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화가에서 오래된 서점을 만나다
혹여 길이 막힐까봐 서둘러 해인사를 나섰다. 한참 달려 면 소재지를 지날 무렵 에쿠! 하는 탄식이 나온다. 강의용 원고를 책상 위에 그대로 두고 나온 것이다. 나이탓인지 준비성도 예전같지 않게 산만해졌다. 쩝. 총도 없이 전쟁터로 갈 수는 없는지라 급히 핸들을 오던 방향으로 되돌려야 했다. 30분이 그대로 날아갔다. 이후 마음이 바빠지면서 내비게이션에 뜬 시계를 향해 자꾸 눈길이 간다. 다행이 평일인지라 고속도로는 크게 붐비지 않는다. 시내 고가도로에 진입하니 차가 잠시 굼벵이 걸음을 했지만 이내 풀렸다. 목적지인 '영광도서'주차장에 예정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다.
부산 번화가인 서면 한복판에서 오층짜리 빌딩 한 채가 온전히 서점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로움이었다. 지하에 한 층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매장의 대형서점에서 흔히 접하는 다소 차가운듯한 매끈함과는 그 틀이 달랐다. 약간 어수선하면서도 정돈된 서가의 책들은 층층이 사람냄새를 물씬 풍긴다. 이 서점은 필자의 첫 산문집인 『아름다운 인생은 얼굴에 남는다』가 가장 많이 팔린 곳이라는 기록을 보유한 '나의 성지'이기도 하다. 1968년 창업한 이래 "무슨 책이든지 원하면 다 구해준다"는 입소문을 타고 50여년 동안 이 거리를 꿋꿋하게 지켜냈다. 주인어른에게 고개가 숙여지고 감사의 인사가 저절로 나왔다. 오래된 가게가 주는 포스(force)는 인근의 휘황찬란한 새 건물에 비할 바 아니다.
돌이켜 보니 2008년 강남 교보문고에서 처음으로 저자사인회를 했다. 그 때는 출판사의 말만 믿고 무턱대고 그냥 맨손으로 나갔다. 쑥스럽기도 하고 자기 입으로 본인 책을 자랑하는 것이 팔불출 같은지라 말도 꺼내기 전에 먼저 얼굴이 화끈거려 주변에 알리지도 않았다. 화려한 강남 네거리의 일등서점으로 용감하게 들어섰지만 무명작가(?)가 사인한 책을 사겠다는 독자는 별로 없었다. 불과 10여분만에 싱겁게 끝났다.
무엇이건 수업료가 제대로 지불되어야 자기 것이 되는 법이다. 첫 사인회 실패를 거울삼아 이번에 간행된 책 『집으로 가는 길은 어디서라도 멀지않다』 의 '독자와 만남'은 나름 성황을 이루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적지 않았다. 하기야 몇년 사이에 필자의 얼굴도 많이 두꺼워진 편이다. 일정이 잡히자마자 주변의 지인들에게 '박수부대'로 참여해줄 것을 은근하게 읍소했다. 거기에 힘입어 7년만에 만족스런 행사를 갖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책방문화를 지켜가는 아름다운 일에 십시일반 참여기회를 주었다는 사실이 더 기뻤다.
몇몇이 남아 뒷풀이 자리를 가졌다. 아날로그 세대가 주류인지라 이미 대세가 되어버린 인터넷 문화로 인하여 종이출판물은 하루가 다르게 쇠락해가고 있다는 현실 앞에 하나같이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자리를 함께 하신 부산 토박이 원로는 '책방보다 건넛편에 부설로 만들어 놓은 주차장 수입이 훨씬 많다'고 귀띰해 주었다. 그나마 다행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 건물이 오래오래 책방으로 남아주길 그 주차장에서 시동을 걸며 마음다해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