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쥐/들쥐 한 마리가 송아지 한 마리 가격이었다니!
현대는 먹을 것이 너무 넘쳐서 문제다. 물론 여기엔 기근에 시달리는 국가들을 제외하고 평균적으로 살고 있는 지구 민족을 기준으로 말한다. 또 다른 비교는 오늘날은 세 끼를 챙겨 먹는 다는 거다. 하지만 바로 몇 백 년 전의 유럽 같은 경우는 하루 세끼가 아니라 두 끼만 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먹을 것이 궁해서였는지 아니면 이들의 전통적인 관습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기야 많이 먹는 것 보다는 적게 먹는 것이 건강에도 좋다는 결론에 다다른 시대이니 이런 두 끼가 오히려 좋은 습식 이었을 지도 모른다.
오늘은 인간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처해진 환경에 따라서 어떻게 변모했는지, 특히 먹을 것이 궁한 기근 시에는 어떠했는지를 보자.
독일의 슈푸랑켈 교수가 한 심포지엄에서 중세 때 인간이 먹은 음식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다. 물론 정상적인 생활 양식일 때 가 아니고, 기근이 들었던 바로 중세 유럽(500-1500/1700)중의 한 시기다.
그가 택한 연구시기는 바로 유럽의 30년 전쟁 때다. 이 전쟁은 1618년에서 1648년 까지 꼬박 30년이 걸린 전쟁이었기에 이름도 ‘30년 전쟁’이다. 3년도 아닌 30년간이나 전쟁을 했다면, 민중들의 삶은 어떠했을지 쉬이 짐작이 간다. 그리스도교 지배 아래서 잘도 지켰던 윤리와 도덕은 깡그리 깨어져 버리고 그 자리에 강간, 약탈, 고문의 일상사로 변모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배고픔이었다. 먹을 것이 없다 보니 굶어 죽는 이들도 수두룩했고,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어떤 이들은 일단 배를 채우고 보자는 마음에서 상한 음식까지도 먹었다. 시골에서는 병들은 소까지 먹어 치운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배는 채웠다지만 상한 음식과 병든 소를 먹고 난 뒤 이젠 병이 들어 죽기도 했다.
이 전쟁 중에 한 마을이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면 그 심각성을 엿 볼 수 있다. 전쟁 전에 90가구가 살았던 마을이 1644년엔 11가구가 살아 남았고, 1년이 지난 1645년 8가구 만 살아 남았다 하니 어느 정도 살기가 힘이 들었는지 짐작이 간다. 좌우지간 어림 잡아서 약 90%가 이 전쟁으로 피해를 보았다고 보면 된다고 한다. 여기에 관한 많은 설명은 그만두고 그림 한 장으로 당시의 전쟁 상황을 대변 하기로 하자.
한 자료를 통해서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보자; 30년 전쟁시기 때인 1634년에서 1635년까지인 2년간의 자료가 독일 그뤼넨부르크의 한 성당/교회의 기록부(Kirchenbuch)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책자는 교회에서 신자들의 영세 날, 결혼 한 이들의 이름, 날짜, 죽은 사람의 기록, 그 외에 특수한 기록 등등을 생생하게 기록으로 남겨진 문서다. 이 그뤼넨부르크의 교회기록 문서를 남긴 자는 요한 로자리우스라는 신부/목사였다(이 글의 맥락으로 신교인지 구교인지가 불 분명하기에 신부/목사로 칭한다. 하지만 이 지역은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지역인지라 신교일 가능성이 크다고 필자는 본다)
그의 기록을 보면: 당시에는 각 도시와의 교역 때문에 도시의 특성에 따라 마차길이 존재했다. 이 길은 장사치들을 위해서다. 장사치 들이 마차에 실은 물건을 잘 운반 할 수 있도록 이런 길을 만들어 두고선 마차가 통과 때 마다 통행세를 받았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고속도로 역할이다. 하지만 그뤼넨부르크에 만들어졌던 이 마차길은 이 시기엔 다른 역할을 했다. 이젠 장사치들이 이 길을 다니는 것이 아니라 1621년 이래로는 90번이나 군인들이 점령했다. 이렇게 머문 군인들도 먹을 것 때문에 온 도시를 다니면서 약탈을 일삼았는데 이 도시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먹을 것이 없어서 허덕이던 민초들은, 그나마 남은 음식도 군인들에게 다 빼앗기자 더 기근에 시달렸다. 배가 너무 고팠던 민중들은 평소에 쳐다보지도 않던 것에 눈을 돌렸다 바로 나뭇잎, 풀 그리고 유피까지 먹어 치웠다 한다, 우리 역시 어려운 시기에 솔가지나 칡뿌리를 캐 먹었다 하니 이런 류는 사실 그리 큰 관심거리는 아니다.
