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에 오염된 한국 불교
‘돈오돈수(수행을 해서 한 번 크게 깨치면 더 깨칠 게 없음)냐’ 아니면 ‘돈오점수(깨친 후에도 수행을 계속해나감)냐’는 불가의 오랜 논쟁거리였다. 어느 입장이 옳으냐를 떠나 한국 불교는 다양하고도 치열한 논쟁들을 통해 발전해오면서 세상에 선불교(禪佛敎)로 널리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이즈음 산문 밖으로 새어 나오는 소식들이 심상치 않다. 돈에 눈이 먼 불교계의 타락이 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작금의 한국 선불교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돈맛을 알고 돈 벌 궁리를 하는 돈悟돈修(돈오돈수)’라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서울의 한 선원은 선의 대중화를 표방한 사찰이다. 스님이 아닌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참선 수행이 사찰의 주요 프로그램이다. 젊은이와 외국인들이 호기심에 이곳을 자주 찾지만 고졸해야 할 선원에 걸맞지 않은 웅장한 건물 규모와 화려한 불상 앞에서 먼저 주눅이 든다. 자주 지내는 49재나 조상 천도재와 같은 재(齋·죽은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불교 의식)가 낯설기도 하다. 선(禪)이 수백명이 운집하는 재를 장엄하는 역할을 하는 소품에 불과해 보이는 것은 왜일까?
망자의 극락왕생을 비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절에서 내 남편과 자식의 성공을 바라는 것도 인지상정의 우리 전통이다. 문제는 겉은 선을 표방하면서 안으로는 기복에 치우친 위선이다. 참선을 하면 마음의 지혜가 생겨 현실에서 실타래처럼 얽힌 문제들을 풀 수 있는 출구가 열린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그 출구의 끝이 더 많은 행복과 재물로 향해 있다. 청정해야 할 수행처가 돈에 물들고 있는 것이다. 금권에 따라 정해지는 신도의 서열을 기반으로 더 많은 복을 탐하는 기복자들의 심리가 저변에 깔려 있다. 헌금 액수가 많은 사찰 주지의 임명을 두고 갈등이 생기고 세력 간 다툼이 생기는 것도 결국 기복과 돈의 연결고리 때문이다. 지난달 송담 스님의 조계종 탈종 사태를 비롯해, 이른바 돈 되는(?) 절을 두고 벌이는 진흙탕 싸움이 최근에만 벌써 몇 번인가?
‘종지(宗旨)가 선’이니, 선불교니 운운하는 것을 보면 낯간지럽기가 그지없다. 선불교의 적통이 한국 불교에 있다는 주장도 억지스럽다. 선의 원조 달마는 참선 수행을 위해 눈꺼풀을 도려냈다. 눈을 부릅떠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지 않기 위함이다. 한국 불교는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로부터 눈을 감고 있다. 종교계에서 유독 기독교가 혹독한 비판을 받고 있지만 한쪽에선 변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어려운 이웃과 함께하고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바꾸기 위해 치열한 고민도 하고 있다.
불교는 문제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복지와 자선 등 현실 참여에 있어서도 불교는 타 종교보다 뒤처져 있다. 세월호 사건의 경우도 특별법 제정과 같은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불교가 평화의 종교라고 하지만 침묵이 곧 평화는 아닐 터, 생때같은 아이들 죽음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부처님도 피눈물을 흘리고 계시는 한국전쟁 이후의 최대 참사다.
옛날에 한 가난한 여인이 작고 보잘것없는 등불을 부처님께 바쳤다. 새벽이 되자 다른 등불들은 다 꺼졌는데 여인의 등불만 주위를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고 한다. 왜 작은 등불이 제일 오래 불을 밝혔을까?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오늘날 한국 불교가 참구해야 할 화두다. 알 듯 말 듯 한 말들의 향연이 선은 아닐 것이다. 선가(禪家)에서는 ‘부처를 보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불교의 존경할 만한 스승)를 보면 조사를 베라’고 했다. 인구 백만도 되지 않는 남미의 가이아나를 제외하면 남북한이 사실상 세계에서 자살률 1위다. 불교가 중생들의 신음소리에 귀 기울일 때다. 한가롭게 옛 선사들의 말들에 빠져 있을 때인가?
왜란 때 도탄에 빠진 민초들을 위해 휴정과 유정은 칼을 들었다. 두 분 다 뛰어난 선승이었다.
하훈 평화기획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