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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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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코끼리 사랑으로 망한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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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레오(1513-1521)의 성대한 코끼리 장례식


레오 10세가 라파엘로에게 청탁한 그림 중엔 코끼리도 보인다. 이 교황은 현대인들처럼 동물사랑, 자연사랑에 푹 빠졌던가? 그렇담 참 아름답다 이 교황!  먼저 교황 레오가 누구인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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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10세는 1475년 기오바니 데 메디치로 9명 중 6번째 자식으로 태어났다. 아들로서 두 번째인 그는 이미 7살 때 미래에 수도자로 걷는다는 성사를 받았다. 이 표징은 그가 종교적인 소양이 특출해서라기보다는, 자식 하나를 수도자로서 보내 출세를 꿈꾸었던 당시 귀족들의 관습에서 기인한다.


아버지 로렌조는 이 아들을 추기경 만들기 위해 갖은 방법을 썼다. 먼저 교황 이노센트 8세에게 잘 봐 달라는 청을 했지만 거절당했다. 전쟁 발발 때 로렌조가 교황 이노센트 편을 안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척인 플로렌즈 추기경이 이 두 사람 사이에 화해의 다리를 놓자, 교황은 이런 기회를 먼저 이용했다. 교황 이노센트 8세는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은 프란체스코였다. 1486년 11월 교황 이노센트 8세가 자기 아들 프란체스코와 로렌조의 딸 막달레나와의 결혼을 제안했다. 이것이 기회다 싶었던 로렌조 역시 허락하는 척 하면서 자기 아들 기오바니를 추기경으로 임명해 달라는 조건제시를 했다. 아버지가 정치장사를 잘한 덕택에 14살 먹은 기오바니는 1489년 3월 9일 드디어 추기경이 된다. 한국식으로 따져보면 교황사돈과 매제 덕택에 추기경이 되었다는 거다. 이 추기경 임명은 한 3년간 비밀로 잘 유지 되다가 1492년 3월 2일에서야 교황이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이 일을 계기로 기오바니의 출세 길은 훤히 트이기 시작하더니 전 교황인 율리우스 2세가 1513년 2월에 죽자 37살의 기오바니가 3월에 레오 10세로 교황에 등장 했다.


이렇게 교황이 된 그가 코끼리는 왜? 약 800 년경부터 유럽에선 코끼리가 외교적인 선물이나 공물용이었다. 그 이유는 코끼리가 거대한 힘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레오 10세가 교황이 되자마자, 포루트칼의 마누엘왕이 이 코끼리를 교황에게 선물 했다. 이 왕은 이번 기회에 새 교황 레오의 힘을 등에 업고 적대 관계에 있던 스페인을 견제해 보자는 의도 때문이다. 드디어 이 코끼리가 바티칸에 당도하기 위해 이동이 시작된다. 이 코끼리 이동 때 마누엘 왕은 70명의 고위 사신들까지 동행시켰다. 이 이동은 리스본에서 이태리 해변을 거쳐 다시 육지로 오르는데 몇 주나 걸렸던 꽤나 힘든 작업이었다. 이들이 숙박업소에 정착 할 때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 코끼리 구경 때문이다. 어느 날은 한 여관의 지붕이 내려 앉았을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온 적도 있었는가 하면, 지방의 귀족들은 이 코끼리와 사신들을 자기 영주에 숙박제공을 서로 자처했을 정도로 야단스러웠다. 하지만 이 코끼리 이동이 너무 힘들었다 보니 교황청에 당도하기도 전에 이들은 이미 지쳐 파김치가 되었다. 이 사실이 교황 레오 10세 에게 보고 되자 그는 스위스 친위병 궁수들을 보내 준다. 덕택에 이 코끼리는 로마에 무사히 잘 도착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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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코끼리는 레오 10세와 깊디 깊은 인연이 시작되었다. 한니발 장군의 유명세를 따서 '한노'로 칭해진 이 코끼리는 바티칸 정원에 보금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사랑 받았다. 이 코끼리를 보살 피는 비서까지(?) 정해졌는데 그가 바로 유명한 화가 라파엘의 친구였던 브란코니노 였다. 코끼리가 로마에 도착했다는 소문이 나자마자 로마 시민들도 호기심 발동을 잠재우지 못하고 구경에 몰려 들었다. 특히 교황이 코끼리와 노는 모습을 시민들에게 자주 보여 주었다는 것이 기록이 나오는데 이런 때는 더 야단법석이었다. 한번은 교황의 조카인 로렌조 2세가 플로렌즈의 한 연회에 이 코끼리를 데리고 가고 싶다고 청했지만 교황 삼촌은 단연코 거절했다. 그 이유는 긴 여행을 하면 코끼리 건강이 염려 된다는 것 때문이다. 이 코끼리에게 신발을 짜 맞추어 주었을 정도로 그는 코끼리에 대한 사랑이 과분할 정도로 철철 넘쳤다.


