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10명과 아내를 버리고 은수자가 되다
어느 해인가 스위스에 있는 한 수녀원에 한 달간 머문 적이 있었다. 일주일 중 5일은 수녀원에서 함께 어울려 일하고 2일은 휴가를 받았는데, 이런 날은 주로 스위스의 전역을 여행 다녔다. 하루는 이미 한 번 가보았던 곳에 또 가고픈 마음이 일어났다. 바로 융프라우였다. 융푸라우에 가기 위해선 루체른에서 기차를 갈아타야만 했다. 갈아탄 기차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기차를 탄 한 무리의 스위스 여인들도 주위 자리에 앉았다. 맞은 편에 앉았던 한 스위스 여인이 친절한 웃음을 던지더니 필자에게 말을 걸어 왔다. 자기들은 그룹피정을 하기 위해 피정의 집으로 가고 있는 중인데 필자 보고 '어디서 왔느냐?'고. 이 질문은 유럽인이 외국인들에게 던지는 뻔한 질문 1호에 속한다. 이렇게 서로간에 말문을 트자 쉽게 다른 얘기들로 빠져 들어갔다.
*클라우스 성인
갑자기 그녀는 나에게 클라우스 성인을 아느냐? 그의 성지를 가보았느냐? 고 물었다. 성지는 말할 것도 없고 성인 조차도 모른다 했더니, 아쉽다는 표정 속에서 필자가 원하기만 하면 이 성지를 안내 해 주겠단다. 이 성지가 마침 이들이 가는 피정의 집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쉽게 안내 할 수 있다는 거다. 기차에 내린 우리 일행을 실은 버스는 언덕바지 쪽에 있는 피정의 집을 향하여 무겁게 올라갔다. 그들이 머물 피정 집에 함께 내렸다. 이 피정은 상당히 컸다. 이 집에서 열리는 프로그램을 죽 들여다 보았더니 요가코스까지 있었다. 동양의 문화가 스위스의 자그마한 도시인 이 곳까지 침투 했다는 것이 왠지 기뻤다. 얼마 후 나는 이들이 안내 해준대로 산등성이를 힘겹게 걸으면서 그 성지로 향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1417~1487년까지 살았던 니콜라우스는 신비가이자, 은수자로서 살았던 스위스의 수호성인 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남 달랐다고 한다. 같은 또래와 정신 없이 놀다가도 돌연 혼자서 기도에 몰입하곤 했다고. 16살때는 전쟁에도 참여했고, 30살이 되자 그는 같은 마을 출신의 여인 도로테아와 결혼했다. 둘 사이엔 아들 5명, 딸 5명을 합 열 명의 자식이 태어났다. 그의 생활은 늘 풍족했다. 마을에선 시의원으로, 교회에 어떤 문제가 일어나면 그가 등장해 얽힌 일들을 잘도 풀었던 해결사였다. 아무튼 그는 고향에서는 영향력 있는 인물, 말하자면 명함에다 직함을 빡빡하게 박아 다닐 수 있었던 사람에 속했다. 48살이 되었을 때 이미 그는 가정적인 행복에다가, 경제적인 성공, 사회적으로는 공적인 존재로 인정도 받았던, 그야말로 그의 삶은 절정기에 이르렀다.
*클라우스 성인의 가족이 살았던 집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혼은 늘 무언가에 목말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깊은 기도 중에서 네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네가 이룬 모든 업적을, 심지어 부인 자식들까지도, 고향까지도 다 놓아라! 라는 신의 부름을 내면에서 들었다 한다. 많은 고심과 고민 끝에 그는 은수자가 되고자 결심했다. 하지만 그는 홀몸이 아니었다. 모든 지위를 버리는 것은 그에겐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10명의 딸린 자식과 부인이 눈에 걸렸다. 부인 도로테아의 동의를 구해야만 했던 것 때문에 다시 깊은 절망에 빠졌다. 결과는 그의 걱정과는 완연 다르게 흘렀다. 부인이 예상외로 그의 뜻에 쉽게 동의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18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 남편의 특이한 신비주의 성향을 이미 알아 차리고 있었던 터였기에, 아픈 가슴을 보듬으면서 남편이 가정을 떠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던 거다. 전적으로 동의 했다손 치더라도 그녀의 내면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녀 역시 성인 남편에 걸 맞는 역할을 하는 반 성녀처럼 느껴진다.
