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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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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도 취직안돼 초조했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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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명장면】세속의 꿈, 영원의 빛 <下>위대한 실패자

 

 如有用我者 吾其爲東周乎

 여유용아자 오기위동주호

 

 나를 써주는 자가 있다면, 나 그를 위해 동쪽의 주나라를 건설하리라.-‘양화’편 5장


 

 


1. 사랑의 빛깔

공자가 지천명의 나이에 접어든 서기전 502년 4대째 노나라를 지배해온 삼환세력을 거세하려던 양호의 군사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양호는 일개 가신의 신분으로 주군의 권력을 힘으로 탈취하여 노나라 정권을 전단한 사람이다. 3년 가까이 독재를 하며 자신감을 키운 양호는 명실상부한 자신만의 정권을 세우고자 했다. 기존의 지배층인 삼환세력과 거기에 기생해온 부류를 배제하고 새로운 인물들이 자신을 떠받치는 정권을 구상했다. 공자는 양호의 그런 구상에 딱 맞는 인물이었다. 뛰어난 도덕성과 지성으로 공문(孔門)이라는 지식 집단을 이끌고 있는 명성높은 사유(師儒). 양호는 대중들에게 이런 이미지를 갖춘 공자를 자기 휘하에 두고 싶어 했다. “해와 달이 흘러가듯이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日月逝矣 歲不我與-‘양화’편 1장)”며 마치 구애하는 연인처럼 은근한 마음까지 드러내보이면서 공자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 했다. 하지만 공자도 마음에 둔 진짜 애인이 따로 있는 사람처럼 양호의 이 끈질긴 유혹을 요리조리 잘도 피해냈다. 그런 양호의 득세와 몰락을 지켜보며 공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양호에게 ‘굴복’하지 않은 자신의 처신을 내심 대견해 했을까? 아니면 (양호의 무모한 도전으로 인해)  더 큰 차원의 ‘사랑’이 어려워진 상황을 안타까워 했을까…

 

2. 밥과 벼슬

나, 이생이 여러 고제들로부터 들은 바로는 사실 공자는 4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출사(出仕)에 강한 의욕을 느끼고 있었다. 사후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성선사(至聖先師)의 반열에 올랐지만, 장년(壯年)의 공자는 삶의 정점을 향해 비상(飛翔)하려는 한 인간이자, 직업적으로는 ‘교서상례’(敎書相禮), 즉 지식 전수와 제례 대행을 생업으로 삼는 한 사람의 유(儒)이기도  했다.


 “당시에 중간계급으로서 유사(儒士·선비)는 상위 계급에 의해 기용되어야만 존재가치가 있는 부류들이지요. 누군가의 벼슬을 살지 않거나 누군가로부터 교서상례의 직무를 대행받지 못하는 유란 생산활동 측면에서는 별 쓸모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당시 유사계급이 처한 엄연한 현실이었다. 공문(孔門)의 교과목 중에서도 예(禮)교육이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바로 예교의 전수가 유(儒)라는 집단의 존재양식이었기 때문이다. 공자도 그 자신 한 사람의 유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며 그 지식으로 제자를 키우고 생업을 유지하였다. 그런 유자에게 ‘부모형제를 모시고, 상례에 최선을 다하고, 선비로서 어떤 경우라도 체통을 잃지 않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벼슬을 얻어 군주와 대부를 보필하는 이른바 ‘출사공경’(出仕公卿)을 하는 것만큼 중요한 지상과제는 없’었다.(子曰 出則事公卿 入則事父兄 喪事 不敢不勉 不爲酒困 何有於我哉- ‘자한’편 15장①)

 

“공자는 섬길 임금이 석달만 없어도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다른 나라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임금에게 줄 폐백을  싣고 다녔다.”(傳曰 孔子 三月無君則皇皇如也 出疆 必載質 -<맹자> ‘등문공 장구 하’)


훗날 열국을 유랑하던 공자의 이런 모습이 사람들에게는 벼슬에 안달복달하는 속유(俗儒)로 비쳐졌을 가능성은 얼마든 지 있다. 하지만 떠돌이 처지의 공자가 언제 있을지 모를 자신 또는 제자들의 출사에 대비하여 예물을 상비하고 다녔으리라는 것은 일상적인 삶의 기준에서 볼때 결코 이상한 행동도 아니고 비난받을 일은 더더욱 못된다. 사람은 생활을 해야 살 수 있는 존재이고, 더구나 공자는 한 집단을 책임지고 있던 사람이 아닌가.

