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명장면】 벼슬하는 것만이 정치가 아니다
或謂孔子曰 子 奚不爲政 子曰 書云孝乎 惟孝 友于兄弟 施於有政 是亦爲政 奚其爲爲政
혹위공자왈 자 해불위정 자왈 서운효호 유호 우우형제 시어유정 시역위정 해기위위정
어떤 사람이 공자에게 말하였다. “선생께서는 어째서 정치를 하지 않으십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서>에 이르기를 ‘오로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라. 그 마음을 펼친 것이 정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것이 다 정치인데 꼭 벼슬해서 정치하는 것만 정치이겠습니까?” -‘위정’편 21장
*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 중에서
1. 불혹의 사업
공자가 본격적으로 교사 활동을 시작한 때는 30살 전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9살 연하의 자로가 젊은 무뢰배 시절에 공자의 학당을 찾아 왔고①, 공자 스스로 학문적으로 자립하였다고 말한 나이가 삼십대((三十而立 -‘위정’편 4장)였다. 특히 노나라 명문가의 장로 맹희자가 아들 교육을 공자에게 맡길 것을 유언한 것이 공자 나이 34살 때의 일임②을 생각하면, 공자는 삼십대 초반에 이미 교육자로서 상당한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런 공자가 임금이 국외망명을 하는 정치 상황에 의분을 느껴 제나라로 출국한 것이 36살이었고, 망명 7년만에 노나라로 귀국했을 때 그의 나이 43살이었다.
더이상 미혹되는 바가 없었다는 마흔, 즉 불혹(不惑)의 나이를 망명지에서 시작한 공자는 소공의 죽음을 계기로 곡부에 돌아와 교육에만 전념했다. 그러나 공자라는 사람은 본래 ‘이상국가 건설’이란 커다란 포부를 지닌 개혁가. 그런 그를 세상이 그냥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자에게 정계 진출의 손을 내민 사람이 있었으니 양호(陽虎)라는 인물이다.
2. 독대
서기전 509년 궐리의 한 객잔에 두 남자가 마주 앉았다. 둘 다 훤칠한 키에 당당한 체격을 지닌 장년의 사내였다. 그 무렵 곡부엔 때아닌 서리가 내려 추수를 앞둔 콩이 떼죽음을 당해 민심이 뒤숭숭할 때였다.③
“선군의 애도기간을 피하려다가 오히려 어수선한 시기에 귀국연을 마련하게 되어 유감이오. 돌아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오.”
“보잘 것 없는 망명객의 귀국을 각별히 여겨주시니 후배로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노나라 집정대신 계평자(季平子)의 가신인 양호는 공자와 같은 사족(士族)으로 나이가 4~5살 정도 위였다. 어려서부터 아는 선후배 사이인 두 사람은 곡부 사람들이 대표적인 신진 문사(文士)를 거론할 때 늘 쌍벽으로 꼽혔다. 양호는 7년 전 노소공의 친위 쿠데타 때 멸문의 위기에 빠진 계씨 집안을 구한 공으로 계평자의 오른팔이 되었다. 양호는 배짱이 두둑하고 권모술수에 능한 전형적인 마키아벨리스트형 지식인이었다. 그가 공자를 초대한 이유는 간단했다. 7년만에 돌아온 이 뛰어난 ‘재야 지식인’의 의중이 왜 궁금하지 않았겠는가?
‘중니(仲尼)는 낭중지추(囊中之錐·주머니 속의 송곳이라는 말로 때가 되면 밖으로 존재를 드러낸다는 뜻)의 잠룡(潛龍), 내 편으로 만들거나 그렇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이것이 당시 집권층 사람들의 속셈이었다.
“제나라에서의 생활은 어땠습니까? 역시 큰 나라이지요?”
“화려하기는 했습니다만, 저는 그저 음악이 좋았습니다.”
“음악에 취해 석달동안 고기맛을 잃어다고요?④ 역시 중니는 문화를 아는 사람이오!” 그러면서 양호가 슬쩍 본론으로 넘어간다. “나는 정치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군주를 동방의 패자로 만든 진(陳)씨 가문과 명재상 안영의 찰떡 호흡이 제일 볼만하더이다.”
제나라 실권자 진항의 참주정치⑤에 기대어 노나라 계씨 정권의 정당성을 간접적으로 찬양한 말이었다.
양호의 말뜻을 모를 리 없는 공자가 웃으며 말했다.