문제는 평소엔 전연 눈도 돌리지 않았던 생각 만 해도 소름 끼치고 토해 낼 것 같은 것을 먹어 치웠는데 바로 쥐고기다. 시궁창 쥐, 집쥐, 들쥐 그리고 산 쥐까지 보는 대로 잡아서 식용으로 이용했다. 이것마저도 못 구해 안달이었다 보니 당시 쥐 한 마리 가격이 4 굴덴(Gulden)에 팔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사실 우리는 당시 돈인 굴덴의 가치를 잘 모른다. 비슷한 시대에 신학 교수였던 루터가 일년 간 받은 월급이 8두카텐(Dukaten)이라 하니 어쨌든 돈 단위는 다를 지라도 엄청난 돈 일 것 같다. 증명으로 슈푸란겔 교수가 이 쥐 한 마리 값은 당시의 송아지 한 마리 값과 유사하다고 했으니 말이다. 사람들이 먹을 것도 없는데 어찌 큰 송아지를 키웠겠는가? 짐작컨데 이들은 이런 쥐고기 음식(?)을 통해서라도 몸에 기름기 섭취를 원했을 거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젠 쥐를 잡아 먹는 고양이에게도 눈 독을 들였다가 드디어 개고기까지도 먹었다. 사실 한국인들의 개고기 섭취는 그리 낯선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럽인들이 개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하나의 타부에 속했던 터였기에 어마어마한 사건에 속한다.
로자리우스 신부/목사의 다른 기록도 보자; 당시 사람들이 배고픈 나머지 무덤을 파헤쳐 그 미이라를 먹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선 미이라에 대한 해석도 달랐다. 이런 미이라는 결코 인간의 시체가 아니라 일종의 ‘고기’(Fleisch)였다는 단어를 덧붙였다. 이렇게도 배가 채워지지 않자 어떤 이들은 사람을 때려 죽여 그것을 고기 대용으로 먹었다는 사실을 로자리우스 신부/목사가 교회 기록부에 남겨 놓았다. 근데 필자는 궁금하다; 이런 기록을 한 신부/목사도 굶주림에 지친 나머지 이들과 유사한 음식들(?)을 같이 섭생했는지? 아니면 그는 잘 먹고 지내면서 이렇게 목숨을 연명했던 당시 민중들의 삶을 초연하게 이렇게 기록으로만 남겼는지?
30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시 페스트가 번지기 시작했다. 특히 1635년 6~9월 사이에 그륀베르크는 페스트로 1224명의 목숨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는데 당시의 이 자그마한 시민의 반이 죽어 나갔다고 한다.
20세기의 독일의 유명한 서정시인인 브레히트(Brecht; 1898-1956)는 당시의 이런 상황을 ‘일단 (게걸스럽게) 먹는 것이 해결 되어야 그 다음 윤리가 적용된다’라고 표현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우리의 말과 유사하다. 말하자면 인간의 가장 기본 구조인 의식주가 해결 된 뒤라야만 도덕, 윤리, 문화 종교 등등을 구축 할 수 있다는 뜻일 게다. 만약에라는 가정을 해보자; 이렇게 쥐고기를 먹으면서 연명하는 굶주린 사람들을 교회/성당에 붙잡아 두고선 교리인 삼위일체가 어떻고, 하늘 나라와 천국이 어떻고 하면서 설교와 강론을 한다면 아마도 이들 사이엔 당장에 폭동이 일어 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의식주가 해결 된다는 전제 조건이 주어질 때야만 윤리와 도덕이 튼튼하게 지탱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모진 운명을 뒤로하고 살아 남은 자들이 번성 시킨 200여년이 흐른 후 후손들의 모습이다. 이 때는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1870~1871)이 일어났다. 이 전쟁 때도 많은 시민들이 죽어나갔다. 물론 이 때는 음식 때문에 고생을 했지만 중세와는 비교가 안 되었다. 이들은 계몽주의 덕택에 미리 음식을 나름 준비 할 수 있었다. 말고기 같은 것을 소금으로 절이거나 통조림을 만들거나 했다. 그리고 신선한 고기로서는 종달새, 지빠귀, 야생비둘기, 까마귀등등을 잡아 먹었다. 이것이 동이 나자 다시 고양이고기, 쥐고기, 개고기에 눈독을 들였다. 특히 당시의 유럽 중 파리를 보면, 이곳은 문화, 예술, 학문 그리고 완전히 사치에 빠진 삶의 중심지였다. 동시에 서구의 여러 나라들 중 고약한 냄새가 가장 많이 나는 중심지로 속하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파리가 급격하게 도시화 되면서 길거리에 넘치는 쓰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쓰레기 치우는 것이 문제로 대두 되었고, 이 쓰레기 속에서 살아갔던 쥐 때문에도 고민에 빠졌다. 당시는 동서양과 큰 교역이 활성화 되었던 터라 많은 쥐들이 교역 짐 속에서 따라 들어 왔다 보니 더 심각한 상태였다. 하여튼 불결한 파리의 거리, 어두침침한 곳곳에서 악취를 풍기는 이곳에서 쥐가 판을 치던 분위기를 상상 해 보면 되겠다.
