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없는 풍요로움
<불교포커스> 2014.06.29 최원형_불교생태콘텐츠연구소 소장
노트북은 주로 검거나 회색이던 시절, 오렌지 색 노트북은 첫눈에 인상적이었다. 첫눈에 반해서 내 것이 된 노트북을 쓴 지가 삼년이 채 되지 않았을 무렵부터 자꾸 프로그램이 다운되고 오류가 나기 시작했다. 글 쓰는 일을 하다 보니 노트북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으면 여간 답답한 게 아니었다.
하루 시간을 내서 서비스센터에 가져갔다. 그런데 그곳에서 어처구니없는 얘길 들었다. ‘이제 바꿀 때가 된 거죠.’ 나는 귀를 의심했다. ‘아직 삼 년도 채 못 썼는데요?’ ‘노트북을 이 정도 썼으면 쓸 만큼 충분히 쓰신 거예요. 보통 이 년쯤 지나면 대부분 새 제품으로 바꾸세요.’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 직원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냥 고장 난 부품을 교체해 달라 했다. 겉은 새 것과 다를 바 없이 멀쩡한데다 부품이 고장 난 거라면 그것만 손보면 되는데 새 제품이라니,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서비스센터직원은 부품이 있는지부터 알아볼 테니 잠시 기다리라했다. 겨우 삼년도 안 된 제품의 부품 여부를 살펴봐야하다니, 제품 수명을 대체 몇 년으로 두는 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부품 창고에 다녀온 그가 다행히 부품은 있다고 했다. 문제는 비용이었다. 십만 원이 훌쩍 넘는 그 비용을 감수하고 노트북을 고쳤다 해도 또 다른 고장이 일어날 수 있다는 직원의 말에 적잖이 망설여졌다. 그러다 또 다른 데가 고장 나면, 계속 수리비만 대다 결국 못 쓰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석연찮은 마음 때문에 수리하려던 마음을 접고 말았다.
서비스센터를 나서는데 누군지 모를 대상을 향한 분노가 일었다. 과학기술은 날로 진일보하는데 어떻게 이런 물건을 고작 삼 년도 채 못 쓰고 버려야 한다는 건지, 더구나 이게 일반적인 경우라는 건 더더욱 이해가 불가했다. 장터에서 뚝딱 만든 물건이라면 몰라도 기백만 원이 훌쩍 넘는 가격에, 최첨단 기술 개발로 만들어진 노트북을 고작 이, 삼년 쓴다는 건 왠지 사기 당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내 노트북은 자칭 초일류 기업이라는 광고문구가 붙어 다니는 회사 제품이다. 그런데 왜 제품을 이토록 허술하게 만들까?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 밖이었다.
▲ 사용했던&사용 중인 노트북
내 친정집엔 70년대에 구입한 선풍기가 그 제조 회사는 오래 전 망해 없어졌어도 사십 여 년째 잘 돌아가고 있다. 고작 동네 전파상에서 몇 차례 수리 받은 이력이 전부인데도 말이다. 40년이나 지나는 세월 동안 기술의 진보는커녕 오히려 퇴보가 됐다는 말인가? 기술의 퇴보라는 건 얼토당토않은 얘기다. 그렇다면 왜?
생각해 보니 우리 집에 카세트 데크만 서너 개 된다. 다 망가진 것들이다. CD 플레이를 위해 구입해서 일 년쯤 쓰다보면 고장이 났다. 고치러 가면 대개 부품 하나가 고장인데, 부품 가격이 만만찮게 비쌌다. 그 값에 조금만 더 보태면 새 제품을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 그러니 수리하기보다는 새로 구입하고 또 고장 나고 새로 구입하고. 그렇게 서너 개의 고장 난 카세트 데크가 겉모양은 멀쩡하다보니 버리기가 왠지 아까워 여태 붙박이장에 쌓여 있다.
쓰던 회사의 제품이 특별히 부실한가 싶어 경쟁사의 제품을 사도 고장이 나는 시기는 대략 비슷했다. 그러고 보니 프린터도 그랬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
우연한 기회에 나는 꽤나 답답했던 이 의문에 답을 찾게 되었다. ‘계획된 진부화’.
제품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고장 나도록 미리 정해놓았다는 뜻이다. 왜? 간단하게 말하면 그래야 또 사니까. 미리 결함을 넣어둠으로써 일정 기간이 지나면 물건은 망가진다. 제3세계의 값싼 노동력으로 만들어진 새 제품에 비해 이, 삼년 안에 생산라인을 중단해버린 고장 난 제품의 부품은 아예 구할 수 없거나 혹은 값이 턱없이 비싸다.
그러니 소비자들은 수리를 포기하고 새 제품을 구입한다. 계획된 진부화는 끊임없이 새 제품을 소비하도록 부추긴다. 그리고 소비한 만큼 엄청난 쓰레기를 생산 한다. 자원고갈 따위는 계획된 진부화 프로젝트에 어떤 영향도 줄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휴대폰 가게 앞을 지나다보면 신제품이 출시되었으니 바꾸라는 권유를 많이 받는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 휴대폰을 새 제품으로 자주 바꾸는 소위 얼리어답터들도 꽤 되는 것 같다. 휴대폰 시장은 이미 포화상태고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시장을 움직여야 할까? 이미 나온 제품을 빨리 구닥다리로 만들어버리면 된다. 그리고 새 제품을 광고 한다.
