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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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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무섭니? 세상이 무섭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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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자존심 대결



글의 주인공 청소년들은 살레시오 남녀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마자렐로센터>와 <살레시오 청소년센터>에 현재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법원에서 ‘6호처분’이라는 재판을 받았습니다. '6호 처분’이란 소년법 제32조에 의한 보호처분을 말합니다. 비행성이 다소 심화되어 재비행의 우려가 있는 청소년을 교육을 통해 개선하기 위한 법입니다. 센터에 머무는 법정기간은 6개월이며 퇴소 후 집으로 돌아갑니다.

주인공 청소년들 가슴에는 대부분 아픈 가정사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린 나이에 인생의 산전수전을 참 많이 겪었습니다.
이 글은 유혹과 열정, 막무가내 용기로 살았던 자신들의 경험을 진솔하게 들려주면서 그것을 통해 같은 청소년에게 꼭 해 주고 싶은 말을 전하는 또래 멘토들의 이야기입니다.   
 


영화다우더내선.jpg

*강압적인 엄마와 그런 엄마를 무서워하는 딸의 갈등을 다른 영화 <다우더> 중에서.



집을 나온 경험이 있는 청소년들에게 어른들이  
“왜 집에 안 들어갔는데?”
하고 물어보면

“엄마가 무서워서요.”
“아빠가 무서워서요.”
“들어오면 죽인다고 했어요.”
라고 말할 것이다. 이건 우리들의 진심이다. 아니,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범죄를 저지른 얘가 고작 엄마, 아빠가 무서워서 집에 못 들어갔다고? 믿기지 않을 것이나 정말이다. 집에 들어가지 않으면 밖에는 더 두렵고 상상 못할 일들이 있는데 우린 거기까지 생각을 못한다. 가출을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냐를 생각하기 보다는 지금 당장 집에 들어가면 야단치고 소리 지르고 맞는 것이 더 두렵고 무서운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중3일 때 같은 학교 미소라는 1학년 동네 후배가 있었다. 하루는 그 얘 집엘 갔는데 미소 오빠와 그 오빠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이 소년원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됐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나는 그날 그 오빠들과 같이 놀고, 또 내 친구들도 불러서 노래방도 갔다. 며칠 후 또 연락이 와서 같이 놀다 저녁이 되어 집에 가려는데 미소가 자고 가라고 잡았다. 엄마는 일 나가고 아무도 없는 집. 그래 자고 가자. 했는데 그게 하루가 되고 이틀이 되니까 이제는 집에 더 가기 싫었다. 분명 화가 나 있을 엄마가 무서웠다. 엄마한테 계속 연락이 오니까 더 무서워졌다. 결국 미소 집까지 찾아온 엄마한테 실컷 두들겨 맞고 집에 들어 왔다.
“너 때문에 못살아, 못살아. 벌써부터 남자 새끼도 아닌 것이 남에 집에서 잠이나 쳐 자고 말이야. 그 새끼들은 뭐하는 것들이냐. 뭐하고 싸돌아 다녔어?”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엄마는 나를 사람 취급도 안 하는 것 같았다.
“엄마가 전화했을 때 너, 집이라고 했잖아.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그럴 수 있지. 뭐가 안 돼. 엄마는 그런 적 한 번도 없어? 없는 거야?” 점점 짜증이 났다. 나도 듣고만 있지 않겠다는 오기가 올라왔다.
“미친년, 너 같은 것을 자식이라고…… 아이구.”   
"뭐? 미친년? 아무리 엄마라고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거야? 마치 머리끄덩이를 잡혀 길바닥에 내팽개쳐진 기분이었다. 자존심이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긴 말 하지 않고 통보했다.   
“됐어. 차라리 집을 나갈게. 이제부터 안 들어오면 되지?”
하면서 집을 나왔다. 엄마가 나를 다 버려진 아이로 취급했으니까 좋아. 엄마가 생각한 대로 그대로 살아주면 될 것 아니야.


그날 밤도 미소네 집에서 오빠들이랑 어울려서 놀고, 노는 날만큼 학교도 빼먹고 그러다 보니까 등교 안 하는 날짜가 훨씬 많아졌다. 계속 미소네 집에만 있을 수 없어서 아는 언니 집에도 몇 번 왔다 갔다 하면서 잤으나 이제 갈 때가 없었다. 하지만 큰소리 치고 나온 집을 내 발로 다시 들어가 엄마 얼굴 보기는 정말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가 없을 때 집에 들어가서 필요한 옷을 챙겼다. 또 돈이 필요하니까 엄마 귀걸이, 목걸이를 가지고 나와 길에서 천막 치고 금이나 은 산다고 하는 곳에 돈 3만원을 받고 팔았다. 그 돈으로 밥 사먹고 언니, 오빠들이랑 노는 데 썼다. 정작 후배 미소는 오빠들이랑 놀다보니 안 만나게 됐다.