근데 이런 그의 결정이 바깥으로 알려지자, 주위사람들이 더 야단 이었다. 평소에 그의 정치적인 견해의 반대편에 서 있던 이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던지면서 그의 결정에 대해 심히 비아냥거렸고, 심지어 그의 정신상태를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가까운 이웃들은 부인과 10명의 아이들을 가진 가장이 어찌 코 풀 듯 가정을 팽개치느냐! 자기만을 위한 삶인 은수자로 떠나겠다는 그의 결정에 대해 분개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아이가 태어난 석 달 후인 1467년에 먼저 성지 순례 길에 올랐다. 물론 이미 옛 명함은 다 버렸고 이 때부터 그의 이름은 클라우스 형제로 통했다. 여러 번의 성지순례 중 자주 환시체험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고통체험도 했다. 성지순례에서 돌아온 그는 더 이상 가족들에게 가지 않았다. 마을부근의 계곡에다 나무로 조그마한 통나무집을 지었다. 이 때부터 그는 은수자로서 명상과 기도에 깊게 빠져 들어가는 삶을 살았고, 깊은 고독 속에서 신의 현현을 자주 체험하기도 했다. 그는 살아 있을 때부터 성인으로 공경을 받기 시작했는데, 특별히 그의 단식기적 때문이었다.
이 기적은 그가 20년간 이 오두막에서 교회에 주는 얇은 밀떡(성체)과 물로만 살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가 음식을 먹지 않고 영성체와 물만으로 산다는 소문이 바깥으로 날아가자, 진기함 반과 의심 반을 지닌 사람들이 호기심 발동으로 그를 보기 위해 오두막으로 모여들었다. 시끄럽자 이젠 관청이 나섰다. 그가 정말 음식 없이 살아가는지를 확인 하기 위해 그의 오두막 앞에 경비병을 한 달 간이나 세워 두기도 했다. 관찰결과가 나왔다. 소문 그대로 그는 성체와 물로 산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사람들이 이 사실을 쉽게 믿지 않자, 그 당시의 주교가 검증까지 하고 나서자 그제서야 사람들은 그의 삶 자체를 사실로 믿기 시작했다. 당시의 신비가들이 물과 성체로만 살았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물론 그들 중에는 더러 가짜가 있었기에 이로 인해 기이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말이다.
*클라우스의 집(왼쪽)과 이어 지은 경당(오른쪽)
살아있는 이 성인에게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 했다. 기도와 묵상으로 무르익을 대로 익은 영성을 소유한 그는 찾아온 이들이 삶의 고통을 하소연하면 기꺼이 경청했고, 이들의 영혼을 위로 하고 어루만져 주고 기도해 주었다. 이런 사실들이 점 점 더 먼 바깥으로 퍼져 나갔다. 나중엔 이 지역의 주민들 뿐만 아니라, 15세기에 살았던 유럽의 국가원수들도 그의 조언을 구하러 찾아 왔다고 한다.
그가 70살이 되었을 때 심한 병이 들었다. 일 주일간 이 병 땜에 고통에 시달렸던 그는 그의 오두막집에서 1487년 3월21일 죽었다. 그 이후로 그의 고향과 그가 머물렀던 장소는 스위스의 유명한 성지가 되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가 죽고 난 후 그의 큰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서 입을 열었다.
그는 아버지가 집에서 가정생활을 했을 때도 밤에 일어나 자주 기도 하는 걸 목격 했었다고!