이런 분위기에서 쥐고기가 또 등장 했다. 때는 1870년의 11월 17일로 날짜까지 정확하게 남겼다. 이름 있는 유명한 사람들 10명이 한 가정집에 모였다. 모인 이유는 아래에 나오는 메뉴판 음식 시음 때문이다. 자 이들이 무엇을 먹었는지? 그리고 이들은 이 음식들을 시식한 후에는 각 음식에 대해 어떻게 평했는지를 보자.
<스프>
1= ‘말고기 육즙에다 수수 섞은 스프 요리’.
2= ‘개의 간을 얇게 썬 조각 요리’.
3= ‘고양이 등 밑 살 자른 것과 마요네즈 곁들인 요리’.
<전채 요리>
4= ‘개의 어깨 살을 숯불에 구어 토마토 소스와 버무린 요리’
5= ‘고양이 고기를 후추로 요리해 버섯을 곁들인 요리’
6= ‘개의 뒷다리에 푸른 완두콩 곁들인 요리’
7= ‘(식용이 안 되는) 쥐고기에다 로베르트 소스을 곁들인 요리’.
8= ‘작은 쥐고기와 개의 뒷다리에 고명을 곁들여서 후추 소스를 친 요리’.
9= ‘육즙에다가 베고니아(추해당) 넣은 요리’.
10= ‘건포도가 든 푸딩과 말의 골수 첨부한 요리’
자 지금까지 봐온 바와 같이 이 메뉴 판에는 당시 중세 때 기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먹었던 쥐고기, 고양이고기, 개고기 요리가 1870년의 정식 메뉴판에 다시 등장 했다. 맛있게 이런 음식을 먹고선 평가서까지 기록으로 남겼다. 사실은 왜 이런 음식을 먹었고, 왜 시식 후 평가서를 남겼는지 너무 궁금하다. 하지만 알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다. 유명했다는 이들이(Prominente)의 시식 후의 평가서에 이런 음식들을 즐기면서 먹었다는 사실이다. 자 그럼 이 음식에 대한 이들의 평을 보자.
1번을 보자 ‘말고기 육즙에다 수수 섞은 스프 요리’ 에 대한 평은: 수수는 약간 단단 했지만 하지만 전체적인 맛은 탁월하다는 평이다.
2번은 ‘개의 간을 얇게 썰은 조각 요리’의 평은: 우리들 10명 중의 대다수가 개의 간 맛은 거세된 수양의 신장 맛과 유사했다고! 그리고 혀에 녹을 정도로 부드럽다고! 평했다.
3번의 ‘고양이 등 밑 살의 자른 것과 마요네즈 곁들인 요리는 그 맛이 아주 탁월 했고, 흰색 부분의 고기는 시식하기도 전에 벌써 보기에도 아주 먹음직스럽게 보였다고! 이 고기가 특별히 연했다 보니 몇몇 이들은 이 고양이 요리가 차가운 어린 암소 고기 맛과 유사했다고!
4번의 ‘개의 어깨 살을 숯에 구운 것 에다 토마토 소스’는 특별히 연한 고기였고, 몇몇 손님들은 알프스의 양고기 맛과 낙타고기와 비교가 된다는 평을 했다.
5번째의 “고양이 고기를 후추로 요리해 버섯을 곁들인 요리는 사실 약간 질기기는 했지만, 만약에 여기 모인 이들이 다른 음식을 먹지 않은 배고픈 상태였다면 이주 호감 가는 음식에 속한다는 평이다.
6번의 “개의 뒷다리에 푸른 완두콩 곁들인 요리”는 식초에 너무 절였다 보니
식초 맛이 더 강했다. 이 고기 역시 나쁘지는 않았지만 약간 섬유질이 많아 질긴 것이 흠이었다.
7번은 (식용이 안 되는) 쥐고기에 로베르트 소스을 곁들인 요리에서는 이 쥐고기의 맛이 특별히 베리 굿!(sehr gut!)이다고 평했고, 이 쥐고기가 새고기 맛과 너무 유사하다는 평을 내렸다. 한국이야 그래도 바다에서 나는 ‘쥐고기’를 먹기 때문에, 땅의 쥐라는 단어 자체에는 그리 큰 거부 반응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 하는 쥐고기를 먹는 다는 것! 왠지 생각만 해도 메스꺼워진다.