이런 생활이 습관화되다 보니까 엄마 물건을 하나 더 하나 더 이러고선 엄마 금귀고리를 거의 다 팔아먹었다. 나 백일 때, 돌잔치 때 받은 금팔찌, 금반지도 다 팔아먹었다. 엄마는 할 수 없이 신고를 했고 나는 집으로 왔다.

 

난 초등학교까지는 공부를 하긴 했다. 중1 올라가면서 딸 시험 치는 날도 모르고 내 성적에 관심 없는 엄마에게 보여주나마나한 성적표도 내밀기 싫었다. 나는 선생님 핸드폰 번호를 엄마 핸드폰에서 차단시켰다.

우리는 딱히 뭘 하고 논다는 것도 없었다. 그냥 같이 모여서 얘기하고, 돌아다니고 그런 게 재미였다. 그러면서 담배도 배우고 술도 먹고 지금까지 안 하던 것을 하니까 더 재미있었다. 엄마는 계속 하지 말라고 했다.
“학교를 아주 안 가는 것도 아닌데 왜, 왜, 나는 재미있는 걸 왜 자꾸 하지 말라고 하는 거야?”
이러면서 학교는 가되 중간에 빠져 나왔다. 점심시간이 되면 밥만 먹고 나와 버렸다. 학교 아이들과 멀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아침에는 엄마가 집에 있으니까 교복을 입고 나와 지하철 화장실이나 친구 집에서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아이들과 다니면서 놀다가 돈은 없고 배가 고파서 맨 처음 절도를 한 것이 편의점에서 먹는 것을 하나 둘 훔치기 시작했다. 삼각 김밥 하나 훔치니까 두 개 훔치는 것은 더 쉬어졌다. 하루에 같은 편의점을 두세 번 들락날락하면서 훔쳤는데 안 걸렸다. 어, 안 걸리네? 하면서 우리는 또 가고 또 갔다. 훔친 물건들을 두꺼운 점퍼 안에 넣거나 허리 벨트에 끼워서 옷으로 가리고 나왔다. 하나 둘 훔치다 보니까 이것도 못 가지고 나오겠어? 하면서 가지고 나왔다. 점점 통이 커졌다. 계속 그렇게 하다가 결국 걸렸다. 너무 자주 오는데 물건을 안사니까 주인이 이상하게 생각했고 어느 날 삼각 김밥과 음료수랑 숨기고 나가려는데 어떤 오빠가 문 앞에 지키고 서 있었다. 뭔가 낌새가 안 좋아서 그냥 아무데나 놔두고 나가려고 하는데 못 나가게 했다. 경찰 아저씨들이 왔다. 나는 경찰서에 가서 다 고백하고 피해 금액 전액을 물어주고 나서야 풀려 나왔다. 편의점 주인이 CCTV를 돌려서 지금까지 없어진 물건 값을 모두 계산을 해 온 것이다. 20만원인가 30만원인가를 같이 범행했던 친구 언니가 해결해 주었다. 그때는 좀 창피하기도 했으나 아, 안 걸렸으면 괜찮았을 텐데. 그날만 거기 안 갔으면 안 걸렸을 텐데. 이런 후회만 했다. 하도 많이 하다보니깐 반성이나 다시는 안 해야지 그런 마음이 없었다.

그때 풀려나서 집으로 가야 하는데 엄마한테 혼날까봐 들어가지 않았다. 그날 인천에서 서울 반포쪽으로 갔다. 그 얘들을 안 따라가면 나는 혼자 있어야 하니까 같이 행동했다. 돈이 없어서 역무원이 안 볼 때 몰래 개찰구를 넘어가서 지하철을 탔다. 그때라도 집에 들어가 엄마한테 빌었으면 하는 후회를 여기 센터에 와서 했다.


