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2년 전의 교황청 일기, 문서위조와 도둑질하다 주교된 이가 남기다
522년전인, 1492부터 1503년 까지 교황의 의례절차를 담당하는 한 마이스터가 일기를 남겼다. 그의 이름은 부르카르두스다. 15세기에 할스라흐(Halslach)에서 태어나고, 스트라우쓰부르크(Strassburg)에서 살았다. 보통 교황의 측근이 될 정도라면 아주 신심이 깊은 영성가를 전제로 함은 당연하다. 근데 그의 이력을 보면 좀 의아하다. 그는 고향에서 문서위조를 하다 걸렸고, 도둑질하다 붙잡혔던 이다. 결국 죄값으로 살던 도시에서 추방 당했던 그는 로마로 도망갔고, 여기에서 출세 가도를 달렸는데, 바로 1467년부터다.
그의 출세 길은 교황 파울 2세(교황등극 1464)재직 때 부터다. 그는 이 교황 곁에서 여러 직책을 맡으면서 승승장구 했다. 다음 교황으로 식스투스4세(교황등극 1471)가 등극했다. 이 교황은 그를 1483년 바티칸에서 행해지는 모든 의례절차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늘 탁월하게 일을 잘 해냈던 터였는지 후대에 등극하는 교황들도 계속해서 그에게 직책을 부여했다. 그는 다음의 알렉산더 6세(교황등극1492)와 그 다음의 피우스 3세(교황 등극1503.9.22/죽음 1503.10.18) 교황들 곁에서 일했다. 마지막의 피우스3세는 그를 교황청의 의례 담당 책임뿐만 아니라, 1503년에는 키비타 교구의 주교로까지 임명하였다. 하지만 부르카르두스의 마지막 욕심은 주교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추기경이 되는 거였지만 이루지 못했다. 아마도 피우스 3세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추기경은 되지 않았을까? 이 피우스 교황은 9월22일에 등극해 10월18일, 27일 만에 죽어 버렸으니, 어쩜 부르카르두스도 이 땜에 추기경 되는 꿈을 채우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마지막 꿈을 이루지 못한 채 그는 1506년 5월16일 죽었다. 그것도 자연사가 아니라 비참한 죽음을 맞이 했다고 한다. 아무튼 문서 위조 죄목 그리고 도둑질 한 죄로 고향에서 추방 된 이가 로마에서 주교까지 올랐으니, 그의 주위엔 많은 적들이 있었으리라는 짐작이 간다.
그의 일기는 알렉산더 6세 측근으로 있을 때 쓴 글이다. 일기 내용은 사적인 것보다는 공적인 일을 더 많이 기록했다. 그의 글을 좀 더 빠른 이해를 위해서 알렉산더 교황에 대해서 잠시 언급 하기로 하자. 그는 칼리식스 3세(교황등극 1455)의 조카였다. 그 덕택에 그는 추기경이 되었고 드디어 돈으로 교황자리에 올랐다. 그는 교황이지만 첩을 두고선 9명의 자식을 두었다 한다. 이 교황과 그의 자식들이 뿌렸던 얘기들은 문화사에 흥미진진하게 서술되어 있다. 특히 그와 그의 딸 루크레치아와 얽힌 얘기는 너무 유명 했다 보니 유럽에선 영화까지 나올 정도다. 부르카르두스가 이런 교황 옆에서 일하면서 보고 들은 얘기들을 일기로 기록 했으니 얼마나 생생한 하고 흥미진진 하겠는가? 많은 내용을 다 옮기기에는 지면문제가 있으니 한 단면만 소개한다. 특히 오늘 소개하는 일기에는 그의 딸 루크레치아와 아들 고프레도스에 대해서다.
1494년 5월7일 수요일.
교황 알렉산더 6세의 아들 고프레도스(Gofredos)와 시칠리아의 왕 알폰소 2세의 딸 쟌키아(Sancia)와 결혼 계약서(당시는 결혼 하기 전에 집안간에 늘 계약서를 썼다)가 성사되었다. 쟌키아는 알퐁소 2세 왕의 혼외에서 낳은 딸이다.
1494년 5월8일 목요일.
그리스도 승천 축일, 천사 미카엘을 기념 하는 날이다. 이 날 앞으로 사돈이 될 알폰소 왕의 대관식이 있었다. 왕은 진주와 보석이 달린 옷을 입었고, 대관식은 아주 성대하고 호화스럽게 치렀다. 이 대관식에서 입은 그의 옷값이 자그마치 약 1000두카텐이다. (교수로서 일했던 마르틴 루터의 당시 일년 치 교수월급이 8 두카텐이었다고 하니, 왕이 입은 이 옷값은 정말 천문학적인 숫자임이 틀림없다.)
