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버거울 때는 잡초를 보라
잡초를 살피며 채취하며 잡초에서 배우는 고진하 목사 시인
한껏 몸을 낮추고
지혜롭게 겨울을 이겨내는
개망초, 민들레, 달맞이꽃, 곰보배추
짓밟히며 강해지는
질경이, 민들레, 애기땅빈대
원자폭탄 투하로 폐허가 된 일본 히로시마에서
가장 먼저 돋아나 ‘지옥에서 살아난 잡초’로 불리는 쇠뜨기
그들을 보면
삶의 역경에 맞설 힘이 생긴다
대한이 소한 집에 가서 얼어죽는다더니 요즘 내 꼴이 꼭 그 형국이다. 소한이 지났지만 동장군의 기세는 여전하다. 그 기세에 눌려 죽은 듯 방콕(!)하고 지냈더니 몸이 찌뿌둥하다. 모처럼 날씨가 좀 풀려 두툼한 잠바를 걸치고 마을을 벗어나 논밭뙈기 사이로 난 농로로 걸음을 떼어놓는다. 사실 나는 지난해 봄부터 늦가을까지 이 농로를 거의 매일같이 걸었다. 단지 운동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논밭두렁에 돋아난 잡초를 뜯어먹으러!
웬 잡초 타령이냐고? 나는 식재료비 0원의 잡초를 뜯어먹으면서 그 강한 생명력과 뛰어난 약성(藥性)에 반했고, 흔하디흔한 잡초야말로 미래 식량의 한 대안이 될 것이란 확신을 갖게 되었다. 덕분에 ‘흔한 것이야말로 귀하다!’는 깨침도 새겼다. 그렇지 않은가. 금화 같은 ‘흔치 않은 것’을 숭상한 결과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경제 체제는 이제 내리막길로 곤두박질치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흔한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삶의 방식으로의 전환만이 전지구적인 파국을 막을 대안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야산에 둘러싸인 농로는 눈이 녹지 않아 미끄러웠다. 빨리 걸을 일도 없지만 얼어붙은 길 때문에 걸음은 더욱 느리다. 그렇게 걷다가 농로 곁의 논두렁을 살펴보니, 혹한 속에서도 살아남은 푸른빛 잡초들이 보인다. 미끄러질까봐 내 팔짱에 매달려 걷던 아내도 잡초들을 보고 놀란 눈을 휘둥그레 뜬다.
“어머, 저 퍼렇게 살아있는 것 좀 봐!” “그렇구려. 그런데 저런 식물들을 뭐라 부른다고 했지?” “아이 참, 또 잊었어요? 로제트 식물요.”
잎을 땅에 찰싹 붙이고 겨울을 나는 식물을 그렇게 부른다. 오늘 우리 눈에 띈 로제트 식물은 개망초, 민들레, 달맞이꽃, 곰보배추…. 저 식물들은 어쩜 저렇게 한껏 몸을 낮추고 겨울을 이겨낼 지혜를 갖게 되었을까. 가을에 종자를 뿌리는 이 식물들은 겨울을 견뎌야만 이듬해 봄에 싹을 틔운다. 혹한을 견뎌내는 로제트 식물뿐 아니라 실은 모든 잡초들이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본래 잡초가 다른 식물들보다 강한 건 아니다. 잡초는 약한 식물이다. 약한데도 잡초가 건재할 수 있는 까닭은 자기보다 더 강한 식물이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장소에 뿌리를 내리고 살기 때문이다. 잡초는 예측불가
의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적응력을 가졌다. 어떤 식물학자는 이런 잡초를 두고 “예측불가능한 난세를 좋아하는 식물”이라고 했다. 햐, 식물의 세계는 들여다보면 볼수록 웅숭깊다.
달개비
떡을 빚으러 바구니에 담아둔 야생초 꽃들
잡초비빔밥
사실 ‘난세’란 말은 어지러운 인간세상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요즘 들어 모두들 어렵고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하루 세 끼 밥을 굶지 않기 위해 애면글면해야 하고, 세상 인심은 점점 각박해지고, 신용불량자는 점차 늘어나고, 국민을 위한다는 국가는 도리어 국민을 괴롭히는 ‘괴물’로 인식되고, 그러다 보니 하늘이 선물로 준 신성한 생명을 헌신짝처럼 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과연 ‘난세’인가,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버릴 만큼? 잡초는 예측불가의 난세에도 잘 살아간다는데…. 그렇다. 아무리 힘든 환경에서도 잡초는 자살하지 않는다. 밟히고 또 밟히면서도 굳세게 살아가는 질경이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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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질경이는 다른 식물들과의 경쟁에서는 약한 식물이라고 한다. 하지만 밟히며 살아가는 데는 질경이를 따라올 식물이 없다. 그래서 다른 식물들이 살아가지 못하는 길바닥을 서식지로 삼는 것. 여린 잎 속에 강한 실 줄기가 들어 있어 사람들 발길에 밟혀도 다시 오뚝 일어나며, 씨앗 속에 젤리 모양의 물질이 있어 물에 닿으면 부풀어 오르며 달라붙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이 성질을 이용하여 씨앗을 퍼뜨린다고. 와우, 놀라워라! 사람의 신발이나 동물의 발, 심지어는 자동차의 바퀴에 붙어 자기 종족을 천지사방 퍼뜨린다나. 밟히고 또 밟히면서도 씩씩하고 늠름하게 살아가는 질경이를 볼 때마다 그 생존의 지혜로움에 짝짝짝^^^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다.
