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알렉산더>에서 알렉산드로스와 어머니 올림피아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알렉산드로스가
아버지 필리포스를 죽였을지 모른다는 추축도 있다. 사진 <영화> 알렉산더에서.
개인이나 국가의 운명이 이미 정해졌다는 식의 운명론은 고대 비극을 통해 끈질기게 전해진다. 대표적인 게 오이디후스다. 오이디푸스는 트로이의 전설과 함께 그리스 문학 가운데 가장 많이 회자되는 비극 공연의 단골 메뉴다.
비극은 델포이 무녀의 저주에서 비롯된다. 인근에 있는 테바이의 라이오스 왕은 델포이 신전에 왔다가 무녀로부터 기분 나쁜 예언을 듣는다. 아들을 낳으면 아들이 자신을 죽일 뿐 아니라 가문의 멸망을 가져오리라는 것이다.
신탁을 들은 뒤 라이오스 왕은 왕비 이오카스테와 잠자리를 피했다. 그런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왕비가 왕을 술에 취하도록 한 다음 동침하여 아들을 얻는다. 왕은 신탁이 실현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아기의 복사뼈에 쇠못을 받아 키타이론 산에 버린다.
오이디푸스를 처음 발견한 목동은 자식이 없던 코린토스의 폴리보스 왕에게 데려다주고, 아이는 못 박힌 자리가 부어서 '부은 발'이란 뜻의 '오이디푸스'란 이름을 갖게 된다. 오잉디푸스는 궁전에서 왕자로 자라는데, 장성한 뒤 사람들과 말다툼을 벌이던 끝에 출생의 비밀을 듣게 된다. 양부모로부터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오이디푸스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풀기 위해 델포이 신전으로 향한다. 이때 무녀는 그에게 이런 신탁을 내린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것이다."
오이디푸스 신화
이 예언을 듣고 누군들 기분이 상하지 않겠는가. 오이디푸스는 간신히 화를 참으며 신전을 내려오다 갈림길에서 두 사람과 마주친다. 이곳이 바로 운명의 갈림길이 될 줄은 모른 채. 오이디푸스와 마주친 둘 가운데 부하인 듯한 사람이 오이디푸스가 길을 비켜주지 않자 말을 베어버린다. 그렇지않아도 화가 나 있던 오이디푸스는 자기 말을 죽인 사람과 상전을 그 자리에서 죽이고 만다.
이후 오이디푸스는 테바이를 지나던 중 스핑크스를 만난다. 반은 사자, 반은 여자인 스핑크스는 테바이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를 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면 잡아먹어 테바이인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 존재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는 이렇다.
"한때는 두 발로, 한때는 세 발로, 한때는 네 발로 걸으며, 일반적인 법칙과는 반대로 발이 많을수록 약한 존재는 무엇인가?"
오이디푸스는 말한다.
"인간이다."
어린 시절엔 네 발로 기어 다니고, 커서는 두 발로 다니지만, 늙어서는 지팡이에 의지해 세 발로 걷는 게 인간이라는 것이다. 스핑크스가 또 다른 수수께끼를 냈다.
"두 명의 자녀가 있는데,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낳으며, 이 한 명이 다시 다른 한 명을 낳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오이디푸스가 대답한다.
"낮과 밤이다."
오이디푸스가 정답을 맞히자, 스핑크스는 바위에서 몸을 던져 죽는다. 테바이인들은 자신들을 괴롭히던 스핑크스가 죽자 기뻐하며 홀로 된 왕비와 오이디푸스를 결혼시키고 그를 왕으로 추대한다. 왕이 된 오이디푸스는 두 아들과 두 딸을 낳고 테바이를 잘 다스린다.
2011년 상영된 예술영화 <그을린 사랑>. 오이디푸스신화를 모티브로 한 영화다.
그러던 어느 날 테바이에 역병이 닥친다. 오이디푸스는 델포이 신전에 신하를 보내 해결 방법을 묻는데, 무녀는 뜻밖의 대답을 한다.
"선대 왕인 라이오스 왕이 죽은 이유를 밝히지 않으면 재앙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무녀이 말에 다라 사건을 파헤치라는 명령을 내리고, 결국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된다. 테바이에 오기 전 갈림길에서 자기가 죽인 사람이 바로 친부인 라이오스 왕과 시종이었고, 자신의 아내가 바로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오이디푸스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때 왕비 이오카스테는 복사뼈의 상흔을 보고, 지금의 남편이 실은 자기가 낳은 아들이었음을 확인하고는 자살하고 만다.
서사시에서 오이디푸스는 이오카스테가 죽은 뒤에도 계속 나라를 다르리던 중 이웃나라와 전쟁을 치르다가 죽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에선 오이디푸스가 비탄에 빠져 자기 두 눈을 ㅉ리러 맹인이 되어 딸 안티고네와 함께 유랑하다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두 아들은 서로 싸우다 함께 죽어 비극을 더했다는 것이다.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이 비극의 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을 세웠다. 서너 살 아이가 아버지를 제치고 엄마를 독차지하고 싶은 심리를 설명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이런 비극이 서사시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비극이 동정심과 두려움을 통해 유사한 감정을 해소시켜주는 카타르시스 기능을 해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비극은 신화와 마찬가지로 운명은 어찌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이란 도그마를 각인시키는 건 아닌가.
신화의 세계에서도 출발부터 불운한 예언이 등장한다. 크로노스도, 아들 제우스도 자기 아들에 의해 왕좌를 뺏길 것이란 예언을 듣는다. 그로부터 죽고 죽이는 세상의 권력 쟁탈과 폭력이 시작된다. 호메로스는 <일리아스>에서 아킬레스의 말을 빌어 '인간은 괴로워하며 살도록 운명지워진 존재'라고 말한다. 만약 운명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를 바꾸려는 노력이나,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구스타프 모로의 '스핑크스와 오이디푸스'
눈이 멀어 유랑하는 오이디푸스. 사진 <오이디푸스왕>에서.
혹시 오이디푸스의 기막힌 불행은 운명 때문이 아니라 무녀의 무절제한 저주와 이를 무조건 받아들인 인간의 무지 때문은 아닐까. 오이디푸스의 삶을 운명적 코드가 아니라 삶의 코드로 살펴보면 어떨까.
오이디푸스의 '부은 발'은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내면의 상처로 볼 수 있다. 누구나 자기만의 상처를 가지고 있고,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는 콤플렉스가 되어 삶의 길을 내디딜 때마다 두고두고 그 아픔을 되새기게 한다.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절대적인 돌봄이다. 그래야 엄마와 애착관계가 형성되는데, 어린 시절 그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사람을 잘 믿을 수 없게 된다. 노이로제와 불안 증후군이 잠복하게 된다.
그런데 오이디푸스의 부모는 어땠는가. 부모의 절대적인 보호가 필요한 어린 아들을 오로지 예언에 기대 무정하게 버렸다. 복숭아뼈에 못을 박은 게 아니라 어린아이의 마음에 대못을 박은 것이다.
상처를 이겨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상처가 우리의 전 존재를 덮어버리지 않도록 자신이 더 커져야 한다. 그리고 성장을 통해 독립적인 개체가 되어야 한다. 네 발로 기다가, 뭔가를 붙잡고 걷다가, 타인을 의지하지 않은 채 자신의 두발로 독립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스핑크스가 말한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리스인생학교>(조현 지음, 휴) 6장 '최고의 예언 신전, 델포이'중에서
*델피의 아테네 신전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