“진씨의 마음 속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안자(晏子)는 제나라 사람 상하가 모두 좋아하더군요. 그가 구이경지(久而敬之·오래 사귀어도 항상 공경함을 잃지 않는다는 의미- ‘공야장’편 16장⑥)하는 현자로서 기세등등한 권문세가를 대의 하나로 이이제이(以夷制夷)해 나가는 모습은 가히 아름답기까지 하였습니다.”
*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 중에서
3. 가는 길이 다른 사람
공자의 뼈있는 답변에 양호가 의미심장한 이야기로 말머리를 돌렸다.
“중니, 기억하시는가? 내가 일찌기 계자님의 잔치 때 그대의 참석을 가로막은 적이 있는데, 어쩌면 오늘을 위해 그런 일이 있었던게 아닐까?”
공자 24살 때의 일이다. 어머니 안징재가 죽어 공자가 상중일 때 계평자가 곡부의 사인(士人)들을 초청해 성대한 잔치를 열었다. 진(晉)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계평자가 자신의 건재를 과시하는 한편 평소 자신에게 비판적이었던 재야 지식인들을 회유하기 위한 정치적 행사였다. 이때 계평자의 가신으로 잔치의 실무를 맡은 양호가 자신과 쌍벽을 이루는 ‘후배’인 공자의 참석을 제지했던 것이다.⑦ 훗날 나, 이생이 공문의 사람들로부터 듣기로는 탐욕스럽고 독점욕이 강한 양호가 공자를 시기했기 때문이란 해석이 주를 이뤘으나, 실제 상황은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계평자의 초대장은 공자에게 양날의 칼이었다. 초대에 응하면 계씨 지배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꼴이 되고, 반대로 초대를 거부하면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것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때 ‘재조(在朝)의 선배’ 양호가 ‘재야(在野)의 후배’ 공자에게 말했다.
“자네와 난 다같이 사족의 미래를 짊어질 동량. 굳이 좁은 막부에서 어깨를 부딪힐 필요가 있겠나? 자네는 때를 기다렸다가 막바로 조정에 출사하여 임금의 신하가 되시게. 마침 상중이라니 그것을 핑계삼으면 계씨들도 자네의 불참을 오해하지 않을 걸세. 길게 보면 우리는 한 배에 탄 사람들이 아닌가.”
이것이 나중에 내가 들었던 당시의 비사인데, 양호는 지금 그 때의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중니.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소. 지금 계씨는 임금자리까지 바꿀 정도로 세력이 더욱 막강해졌고, 나 양호가 그런 계씨의 총신이 되어 있지 않소? 어떻소? 이제야말로 나와 함께 정치를 하는 것이.”
양호의 제안은 다른 사인들 같으면 거절할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다고 외친, 임금의 굴욕을 보다못해 자발적 망명을 마다하지 않던 공자와 같은 대장부에게는 범인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대의명분이라는 것이 있었다.
‘쫓겨난 임금은 객사했고, 새 임금은 허수아비다. 더구나 양호같은 배신(陪臣· 임금의 입장에서 볼 때 신하의 신하)까지 참월을 도모하는 혼란의 시대에 벼슬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라에 도가 없을 때 벼슬하는 것은 선비의 수치(邦無道 穀 恥也)-헌문편 1장’⑧)가 아니겠는가…
더욱이 공자는 양호라는 사람의 인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인(仁)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에게 정치는 권력을 잡기 위한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사람과 더불어 이상을 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가는 길이 다른 사람과는 함께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道不同 不相爲謀 -‘위령공’편 39장⑨)
생각을 정리한 공자가 부드러운 얼굴이지만 정색하고 말한다.
“선배님.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는 벼슬길에 나갈 뜻이 없습니다. 선배도 아시겠지만 <서(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오로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라. 그 마음이 바로 정치이다.’ 이처럼 한 집안을 가지런히 하는 일도 정치라면 정치인데, 꼭 벼슬해야만 정치를 하는 것이겠습니까?” -‘위정’편 21장⑩
몇차례 이야기가 더 오갔지만 양호도 결국 더 이상의 대화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았다. 양호의 입장에서도 공자의 뜻을 직접 전해 들은 것만으로도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어차피 내 사람이 안될거라면 정치를 권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면 무엇을 하실 요량이신가? 역시 학숙에서 교편을 휘두르실 참이신가? 허허.”
“그렇습니다. 군자를 키우는 일이니 어찌 선비의 보람이 아니겠습니까?”
