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한자문화권인 한중일의 민간교류와 미래
교토(京都)에서 부득이한 사정으로 일행과 떨어져 공항까지 혼자 가야했다. 약간의 긴장감이 뒤따르긴 했지만 그래도 길 떠난 느낌을 짧은 시간이나마 좀 더 누릴 수 있었다. 정거장이 바뀔 때마다 실시간으로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안내방송과 함께 자막으로 처리된 3개국 문자가 차례대로 친절하게 뜬다. 창 밖 풍광도 낯설지 않고 얼굴 생김새도 비슷하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토종형’을 제외하고는 서로의 출신국가를 짐작하는 일조차 쉽지않다.
올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일본과 중국 나들이는 이웃마을에 온 것 같다. 거리가 가까운 탓도 있지만 한자문화권이라는 동질감이 더 큰 원인일 것이다. 하지만 눈으로 한문을 보는 생활에만 익숙하다보니 늘 일방소통으로 만족해야 했다. 관광객으로서 지출 위주인 갑(甲)의 입장에선 필담(筆談)만으로도 크게 불편할 일이 없다. 하지만 지갑을 열도록 만들어야 하는 을(乙)의 관계가 된다면 사정은 판이하게 달라질 것이다. 눈(문자)보다는 입(말하기)과 귀(듣기)의 역할이 더 커지기 때문이다. 쌍방소통은 문자 ‘눈팅’만으로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일본 나라현에 있는 호류지. 하어영 기자
가끔 차 한잔을 나누는 중의학 전공의 지인은 “3개국 공통한자로 선정된 808자 정도는 아예 초등한자 교육부터 3국의 읽는 방법까지 같이 가르친다면 힘들이지 않고 외국어 2개는 그저 덤으로 얻어질 것”이라고 나름의 비방책을 제시했다. 화기애애하게 ‘건배(乾杯 한)!'‘건뻬이(중)!’ ‘간빠이(일)!’만 외쳐도 된다면 세종께서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라고 하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같은 지방에 있는 절인데도 사(寺)라는 글자를 ‘지(じ 法隆寺호류지)’라고 읽고, 또 ‘데라(でら 淸水寺기요미즈 데라)’라고도 읽어야 하는 현실은 어떤 외국어건 만만해지려면 적지않는 노력이 뒤따라야 함을 보여준다.
작년(2013) 한 해동안 한국 644만, 중국 564만, 일본 563만명이 상대국을 방문했다고 한다(2014.4.23 중앙일보). 작은 숫자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해마다 그 나라 전체 인구 숫자 이상이 상호방문하는 유럽연합(EU)의 수준에는 한참 못미친다. 그만큼 또다른 벽이 있다는 반증이다. EU인들 인접나라끼리 어찌 구원(舊怨)이 없겠는가? 하지만 과거가 미래의 발목까지 잡을 수 없다는 공감대가 단일경제문화권을 만들어낸 힘이다.
한자문화권간의 정치적 갈등 해소방편은 활발한 민간교류가 그 해답이다. 모든 것이 사람의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남긴 몇개의 발자국이 소비성 유람이 아니라 이웃 3국이 구동존이(求同存異 : 차이점을 인정하면서 같은 점을 추구한다)의 열린 마음을 지향하는데 일조하길 바라면서 한자문화권 공동체의 완성을 꿈꾸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