▲ 버려진 휴대폰들
텔레비전을 보며 일방적으로 세뇌당하는 이들이라면 솔깃해진다. ‘오, 괜찮은데’ ‘갖고 싶어’ 하는 욕망의 씨앗을 심는데 광고 전략은 성공한다. 상징적 진부화의 과정이다. 휴대폰이라는 새로운 발명품의 등장은 단지 소비의 시작에 불과했다. 끊임없이 새로운 겉모습으로 진화하며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빼앗는다.
그러니 계획적 진부화가 이젠 큰 의미가 없어 보이기도 하다. 애당초 휴대전화 본래의 기능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제 그것은 개인단말기의 기능을 한다. pc가 있고, MP3가 있고 전화기가 있어도 그 셋을 합친 건 없지 않느냐며 있던 것들을 버리고 “이걸로!” 소비하라 부추긴다. 스마트폰이 등장하고 나서 우리 집에 있던 MP3는 순식간에 쓰레기통에 처박혀 버렸다.
프랑스의 경제학자이자 철학자며 탈 성장 이론가인 세르주 라투슈는 그의 최근 작 <낭비 사회를 넘어서>에서 ‘소비 사회는 성장 사회의 종착점’이라고 했다. ‘성장 사회는 성장 경제가 지배하는 사회이고 성장이 모든 것을 흡수해 버리는 사회로 정의할 수도 있’다 했다.
성장을 위한 성장이 경제와 삶의 우선적인 목표, 아니 유일한 목표가 되어 버렸다. 분명한 필요를 위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기 위해 성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필요에 의해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를 함으로써 필요성을 찾는다는 것이다. 필요를 창조한다는 이상한 논리가 전혀 이상스럽지 않게 성립되기도 하는 게 오늘날 소비 사회다. 제품이 죽어야 소비 사회가 산다는 말로 요약 가능하다.
프랑스의 또 다른 경제학자 베르나르 마리스는 ‘상품의 소비와 순환은 점점 빨라지고, 쓰레기는 점점 많이 쌓이고, 이 쓰레기를 처리하는 활동은 점점 중요해진다’고 했다. 생산한 것은 몇 년 내에 고장이 나도록 의도적 결함을 끼워 넣어 판매되고 소비자는 왜 소비를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른 채 상징적 진부화에 떠밀려 혹은 계획적 진부화로 인해 소비의 소용돌이 속으로 정신없이 빨려 들어간다.
소비에 중독된 사회는 여러 가지 형태의 부작용을 낳는다. 숱한 부작용 가운데 소비에 중독된 인간으로 인해 생태계가 몸살을 앓고 병들어가는 일은 세대를 거듭해 문젯거리가 될 것이다.
▲ 재활용매장의 TV와 세탁기들
새 제품을 구입하면서 밀려나는 낡은(사실은 낡을 정도로 쓸 겨를도 없지만) 물건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관심 밖이다. 우리의 관심은 오직 새로운 소비니까. 새 제품이든 헌 제품이든 생산되고 소비되는 물건 가운데 플라스틱이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적지 않다. 플라스틱은 박테리아 등 분해물질에 의해 유기물이 생태계속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햇빛에 의해 계속 잘게 쪼개지기만 할 뿐이다. 즉 플라스틱은 끝내 자연으로 돌아가 생태계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잘게 쪼개진 플라스틱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오늘날 바다는 온통 쓰레기로 넘쳐난다. 육상에서 떠밀려온 쓰레기도 있고, 배에서 버려진 쓰레기도 있다. 쓰레기의 90% 이상이 플라스틱이다. 그리고 그 쓰레기가 생산되는 것과 계획적 혹은 상징적 진부화는 어딘가 맥이 닿아있다. 하와이 인근에는 둥둥 떠다니는 한반도 7배 크기의 거대한 쓰레기 섬(Great Pacific Garbage Patch). 2009년 8월, 쓰레기 섬의 규모를 측정하고 이것이 해양생물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는 가이세이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이 프로젝트 결과, “쓰레기 섬은 온갖 종류의 떠다니는 쓰레기(특히 플라스틱)로 이뤄져 있으며, 해양생물들은 이 쓰레기로 인해 생명에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해양생물의 생명이 위협당하면 결국 우리의 생명도 위협을 당한다는 건 자명한 이치다. 모든 생명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그 후, 쓰레기 섬의 크기는 작아졌을까?
끊임없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사이클, 이 과정에서 남겨진 쓰레기가 쌓일 곳은 자연 말고 달리 없다. 소비하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는 이 시대의 모순을 최종적으로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 것이 왜 자연이어야 할까? 자연에서 생명을 얻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갈 우리들인데. 자연은 우리가 ‘소유했’던 것들을 무한정 받아줄 수 있을까? 낭비 사회의 질주는 언제까지 이어질까?
매 순간 현재를 진부한 과거로 매도해버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소비를 강요하는 일상을 멈출 열쇠는 무엇이며 누구일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의도된 진부화라는 이 탐욕스러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소비하지 않아도, 성장하지 않아도 우리 삶이 보다 풍요로울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
시간과 공간 속에서 방향을 잃고 소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이리저리 표류하는 우리. 우리의 왜곡된 좌표를 제대로 볼 바른 견해, 정견이야 말로 지금 당장 필요한 지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