“난세는 곧 기회의 시기이기도 하지. 이런 때에 굳이 남을 키우는 일에 자신의 큰 꿈을 허비할 필요가 있을까?”
“어찌 허비이기만 하겠습니까? 임금이나 위정자가 진정으로 백성을 이끌어 아름답고 선한 세상을 이룩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학문과 교육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君子 如欲化民成俗 其必由學乎.-<예기> ‘학기’편⑪)고 생각합니다. 저는 미력하나마 그 길을 가고자 합니다.”
4. 호향의 교훈
공자는 망명에서 돌아온 후부터 벼슬길에 나선 50대 초반까지 10년 가까운 세월을 오직 교육에만 전념했다. 일생을 통해 교사로서 가장 왕성한 시기였으며, 개혁가로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예열(豫熱)의 시간이기도 했다.
공자의 학숙은 처음에는 규모가 크지 않았다. 제자들도 사제간이라기 보다는 뜻을 같이하는 선후배 내지 동지에 가까왔다.
“누가 누구를 가르친다기보다는 관심있는 주제나 과제에 대해 함께 탐구하고 토론하는 사이였다고나 할까요? 그런 연찬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공자가 지도적 역할을 맡게 된건데 그건 그의 인격과 월등한 지성을 다른 사람들이 인정한 결과였습니다.”
사실 비슷한 연배의 ‘동지’들이 공자에게 보인 존경과 충성은 인류 지성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높고 단단했다. 스승과 제자간의 이런 인간적 연대는 공자 학단이 성장하는 도덕적 밑돌이 되어주었고, 유가가 다른 학파를 제치고 사상의 승자가 된 결정적 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초기 제자 중에 염경(염耕. 자는 백우(伯牛)로, 공문십철의 한 사람이다 )이란 선비가 있었다. 선생님보다 7살 아래였다. 염백우는 만년에 불치병에 걸려 다른 사람들과 격리된 채 살았는데, 나는 그의 병이 전염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대담하게 그를 찾아볼 수 있었기에 공문에서는 나에게 그를 돌보는 일도 맡겼다. 그런 인연으로 나는 종종 공문의 초기 시절에 대한 그의 회고담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학당이 처음 자리를 잡아갈 무렵 호향(互鄕)이란 고을의 한 소년이 공부를 하겠다며 찾아왔었지요. 호향은 곡부에서 멀리 떨어진 야인 부락으로, 언어도 잘 통하지 않을 뿐 아니라 풍속이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것이 많아 사람들이 접촉하길 꺼려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문인들이 이 소년의 접견을 반대했습니다. ‘이제 겨우 학숙이 모양을 갖춰가고 있는 마당에 저런 야만족을 받아들인다면 학풍이 흐려져 결국 유수한 가문들이 자제를 맡기길 꺼려할 것입니다.’ 반대 여론이 높았지만 선생님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소년을 받아들였습니다.”
옳은 길로 나아가려 하는 사람은 받아들이고, 퇴보하는 사람과는 함께 하지 않으면 그 뿐, 저 소년에게 심하게 굴지 마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다가오면 그 깨끗함으로 받아들여야지, 과거의 흠결로 그 의지를 꺾지는 말자.(互鄕難與言 童子見 門人惑 子曰 與其進也 不與其退也. 唯何甚. 人潔己而進 與其潔也 不保其往也)- ‘술이’편 28장.
5. 초기의 가르침들
염백우는 이 때의 일을 회상하며 덧붙였다.
“선생님은 육포 한꾸러미 정도의 예의를 갖추고 배움을 청하는 사람이라면 빈부귀천(貧富貴賤)과 지우불현초(智愚賢不肖)를 따지지 않으셨다.(子曰 自行束脩以上 吾未嘗無誨焉)-‘술이’편 7장” 이런 생각과 행동이 바로 교육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다(유교무류)는 교육철학의 출발이셨다.
염백우의 회고를 듣는 중간 중간에 내가 질문을 던졌다.
“그래도 무슨 입학 기준 비슷한 것은 있지 않았나요?”
