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장봉군 화백
“분노하는 뭇 삶들은 분노로 인해 나쁜 곳으로 간다. 그 분노를 올바로 알아서 통찰하는 자는 끊어버린다.”(이티부타카)
우리 사회도 ‘증오범죄’가 일반화되기 시작한 걸까? 얼마 전 재미동포 신은미씨와 황선씨의 토크콘서트가 열리던 전북 익산의 한 성당에서 사제폭탄이 터졌다. 2명이 화상을 입었고 청중 200여명이 긴급 대피를 했다고 한다. 범인은 10대 고교생 오모군이었다.
“북한이 지상낙원이라고 했습니까?”
그 고교생은 신은미씨가 하지도 않은 말을 물은 뒤, 폭탄을 던졌다. ‘증오범죄’라 할 만하다. ‘증오범죄’란 범죄의 동기가 인종·종교·국가·성적취향·사회적 계층·연령·장애·경제적 지위 등에 따른 편견과 증오에서 발생한 것을 말한다. 그동안 인터넷에서는 일베를 중심으로 특정 성별이나 지역, 이념을 문제 삼은 증오표현이 난무했다. 이제 증오가 ‘표현’에 그치지 않고, 증오 ‘행위’로 이어지는 사태가 벌어지는 걸 보면, 우리 사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근원적인 해결방법을 모색할 때가 아닌가 싶다.
보수정권이 집권한 뒤 극단적인 사회분위기에 편승해서, 그동안 인터넷상에 머무르던 이 세력들이 점차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광화문 세월호 단식 농성장에서 ‘폭식 투쟁’을 벌이는가 하면, 서북청년단재건위를 비롯한 극우·보수 단체들도 일베 회원들의 거리 투쟁을 부추겼다. 결국 한 고교생이 사제폭탄 테러를 가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그런 테러의 희생자이다. 2006년 지방선거 유세 당시 신촌 오거리에서였다. “민주화에 박근혜는 도움이 안 된다”고 주장한 남성이 휘두른 ‘커터 칼’로 그의 오른쪽 뺨을 크게 다쳤다. 명백한 테러였고 그 사건은 우리 사회에 어떤 이유로든 ‘테러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좌든 우든 정치적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커터칼도, 사제폭탄도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이번에는 ‘종북’이 대상이었지만, 여성·동성애자·이주노동자 등 소수자 집단에 가해지는 폭언과 물리적 위협도 수위가 높아지고 있고, 이들 역시 언제든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증오범죄’나 ‘증오 표현’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독일에선 나치를 미화하는 일이 있을 수 없듯,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정치적 견해, 인종·성·종교·성 정체성을 의도적으로 폄하하는 ‘혐오 발언’에 대해서는 차별금지법등을 제정, 단호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증오범죄하면 생각나는 것이 미국의 스코키 유태인 마을 사건이다. 홀로코스트를 인정하지 않는 미국 신나치주의자들은 스코키 마을에서 유태인 반대 시위를 벌였고 연방대법원은 1978년 1월27일 “나치 마크를 앞세운 시위는 상징적 발언으로, 수정헌법 1조가 보호하는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 이에 대해 사전 제약을 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더욱 놀라운 일은 그 뒤에 일어났다. 미국의 지식인, 종교인, 인권운동가를 비롯한 엄청난 수의 시민들이 스코키를 위해 반나치즘 시위로 맞대응을 했다. 기가 죽은 네오나치는 다시는 스코키에 들어오지 못했다. 나치의 광풍에서 시민 사회를 지켜낸 양심과 상식의 통쾌한 승리였던 것이다.
증오범죄가 표현이 아닌 행동으로 이어지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현상을 낳은 청년세대의 좌절을 직시하는 일이다. 개별화·파편화된 청년 세대의 좌절을 어떻게 해결하고 함께 아파할 것인가,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 근원적인 성찰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 깊은 성찰과 함께, 더욱 필요한 것은 스코키 유대인 마을 교훈을 우리가 배우는 일이다. 깨어있는 시민의 힘으로 증오범죄나 증오표현이 용납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바로 시민의 깨어있음이 절실한 시간이 아닐까 싶다.
강용주 광주트라우마센터 원장 hurights62@hanmail.net
이 글은 <법보신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