이제는 차털이를 했다. 보통 남자 세 명에 여자 두 명이 함께 돌아 다녔다. 남자 아이들 따라서 돌아다니다가 큰 고층아파트 지하주차장에 내려가서 CCTV 위치를 잘 봐가면서 차 손잡이를 돌려 본다. 어떤 차 한 대가 열린다. 차 안에 들어가 돈 될 만한 것을 들고 나오고 차키가 있으면 차도 가지고 나온다. 신나게 차를 타고 논다. 같은 방법으로 더 좋은 차가 생기면 그 차를 아무데나 놓고 또 다른 차를 탄다. 차 안에는 동전이 많았다. 그것을 편의점에서 지폐로 바꿔서 차 기름도 넣고 찜질방에도 갔다. 만약 차에서 카드가 나오면 주인이 분실 신고하기 전에 먹을 것을 편의점에서 왕창 샀다. 담배도 몇 보루씩 구입했다. 점점 하는 범위가 넓어지고 아파트 찾아가는 숫자도 많아졌다. 하루 종일 차털이만 하다가 경기도 광주까지 간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태연하게 집에 들어와서 잠깐 있었다. 참 이상한 것은 그렇게 도둑질 하는 것은 안 무섭고 엄마가 화를 내면 어떡하지? 때리면 어떡하지? 그런 게 무서웠다. 이게 이상하다. 엄마가 뭐라 하는 게 무서웠다. 그래서 들어갈까 말까 엄청 밖에서 고민하다 들어갔다. 딱 들어갔는데 엄마가 아무 말도 안 했다. 왜 아무 말도 안 하지? 계속 혼날까봐 고민했는데 엄마가 밥도 해주고 그러는 거다. 뭐지? 왜 이렇게 잘해줘. 속으로는 비아냥거렸다.


남자 아이들한테 또 연락이 왔다. 2명이 집에서 나왔다고 했다. 또 가출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 하자는 말도 없이 차털이를 하러 갔다. 그렇게 습관화되어 지냈다. 어느 날은 훔친 차를 타고 엄청 멀리까지 갔는데 자고 일어나보니 강원도 동해까지 와 있는 거다. 남자 아이가 바다가 보고 싶어서 왔단다. 그날 밤 찜질방에서 자고 있는데 경찰이 왔다. 모두 수갑을 채웠다. 우리가 턴 남의 차 키가 서너 개가 되었다. 그걸 내가 가지고 있었는데 조사받는 와중에도 차키를 숨기려고 변기통에다 버렸다.



엄마한테 자존심 세우는 너에게


친구야.
경찰서는 조사 받으려 여기저기 다녔으나 유치장은 처음이었어. 난 아무 느낌이 없었어. 그때 나이 16살이야. 우리는 그 안에서도 철없이 장난을 쳤어. 같이 잡힌 친구 보영이 엄마가 왔지만 우리 엄마는 나타나지 않았어. 남자 아이들은 그대로 유치장에 있고 나와 보영이는 일단 보영이 엄마한테 인계돼서 유치장을 나왔어. 우리둘은 나오자마자 도망을 쳤어. 보영 엄마는 길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었어. 뒤를 돌아보다가 엄마가 우니까 보영이도 나도 다시 돌아섰어. 친구 엄마는 우리를 음식점에 데리고 가서 밥을 사 주셨어. 
“집에 안 들어와도 좋다. 밥 먹고 너희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난 우리 엄마가 아니지만 마음이 너무 아팠어. 그런데도 집에는 들어가기 싫었어. 며칠 후 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집으로 들어갔어. 엄마의 한 마디 
“왜, 밖에서 그냥 살 지? 너 마음대로 하고.”
이제 엄마는 나에게 신경도 안 썼어. 내 딴에는 그게 너무 편했어. 어떤 날은 하루를 보내면서 엄마랑 아예 말 한 마디 안 한 적도 있었어. 유치장도 경험하고 집에 오니까 내가 한 일들이 그때부터 생각났어. 소년원에 갈 것 같았어. 학교는 이미 유급된 상태였지. 몇 주 동안 계속 난 집에만 있었어. 우리가 돌아다니는 동안 차 주인들이 이미 신고를 해서 사건이 뜨기 시작했고 경고장들이 집으로 날아왔어. 그제야 무서워졌어.


친구야!
불과 두세 달 동안에 내가 이렇게 많을 걸 했구나 하면서 무서웠어. 조사를 받다보니 내가 한 일이 범죄라는 걸 알았어. 편의점 절도사건 때는 재판은 받지 않고 보호관찰 6개월을 받았어. 그 보호관찰을 받은 도중에 범죄를 한 것이었어.
난 자동차 특수절도로 처음 지문을 찍었어. 경찰서에 조사 받으려가서 열 손가락 지문을 찍었는데 그 다음부턴 경찰서에 가면 내 이름과 엄지손가락 지문 하나면 그 전에 조사 받은 것이 다 떴어. 그리고 이제는 조사받고 나서 나 스스로 각 페이지마다 자연스럽게 내가 지문을 척척 찍는 거야. 몇 번 해보니까 내가 알아서 찍는 거지. 그게 한 번이 힘들지 두 번째 부터는 너무 쉬운 거야.