“유일한 기준은 공부에 대한 열정입니다. ‘배우려고 온 힘을 다하지 않으면 길을 열어주지 아니하고, 배운 것을 표현하려 애쓰지 않으면 그 말문을 터주지 않을 것이다. 사물의 한 쪽을 들어 설명해주었는데도 나머지 세 방면의 이치를 깨달아 알지 못하면 다시 되풀이 하지 않겠노라’ 말씀하셨지요.(子曰 不憤不啓 不비(心+非)不發 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술이’편 8장⑫) 또 학문을 오로지 출세하는 기술로만 배우려는 자들(士志於道恥惡衣惡食者-‘이인’편 9장), 공부한 지 겨우 삼년에 출세할 꿈부터 꾸는 사람들(三年學 不至於穀 不易得也-‘태백’편 12장⑬), 겉과 속이 다른 자세로 명예만 탐하는 위선자들(鄕愿 德之賊也-‘양화’편 13장⑭), 이런 류의 사람들은 선생님이 바라는 학인(學人)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공부하는 자세는 어떻게 제시하셨나요?”
“선생님은 자신을 본보기로 삼아 이렇게 스스로를 채찍질하셨습니다. ‘덕을 잘 닦고 있는가? 공부한 것을 제대로 가르치고 있는가? 의를 듣고도 실천하지 못하는 일은 없는가? 잘못한 것은 그때 그때 바로 고치고 있는가? 나는 늘 이것을 근심으로 삼는다’(子曰 德之不修 學之不講 聞義不能徙 不善不能改 是吾憂也-‘술이’편 3장⑮)
선생님은 또한 공부하는 사람의 노력을 무척 강조하셨습니다.”
학문이란 비유컨대 산을 쌓는 일과 같다. 흙 한 삼태기만 더 부으면 산이 완성되는데도 거기서 멈추었다면 그것도 자기가 그만 둔 것이고, 땅을 편편하게 고르기 위해 이제 겨우 흙 한 삼태기를 부었더라도 그만큼의 진보를 자기가 시작한 것이다.(子曰 譬如爲山 未成一궤(竹+貴) 止 吾止也 譬如平地 雖覆一궤 進 吾往也-자한편 18장<16>)
“공부는 왜 하는 것입니까?”
공부를 하는 궁극적인 뜻은 군자의 길을 가는데 있다. 덕으로 행동의 준거를 삼고, 인으로써 마음의 토대를 삼으며, 문화와 교양으로 품성을 함양하고자 하는 것이다. (子曰 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游於藝 -‘술이’편 6장<17>)
“그렇다면 군자가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최고의 인간상인가요?”
“그렇습니다. 선생님은 당신을 기용해 준다면 그 나라를 동쪽의 이상국가로 만들겠다(如有用我者 吾其爲東周乎-‘양화’편 5장)고 선언하신 적이 있을 정도로 이 세상의 개혁에 큰 뜻을 품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일찌기 교육방침도 이상사회 건설을 함께 이끌어갈 사람을 양성하는 데 두었습니다. 그런 지도자는 인을 근본으로 삼고 지식과 기술을 채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군자는 인덕을 갖추고 선정에 참여할 수 있는 지식과 기술을 연마한다. 자신의 욕망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불의와 맞서는 용기를 갖추어야 한다. 이처럼 지와 절제, 용기를 갖춘 군자가 문화에도 조예가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이상의 네가지 덕목을 갖추고 예의와 품격으로 행동을 조율할 줄 안다면 으뜸의 군자일 것이다.(子路問成人 子曰 若臧武仲之知 公綽之不欲 卞莊子之勇 염求之藝 文之以禮樂 亦可以爲成人矣-‘헌문’편 13장<18>)
6. 전통의 성립
후학들에 의해 편찬된 <대학>(大學)은 이런 공자 학문의 목표를 ‘바른 덕을 밝히고(明明德), 대중을 계발하고(親民), 높은 수준의 선을 유지하는데 있다(止於至善)’ 선언한다.<19> 이런 대강(大綱) 아래 군자가 덕으로 세상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 그런 군자의 양성에는 그 어떤 차별이나 한계가 있을 수 없다는 것과 같은 공자 교육의 진보성은 곧 대중들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배움에 대한 자각과 욕구는 마치 본능의 확장처럼 전 계층으로 퍼져나갔다. 공자 사후 2백여년 뒤에 활약한 맹자의 일화에서도 유교무류의 전통은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다. 맹자가 등나라 영빈관에 머물고 있을 때 신발 도난 사건이 발생했다. 관리인이 맹자의 수행원들을 범인으로 의심하자 맹자가 “나를 따라온 사람들이 겨우 신이나 훔치러 온 줄 아느냐”고 화를 냈다. 그때 관리인이 “선생님이야 성심으로 배우려고 찾아온 사람들로만 알고 받아들이셨겠지만…”이라고 둘러댔다.(<맹자> ‘진심’ 하) 맹자 문하에 여러 질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맹자 역시 제자를 받아들이는데 별다른 차별을 두지 않았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7. 교학상장(敎學相長)
“한 사람의 학인으로서 젊은 시절의 선생님 모습을 그려보고 싶습니다.”
