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만다라 3>
2. 초발심 행자에게 띄우는 두 번째 편지- 봄의 향기
불연세속 시명출가 不戀世俗 是名出家
–삶의 가치와 방향, 그리고 삶의 방식의 전환이 출가입니다.
행자님!
4월은 온통 개나리, 백목련, 벚꽃들로 가득합니다. 화사한 눈부신 꽃들은 마치 대낮에 등불이 걸린 듯 환하게 비춰줍니다. 꽃그늘에도 그윽한 향기가 배여 있습니다. 이런 축제의 봄날 행복은 한겨울 모진 추위를 감내한 결실입니다. 사람의 성숙과 결실도 한 송이 꽃과 같습니다, 그래서 황벽 선사는 “뼛속까지 사무치는 추위를 견디지 않고서, 어찌 코끝을 찌르는 매화향기 얻을 수 있으랴!”라는 게송을 읊었습니다.
늘 연초에 이 글을 지인들에게 띄울 만큼, 저는 이 게송을 좋아합니다. 행자님도 출가정신이 느슨해질 때마다 이 구절을 되새겨보면 참 좋을 듯합니다.
*길가에 핀 개나리. 사진 한겨레 이종근 기자
행자님!
이제 우리 초발심 행자님들 대부분은 불교공부를 위하여 각 승가대학에서 터를 잡고 반쯤의 설렘과 반쯤의 염려로 시작하고 있겠지요. 모든 것이 낯설고 그래서 매사 서툴 것입니다. 하지만 곧 익숙해지고 느긋하게 적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상의 일과에 순응하면서도 늘 점검하고 다잡고 새로이 거듭거듭 새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출가정신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출가한지 얼마 되지 않은 길목에서 다시 출가에 대해 생각해볼까 합니다. 대략 출가는 그동안 깃들어 머물던 삶의 터를 떠난 것을 말합니다. 더 진정한 의미는 세속으로 상징되는 모든 가치와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새로운 인생의 가치와 방식을 선택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출가는 포기이자 선택이며, 선택이자 포기입니다. 곧 출가는 선택과 포기의 동시적 결단인 것입니다.
행자님! 그렇습니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찾는다는 것은 과욕 이전에 큰 어리석음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제 행자님은 그동안 복잡하게 자신을 얽어맨 세속을 떠난 홀가분함에 젖어있기보다, 참다운 수행자로 큰 성취를 얻기 위해, 진정으로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야 할 시점에 서 있습니다. 버리지 않고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길, 출가의 길임을 다시 새겨야 할 것입니다.
포기와 선택이 곧 출가라는 말을 생각해 보니 사냥꾼에게 사로잡힌 원숭이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동남아 지역에서 독특한 원숭이 사냥법이 있습니다. 원숭이들이 많이 사는 숲에 덫을 설치합니다. 아주 무거운 바구니에 원숭이들이 좋아하는 먹이들을 가득 담아둡니다. 먹이를 본 원숭이는 아주 좋아서 냉큼 바구니에 손을 집어넣고 먹이를 잡습니다. 그런데 원숭이는 손을 바구니에서 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바구니는 그냥 손을 넣을 때는 들어갈 수 있지만 무엇을 움켜쥐었을 때는 나올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원숭이는 그것을 먹고 싶은 욕심에 끝까지 움켜쥔 손을 풀지 않고 손을 빼내려고 낑낑거립니다. 낑낑거리는 소리를 듣고 사냥꾼은 원숭이를 잡습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은 생각과 욕망을 놓지 못하여 고통과 불행의 덫에 걸려 허우적거리고 있는 모습들이 제 죽을 줄 모르고 먹이에 탐착하여 움켜 쥔 손을 놓지 못하는 원숭이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세속의 집을 떠나고 삭발하고 절집에서 산다고 하여 출가라고 할 수 없겠지요.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한다면 마치 낡은 옷 위에 새 옷을 걸치는 격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스승은 석가모니 붓다께서는 카필라 성을 나와 출가할 때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이 세상에는 세 부류의 수행자가 있다. 첫째는 탐욕이 부질없음을 통찰하지 않고 몸과 마음에 욕망을 품고 수행하는 사람. 둘째는 마음으로는 욕망이 부질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으로 욕망을 행하는 자. 셋째 몸과 마음에 욕망을 멀리하고 수행하는 자. 나는 이 중에서 세 번 째 수행자의 대열에서 깨달음을 추구하리라”
행자님! 행자님도 세속에서 듣고 보았겠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의 적지 않은 종교인들이 세간 사람들보다도 더 많이 권력과 재물과 명예를 탐착하고 있습니다. 종교인의 범죄도 늘어가고 있습니다. 더 우리를 절망하게 하는 것은 그렇게 본분에서 이탈하면서도 전혀 부끄러움을 모르고 성스러움으로 포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행자님은 오히려 출가의 긴 여정에서 우리의 스승께서 결심하신 ‘몸과 마음에 욕망을 포기하는’ 출가를 거듭거듭 하기를 바랍니다.
