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독존의 불교를 넘어서라
*혼자 걸어가고 있는 스님의 모습. 이정우 선임기자
요 며칠 새 포도막염이란 눈병을 앓았다. 눈앞에 안개가 자욱해지고, 충혈돼 출근도 못한 채 누워 있는데, 전화음이 울린다. 산사의 선승이 첫눈에 안긴 선방의 설경 사진을 보냈다. 그에게 눈앓이 소식을 전하며 “눈 한 바가지 떠서 내 눈에 부어주오” 했더니 “조금만 기다리소. 내가 그 눈병 가져감세”라는 답이 왔다.
지난번 ‘누가 부처와 조사를 죽이고 살릴 것인가’라는 칼럼에서 세상 고통에 응답하며 열려 있는 틱낫한 식 불교와 비교해 한국 불교, 특히 선불교의 권위주의적 태도와 폐쇄성을 지적한 바 있다. 불교가 불교다워지고 선(禪)이 선다워졌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지만, 유일무이한 선의 가치를 헐뜯은 것으로 여긴 이들도 적지 않았다. 특히 송담 스님을 언급한 데 항변했다. 그런데 이 선승은 험구에 악구로 맞대응하지 않고, 말이나마 병마저 가겠다는 것이다.
대설인 7일(음력 10월16일) 100여개 선방에서 2천여명의 선승들이 3개월간 동안거에 들어갔다. 신자유주의 욕망 시대에 경쟁하지도 비교하지도 않고 좌선하며 멈춘다는 것은 얼마나 고고한가.
따라서 불교와 선의 폐쇄성을 지적한 것은 ‘중추적인 스님 2천여명이 일년의 절반이나 되는 시간 동안 문을 닫아걸고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느냐’는 힐난은 아니었다. 수행만을 위한 수행이 아니라 ‘중생을 고통에서 건진다’는 출가 본분을 위한 수행이어야 함을 말한 것이다.
몇 년 전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과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 폴 니터가 만나 대담을 한 적이 있다. 폴 니터는 “나를 바꾼다고 세상도 바뀌느냐”며 ‘수행과 현실참여의 병행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에 진제 스님은 “세상 시비에 벗어나는 것이 도를 닦는 취지”라며 ‘참나를 찾는 중요성’만을 강조했다. 그런 답이 어제오늘의 것은 아니다. 3·1운동 당시 불교계 대표로 참여한 용성 스님이 한일병탄 뒤 도움을 받기 위해 스님들을 찾아다녔을 때, 한결같이 외면하며 내뱉은 말도 “중의 본분은 (나라를 찾는 것이 아니라) 도를 찾는 것”이었다. 문제는 공감이다. 누구와 공감하고 있느냐다. 세월호 유족이나 사회적 약자인 중생을 외면하고, 기득권층의 소수 인연에만 넘치는 자비심을 베풀면서 대자대비를 말함은 어불성설이다. 일제 때는 제1매국노 이완용을, 유신독재 때는 2인자 이후락을 각각 신도회장으로 옹립한 고위 승려들이 공감해온 이들은 주로 누구였을까.
*동안거를 마친 스님들. 이병학 선임기자
시대와 역사를 뒤로한 ‘닫힌 불교’는 중생뿐만 아니라 불교 자신에게도 불행이다. 올해 인기 사극으로 재조명된 정도전은 조선을 건국하며 <심기리>, <불씨잡변> 등을 통해 불교를 내쳤지만 승려들은 대응할 지식이 부족했다. 종교 사상의 종장을 성리학에 내준 것은 이미 12세기 주자에 의해 승패가 결정지어진 일이었다. 선승들은 불교와 선의 탁월성에 안주해 타 종교 사상에 무관심했지만, 주자는 젊은 날부터 불교와 선을 치열하게 탐구해 “승려들은 유학을 모르지만 나는 선승들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자신했다.
어디 동아시아뿐인가. 불교가 탄생한 인도에서 불법이 사라져버린 것도 마찬가지다. 승가가 수행법과 철학, 공동체 윤리 등에서 자족한 반면 샹카라(788~820)는 불교의 장점을 겸허히 받아들여 힌두교 베단타철학을 확립해 사실상 인도에서 불교의 독존적 필요성을 없애버렸다.
불교의 패퇴는 배움의 바다에도, 중생의 바다에도 나아가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우물 속에만 갇혀 있던 결과였다. 이런데도 근대 한반도에서 거대한 서세동점의 시대에 열린 자세로 성경과 서양 사상을 탐구하거나, 민중 속으로 뛰어들어간 승려가 몇이나 될까.
세상은 무상하다. 모든 것은 변한다. 붓다의 말대로다. 그래서 32살로 세상을 뜨기 전 불교를 패퇴시키고 인도의 종교 사상을 통일한 샹카라는 말했던 것이다.
“장점을 답습하는 것만으로는 더 나은 장점을 이룰 수 없다. 하얀색만으로는 더 하얀색을 만들 수 없다.”
선방의 새하얀 설경은 멋지다. 그러나 유아독존 속에서 나와 고해 중생을 모두 감싸줄 설경은 더 멋지지 않겠는가.
조현 종교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