길가에 서식하기 때문에 자주 밟히는 잡초 가운데는 민들레도 있다. 물론 밟히면서도 일어난다. 하지만 밟히면서 계속 일어나는 건 아니다. 계속해서 밟히면 민들레는 옆으로 자라는 기막힌 지혜를 발휘한다. 암 치료에 효험이 있다고 각광받는 애기땅빈대도 사람들의 통행이 붐비는 길 위에 납작 엎드려 짓밟히면서 생명을 영위한다. 길바닥에 붙어살기 때문에 꽃을 피워도 벌이나 나비의 눈에 띄지 못하지만, 개미와 파트너를 이루어 꽃가루받이를 하여 씨앗을 퍼뜨린다. 이런 지혜로운 생존전략을 보면, 잡초는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이 난세의 스승으로 삼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지난해 논에 모를 낼 무렵 중부지방에는 가뭄이 심했다. 나는 마을 농사가 걱정되어 농로를 걸으며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논밭을 살펴보았다. 식물들이 노랗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논밭두렁이나 길가에 서식하는 잡초들은 싱싱한 초록빛을 내뿜고 있었다. 사람들이 재배하는 식물들과 달리 잡초들이 가혹한 환경에서도 씩씩하고 늠름하게 살아가는 비결은 뭘까. 그건 곧 깊게 뻗어 내린 ‘뿌리’. 물을 풍부하게 제공받는 수경재배 식물은 뿌리를 길게 뻗지 않는다. 뿌리를 뻗지 않아도 충분히 물을 공급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식물이 수분이 부족할 때는 물을 찾느라 뿌리가 쭉쭉 길어진다.
그렇다면 가혹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어떨까. 아이다 미쓰오의 시에 ‘생명의 뿌리’라는 작품이 있다. “눈물을 참고 슬픔을 견뎠을 때/ 입으로 말하지 않고 고통을 견뎠을 때/변명을 하지 않고 잠자코 비판을 견뎠을 때/분노를 삭이고 굴욕을 견뎠을 때/당신의 눈빛은 깊어지고/생명의 뿌리는 깊어진다.”(이나가키 히데히로, <도시에서, 잡초>에서 인용)
인간이 역경을 잘 견뎌낼 때 존재의 성숙에 이를 수 있음을 노래하고 있는 시인데, 어쩜 시인은 역경 속에서 더욱 깊게 뿌리내리는 잡초에게서 이런 삶의 지혜를 터득했는지도 모른다. 농작물을 키우는 밭에서 가장 미움을 받는 잡초로 쇠뜨기가 있다. 이 식물의 땅 위 줄기는 몇십 센티미터에 불과하지만, 뿌리줄기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땅속 깊이 종횡무진 뻗어나간다고. 그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일본 히로시마가 원자폭탄으로 인해 폐허가 된 후 가장 먼저 시퍼렇게 돋아난 식물이 바로 쇠뜨기였다고. 그래서 이 식물을 ‘지옥에서 살아난 잡초’라 부르기도 한다.
이처럼 가혹한 환경에서도 생명의 불꽃을 피워 올리는 잡초를 생각하면, 혹한의 겨울을 힘겹게 나면서도 도통 엄살을 부릴 수가 없다. ‘식물세계의 하층민’인 잡초, 인도식으로 말하면 ‘불가촉천민’쯤 되는 잡초지만, 언제나 향상의 의지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르며 살아가는 생명의 신비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잡초만 그런 것은 아니다. 얇은 판자때기 집에서 오들오들 떨면서도 까불까불 명랑하게 꼬리치는 우리집 흰둥이나 저 추운 설산에 갇힌 산짐승들을 비롯해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난경(難境) 속에서도 지금보다 더 향상하려는 삶의 의지를 무량무량 불태우고 있다. 함석헌 선생이 말하셨던가. 생명은 문자 그대로, ‘살아라!’(生)라는 하늘의 명(命)이라고. 흔하디흔하기에 정말 귀한 잡초를 스승 삼고 난 후 나는 잡초를 통해 생의 존엄과 절대긍정의 삶의 지혜를 배우고, 흰둥이가 꼬리치며 새해 선물로 준 ‘명랑’이라는 화두를 시와 노래와 춤으로 풀어 한껏 낭비하며 살아가려 한다.
글 사진 고진하 목사·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