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성녀들(?)의 집합소인 수녀원 얘기에 눈을 돌려보자. 하지만 여기에도 거룩함(聖)만이 승리한 곳이 아니라 빛과 그림자처럼 그 반대편도 공존했다.
오늘날에도 많은 여행객들이 붐비는 베네치아의 ‘산마리노’ 광장에, 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450년 전인 1561년 가을 한 사나이가 사형집행인 손에 끌려 나왔다. 이런 무시무시한 사형광경을 직접 본다는 것을 현대인들은 상상 할 수 가 없다. 하지만 당시는 죄인을 사람들이 들끓는 이런 광장에서 목을 쳐 죽였다.
당시인들은 이런 사형집행 날짜가 공개되면 ‘축제’에 참석한다고 여겼을 정도다. 이번에도 많은 군중들이 산 마리노 광장에 모였는데, 이 날의 특이점으로는 이 사나이의 사형집행을 목격하기 위해 교황대사(Nuntius)인 이폴리토 카피루피(Ippolito Capilupi)까지 관람객으로 파견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사나이의 죄질이 상당했음은 틀림이 없겠다. 시간이 되자 집행관은 이 사나이의 목을 몇 번이나 쳤지만 연거푸 실패로 돌아가자 다시 노련한 사형 집행인이 나서서야 그의 목이 날아갔다.
죽은 이 사나이는 누구인가? 대체 수녀원과는 무슨 연관성이 있었고 교황대사까지 참관인으로 나왔단 말인가? 죽은 이 사나이는 베네치아의 서쪽에 있는 한 수녀원에 살면서 수녀들의 영혼을 돌보던 43세의 고해 신부였다. 그는 베네치아의 북쪽의 알프스지방 출신으로 이름은 기오반니 피에트로 리온(Giovanni Pietro Lion)다.
그가 상주 했던 수녀원 이름은 레 콘베어티테(Le Convertite)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의 시대적인 배경으로는 이해 하기 힘든 사실 하나를 알아 둘 필요가 있는데, 당시의 수도원은 오늘날과는 달리 여러 유형이 공존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오늘날처럼 신의 부르심인 ‘성소’에 따라 수녀원에 들어가는 것만이 아니라 정반대로 바깥에서 창녀로 살아갔던 여인들이 들어가는 수녀원도 있었다. 성서에 등장하는 마리아 막달레나(성당축일은 7월 22일)의 정신을 본받자고 세워진 수녀원이다. 품행이 방정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는 그녀는 예수로부터 감화를 받은 후 참회하고 뉘우치면서 새 삶을 살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이런 바탕으로 세워진 이런 류의 수녀원을 일명 ‘뉘우치는 여인들의 수녀원’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하기야 이런 수녀원이 당시에 생긴 것은 전지전능한 신의 뜻으로 볼 수도 있겠다. 인간을 차별함이 아니라 누구나가 수도자로 부름 받은 것으로 해석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가 어찌되었든지 간에 일단 이 수녀원에 들어온 여인들 역시 성서 속의 마리아 막달라처럼 과거 생활을 다 버리고 오직 예수의 정신에 완전히 귀의해 살아야 했다. 물론 수도원의 3대 규칙인 청빈 정결 순종의 덕목을 챙기는 의무를 지켜야 한다. 당시에 이 레 콘베어티테 수녀원에는 400명의 여인들이 수녀로서 참회하면서 살았다.
하지만 우리 속담에 ,집에서 새는 바가지는 나가서도 샌다,는 말이 있듯이, 이들이 이런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런 여인들 중에서는 과거의 삶을 청산 못하고 더러 탈선을 한다는 거다. 그렇다 보니 이런 수녀원에서는 갖가지의 기이한 얘기들이 난무했고 여기에 관한 연구도 지금 독일(유럽)에선 활발하다.
오늘 여기 소개하는 얘기는 이 수녀들의 탈선이 아니다. 이 수녀들이 잘 살고자 했지만 오히려 탈선을 주도했던 한 인간의 얘기다. 바로 위의 기오반니 피에트로 리온이다. 그는 영적 지도 고해 신부로 선택되어 이 수도원에 상주하게 되었다. 이들이 비록 과거를 청산했을지라도 청빈 정결 순결의 의무를 지키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던 차, 이 고해 신부는 자기의 진정한 본분을 완전히 망각하고는 오히려 기이한 발상을 가지고 이들에게 접근했다.