1494년 5월 11일 일요일.
온종일 억수 같은 비가 그치지 않고 쏟아졌다. 11시에 카스트로 노베성당 에 알폰소 왕이 교황 사절과 함께 나타났다. 오늘은 왕의 혼외 딸인 쟌키아(Sancia)와 교황 아들인 고프레도스(Gofredos)가 결혼 하는 날이다. 이 결혼식에는 많은 이들이 참여했는데 물론 명망 있는 귀족들이다. 이들은 철저하게 서열을 따져 그 높낮이에 따른 자리 배정을 받아 가지런히 앉아 있었다.
…
결혼예식 중에 신랑신부가 사용했던 의자들이나 방석도 금으로 치장 되었다. 신랑신부가 손에 들었던 초가 상당히 무거운 3파운드(독일 1파운드=500g=영국 454g)다. 이 무거운 초에는 자그마치 10두카텐의 돈이 꽂혀 있다(대학 교수였던 루터의 일 년치 월급보다 더 많은 돈이 이 초 한 자루에 꽂혀 있다). 이 무거운 초는 예식미사 동안 신랑 신부가 내내 들고 있었다. 신랑과 신부가 입맞춤을 하는 동안만은 한 사제가 이 초를 잠시 넘겨 받았다가, 다시 신랑 신부에게 초를 돌려 주었다. 마지막에 예식을 주관했던 주교가 이 결혼에 참석한 이들에게 거룩한 축성을 내렸다. 그의 축성을 받은 자들은 자그마치 7년간 죄 사면을 보증 받았다. 결혼 잔치는 늦은 시각인 11시에 시작해서는 2~3시간 후에 끝났다.
이 만찬 후에 신랑신부는 교황사절단과 왕의 호의를 받으면서 궁으로 들어간다. 사람들은 신랑 신부를 눈에 띄지 않는 한 방으로 안내했는데 거기엔 이미 신랑신부를 위한 첫날밤 침대가 마련 되어 있었다. 교황사절과 왕은 바깥에서 잠시 기다리는 동안 여러 여인들이 이 방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신랑 신부의 옷을 벗겨주고선, 이 신랑신부를 침대에 직접 눕혀 주었다. 신랑이 눕는 곳은 신부의 오른쪽이다. 이 신랑신부가 아마포 시트를 깐 침대에 옷을 전연 걸치지 않고(nackt) 누어 있을 때, 교황사절단과 왕이 신랑신부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 방에서 시중들었던 여인들이 왕과 교황사절단이 직접 보는 앞에서 이 신랑신부에게 배꼽 부분까지만 이불을 덮어 주었다. 이때 신랑신부는 전연 부끄럼없이 서로 실컷 입맞춤을 했다. 교황사절단과 왕은 신랑신부의 방에 30분 가량 머물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나선 신랑신부를 남겨놓고 이들은 이 방을 빠져 나왔다. 교황사절단 추기경은 주교 궁으로 돌아갔고, 왕은 城으로 돌아갔다.
1494년 5월12일 월요일.
이날은 왕이 교황사절단에게 아주 호화로운 연회를 열어 주었다. 이 연회에서 나는 특별히 기억 나는 것은 없고, 단지 기억에 남는 것은 이 연회에 제공된 음식들은 초호화판 이었다는 것과, 이 음식을 담았던 그릇들이 금과 은으로 치장 되었다는 사실이다. 여기 이 연회에 사용된 가격은 (6천 이 아니고) 약 60000 두카텐이 된다고 나는 짐작 한다. (※그리고 그의 일기는 1494년 11월 17일 월요일로 넘어갔다.)
1500년 7월15일 수요일.
교황 딸 루크레치아의 얘기다. 그녀의 남편인 알폰소 귀족이 밤 10시경에 성 베드로 성당 계단에서 여러 사람에 의해 갑자기 습격을 당했다. 관절과 오른쪽 팔 그리고 허벅지를 찔려서 난 상처에서 많은 피가 흘렀다. 그를 공격했던 이들은 성 베드로 성당의 계단 위로 달아났다. 그 곳에는 말을 탄 이들 40명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가 이들이 오자말자 그 말에 태우고선 재빨리 도망을 갔다.
1500년 8월 18일 화요일이다.