동물을 이리 사랑하는데 좋은 일 아닌가?  문제는 자기 본분을 잊고 동물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이다. 그의 삶을 먼저 좀 들여다보고 나서 다시 그의 코끼리 사랑 얘기를 마저 하자. 유감스럽게도 레오 10세는 교황이었지만 예수에 대한 강한 믿음은 없었다고 한다. 그가 한 말이 재미 있다. ‘모든 세상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예수에 관한 신화를 짜 맞추어 넣었는지’ 이런 발언을 통해서 보면 어쩜 그는 당시에 벌써 종교 다원주의에 관심 가졌을지도 모른다. 아님 한 종교를 초월한 경지에 이미 다다른 존재였든가! 반대로 그가 지대한 관심을 보인 것은 당시 유럽 정치 돌아가는 것이었다. 독일 황제 막시밀리안이 죽자, 그는 프랑스의 프란츠 1세를 단연코 지지했다. 하지만 곧 변절 한 그는 이젠 전쟁에서 이긴 칼 5세와 손을 잡고선 프랑스에 대항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한 또 유명한 말이 있다. '신이 즐기라고 우리에게 교황직을 준 것이다'실제로 그는 이 말처럼 살았다. 로마를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던 긍정적인 업적도 있었다지만, 좌우지간 그의 생활을 들여다보면 낚시는 그의 일상사였고, 사냥에 매료된 그는 일주일 내내 사냥만 하러 다니기까지 했다. 한번 교황 사냥 행차가 떠나면 동행인이 자그마치 2000명 정도였다. 이것도 모자라 황소싸움에 도박을 잘 걸었는가 하면 교황청엔 익살 피우는 궁중광대들을 상주시키고선 즐겼다. 광대들이 순발력 있는 위트로 즉시 웃음을 쏟아내는 분위기를 연출 하지 못할 경우는 이들을 두들겨 패기까지 했다. 또 자주 열렸던 그의 호화로운 잔치를 보자. 이런 잔치를 한번 열면 100,000 두카텐까지 지출할 정도였다. 교수로서 일했던 루터의 당시 일년 치 월급이 8 두카텐을 받았다고 하니, 이 돈은 정말 천문학적인 숫자임이 틀림없다. 프랑스 국왕과 인척 관계를 맺은 동생 기울리아노가 축제를 연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그는 후원금으로 당장 그에게 150,000 두카텐을 내어줄 정도로 였는데 기분파 였는지? 아니면 예수를 이어받아 이웃사랑을 이런 식으로 베풀었는지?


성직매매도 곧잘 했다. 헤르만교수에 의하면 2200번의 성직을 팔아 생긴 돈이 자그마치 3 밀리온 이라고 한다. 교황청의 수입을 6배로 불려주는 장사였다고! 한번은 한꺼번에 31명의 추기경을 임명해주고 받은 돈이 300,000 두카텐 이었다. 그에겐 이것만으로도 부족했던지 40%까지 이자를 받는 돈놀이까지 한 적 있었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이웃을 도왔는가? 아니다 전쟁비용에 800,000 두카텐을 투자했다고 한다. 이 돈은 바티칸 한 해 예산의 반이나 되는 거금이었다. 7년간의 교황직에 있으면서 5 밀리온을 지출 했던 그는 결국 재정 바닥을 냈다. 신학 교수 루터가 일년간 받은 돈이 겨우 8두카텐에 비하면 정말이지 엄청난 돈이다.


루터가 종교개혁 할만도 했다. 일단 이런 꼴에 어느 누가 뿔이 안 나겠는가? 그러던 차 로마성당 짓는다고 면죄부를 팔아댔다. 견디지 못한 루터가 1517년 10월 21일에 비텐베르크에 기존교회에 반대하는 95 조항을 붙이면서 종교개혁에 불을 질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레오 10세는 루터의 이런 반박을 아주 대수롭게 않게 여겼다. 1520년 6월 1미터 길이와 0.5미터 넓이로 돤 증서를 만들어 교황의 권한으로 루터에게 협박을 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는 루터의 종교 개혁을 아주 가볍게 판단 했던 거다. 하기야 성직매매, 어린 조카를 추기경으로 임명, 본분에 어긋난 호화 파티 등은 사실 레오 10세에게만 해당 되는 일은 아니었다. 예를 들자면 1460년 칼리히트 3세부터 식스티우스 4세들에 이르기까지 뿌리깊게 누적 되어 부풀어진 풍선이 드디어 루터가 터트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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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성스런(?) 교황이 사람이 아닌 코끼리에게만 너무나 넘친 사랑을 쏟아 붓자 여기저기서 비난의 봇물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즉 이 교황이 초등학교 책명처럼 '바른 생활'을 하고선 동물을 사랑을 했다면야, 아마도 자연보호 사랑 모임이 그의 동물사랑을 치하하면서 훈장을 주었을 지도 모른다. 달이 차면 기우는 법, 우연인지 필연이지 무서운 사고가 일어났다. 루드빅히 12세의 여동생과 결혼한 동생 기울리아노가 로마에 오기로 했다.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요란스런 준비를 했다. 그 중 하나가 그들이 밟고 들어오는 길에 개선문을 만든 거다. 거대한 천막을 쳐둔 곳에 귀족들이 즐비하게 서서 이들을 영접할 준비를 했는데 이런 영접식에 코끼리 '한노'가 빠질 수가 없었다. 드디어 교황의 손님들이 당도하자, 무장한 군인들이 예포를 쏘아댔다. 이 때 이 굉음에 놀란 코끼리가 공포를 느끼면서 미친 듯 날 뛰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이 영접식장은 야단 법석이 일어났고 한 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이때 공적인 집계로 13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의 형제 기울리아노도 죽었다.


