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강남 교수의 아하!
사회 구조에 눈감는 표층 신앙
요즘 우리 주위에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삶을 등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계속 들려온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렇게 궁지에 몰린 이들에게 무슨 이야기인들 귀에 들어올까만 그래도 우리 살아남은 사람들끼리라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불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여섯가지 존재 형태가 있다. 천상의 존재, 인간, 아수라, 축생, 아귀, 지옥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조그만 구멍 하나가 뚫린 나무가 망망대해에서 물결에 따라 떠다니는데 100년에 한번씩 물 위로 머리를 내미는 눈먼 거북이가 우연히 그 나무 구멍 속으로 머리를 내밀게 되는 확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생에서 인간의 삶을 얻어서 나오게 되는 확률과 같다는 것이다. 이른바 ‘맹귀우목’(盲龜遇木)이라는 이야기이다. 인간의 삶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말해주는 메시지다.
사실 인간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세계 주요 종교의 심층에서 거의 보편적으로 강조하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우리 인간은 신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든가 우리 속에는 신이 내재하고 있다든가 심지어는 우리와 신이 하나이기에 신이 곧 나고, 내가 곧 신이라 가르치기도 한다.
*한겨레 이정용 기자
그런데 우리 주위에 이처럼 생활고로 시달리다가 사람됨의 특권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을까? 천박한 표층 신앙에 근거한 종교가 그 책임의 일단을 져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천박한 표층 신앙이란 잘 믿으면 잘살고 못 믿으면 못산다고 믿는 일차원적 믿음이다.
이런 믿음이 팽배할 경우 두가지 결과가 생길 수 있다. 첫째, 내가 가난하면 내가 잘못하여 신의 축복을 받지 못한 결과로 받아들여 가난과 함께 죄책감마저 감내해야 한다. 둘째, 잘살고 못사는 것이 개인과 신의 관계에 한정된 문제일 뿐 사회제도나 분배의 문제라는 생각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 극단적으로 나가면 어느 개인이 부해지거나 가난해지는 것은 신의 소관사항일 뿐, 인간이 간여할 문제가 아니라고 여길 수도 있다. 자연히 가난에 대해 사회 전체가 져야 할 책임감은 그만큼 적어질 수밖에 없고, 그 결과 보편 복지 같은 것은 뒷전으로 물러나게 된다.
이런 표층 신앙이 없는 사회의 경우를 보라. 최근 미국 종교사회학자 필 주커먼이 쓴 <신 없는 사회>라는 책에서도 지적된 것처럼, 개인의 길흉화복을 주관하는 그런 초자연적 신을 상정하지 않고 살아가는 스칸디나비아 3국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가 되었는데, 그 중요한 이유가 가난을 비롯하여 사회문제는 신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문제, 시스템의 문제로 여기고 이를 개선하고 해결하려는 방향으로 애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삶을 포기하려는 사람들에게 삶의 중요성과 의미를 일깨우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들의 어려움이 우리 모두의 문제로서 우리 모두가 힘을 합해 해결해야 한다는 공동체 의식, 연대의식이 절실하다.
오강남 ‘종교너머, 아하!’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