“벼슬을 해야 조상이 물려준 직분(職分), 하늘이 부여한 천분(天分)을 수행할 수 있기에 당시에도 사람들은 선비가 벼슬자리를 잃는 것을 제후가 나라를 잃는 것에 비교하고, 선비가 벼슬하는 것을 농부가 밭을 갈아 가족을 먹여살리는 것에 비유했지요.”(士之失位也 猶諸侯之失國家也, 士之仕也 猶農夫之耕也- 상동)

 

3. 제 값을 기다리는 사람

따라서 ‘나이 마흔을 넘어서도 남에게 못나게 보이면 그야말로 끝장’(年四十而見惡焉 其終也已 -‘양화’편 26장②)이라거나, ‘나이 사십오십이 되어서도 이름이 들리지 않으면, 이 역시 별 볼일 없는 사람’(四十五十而無聞焉 斯亦不足畏也已-‘자한’편 22장)이라고 말하며 ‘무직자’의 불안과 초조를 감추지 않은 공자를 미래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온 나, 이생은 마치 내 일처럼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무렵의 공자에게 ‘불확실한 미래’는 자신에게 부여된 천명(天命)의 실체를 고뇌하게 만들었다.

 

 천명을 알지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다고 했거늘(不知命 無以爲君子也 -‘요왈’편 3장), 지금 나는 군자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 나에게 천명이란 무엇일까?

 

그렇게 그는 자신의 사명을 하늘에 묻고 또 물었을 것이다. 깊은 밤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자리를 고치고 앉아 점을 치는 한 유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공자의 어떤 마음을 읽을 수 있을까?

 

   내가 몇년을 더 공부해 나이 오십에 주역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큰 허물은 면할 수 있을까…(加我數年 五十以學易 可以無大過矣)-‘술이’편 16장③

 

공자는 나이 쉰이 다 되어서도 연배에 맞는 자리를 갖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 불안했을 것이다. 그것이 비록 자기 탓이 아니라 그가 감내해야 할 시대의 탓이었다 해도, 시운(時運)을 만나고 못만나는 것 또한 천명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이므로 그는 초조한 마음으로 자신의 뜻을 펼 수 있는 ‘때’를 기다렸던 것이다.

 

    선생님, 여기 아름다운 옥이 있습니다. 그냥 궤짝에 넣어둬야 하나요, 팔아야 하나요?(有美玉於斯 온독(감출 온 감출 독)而藏諸  求善賈而호諸)

  무슨 소리, 당연히 팔아야 하고 말고. 나도 좋은 값을 쳐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지.(沽之哉 沽之哉 我待賈者也) -‘자한’편 12장④

 

훗날 이재에 밝은 젊은 제자 자공과 나눈 이 대화에서도 유자로서 공자가 견지해온 직업의식을 읽을 수 있다. 듣는 이로 하여금 슬그머니 웃게 만드는 공자의 유머러스한 토로는 그러나 노경에 이른 자의 달관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공자8.jpg

*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 중에서


 

4. 권도(權道)

공자는 벼슬길에 올라야 했지만, 제나라에서도 나아가지 않았고, 귀국해서도 삼환에게 기대지 않았다. 자신을 높은 값에 쳐주던 양호도 사절했다. 양호가 노나라를 지배한 40대의 마지막 3년은 양호 외에 달리 벼슬을 줄 만한 사람도 없었으니 공자는 노나라에서 벼슬할 생각은 포기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명했다. 공자가 보기에 양호의 길은 자신의 길이 아니었다.

 

 가는 길이 다른 사람과는 함께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道不同 不相爲謀 -‘위령공’편 39장)

 

내가 그때의 일에 대해 여러 고제들에게 물어보았다.

“굳이 다른 길인가요? 적어도 양호가 사변을 획책하기 전까지 두사람은 겉으로라도 우호적이지 않았나요?”