곧 이어 이상한 일도 일어났다. 곧 교황도 열에 시달리며 고통스러워했다는 거다. 그때 점성학을 하는 수도승이 이젠 코끼리가 곧 죽을 징조라고 예언했다. 정말 6월에 이 코끼리가 병이 들어 겨우 호흡만 하는 지경에 이르자 레오는 즉시 그의 주치의들을 불러 진단을 내리게 했다. 코끼리가 숨이 가쁜 건 후두염 때문이고 그것 때문에 변비에 걸렸다는 거다. 처방으로 내린 것은 코끼리에게 금이 섞인 하제를 먹여야 만 한다는 거다. 사실 당시인들의 변비처방하제에 약간의 금을 섞었다고 한다. 근데 사람에 비해 코끼리는 몸집이 얼마나 비대한가? 이 코끼리에게 얼마나 많은 양의 금을 하제로 쓰였는지 짐작이 간다. 하지만 다 소용이 없었다. 한노는 1516년 6월 8일 날 교황님의 사랑(?)을 뿌리치고 그만 돌아가셨다(?). 교황은 당대의 유명한 화가 라파엘를 불러 이 코끼리 그림을 다시 그리게 했다. 그 뿐만 아니라 아주 성대하고 거대한 한노의 장례식을 치른 후에 이 코끼리를 바티칸 담벽에 묻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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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코끼리를 떠나 보낸 후 그는 고통과 슬픔을 참지 못하겠다고 공적으로 표현했을 정도였다. 한노에 대한 사랑을 과시했던 이 교황은 코끼리에게도 ‘한노가 후두염으로 죽었다’는 사인서 작성을 명했다. 한노의 기념비 세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바티칸 담 쪽에 세워주었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고 다만 표징만 증명 할 수 있다(1962년 바티칸의 도서관 건축 중에 뼈와 아주 큰 이빨을 발견 한 적이 있었다. 그 이후 다시 1990년대의 발굴작업에서 뼈와 잇빨등을 발견했는데 이것을 코끼리 한노 뼈로 간주하고 있다.) 이러자 로마인들 그리고 나중엔 신교도들이 합쳐 교황의 이 코끼리 사랑에 기꺼이 동참해 주었다. 물론 진짜 동참이 아니라 교황을 골려 주기 위해 빈정거린 투로 쓴 글이었다. 그 우스개 유언장 글이 지금 남아 있다. 이 뿐만 아니었다. 돌아가신(?) 한노에 대한 얘기가 로마에 여전히 괴상한 얘기로 퍼져 나갔다. 좌우지간 오늘날 난무하는 인터넷의 댓 글을 연상하면 되리라. 예수의 정신을 진정으로 실천하고자 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더욱 더 돋보인다.


이런 레오 10세도 1521년 겨울감기로 죽었다. 너무 갑자기 죽는 바람에 그는 가톨릭 교리에 따라 반드시 받아야 할 성사도 못 받았다. 근데 자연사로 보지 않았다. 그의 시체가 심하게 붓고 또 검은색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교황이 독살 당했다는 의심을 잠재 울 수가 없었다. 프랑스의 사주를 받았으리라고 추측했던 한 혐의자를 심문대에 올렸지만 이 살해에 대한 단서를 잡지 못했다. 이 때 메디치가(家)의 추기경이 나서서 이 혐의자를 풀어 주라고 지시했다. 프란츠 I세와 원수 지간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기야 아무리 떵떵거리던 메디치家 였지만, 이젠 정승개가 죽은 게 아니고 정승이 죽었는데 싸워봐야 무슨 승산이 있겠는가? 거기다 레오 10세가 교황으로 반듯하게 살았던 것도 아니고!


교황 레오는 많은 빚을 남겼다. 심지어 관에 쓸 초 값 조차도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 좀 과장이라 치더라도 그가 살았던 삶을 대변하는 뜻 일 것이다. 그의 뼈는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에 묻혀있다. 죽기 전 반드시 받아야 할 종부 성사도 못 받았고, 바티칸에 빚만 잔뜩 지운 교황이 하늘나라가 있다면 여기서 과연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 천국에서 교황의 빚을 간접적으로 다 탕감해 주었을까? 인간이 ‘어떤 자리’에 앉으면 ‘그 자리에 상응하는 삶'을 살다 가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깊게 느낄 수 있겠다. 얼마 전 한국을 다녀가신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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