G. B. 인트라의 말을 통해서 이 고해 신부의 기이한 행적을 보면: 이런 과거의 삶을 끌어안고 수도원에 들어온 여인들이 영적 상담을 청하고 고백성사를 보기 위해 그를 찾는다. 하지만 이 피에트로 리온은 흑심을 품으면서 엉뚱한 생각을 한다. 비록 수녀가 되었을지라도 이런 여인들 중에는 아직도 이들 안에 육욕이 잠자고 있을지 모르니 한번씩 건드려보자는 심사였다. 그는 고해하러 오는 수녀에게 은근슬쩍 손을 내 밀면서 수작을 걸었다. 이때 한 수녀가 그의 그런 행위를 완강하게 거부하면, 그는 그녀를 찬양하였다; 나는 그대가 진정으로 돈독한 믿음을 가졌는지 어떤지를 슬쩍 시험해 보았노라고! 강하게 반발하고 저항하는 그대는 과연 대단한 믿음을 지녔구나! 라고 칭찬을 해댔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은근슬쩍 다 넘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유혹하고 싶지만 통하지 않는 수녀에게는 감금시켜 버리고 패기도 했다. 때론 그는 수녀들에게 쇠고랑을 채우고 고문도 가했다. 이런 가혹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어떤 여인들은 그의 청에 순순히 순응하기도 했는가 하면, 어떤 여인들은 그의 욕망에 순응하기보다는 차라리 자살을 택하기도 했다. 재미있는 일은 그리 예쁘지 않은 여인이 그에게 응하면 그는 오히려 그녀를 옷을 벗기고선 서 있게 했다 한다.
그의 이런 음탕은 이제 고해소에서만 국한 되지 않고 점점 더 교묘한 다른 방법으로 옮겨갔다.
지금도 베네치아 하면 곤돌라가 떠오르는데 당시 그는 이 곤돌라를 이용해서 까지 육욕을 채웠다. 여름철그는 수녀들의 수행을 받으면서 곤돌라를 탔다. 여기서도 여인들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그 중 특히 아리따운 여인을 취해 그의 욕심을 채워 나갔다. 수녀들의 영혼을 도와 준다고 앉은 자리에서 영혼 구제는커녕 그는 양심을 바닥에 던지고선 이들의 영혼과 육체를 갉아먹고 있었다.
근데 참 기이하지 않는가? 영적 지도 사제가 이런 교묘한 방법으로 수녀원을 장악해 추악한 행위로 성적인 만족을 채워 나갔는데 아무도 몰랐단 말인가? 당시에 400명의 수녀들이 이 집에 살고 있었다는데……
그에게 당한 여인들이 일체 바깥으로 발설 할 수 없었다는 자체가 벌써 수녀원안에서 그를 돕는 도우미 무리들이 즐비했다는 뜻이다. 이들은 그의 지시에 따라 철저하게 함묵 했을 거다. 호화판인 그의 생활을 들여다 보아도 혼자서는 도저히 불가능 한 일이다. 꿩고기에다 노루고기, 비싼 술이 빠지지 않았고, 방에는 몸에 좋은 정력제와 음식으로 가득 찼다. 그의 사형장에 나타났던 교황대사 카피루피도 후에 어찌해서 그의 행적이 내부와 외부에 알려지지 않고 19년간 감쪽같이 숨길 수 있었을까? 하고 강한 의문을 제시를 했다.