현애살수장부아 懸崖撒手丈夫兒!
백천간두진일보 百尺竿頭進一步!
아득한 벼랑 끝에서 나뭇가지 붙잡은 손을 놓아라.
천길 꼭대기에서 서슴없이 한 발 내딛어라.
예로부터 선가에서는 출가대장부가 당당한 자기 삶의 주체로서 대자유의 결연한 몸짓을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한 점 미련 없이 털어버리고 놓을 수 있는 자만이 성취할 수 있는 출가의 길입니다.
그렇다면 행자님! 이제 우리는 무엇을 포기하고 선택해야 할까요? 먼저 저는 출가를 ‘위대한 포기와 선택’이라고 정의합니다. 그 선택은 바로 ‘삶의 가치와 방향, 그리고 삶의 방식의 전환’입니다. 세속을 떠난다는 말과 삶의 가치와 방향, 방식을 바꾼다는 말을 놓고 생각할 때 출가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체감하는 온도가 다르지요? 그래서 앞으로 행자님이 공부할 때는 늘 오늘의 언어와 사유의 방식으로 모든 명제들을 정립하고 배열하기 바랍니다.
삶의 가치와 판단은 무엇인가요? 무엇이 옳고 무엇이 아름다우며, 무엇이 나와 우리 모두를 행복하고 평화롭게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이겠습니다. 삶의 진정한 방향은 무엇인가요? 진정한 삶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곳과 그 곳 사람들의 대열에 동행함을 말하는 것이겠습니다. 바람직한 삶의 방식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진정한 가치를 드러내고 얻어가는 일상의 구체적인 규범이고 실천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앞에서 말했듯이 선택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버려할 것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 선택은 진정한 출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 행자님, 이제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을 두서없이 생각해 보기로 하지요. 장자가 “학문하는 자는 더하는 것으로서 공부하고 도를 수행하는 자는 덜어가는 것으로서 공부한다.”고 했듯이, 출가수행자는 버려야 할 것을 많이 버릴수록 자유와 기쁨은 한없이 늘어나게 됩니다.
*수계교육을 받는 여행자들이 삼보일배를 하고 있는 모습. 출처 : 조계종 홈페이지
나는 우리가 버려야 품목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체감할 수 있는 매우 사실적 것들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하게 ‘세속적인 욕망의 포기’라는 한 줄의 선택에만 머문다면 우리 삶이 구체적으로 공감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먼저 우리 현실의 삶터에서 매우 행복하고 좋아 보이는 것에 대한 반시대적인 반성적 사유가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매우 익숙하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집단적으로 동의한 것들에 대한 비판적 사유와 뒤집기가 있어야만 미련 없이 버려야 할 것을 버릴 수 있습니다.
현대사회에서 우리 모두는 너무도 많이, 깊이, 자본의 사유와 자본의 방식에 길들여 있습니다. 출가자는 대량 생산, 대량 소유, 대량 소비가 행복이고 삶의 순환이라고 보는 자본주의적 사고와 방식에서 떠나야 합니다. 세속은 말할 것도 없고 오늘날 한국과 세계의 많은 종교집단들이 교회를 세습하고, 과다한 건축불사에 매달리고, 돈에 집착하고 독점하는 등의 병폐는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겉으로는 청빈과 사랑을 외치면서도 뿌리 깊이 박혀있는 자본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내걸고 포교를 내걸며 교세확장의 성장과 독점에 매몰되어 있는 종교계의 현실은 종교인들이 자본의 허망함과 부질없음을 통찰하고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의 교묘한 위장과 전이가 종교계에 많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본을 중심에 두고 사고하고 사는 방식을 버리고, 깨달음과 나눔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 길이 바로 출가입니다.