그 때 다친 알폰소는 바티칸 정원의 지하로 옮겨져 아주 삼엄한 경계 속에서 다친 상처를 치료 받고 있었지만, 결국은 그 날 오후 4시경에 그의 침대에서 죽었다. 밤 10시경에 사람들은 그의 시체를 들고가 장례를 치렀다. 코젠카 대주교, 프란체스코 보르기아, 교황의 재무담당관들이 그의 장례를 진행했다. 그의 주치의들과, 그를 늘 보필했던 허리 굽은 곱사등이 체포되어, 엥겔스베르그로 끌려가 심문을 받았지만 후에 이들은 석방 되었다. 이들은 혐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같은 날 거의 같은 시각에 루카스 데 둘치부스란 남자가 그의 집 앞 에서 당나귀를 탄 채 습격을 당하고 나서 심하게 다친 후 3~4시간 후에 죽었다. 그는 로페레 추기경의 재무담당자이자 동시에 교황의 칙서 기록관이었다. 로페레 추기경과 몇몇 이가 참석한 가운데 그의 장례를 치렀다.
1500년 8월 31일 월요일.
이 날은 교황 딸 루크레치아가 많은 수행인들을 대동하고 로마에서 네피로 떠나는 날이다. 그녀의 동행인들은 다 말을 탄 자들인데 그 숫자는 자그마치 600명(60명이 아님)이다. 얼마 전에 그녀의 남편 알폰소가 갑자기 습격 당했다가 결국은 죽었다보니 그녀는 그만 과부가 되어 버린 셈이다. 이 일로 그녀가 너무나 큰 슬픔과 비통에 젖어 있자 그녀를 위로하고, 휴양차원에서 만들어진 거대한 행차였다.
여기에 등장 하는 교황 알렉산더 6세! 이 교황은 딸 루크레치아를 정치적인 목적으로 자주 이용했다. 교황은 그녀를 11살에 한번 결혼 시켰고, 다시 13살에 한번 더! 보르기아家는 이 2번째 사위를 떼어 놓기 위하여 모함까지 했는데, 성불구자라는 소문을 공공연하게 퍼뜨려 딸과 이혼하게끔 만들었다고 샤드박사가 밝혔다. 이유가 있다. 교황은 2번째 사위 집안으로부터 뭔가의 커다란 것을 얻고자 정략 결혼을 시켰는데, 바라던 목적이 이루어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결과적으로 보르기아家가 이 가문으로부터 별 소득이 없었다는 뜻이다. 보르기아家의 최고봉에 있던 교황 알렉산더가 이 일을 다 조종 했다는 거다. 그 이후 교황은 딸을 알폰소와 3번째 결혼을 시켰다. 그녀는 이 결혼에 다소 행복을 찾았다지만 너무 짧았다. 1500년 7월15일 수요일에 일어났던 이 사건은 그녀의 오빠가 꾸몄다고 한다. 그 이후 다시 아버지 교황은 딸을 부와 권력을 넘치게 지닌 남자와 4번째 결혼을 시킨다.
여기서 우리가 몇 가지를 들여다 볼 수 있다. 먼저 교황 아버지의 권력을 등에 업은 과부가 된 딸의 위로행렬이다. 그 행렬에 말 탄 사람을 장장 60명도 아닌 600명이나 동행 시켰다니! 정말 좀 지나치다!
당시 결혼식도 진기하다. 예식을 마친 신랑신부가 오늘날처럼 둘 만의 시간을 가지는 게 아니고 침대예식까지 다 공개 하는 장면을 보면 현대인들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 결혼식에 참여한 축하객들에게 주교가 그냥 축복이 아니고 7년의 죄값을 사해 준다는 거다. 이런 권한은 어디서 오는 걸까? 거기에 참석한 자들은 그래도 다 귀족들 일터인데, 민중들은 이런 기회조차도 갖기 힘들었을 거다. 그럼 부와 권력을 손에 쥔 이 자들이 결혼식에 한번 참석하고 7년간 지은 죄 사함을 잘 받고 교리대로 과연 천국에로 갔었는지? 죽은 자들은 말이 없으니 알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이 일기를 쓴 자에 관해서다. 범법자로 고향에서 추방 당한 그는 로마에 가서 교황 측근이 될 수도 있었고, 그것도 부족해 나중엔 다시 주교까지 되는 것도 기이하다. 하지만 그런 것쯤은 덮어줘도 좋지 않을까? 그가 바티칸에 살면서 보고 들었던 것을 일기로 남겨 두었다는 사실을 높이 살 경우에 말이다. 지금 우리는 그의 일기 덕택에 당시의 시대상을 잘 엿볼 수 있고, 자취없이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역사의 한 조각을 그로부터 선사 받았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