여기에 대해서 G.B. 인트라가 이 사건을 언급한 문헌을 보자; 그는 자기 죄를 덮기 위해서 철저한 방어를 했다. 특히 수도원과 그리고 몇몇 수녀들과 아주 긴밀한 친분관계를 깊게 엮어 두었다. 다 자기 음욕을 채우기 위한 준비 단계에 속했고 이런 기상천외의 일을 진행시키면서 다음과 같은 방패막 까지도 만들었다. 그는 이 수녀들이 어떠한 경우에도 바깥 다른 곳에서 고백성사를 못 보도록 엄명까지 내렸다. 이 여인들이 다른 이들에게 고해성사를 보게 될 경우, 당연히 그의 죄과가 들통 날 것은 뻔했기 때문에 이런 통제를 가했다. 심지어 때론 그가 집에 부재중이거나, 그가 아플 경우에도 다른 이들에게는 고백성사를 절대 못 보도록 했다 하니! 이런 그의 철통 같은 방어수단 때문에 가톨릭에서 죽을 때 받는 너무나 중요한 성사도 못보고 죽어간 수녀들도 있었다고 한다.
바깥세상으로 눈을 돌려 보아도 그렇다. 일단 그는 처세술에 능했다. 특히 그는 당시의 사제들이 잘 하지 못하던 라틴어와 그리스어 실력이 뛰어났고 또한 성서에도 능했다. 이런 재주를 무기로 그는 늘 신분 높은 층과 교류하면서 인맥을 쌓아갔다. 그는 교황 파울 3세(1468-1549)의 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돈 게레미아(Don Geremia)라는 이와 친하게 지냈는가 하면, 특히 베네치아 공화국의 왕자는 그를 아주 호의적으로 대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시에서 명망 있는 사람들은 안면을 다 터놓았다. 그는 이들을 만나면 거룩한 척하면서 늘 종교적인 테마를 입에 오르내렸다.
하지만 교묘하게 이 수도원의 수녀들의 몸과 영혼과 재산을 다 빼앗아 차지했던 그의 악행은 19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나서야 종지부를 찍게 된다. 드디어 그는 고발 되었고 많은 이들이 바라보는 광장에서 43세의 나이로 목이 쳐지는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참 아쉽다! 전지전능하신 신은 19년까지 기다리지 말고 일찍 그의 행위를 거두었더라면 이 여인들의 영혼이 상처를 좀 덜 받았을 것이 아닌가?
이런 유사한 사건들은 중세문화사에 자주 등장한다. 1618년에는 부인과 자식을 두었던 한 염색공이 가정생활에 염증이 나자 수도원에 수사로 들어갔다. 하지만 수사로서 잘 살았다면 후세에 이런 지면에 오르내리지도 않았을 것인데 그 역시 결국 교회법 저촉 때문에 체포 당했다. 이런 수도 생활을 하던 자가 자주 고발 되었는데 이런 통계를 보면 263중에 58명이 법정에 섰다 하니 당시의 聖(양)의 惡(음)의 세계를 쉽게 가늠할 수 있다.
앞에 언급했던 것처럼 오늘날의 가톨릭 수도원은 순전히 신의 부르심인 ‘성소’에 따른다. 하지만 당시 중세의 수도원이란 오늘날처럼 영성이 살아있는 수도원과는 거리가 먼 때였다. 위의 ‘뉘우치는 여인들의 수녀원’ 예와는 또 다른 유형 하나는 딸을 많이 가진 귀족집안이 딸을 다 시집 보내려면 많은 지참금이 필요하니 딸 한 둘 정도는 지참금 챙겨서 시집 보내고 나머지는 수녀원에 보내 버렸다. 이렇게 들어간 여인들이 과연 ‘신의 부르심’을 가슴 깊이 느꼈겠는가? 이런 담벽에 갇힌 생활에 견디지 못한 여인네들이 끝내는 탈선하는 얘기들도 많다. 이렇게 탈선했던 수녀들의 연구가 독일(유럽)문헌에는 자주 나온다. 물론 같은 조건으로 수녀원에 들어갔지만 탈선이 아닌 그 반대로 유럽문화사에 후세에 특출한 자국을 남긴 이들도 있다. 예를 들자면 잘 알려진 힐데가드 빙엔 수녀(1098-1179)같은 이다.
끝으로 최근에 한 학자가 베네치아와 그 근교에 있었던 중세기의 수도원 연구를 하였는데 당시 베네치아는 50개도 넘는 수녀원이 있었고 3000명 가량의 수녀들이 살았다. 몇 백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학자들의 진지한 연구 덕택에 이런 인류문화사의 한 단면을 잘 엿볼 수 있으니 그들의 연구물이 그저 고마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