초발심 행자님! 수행자는 돈에 묶이면 즉시 도가 묶이게 됩니다. 돈에서 자유로우면 도가 자유롭습니다. 또한 자본과 더불어 권력의 유혹에서도 벗어나야 진정한 출가일 것입니다. 출가교단도 조직사회이기 때문에 교단을 유지하고 본연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법과 제도와 소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깨달음과 나눔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제도와 소임을 세속의 권력과도 같이 사고하고 사용할 위험이 늘 따르고 있습니다. 세속의 부질없는 권력욕은 말할 것도 없고 앞으로 인연이 있어 직책을 맡게 되면 권좌가 아닌 수행과 자비를 구현하는 선방편으로 대하기 바랍니다. 만약 세속에서 못다 이룬 소유와 지배의 욕망이 그대로 종교의 틀에서 변형된다면 이는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는 출가정신의 위반이 될 것입니다.
행자님! 그리고 출가수행자의 길을 걷노라면 세속에서 생각하지 못한 함정에 빠지지 쉽습니다. 그것은 뭇 사람들의 대접과 찬사와 존경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출가수행자를 믿고 존경합니다. 그것은 수행자가 청빈을 지녔고 깊은 지혜로 자비를 구현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속의 사람들이 보내는 기대와 찬사에 자칫하면 우쭐해하고 교만해질 위험이 제 경험으로 비추어보아도 늘 잠복해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를 두고 종교인들의 ‘아주 특별한 권력’이라고도 합니다. 공경은 타인의 몫이고 무심과 하심은 수행자의 몫입니다. 찬탄받고 존경받으려는 마음도 수행자가 반드시 버려야할 품목입니다.
행자님! 이렇게 글을 쓰고 있노라니 버려야 할 것이 크게 혹은 세세하게 많습니다. 또 버려야 할 것들 중 이런 것은 어떻습니까? 게으름도 버려야 하고, 남과 비교하여 우쭐해하고 우울해하는 습성도 버려야 하고, 남의 시선과 평가에 일희일비하는 감정도 버려야 하고, 용기없는 행위도 버려야 하고, 무관심과 무책임도 버려야 하고, 자기 삶의 테두리에 갇히고 이웃의 삶을 배타하는 속좁은 소견도 버리고.... ...
그런데 행자님! 버려야 할 것들을 곰곰이 눈여겨보노라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버려야 할 것들과 이별하지 않는다면 세속에서도 결국은 살아가는 일이 힘들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인류문명을 염려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반성하고 비판하며 대안을 모색하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출가수행자는 얼마나 좋은 환경인가요? 자본의 시스템과 규칙이 만들어내는 경쟁과 속박에서 벗어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출가해서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하고 미련을 두어 그것들과 교묘하게 손을 잡는다면 세속의 벗들은 이렇게 돌직구를 날릴 것입니다. “이렇게 살 거면 왜 출가하셨습니까?” 그러니 포기할 건 포기하면서 그 자체로 당당해지고 빛나는 수행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행자님! 이제 갓 풋풋한 초발심에 설레고 의욕이 넘치는 행자님에게 너무 무거운 부담을 주어 우울하게 하지는 않았는지 소심한 마음이 저어됩니다. 하지만 평생을 더불어 수행하는 선배이자 도반으로서 노파심과 애정임을 알아준다면 마음에 큰 위안이 되고 기쁨이 되겠습니다. 행자님이 공양간에서 공양 지으면서 틈틈이 읽었던 초발심자경문의 한 구절 새겨봅니다. 불연세속 시명출가 不戀世俗 是名出家.
화려한 봄날입니다. 산속 나무와 절집안의 꽃들에게도 무심한 눈길도 주면서 공부하면 참 멋지겠습니다. 아울러 산 너머 들판에도, 절집 너머 세간에도 따뜻한 눈길을 주면서 공부하는 것은 더더욱 멋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