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예수가 오신다면 십자가가 아니라 똥짐을 지실 것이다
만일 지금 예수가 오신다면
십자가가 아니라 똥짐을 지실 것이라는
권정생 선생의 글을 읽었다
점심 먹으러 갈 때마다 지나다니는 농업박물관
앞뜰에는 원두막에 물레방아까지 돌아간다
원두막 아래 채 다섯 평도 안 되는 밭에
무언가 심어져 있어서 파랬다
우리 밀, 원산지: 소아시아 이란 파키스탄이라고 쓴
푯말이 세워져 있었다
농업박물관 앞뜰
나는 쪼그리고 앉아 우리 밀 어린 싹을
하염없이 바라다보았다
농업박물관에 전시된 우리 밀
우리 밀, 내가 지나온 시절
똥짐 지던 그 시절이
미래가 되고 말았다
우리 밀, 아 오래 된 미래
나는 울었다
―이문재, <농업박물관 소식: 우리 밀 어린 싹>
문학은 기억의 힘에 의존합니다. 오늘 내가 먼지 자욱이 덮인 기억의 헛간에서 찾아낸 것은 오래도록 방치해둔 나의 ‘아버지의 농업’입니다.
아버지의 농업은 기계가 없던 시절의 농업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농업은 거칠어진 손과 발을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던 소규모 자작농이었습니다. 큰 일꾼 중의 일꾼인 황소를 앞세워 쟁기로 땅을 갈고 엎고, 황소가 끄는 수레로 가을 들녘에 탱탱히 여문 낱알들을 집안으로 들여놓던 시절의 농업이었습니다. 인비(人肥)가 막 나오기 시작했으나, 땅심을 돋우기 위해서 인분(人糞)과 퇴비를 넣어 짓던 농업이었습니다.
새벽잠이 없던 아버지는, 농한기에는 뒷간에 쌓인 거름을 손수 거름지게로 져다가 밭을 걸구었지요. 밭은 십리를 걸어야 하는 먼 길이었으나 아버지는 어머니가 아침밥을 차려 놓을 무렵이면 벌써 밭에서 돌아와 빈 거름지게를 뒷간 앞에 훌떡 벗어놓곤 하셨지요. 거름 냄새가 온 집안에 구린 냄새를 풍기며 코를 찔렀으나 밥상 앞에 앉은 식구들은 아무도 코를 막거나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어요. 상 위에 놓인 먹거리와 거름의 순환과정을 직접 보고 냄새 맡고 몸으로 겪었기 때문입니다.
*영화 <워낭소리> 중에서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아버지의 농업에서 밥과 똥을 둘로 갈라서 생각할 수 없었어요. 밥과 똥의 이원화(二元化)는 인비가 확대되고 기계농으로 바뀌면서 생겨난 현상입니다. 밥과 똥의 이원화는 자연의 순환 원리를 거스르는 것. 적어도 아버지의 농업에서 농심(農心)은 천심(天心)이었으나, 이젠 그런 천심을 품은 농심을 찾아보기는 어려운 세상이 되었지요.
이문재 시인의 <농업박물관 소식>은 이런 농심의 사라짐을 슬퍼하는 듯이 보입니다.
농업박물관 앞뜰/나는 쪼그리고 앉아 우리 밀 어린 싹을/하염없이 바라다보았다/농업박물관에 전시된 우리 밀/우리 밀, 내가 지나온 시절/똥짐 지던 그 시절이/미래가 되고 말았다
아버지의 농업은 이제 농업박물관으로 들어가고 말았지요. 하늘마음(天心)을 품고 거름을 져 나르던 농심 역시 농업박물관에 전시될 뿐이지요. 하지만 땅심을 걸구지 않는 농심은 하늘마음을 품지 못합니다. 편리와 자본에 눈이 멀어 땅심을 돌보지 않는 농업은 우주의 순환 원리에서 멀어집니다.
대지 위에 살아 있는 생명의 순환 질서에 민감했던 예수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살 수 있다고 했지요. 예수는 하늘을 극진히 공경하는 분이었지만, ‘땅’에 충실한 분이었어요. 생명의 근원에 닿은 이는 땅에 깊이 뿌리내리는 법. 무슨 어려운 경전을 참고할 필요도 없이 가까이 선 나무만 보아도 우리는 그것을 눈치 챌 수 있습니다. 이 때 나무는 그 무엇보다 큰 경전 노릇을 하는 셈이지요.
아버지의 농업에서 밥과 똥이 둘이 아니듯이, 예수에게 하늘과 땅은 나누어 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의 뜻을 땅을 통해 이루려는 것이 예수의 삶이었지요. 다시 말하면, 올곧은 생명의 순환질서가 땅 위에 실현되도록 하려는 것이 예수가 신명을 바쳐 가꾸려 한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만일 지금 예수가 오신다면/십자가가 아니라 똥짐을 지실 것이라는/권정생 선생의 글을 읽었다
예수가 오신다면 왜 ‘십자가’가 아니라 ‘똥짐’을 질 것이라고 시인은 표현한 것일까요. 십자가는 본래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듯이 ‘자기 부정’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십자가는 그 상징성을 잃고 목에 걸치는 액세서리로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시인은 그래서 예수가 다시 오신다면 ‘똥짐’을 지실 것이라고 하는 권정생의 말에 동감을 표시하는 것이 아닐까요.
내 아버지의 농업에서 직접 보았듯이, 똥짐 지는 일은 땅심을 돋우는 일이며, 어그러진 생명의 질서를 바로잡고 온전하게 가꾸는 일. 예수 역시 ‘아버지’(농부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하느님 나라의 회복, 생명 질서의 회복을 위해 일하신 분이지요. 그러니 시인은 그분이 다시 오신다면 급한 일 중의 급한 일, 생기를 잃어버린 땅심의 회복을 위해 ‘똥짐’ 지는 일을 하실 것이라고 한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새파란 싹을 틔운 우리 밀은 ‘박물’(博物)이 되어 농업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을 뿐. 똥짐을 져 나르며 땅심을 돋우던 아버지의 농심은, 아니 그 천심은 무슨 모형처럼 남아 있을 뿐. 똥짐 지듯 그렇게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땅심을 풍요롭게 돋우던 예수의 삶도, 그 후예들에 의해 이어지지 못하고 ‘박물’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박물관 앞뜰에 앉아 우리 밀 어린 싹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시인처럼 우리는 예수의 재림(再臨)만을 멍하니 앉아 기다려야 하는 걸까요.
우리 밀, 내가 지나온 시절/똥짐 지던 그 시절이/미래가 되고 말았다/우리 밀, 아 오래된 미래//나는 울었다
시인은 그러나 ‘똥짐 지던 그 시절’을 과거로 치부해 버리지 않습니다. 가난하지만 자족하고, 자립하고, 자존하던 그 시절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은 ‘미래’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 오래된 미래!’ 그래서 시인은 웁니다.
나도 울었습니다. 내 기억의 헛간에서 새삼스레 찾아낸 아버지의 농업을 생각하면서, 우리 곁에 다시 오신다면 똥짐을 지고 걸어가실 예수의 하늘 농업을 떠올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