8번의 ‘작은 쥐고기와 개의 뒷다리를 고명을 곁들여서 후추 소스를 친 요리’에서는
특별히 개의 뒷다리 고기 맛이 좋았다고 평했다. 특히 다 익히지 않고 적당히 익혀 피가 보이는 곳의 맛이 우월했다고는 평가를 내렸다. (이 말은 서양 요리 중에는 고기를 다 익히지 않고 피가 벌겋게 그냥 배여 나오는 요리를 의미하는 듯 하다. 지금도 이들은 고기를 덜 익혀 피가 적당히 흘러나오는 고기를 아직도 먹는 것을 종종 보았다). 이 평가자들은 사실 너무 익힌 고기부분보다도 덜 익어 피가 보이는 고기부분이 맛이 월등 했다는 견해를 밝혔다. 쥐고기 평에서는 쥐고기를 너무 익였다 보니 그 고유 맛이 좀 사라진 듯 하고 섬유질이 많았다고!
9번의 추해당(베고니아)로 만든 스프는 승아(Sauerampfer)와 유사했다고! 이 스프는 승아와 비교를 했지만 사실은 승아보다는 더 강하고 진한 맛이라고. 이런 음식은 소금간이 많이 들어간 음식을 먹은 후에 먹는다면 염분을 중화시키는데 최고로 보인다고!
10= “건포도가 든 푸딩과 말의 골수요리는 좌우지간 ‘최고의 맛’ 이었다고 평했다.
지금 막 이런 음식 평을 읽고 난 우리도 입에 군침이 도는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메스꺼움이 느껴 질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참여 했던 열 명의 유명인들은 10가지의 메뉴의 모든 음식들의 그릇을 을 다 비웠을 정도로 음식들이 너무나 흡족했고, 먹는 동안도 한없는 즐거움을 즐겼다는 후평을 슈푸란겔 교수가 언급했다.
슈퓨란켈 교수의 또 다른 언급이다: 게오포라는 자가 아침식사로 들쥐고기를 먹었다는 기록을 전했다. 이 고기를 먹은 그는 들쥐 고기의 평까지 했다. 이 들쥐고기는 새고기 맛과 유사하는 견해다. 이런 그의 견해는 앞의 10명의 평과도 같다. 그는 특히 앞다리의 근육은 뒷다리보다 연하다는 평을 내렸다. 그렇지만 뒷다리 고기는 살이 풍성 하다는 정확한 보고까지 남겼다. 머리를 자르고 털을 벗기고 내장을 빼낸 쥐고기의 무게는 130 그람인 반면에, 간이 크고 먹음직스러운 쥐의 무게는 30그람이 더 많은 160그람 이란다.
주목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은 기근이 들면 배고픈 나머지 못 먹던 음식도 먹게 된다는 사실과 또 그런 음식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영역으로 들어와 고착 할 수도 있겠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두 가지 경우를 위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궁핍과 기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먹었지만, 200년이 더 흐른 후는 즐기면서 이런 특수고기(?)를 먹었다는 사실을 보면 말이다. 그런 의미로 우리는 못 먹는 음식이라는 것도 다시 한번 생각 해 볼 수 있다. 우리가 못 먹는 것으로 이미 박아 두었기 때문에 못 먹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선택할 여지가 너무나 많은 음식들이 있기에, 평소엔 뒤로 밀렸던 이런 희귀 음식들이 유사시에 다시 등장 하게 되는 건지?
한국인 중의 일부는 개고기를 아무 거리낌 없이 지금도 먹고 있다. 유럽도 궁핍 할 땐 개고기까지 먹었다는 사실을 부인 할 수 없는데, 어찌하여 지금 유럽인들은 개 고기 먹는 다는 자체를 아주 나쁜 행위로 몰아가고 있는 걸까?
지난번 글에서 콘크라베를 거쳐 교황이 된 이들의 식탐 얘기도 해 보았다. 이들이 잘 먹었던 음식기록을 다시 한번 여기 옮겨 보면: 거세한 수탉, 공작새 요리, 꿩고기, 메추라기 요리, 두루미 요리, 와인에 절인 삶은 소 혀 요리, 와인에 절인 삶은 돼지궁둥이 요리, 거세한 수탉 요리, 비둘기 요리, 돼지 배 요리, 토끼 튀긴 요리, 염소간 요리, 송아지 발 요리, 개구리 요리, 심지어 곰 고기까지! 너무도 궁금하다. 기근이 일어나 굶어 죽을 지경이 되면 이들 역시 개, 쥐, 고양이까지 먹어 치웠을까? 배가 고파 눈이 빙글빙글 돌아가지만 금으로 장식된 옷/모자/십자가를 쥐고선 근엄하게 그냥 앉아 있었을까? 필자는 그들이 유사시에 어떤 상황을 펼칠지 참 궁금하다. 하지만 어쩌면 이들이 굶어 죽지 않게 측근들이 미리 어떤 조치를 했을 것 같다, 교황이니까! 역사 속에서 늘 특별한 존재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