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미폰 국왕(왼쪽)과 시리킷 왕비는 48시간 만에 쿠데타 주동자들을 만나 쿠데타를 인정했다.
가운데부터 오른쪽으로 찰릿 뿍빠숙 공군총장, 사티라판 께야논트 해군총장,
손티 분야랏글린 육군총장. 사진 <로이터 뉴시스>
[빛깔있는 이야기]
칠순을 맞은 장모님의 배려로 타이을 다녀왔다. 폭설이 내린 아침 인천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5시간 만에 우리를 아열대의 파라다이스로 데려다 놓았다. 파타야에서 이틀을 보냈다. 방콕에서 다시 두 밤을 보냈다. 타이 남자들 대부분은 성년기에 한 번은 불문에 들어 승려생활을 거치는 게 관례다. 현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도 즉위 후 잠깐 승려생활을 했었다. 사심을 없애고 사욕을 제거한 후에야 세상에 참여할 수 있다는 뜻일까? 빈발한 군부 쿠데타로 민간 정부가 전복되는 정변의 현대사를 거쳤지만, 거기엔 두 가지 철칙이 있다. 비폭력 무혈 쿠데타라는 점, 국왕의 추인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북부 출신 여성 가이드는 조만간 방콕발 반정부 시위가 재점화 될 것이라 말해줬다. 국민들은 전임 총리 남매의 축출을 개혁정책에 대한 반동으로 본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타이 역사상 최초의 서민을 위한 정부였다는 평가다. ‘하지만 국왕이 이번에도 쿠데타를 승인하지 않았느냐’ 짓궂게 묻자 그녀는 대답대신 온화한 웃음을 지었다. 화폐는 물론, 어디를 가나 국왕 부처의 사진은 낯설지 않다. 왕궁에 들어갈 때 남자들은 긴 바지를, 여자들은 긴 치마를 입어야 한다. 92년 국왕 앞에 엎드려 훈계를 듣던 수친다 장군과 잠롱 방콕시장의 모습이 떠오른다. 국왕은 ‘부적절하다’며 수친다를 꾸짖어 망명케 하고 잠롱을 진정시켰었다. 쿠데타를 비준해 준 사람은 정작 그 자신이었다.
방콕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외국인이 방문하는 도시의 하나다. 내가 본 파타야 해변은 유럽에서 온 연금생활자들의 낙원이자 호텔들은 인종전시장을 방불했다. 호텔 주변 종사원들 외에 타이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마지막 밤. 불문학도 출신 한국인 가이드는 타국생활에 사람이 그리웠는지, 오리엔탈 호텔 와인바에서 러시아문학 얘기나 듣자 청했지만, 나는 홀로 쉐라톤 호텔 비상구에서 방콕을 생각했다. 자살 방지를 위해 객실의 창문은 모두 봉쇄돼 있었다. 우연하게 거기서 러시아 아가씨 둘과 마주쳤다. ‘안녕하세요(Здраствуйте)?’ 인사를 하자 폭풍 질문을 쏟아낸다. 나는 유서 깊은 오리엔탈 호텔을 가리켰다.
조셉 콘래드가 첫 소설을 쓴 곳이다. 그는 폴란드 태생으로 독립운동죄로 유형간 부모와 러시아 제국의 북부 볼로그다에서 자랐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선원이 되어 동양과 아프리카를 항해했다. 폴란드어도 러시아어도 아닌 영어로 글을 쓰기 시작한 곳이 방콕이었다. 서구인의 시각으로 제국주의 묵시록의 끝을 응시했던 미래적 작가였던 그는 이 어둠 속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암흑의 심연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뷔페 직원이 ‘좌파야’강이라 가르쳐준 챠오프라야강은 그 심연을 알 수 없는 암흑의 핵심을 알고 있는지, 맹골수도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인생은 그림자로다’ 경(經)에 일렀으니, 서 있는 나무나 탑의 그림자냐? 아니로다. 날아가는 새의 그림자로다. 새가 날아간 뒤에는 새도 없고 그림자도 없느니라.(탈무드) 콘래드를 아느냐 묻지 않았다.
천정근 목사(안양 자유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