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따로 한 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서야 보고 믿었다(요한 20,1~9).
예수님의 옷과 수건만 있고 예수님은 사라져 보이지 않은 현장을 보고 어떻게 부활을 믿었다는 걸까요?
물질세계는 사실적인 존재를 근거로 합니다. ‘사실(事實)’이란 시·공적(時·空的)이어서 동시에 두 시공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세계는 시공을 초월한 무한으로, 근거 없이 존재합니다. 부활의 근거를 눈에 보이는 사물의 차원에서 찾거나 논쟁한다면 즉시 물질의 차원으로 떨어져 버릴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발견한 빈 무덤의 옷과 수건은 육신을 상징하는 물질세계의 것이므로 유한한 역사로 남아 있어야 맞는 것이고, 예수님의 몸은 하느님의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온전한 신성으로 돌아가야 맞습니다.
하늘에는 무덤이 없습니다. 무덤은 육신의 것이고 빈무덤은 영혼의 것입니다. 그래서 옷가지와 수건으로 남은 인간 예수의 흔적은 볼 수 있었지만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은 볼 수 없었던 것이 맞습니다.
물질세계를 대상으로 삼아온 눈에는 예수님의 부활이 결코 보여질 수 없습니다. 육신으로 이미 죽은 예수님의 재현은 영적인 체계로만 볼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영적 존재는 영적인 눈을 뜰 때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려거든 세상 사물을 대상으로 둔 눈을 감거나 버려야만 하겠지요.
*출처 : flicker
육신과 인성의 옷을 벗어버리면 영혼과 신성이 남습니다. 예수를 벗어버리면 그리스도가 남고 석가모니를 버리면 부처가 남으리니. 누구나 육신의 옷을 벗어버리면 영적 존재로 태어납니다.
예수님의 아마포 옷과 흰수건처럼 자기 삶의 역사는 언제나 남아있고 내 육신의 처지는 죽는 날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육신 삶에서 챙겨지는 생노병사의 원리도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삶의 희노애락, 번뇌와 고통도 모두 육신의 조건에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대신에 그것으로 내가 지상에 살아있는 생명임을 확인할 수 있는 은총이 주어집니다.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들은 참 고마운 도구들 아닌가요.
육신적 소멸 없이는 부활을 맞을 수 없습니다. 시공을 넘어서지 않으면 부활이 아니겠지요. 부활의 빛을 고대하는 이는 죽음이 고통이 될 수 없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순교자들이 죽음을 기꺼워하며 목숨을 내놓을 수 있었던 이유도 다름 아닙니다. 부활이라는 기쁨의 세계를 고대하는데 박해자들이 지름길을 도와주고 있으니 그들을 용서가 아니라 감사하고 축복해 줄 수도 있었겠지요. 비록 폭력의 불의한 절차였지만 할 일을 다 마치고 아버지께 돌아가야 하는 예수님을 도와준 이들을 십자가에서도 용서하실 수 있었던 것처럼...
완전한 소멸로 공(空)의 상태가 된 자아(自我), 내 것이란 없는 무소유의 상태가 삶으로부터 부활의 생명이 나타납니다. 부활은 공(空)으로부터 오며 무(無)로부터 옵니다.
섬김, 겸손, 양보, 희생, 비움이 곧 무(無)와 공(空)에의 길이며 부활의 길입니다. 왜 모든 종교가 그런 바보같은 태도를 완덕의 목표로 삼고 있는지의 쉽게 알게 됩니다.
비움에서 오는 부활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알렐루야!
동해안 엠마오길. 개나리 벚꽃이 활짝 피었다. 산위의 마을에도 순서가 오겠지. (2013. 4.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