"선생님은 늘 읽은 것, 배운 것, 알게 된 것을 말없이 마음 속으로 기억하셨습니다. 또 여러 책들을 보시고 그것의 출처와 배경, 의의 등을 따져보는 일을 게을리 하는 법이 없으셨습니다. 사람들을 깨우쳐 주는 일이 귀찮고 힘들때가 있음에도 이를 마다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默而識之 學而不厭 誨人不倦-‘술이’편 2장<20>)
“교사로서는 어떠셨나요?”
이미 칠순을 넘긴 염백우가 읊조리듯 말하였다.
내가 아는 것이 있는가? 나도 아는 게 없다. 그러나 어떤 무식한 사람이 찾아와 하찮은 질문을 두서없이 하더라도, 그 질문에 알고자 하는 마음이 가득하다면, 나는 그 질문의 취지를 최대한 헤아려 최선을 다해 가르치고자 했다.(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자한’편 7장<21>)
아무리 맛있는 요리도 먹어보지 않으면 진짜 맛을 모르는 것 처럼 아무리 선미한 지식이나 법칙이 있어도 사람이 배우고 연구해서 그것을 터득한 것이 아니면 그 진가를 모른다. 또 학문을 해보고 비로소 내 지혜가 부족함을 알며, 가르쳐 보고 비로소 교육의 어려움을 안다. 그리고 부족을 알고서 자신의 능력을 반성하게 되는 것이며 어려움을 알아야 열심히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옛부터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은 상조한다고 하였다.(雖有嘉肴 弗食 不知其旨也. 雖有至道 弗學 不知其善也. 是故 學然後 知不足 敎然後 知困. 知不足 然後 能自反也. 知困 然後 能自强也. 故曰 敎學相長也-<예기> ‘학기’편<22>) 나도 너희들과 함께 공부하며 더불어 성장하고 싶었다.
창문 너머로 염백우가 전하는 선생님의 젊은 시절을 듣고 있노라니 마치 선생님이 내게 직접 말을 걸어오시는 듯 했다.
여보게 이생,
자네도 내 젊은 시절 모습이 궁금한가?
네, 선생님!
하하하. 나라고 별 다른 것이 있었겠느냐.
나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가르치지 않은 것도 없다. 제자들과 더불어 함께 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그게 바로 나, 구(丘)라는 사람이라네. (子曰 二三子 以我爲隱乎 吾無隱乎爾 吾無行而不與二三子者 是丘也- ‘술이’편 23장<23>)
<원문 보기> *<논어명장면>은 소설 형식을 취하다 보니 글쓴 이의 상상력이 불가피하게 개입되었다.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논어를 새롭게 해석해보자는 글쓴 이의 취지를 살리면서 동시에 독자들의 주체적이고 다양한 해석을 돕기 위해 원문을 글 말미에 소개한다. 소설 이상의 깊이 있는 논어읽기를 원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2014년 11월호 연재부터 <논어> 원문보기에 인용할 한글 번역본은 <논어정의>(이재호 정해,솔)와 <한글세대가 본 논어>(배병삼 주석, 문학동네)이다. 표기는 이(논어정의)와 배(한글세대가 본 논어)로 한다. 이밖에 다른 번역본을 인용할 때는 별도로 출처를 밝힐 것이다. 영문 L은 영역본 표시이다. 한문보다 영어가 더 익숙한 분들의 논어 이해를 추가하였다. 영역 논어는 제임스 레게(James Legge. 1815-1897. 중국명 理雅各)본을 사용하였다. ***<논어>는 편명만 표시하고, 그 외의 문헌은 책명을 밝혔다.
①<공자가어>‘자로초견’
②<좌전> 노소공 24년 사마천은 <사기> ‘공자세가’에서 이때의 일을 공자 나이 17세 때의 일이라고 하였으나, 맹희자가 실제로 죽은 것은 공자가 34살때의 일이다.
③<좌전>노정공 원년
④<논어> 술이편 13장 ‘子在齊聞韶 三月不知肉味…(자재제문소 삼월 부지육미·공자가 제나라에 머물때 소음악에 심취하여 석달동안 고기맛을 잊을 정도로 심취했다…)는 귀절을 말한다.