친구야.
내가 무서워해야 하는 건 그거, 지문 찍는 걸 척척 알아서 찍는 내 자신이 무서웠어. 난 한 달 정도 아이들을 안 만나고 그냥 집에 있었어. 거의 밖에 안 나갔어. 학교 복학도 알아봤어. 이것저것 사고를 친 다음에 말이야.


친구야!
난 집에 들어가서 잘 지내고 조사도 잘 받고 잘 생활하고 있었어. 그래서 나는 이제 아무 일 없겠지 한 거야. 얼마나 어리석니? 우리가 저지른 일들이 그렇게 쉽게 마무리되는 게 아닌데 말이야. 법은 냉정하고 샅샅이 밝혀내. 2월 17일 재판 판결을 받았어. 2월 18일 아니면 19일에 학교를 복학할 거라 기대하고 있었는데…….


친구야!
이곳 센터에 와서 한 달 반 동안은 적응을 못했는데 적응이 되니까 살만 했어. 밖에서는 엄마하고 한 마디도 안 했는데 엄마와 대화가 엄청 많아졌어. 그 점에 대해서는 진짜 좋았어. 면회 때 엄마를 만나서 엄청 울고, 엄마도 참 많이 울었어.


친구야.
난 엄마가 하는 말이나 요구가 사사건건 간섭하는 것 같았어. 왜 그렇게 늦게 오니? 누구랑 있었어? 왜 집에 안 들어오니? 그때는 그런 게 관심이 아니라 간섭받은 거라 생각했어.
여기 와 있으니까 엄마가 엄청 보고 싶었어. 면회 오기 전까지 전화가 매일 오긴 했으나 평소에 말을 안 했으니까 뭐라 말을 해야 될지 몰랐어. 엄마랑 대화하는 것을 까먹은 것처럼 말이야. 난 엄마에게 어떻게 지냈냐? 물어보면서 하나 둘씩 얘기 했어. 여기 있었던 일. 이거 이거는 싫었다. 괜찮은 것 같다. 말문이 트이니까 대화 하는 게 쉬워졌어. 보고 싶다는 말도 어색하지 않았어. 엄마와 친해진 게 제일 좋은 것 같아.


친구야.
여기서 지내다가 집에 가면 난 엄마랑 또 싸울 수가 있어. 그러나 난 아무리 엄마가 나가라고 화를 낸다하더라도 난 결코 집을 나오지 않을 거야. 엄마에게 조금 고개 숙이면 어떤가? 그런 생각을 여기서 엄청 많이 했어. 엄마 보란 듯이 집을 나가지만 않았다면 난 지금쯤 집에서 잘 있을 텐데……. 이런 생각을 많이 했어.


친구야.
부모랑 싸울 때 조금만 다르게 행동해도 나처럼 이렇게 안 될 수 있어. 한 번 자존심 부려서 나가게 되면 점점 더 안 좋은 짓을 하고, 범위가 넓어지다 보면 결국 잡히게 돼 있어. 또 언젠가는 밝혀져. 그래서 아무리 내가 생각을 고치고 잘 살고 있다가도 그 사건으로 형을 받고 다시 이런 데 올 수 있어. 한 번 싸우면 두 번 싸우기는 더 쉬어. 엄마에게 짜증을 내더라도 알았다 하고 차라리 자기 방에 들어가 있거나 아니면 화를 내. 진짜 집에 들어가고 싶어도 못 들어가고 그러다 보면 계속 밖으로 돌게 되고…….


친구야.
엄마, 아빠한테 굽히지 않는 게 자존심일까?
우리의 진짜 자존심은 뭘까?  





숨은 마음 찾기!


                                  
                                    남민영 수녀님


‘이게 뭐니?’ 라는 말 속에는
‘넌 이것보다 훨씬 더 잘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단다.’라는
나에 대한 기대가 들어있고


‘네 마음대로 해봐, 어디!’ 라는 말 속에는
‘엄마가 너를 도와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사랑의 안타까움이 담겨 있고


‘아예 밖에서 살지 뭐하러 들어왔어?’ 라는 말 속에는
‘이렇게 무사히 돌아와줘서 고마워’라는 안도의 한숨이 서려있다.


주님!
우리는 진심을 표현하는데 무척 서툰 사람들임을 인정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자리 잡은
서로를 향한 진실된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빛을 부어 주소서!
그리하여  ‘너를 정말 아끼고 사랑한단다.’라는 그 소중한 말을
서로의 눈빛을 바라보며 나누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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