1669년에 그가 복자 품에 올랐다. 성인 품에 든 것은 많은 세월이 흐른 뒤인 1947년에서다. 그가 죽은 날은 3월 21일이지만 그의 기념일은 9월25일 이다. 스위스에서는 매해 9월25일에 클라우스 성인을 기념하는 축제를 연다. 1976년에는 그의 고향에 클라우스 박물관도 열었다. 1984년 요한네스 파울 2세 교황이 이 성지를 방문하였는데 그는 부인 도로테아에 대한 공경도 잊지 말라는 표명을 했다 한다. 10명의 아이와 살던 그녀가 남편에게 쉽게 그런 허락을 하고선, 나머지 삶을 그녀 혼자서 몫으로 온전히 수용을 했다는 것 때문이다. 그녀의 이런 삶 자체도 위에 약간 언급했듯이 일종의 거룩한 삶이었다고 평가했다. 1987년엔 클라우스 성인의 500주년 기념 행사도 가졌다. 어쩌면 그는 이 지상에서 성취할 수 있는 것은 다 이룬 아주 특별한 성인인지도 모른다. 온전히 세속인으로서, 대가족까지 거느린 가장으로서, 농부로서, 시청의 의회까지 일했으니 말이다. 그의 업적이 수도원이 아닌 인간 세상 안에서 이루어 내었다는 점이 더 빛이 날지도 모르겠다.
유명한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K. Gustav Jung)은 클라우스를 스위스의 유일한 신비가로 인정한다. 그의 영혼은 교회에서 규정한 모든 도그마를 뛰어 넘었고, 인간들이 스스로 만들어 가두어 둔 종파도 뛰어 넘은 자로 인정했다. 그러기에 융은 그를 금 갈라놓은 종교적인 선을 뛰어 넘은 유일한 현대적인 신비가로 간주했다. 융을 심도 깊게 연구하는 마리 루이제 폰 프란츠(Marie-Louise von Franz) 역시 클라우스의 종교적인 현시를 초월적인 원형으로 간주 했다.
4년 후에 필자는 이 성지를 한국서 온 친구와 함께 1박 2일 일정으로 다시 찾아갔다. 기차에서 내리면 이 성지로 가는 버스가 있었지만 새파란 풀이 덮인 언덕바지와 구릉을 걸어 올라가면서 묵상했던 기억이 새롭다. 겨울에 산 등성이에 깔린 초록 풀들은 비움과 버림이라는 글 뜻이 묘하게 새겨진 듯 보였다. 그의 오두막에는 여전히 단순하고 소박한 분위기가 뿜어 나왔다. 그림에서 보듯이 이 오두막 지킴이는 좁다랗고 반들반들한 나무침대와 돌베게 뿐 이다. 나무로 난 창문은 그가 20년간 침묵 속에서 바깥을 응시 하면서 턱을 괴었던 곳이다. 그의 턱이 닿았던 부분은 아직도 반들거렸다. 아! 그는 20년간의 깊디 깊은 침묵과 고독과 정적 속에서 기도와 묵상을 하였을 터인데, 대체 뭘 생각 했을까? 아마 그가 남기고 온 가족도 분명 생각 하였을 것이다. 아닌가? 온전히 신에게만 귀속된 영혼 이었던가? 이런저런 충분한 상상을 던질 수 있겠다.
*클라우스 성인
그를 기리는 경당에는 가족들과 이별 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걸려있고, 경당 바깥에 있는 조그마한 통나무 집이 서 있다. 이 집에는 수녀들이 기거하면서 순례 객들에게 성물을 팔았다. 빠질 수 없는 전경 또 하나는 바로 고즈넉한 계곡물이 그 집들 앞에서 흐르고 있다는 거다. 이 계곡 물은 400년이란 세월 동안도 이 성인의 집을 지켜주었고, 성지를 찾아오는 이들에게는 계곡 물소리가 이 성인의 얘기를 우리들에게 조곤조곤 들려 주는 듯 했다.
문명의 이기에 지친 나머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고파 하는 열망을 품은 이들이 특히 많은 이런 시대에 이 성인의 삶, 버림과 비움의 의미를 한번 음미해 본다면 앞으로만 보고 달리던 자신의 생을 잠시나마 한번 되돌아 보면서 그로부터 흘러나온 나온 간접적인 영성의 물을 마셔 볼 수도 있으리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