⑤ 참주정(僭主政), 권세가 강한 신하가 임금을 제치고 정사를 주도하는 정치형태.
⑥‘공야장’편 16장 子曰 晏平仲 善與人交 久而敬之(자왈 안평중 선여인교 구이경지)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안평중은 남과 사귀기를 잘하는 구나, 오래될수록 더욱 공경하고 있으니.”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안평중은 사람과의 사귐이 좋았다. 오래되어도 공경하였으니. L-The Master said, “Yen P’ing knew well how to maintain friendly intercourse. The acquaintance might be long, but he showed the same respect as at first.”
⑦<사기> ‘공자세가’(김원중 옮김) 공자세가에 따르면 양호는 이때 공자를 가로막으며 “계씨가 사인(士人)에게 연회를 베푼 것이지 감히 그대에게 연회를 베푸는 것은 아니오”라고 말했다.
⑧ ‘헌문’편 1장 憲問恥 子曰 邦有道 穀 邦無道 穀 恥也(헌문치 자왈 방유도 곡 방무도 곡 치야) 이-원헌이 수치스러운 일에 대해 물으니,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나라가 태평할 때 녹봉을 타 생활하고, 나라가 문란할 때 녹봉을 타 생활하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이다.” 배-원헌이 부끄러움을 여쭈었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나라에 도가 있을 적에 녹을 먹고, 나라에 도가 없어도 녹을 먹는 것이 부끄러움이다. L- Hsien asked what was shameful. The Master said, “When good government prevails in a state, to be thinking only of salary; and, when bad government prevails, to be thinking, in the same way, only of salary;-- this is shameful.”
⑨ ‘위령공’편 39장 子曰 道不同 不相爲謀(자왈 도불동 불상위모)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도(주의나 사상)가 같지 않으면, 서로 일을 모의할 수 없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도가 같지 아니하거든 함께 꾀하지 말아야 하느니. L-The Master said, “Those whose courses are different cannot lay plans for one another.”
⑩‘위정’편 21장 或謂孔子曰 子 奚不爲政 子曰 書云孝乎 惟孝 友于兄弟 施於有政 是亦爲政 奚其爲爲政(혹위공자왈 자 해불위정 자왈 서운효호 유호 우우형제 시어유정 시역위정 해기위위정) 이-어떤 사람이 공자에게 말하였다. “선생님께서는 어째서 정사를 맡지 않으십니까?”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서경>에 이르기를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하여 정사에 시행한다’고 했으니 이것이 또한 정사를 맡는 일인데, 어찌 정사를 맡지 않는다고 하겠는가.” ** 이재호는 본문의 ‘奚其爲爲政’을 ‘奚其不爲政’의 착오로 보고 있다. 배-누가 공자에게 일러 말하였다. 선생은 어찌 정치를 하지 않으시는지? 선생님 말씀하시다. 서(書)에 이르기를 “오! 효로구나, 효도와 형제간의 우애를 정사에 베푼다”라고 하였지요. 이 또한 정치하는 것이니, 어찌 그것만을 정치라고 할 수 있을까요? L- Someone addressed Confucius, saying, “Sir, why are you not engaged in the government?” The Master said, “What does the Shu-ching say of filial piety?-- ‘You are filial, you discharge your brotherly duties. These qualities are displayed in government.’ This then also constitutes the exercise of government. Why must there be THAT-- making one be in the government?”
⑪<예기> ‘학기’(學記)편 發盧憲 求善良 足以소(작을 소·言+臾)聞 不足以動衆. 就賢體遠 足以動衆 未足以化民. 君子如欲化民成俗 其必由學乎(발여헌 구선량 족이수문 부족이 동중. 취현체원 족이동중 미족이화민. 군자여욕화민성속 기필유학호) 생각하는 것이 법도에 맞고 훌륭한 선비를 구하여 쓸 줄 안다면 명성을 얻을 것이나, 민중의 마음을 얻는데는 미치지 못한다. 스스로 현명함을 얻어 그 뜻이 보이지 않는데까지 이른다면 민중의 마음을 얻겠으나 진정한 문화를 이루는데는 미치지 못한다. 군자가 감화된 민중과 더불어 아름다운 문화를 이룩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학문(과 교육)에 의존하지 않으며 안된다.