“허허, 이 사람. 양호가 아무리 선생님을 꼬드기고 강청(强請)해도 불가(不可)는 불가. 삼군의 장수를 빼앗을 수는 있어도 한갓 필부의 마음은 빼앗을 수 없다(三軍可奪帥也 匹夫不可奪志也-‘자한’편 25장)고 한 선생님의 말씀을 자네는 잊었는가? 양호 따위가 어떻게 선생님의 원대한 뜻을 훔칠 수 있겠는가.”

“선생님이 양호에게 가지 않은 뜻은 지난 번에 구구하게 설명했으니 더 말할 것이 없고, 여기선 선생님이 남긴 말씀으로 그 이유를 대신하면 어떨까 하네.”

 

  함께 학문을 할 수 있어도 더불어 도의 길을 갈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도의 길에 함께 나아갈 수 있어도, 더불어 깨달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깨달음을 함께 하더라도 더불어 권도를 나눌 수 없는 사람도 있다.

(子曰 可與共學 未可與適道 可與適道 未可與立 可與立 未可與權)- ‘자한’편 29장⑤

 

위대한 빛을 뿜는 공자와 같은 사람에게 태양이 없는 달과 같은 양호는 권도를 나눌 수도, 아니 나누어서는 안될 사람이었다.


 

5. 빈 의자

양호의 집권은 노나라 정계에 핵폭탄같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가 일개 가신의 몸으로 노나라 정권을 한 손에 쥐고 흔든 정치력도 정치력이지만, 무엇보다 기존 지배층들이 충격을 느낀 것은 양호의 지배를 별 저항없이 받아들인 민심이었다. 그만큼 4대에 걸친 계씨의 장기집권에 대한 민중의 염증이 컸던 것이다. 공실의 입장에서도 양호의 발호는 뜻하지 않은 방식으로 나타난 희망의 빛이었다. ’난공불락 같은 계씨 정권이 자기 가신의 손에 농락 당하고, 심지어 삼환 전체가 요절이 날 뻔 하지 않았나.’ 임금을 비롯한 공족들은 이번 기회를 잘 활용하면 계씨에게 뺏긴 군주권을 되찾는 일이 결코 불가능하지만은 않은 일로 다가왔다.

“개혁만이 살길이다.”

해가 서쪽에서 뜨는 일처럼 삼환과 공족들의 입에서 이구동성처럼 개혁이란 구호가 서슴없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개혁 대상인 자기들을 쏙빼놓고 개혁이란게 가능한가?

양호의 난을 수습하는데 공을 세운 맹손씨의 수장 맹의자가 삼환의 대장 계환자에게 말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삼환이 모든 백성들의 공적이 될 지 모르겠소. 지금까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따져보고 민심을 회복할 수 있는 새로운 정책을 내놓지 않으면 제2, 제3의 양호는 계속 나타날 것이외다.”

조정의 인사권을 쥔 계씨 쪽이 먼저 움직였다.

“아무리 좋은 정책인들 백성들이 믿지 않고, 우리도 얻을게 없다면 무슨 소용이요? 백성들이 신뢰하고 우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그런 인물이 없겠소?”

그때 맹의자가 계환자에게 제안했다.

“중니가 어떻습니까? 내가 그와 가까운 사이라서가 아니라 지금 노나라에서 중니만큼 식견있는 사인(士人)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양호의 강청을 뿌리친 사람이 아닙니까?”

계환자는 공자가 맹손씨와 가까운 것이 다소 꺼림칙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그런 이유로 공자를 마다할 수도 없었다.

 

 ‘자로가 우리 집안과 가까우니 나도 공문과 아주 선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일단은 지방장관 정도의 벼슬을 줘보고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자…’

 

삼환과 조정이 공자를 비롯한 새 인물들을 물색하고 있는 가운데, 비밀리에 공자를 필요로 하는 또다른 인물이 있었다. 곡부에서 동쪽으로 200리쯤 떨어져 있는 요새에 웅거하며 ‘새로운 나라’를 구상하고 있던 공산불요(公山弗擾· 공산불뉴라고도 한다)라는 인물이었다.

