉽다. 그뿐만 아니라, 개체와 국가사회의 관계를 씨와 숲으로 보지 않고 개별 나무와 숲으로 본다. 숲을 살리기 위해서 몇개의 개별 나무쯤은 언제나 잘라 내버려도 용인되는 ‘생물학적 전체주의’ 위험에 빠질 수 있다.


니부어에 의하면 인간 심성의 본질적 특징은 정신의 초월적 능력에 있다. 이 자유의지의 위대성은 일체의 제약과 운명까지도 부정하고 돌파하려는 인간의 창조적 열정에서 빛난다. 다른 한편 이 자유의지의 비극은 그 인간의 자유가 유한하고 상대적이라는 불안 때문에, 그것을 절대화하려는 무리한 시도 속에서 파괴적 마성으로 변질된다. 집단적 어리석음에 정치적 정당성을 스스로 부여하면서 일으키는 사건이 전쟁이다. 전쟁 명분은 항상 거창하고 고상했으나 뒤돌아보면 누구를 위하고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던가? 전장에서 죽은 사람들은 숲을 이루는 개별 나무들이 아니고, 어느 가정에서든지 천지가 무너진 듯한 슬픔을 안겨주는 하나뿐인 인격체이다. 주권국가 자위권 행위라고 주장하는 ‘정의로운 전쟁’일지라도 전쟁은 사람 생명을 죽이는 반인륜적 ‘살인행위’라고 사람의 깊은 양심은 우리를 고발한다.


니부어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명저는 미국 경제공황을 겪고 난 후 1930년대에 쓴 책이다. 사회란 아예 도덕적이지 않고 약육강식의 비도덕적 사회임을 용인하자는 뜻이 아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대기업, 정당, 사회의 이익단체들, 그리고 최종적으로 국가와 같은 집단사회의 윤리의식 수준은 개인윤리에서 가능한 자기절제, 자기성찰, 자기희생 등 도덕적 행동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직시하라는 것이다. 인간은 집단적이 될수록 몰염치한 이기심과 자기중심적 현실해석 논리를 현란하게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오늘날 아베 정권의 강한 일본국가 만들기 우경화 정책, 그리고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범죄를 모든 수단방법을 총동원하여 부정하려는 박근혜 정권의 희석화 시도에서 집단의 비도덕성 그 사례를 본다.


최근 개인신용카드 정보유출 사건의 논란 중에 알려진 내용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주민번호는 110101-100001이고, 육영수 여사의 그것은 110101-200002로서 발급되었다. 두 사람은 보통국민과 다른 존재, 곧 메이지 유신 시대 천황(일왕)에 버금가는 국부와 국모로서 절대화하려는 군사정권 중심부의 충성경쟁 아부족들의 빙산 일각 행태였던 것이다. 문제는 그런 예외적 행정조처를 꾸짖고 시정하도록 돌려보내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 당사자들의 체질화된 특권의식이다. 단순한 사건 같아 보이지만, 바로 그런 특권의식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은 절대빈곤을 극복하고 국가를 산업화하려는 의지를 가졌다 해도 독재자 소리를 듣는 것이고, 결코 ‘화광동진’(和光同塵)하는 민주주의 대통령이 못 되는 것이다. 그래서 라인홀드 니부어는 “정의를 위한 인간의 능력이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고, 불의를 향하는 인간의 경향성이 민주주의를 필요로 한다”고 역설한다.


에드워드 윌슨의 후기 작품 <지구의 사회적 정복자>가 최근에 번역되었다. 이 명저가 제시하는 화두는 사회적 군집생활을 하는 생물들 중에 왜 인간 종만이 지구 생명진화사에서 매우 짧은 기간인 지난 6만년 이래로, 전 지구를 점령하여 오늘날과 같은 문명사회를 이루었는가의 질문이다. 윌슨의 해명은 호모 사피엔스가 생물학적 자기 혈통을 보존하고 강화하려는 ‘이기적 유전자’의 ‘혈연선택’에 집착하지 않고 공동체를 위한 이타적 ‘집단선택’을 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생물체들은 집단적 생활을 이룩하고 생존을 영위한다. 톰슨가젤 무리부터 사자 무리에 이르기까지 그렇다. 식물도 군락을 이루며 일종의 사회적 집단을 형성한다. 그러나 윌슨 박사가 진사회성(eusociality)이라고 표현하는 생물의 특징은 개체 생명체들이 생물학적 자기조직화 능력을 고도로 발전시켜 ‘집합적 생물체’로서 생명현상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개미, 벌, 인류 종이 그 진사회성 달성에 성공한 대표적 생물체라는 것이다.


윌슨이 강조하는 진사회성의 특징은 3가지인데 일정한 거주공간을 중심으로 공동생활을 한다는 것, 두 세대 이상이 함께 살아가면서 생존과 번식을 위한 분업을 담당한다는 것, 그리고 자기 집단의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경우 개체 생명이 자기희생하는 이타적 행동을 보인다는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에 이르러 진사회성은 불, 언어, 예술, 그리고 기술에 힘입어 더욱 강화되고 마침내 지구를 석권하는 생물종이 되었지만, 진사회성의 생물학적 기본 특징을 공유한다고 윌슨은 주장한다. 부족전쟁부터 시작해서 현대국가들의 영토분쟁도 인류 유전자 속에 각인된 개미군단과 말벌들의 영역싸움 같은 것이요, 천황과 국가 수뇌부를 절대화하려는 경향성도 여왕벌과 여왕개미를 지키려는 생물학적 본능의 변용 형태라는 것이다.


윌슨 박사의 지론을 비전문가로서 자세하게 비판할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동의할 수 없는 세 가지 점이 있다. 첫째, 윌슨의 종교비판론은 너무 통속적인 수준이다. 본질적으로 프로이트의 견해와 같으며, 종교는 극복되어야 할 ‘인류의 유아기적 환상’과 ‘부족시대 잔재’라고 보며, 과학한테 자리를 내주고 없어져야 할 고대세계관의 잔재물이라는 견해이다. 둘째, 윌슨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결국은 부정한다는 점이다. 윌슨은 자유의지를 인간이 부딪힌 모든 제약과 상황을 뛰어넘을 수 있는 정신의 자기초월능력이라고 보지 않고, 뇌와 마음을 만들어낸 생물학적 과정으로부터 자유롭지 아니한 유기체의 심리현상이라고 본다. 셋째, 윌슨은 인류 문명의 미래를 너무 낙관적으로만 본다. 새로운 계몽정신으로 인류가 제대로 처신한다면 다음 세기쯤이면 지구는 낙원이 되거나 그 초입에 도달할 것이라고 본다.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에 쉽게 침윤당하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언제든지 창조와 파괴, 정의와 불의라는 ‘역설적 양날검’이 될 수 있다는 니부어의 경고를 윌슨은 너무 가볍게 보는 것 아닐까? 니부어는 다음 같은 기도문을 사랑했다. “하나님,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고요함을 우리에게 주소서. 바꾸어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우리에게 주소서. 두 가지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우리에게 주소서.”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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