⑫ ‘술이’편 8장 子曰 不憤不啓 不비(心+非)不發 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자왈 불분불계 부비불발 거일우 불이삼우반 즉불복야)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마음속으로 통달하려고 힘쓰지 않으면 그뜻을 열어주지 아니하고, 입으로 표현하려 애쓰지 않으면 그 말을 이끌어주지 아니하되, 사물의 한 방면이 이치를 들어 설명했음에도 나머지 세 방면의 이치를 깨달아 알지 못하면, 다시 지도해주지 아니한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배우려는 자가)조급해하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고, 말로 표현하려 애쓰지 않으면 퉁겨주지 않는다. 한 모서리를 들어주되 나머지 세 모서리를 알아채지 못하면 다시는 반복하지 않는다. L-The Master said, “I do not open up the truth to one who is not eager to get knowledge, nor help out any one who is not anxious to explain himself. When I have presented one corner of a subject to any one, and he cannot from it learn the other three, I do not repeat my lesson.”
⑬ ‘태백’편 12장 子曰 三年學 不至於穀 不易得也(자왈 삼년학 부지어곡 불이득야)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삼년 동안을 배우고서도, 녹봉에 뜻을 두지 않는 사람을 쉽사리 얻을 수가 없었다.” *이재호는 부지의 지(至)를 지(志)로 본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삼년을 배운 다음, 벼슬에 뜻 두지 않는 이를 얻기가 쉽지 않더구나. L-The Master said, “It is not easy to find a man who has learned for three years without coming to be good.”
⑭ ‘양화’편 13장 子曰 鄕愿 德之賊也(자왈 향원 덕지적야)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어느 시골에서 진실하다고 일컫는 사람은 덕을 해치는 존재이다.” 배- 선생님 말씀하시다. 향원은 덕을 해치는 놈들이다. **향원은 위선자, 사이비 등을 뜻한다. L-The Master said, “Your good, careful people of the villages are the thieves of virtue.”
⑮ ‘술이’편 3장 子曰 德之不修 學之不講 聞義不能徙 不善不能改 是吾憂也(자왈 덕지불수 학지불강 문의불능사 불선불능개 시오우야)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덕을 닦지 못하는 것, 학문을 연구하지 못하는 것, 의행을 듣고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 착하지 못한 행위를 고치지 못하는 것, 이것이 나의 근심이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덕이 닦이지 않고, 배움이 몸에 익지 않고, 의를 들어도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불선을 고치지 못하는 것, 이것들이 다 내 근심이려니! L-The Master said, “The leaving virtue without proper cultivation; the not thoroughly discussing what is learned; not being able to move towards righteousness of which a knowledge is gained; and not being able to change what is not good:-- these are the things which occasion me solicitude.”
<16> ‘자한’편 18장 子曰 譬如爲山 未成一궤(竹+貴) 止 吾止也 譬如平地 雖覆一궤 進 吾往也(자왈 비여위산 미성일궤지 오지야 비여평지 수복일궤 진 오왕야)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비유하건대 산을 만드는 일에 마지막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서 중지하는 것도 내 자신이 중지하는 것과 같으며, 비유하건대 땅을 편편하게 만드는 일에 비록 한 삼태기의 흙을 덮더라도 일을 진행시킨 것은 내 자신이 진행시킨 것과 같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산을 만드는 데 비유하자면, 한 삼태기를 채우지 못해 미완성에 그친 것도 내가 그친 것이요, 평지를 만드는 데 비유하자면 고작 한 삼태기를 쏟아도, 나아간 만큼은 내가 간 것이다. L-The Master said, “The prosecution of learning may be compared to what may happen in raising a mound. If there want but one basket of earth to complete the work, and I stop, the stopping is my own work. It may be compared to throwing down the earth on the level ground. Though but one basketful is thrown at a time, the advancing with it is my own going forward.”
<17> ‘술이’편 6장 子曰 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游於藝 (자왈 지어도 거어덕 의어인 유어예)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도에 뜻을 두며, 덕을 굳게 지키며, 인에 의지하며, 예술에 적성을 찾는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도에 뜻을 두고, 덕에 의거하며, 인에 기대며, 예에 노닐리라. L- The Master said, “Let the will be set on the path of duty. Let every attainment in what is good be firmly grasped. Let perfect virtue be accorded with. Let relaxation and enjoyment be found in the polite arts.”
<18>‘헌문’편 13장 子路問成人 子曰 若臧武仲之知 公綽之不欲 卞莊子之勇 염求之藝 文之以禮樂 亦可以爲成人矣(자로문성인 자왈 약장무중지지 공작지불욕 변장자지용 염구지예 문지이예악 역가이위성인의) 曰 今之成人者 何必然 見利思義 見危授命 久要 不忘平生之言 亦可以爲成人矣(왈 금지성인자 하필연 견리사의 견위수명 구요 불망평생지언 역가이위성인의) 이-자로가 성인에 대해 물으니,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장무중의 지혜와 공작의 욕심이 적은 것, 변장자의 용기와 염구의 재예를 갖추고, 거기에다 예악으로 문채(文采)를 낸다면 또한 성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금의 성인이란 어찌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익을 보면 의리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 생각하고, 나라가 위급할 때는 자기 목숨을 버리고, 옛날의 약속에 평소 한 말을 잊지 않는다면, 또한 성인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배-자로가 성인을 여쭈었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장무중의 지혜와 공작의 담백함, 변장자의 용맹, 염유의 기예를 예와 악으로써 다듬는다면 또한 ‘성인’이라 할 수 있겠지. (이어서) 말씀하시다. 오늘날 ‘성인’이란 어떻게 꼭 그럴 수 있겠나? 이끗을 보면 이치를 생각하고, 위험을 보면 목숨을 던지며, 오랜 가난에도 평소에 한 말을 잊지 아니한다면 또한 ‘성인’이라 할 수 있겠지. L-Tsze-lu asked what constituted a COMPLETE man. The Master said, “Suppose a man with the knowledge of Tsang Wu-chung, the freedom from covetousness of Kung-ch’o, the bravery of Chwang of Pien, and the varied talents of Zan Ch‘iu; add to these the accomplishments of the rules of propriety and music:-- such a one might be reckoned a COMPLETE man.” He then added, “But what is the necessity for a complete man of the present day to have all these things? The man, who in the view of gain, thinks of righteousness; who in the view of danger is prepared to give up his life; and who does not forget an old agreement however far back it extends:-- such a man may be reckoned a COMPLETE man.”
<19> <대학> 3강령(성백효 역)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新)民 在止於至善 <대학>의 도(방법)는 명벅을 밝힘에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함에 있으며 지선에 그침에 있다.
<20>‘술이’편 2장 子曰 默而識之 學而不厭 誨人不倦 何有於我哉(자왈 묵이식지 학이불염 회인불권 하유어아재)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말없이 마음속으로 기억하며, 전적을 고증하기를 싫어하지 않으며, 사람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 (이 세가지 중) 어느 것이 내게 있겠는가.”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배운 것을) 묵묵히 마음에 새기고, 배우면서 싫증내지 않으며, 남을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음이여! 이 가운데 내게 능한 건 무엇일까? L-The Master said, “The silent treasuring up of knowledge; learning without satiety; and instructing others without being wearied:-- which one of these things belongs to me?”
<21> ‘자한’편 7장 子曰 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자왈 오유지호재 무지야 유비부문어아 공공여야 아고기양단이갈언)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아는 것이 있는가? 나는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어떤 무식한 사람이 내게 묻는데 그의 마음에 정성이 있다면, 나는 그가 묻는 내용의 양단을 질문하고 나서 아는 대로 모두 설명해 준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내가 아는게 있나? 아는 것이 없다. (다만) 무지렁이라도 내게 물을 적엔, (그 질문이) 텅 빈 것 같더라도 난 그 양끝을 헤아려 힘껏 알려줄 뿐이다. L-The Master said, “Am I indeed possessed of knowledge? I am not knowing. But if a mean person, who appears quite empty-like, ask anything of me, I set it forth from one end to the other, and exhaust it.”
<22>이상옥(李相玉) 역
<23> ‘술이’편 23장 子曰 二三子 以我爲隱乎 吾無隱乎爾 吾無行而不與二三子者 是丘也(자왈 이삼자 이아위은호 오무은호이 오무행이불여이삼자자 시구야)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내가 무엇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그대들에게 숨기는 것이 없을 뿐이다. 나는 무슨 행동을 하든 그대들에게 보여주지 않은 적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나 자신이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얘들아, 내가 숨기는 게 있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너희들에게 숨기는 것이 없다. 나는 행함에 너희들에게 보여주지 않은 것이라곤 없는 사람, 그게 나니라. L-The Master said, “Do you think, my disciples, that I have any concealments? I conceal nothing from you. There is nothing which I do that is not shown to you, my disciples;-- that is my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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