 

6. 불타는 마음

양호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간 뒤인 어느 날 밤, 공자에게 밀사를 자처하는 사람이 찾아왔다. 그를 보낸 사람은 계씨의 본읍인 비(費)성의 대부 공산불요였다. 공산불요는 대대로 계씨가에 충성해 온 가신으로, 계평자의 아들들인 계손사(계환자)와 그의 동생 계오가 불화를 일으켰을 때 계오를 지지한 탓에 양호가 계환자를 축출하려는 거사에 동조했다. 그리고 양호가 거사에 실패하고 망명해버리자, 비성에서 계오, 숙손첩 등과 함께 계환자로부터 독립하고자 했다. 당시에는 많은 나라들이 도시 국가의 형태를 띠던 때라, 오랜 기간 계손씨의 본읍으로 있으면서 상당한 군사력과 물적 토대를 구축한 비성은 하나의 나라로 자립할만한 수준에 있었다. 공산불요는 바로 이  ‘건국 계획’에 공자를 끌어들이고 싶었던 것이다. 공산불요는 젊은 시절부터 공자라는 사람의 됨됨이를 잘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양호가 공자를 포섭하려한 이유가 자신과 다르지 않다고 여겼다.

 “중니와 같이 원대한 꿈이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내민 손을 잡지 않을까?”

공산불요의 생각은 어느정도 들어맞았다. 공자는 공산불요의 은밀한 제안을 받고 일종의 격정에 휩싸였다. 아주 오랫동안 어떤 꿈을 간직해 온 사람이 그 꿈을 이룰 길을 찾았다고 여겼을 때의 심정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공자의 가슴은 흔들렸다기보다는 뜨거운 불길에 휩싸인 듯한 상태였으리라.

‘공산은 양호와는 격이 다른 사람이다. 그는 인의(仁義)를 아는 인물이다. 그가 자립하여 나에게 치도(治道)를 맡긴다면 내가 주공의 덕을 재현하지 못할 바가 무에 있으랴!’

 

공자는 삼환에게도 양호에게도 가지 않았지만, 그 마음 속 만큼은 자신이 늘상 강조해온 주공의 문무지덕(周公成文武之德·주나라를 창업한 문왕과 무왕의 치세를 제도화한 주공의 정치를 말한다-<중용>)를 펼쳐보고 싶은 뜻이 가득했다. 제자들이나 친구들과 주루(酒樓)에 있을 때면 종종 먼 하늘과 대화할 때가 많았다.

 

 나라에 도가 사라진 지 오래, 차라리 먼 땅으로 가서 그곳에서 뜻을 펼쳐볼까?(子欲居九夷)

   그러자 함께 술을 마시던 친구가 말했다. 에이, 그런 곳이 어디 있겠나? 아무리 우리 정치가 개판이라 해도 야만족보다는 낫겠지.(或曰 陋 如之何)

 어찌 미개한 풍토가 문제가 되겠나! 군자가 거하는 곳이 바로 문명이 꽃피는 곳인데! (曰 君子居之 何陋之有) -‘자한’편 13장⑥

 

또한 태산을 바라보며 술잔을 들어 이렇게 큰소리친 적도 있었다.

 

 만일 누군가가 나를 등용한다면, 1년 안에 바로잡고, 3년이면 다 이뤄낼텐데! (子曰 苟有用我者 朞月而已 可也 三年 有成)-‘자로’편 10장⑦


그런데 지금 인의를 아는 대부가 자신에게 함께 새로운 치국의 도를 열어보자고 부르고 있다.  공자의 마음 속에 어찌 불길이 일지 않겠는가!

 

 주나라 문왕과 무왕은 겨우 사방 100리도 안되는 풍(豊)과 호(鎬) 땅에서 기업을 일으켜 마침내 주나라를 세워 왕노릇을 하였다! 지금 비성이 작다고는 하지만, (주공의 계승자인) 나라면 거의 치국의 도를 실현할 수 있지 않을까!-<사기> ‘공자세가’

 

그러나 공자는 결국 공산불요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로에게 내가 이에 대해 물었을 때 자로는 조심스럽게 그 때의 일을 들려주었다.

 “우선 내가 계씨와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선생님이 공산씨에게 가는 것을 적극 말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자네는 그런 오해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나는 공산씨가 자신을 주군을 배반한 반도(叛徒)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네. 선생님이 정치적으로 계씨에게 빚진 것이 없다는 것도 잘 아는 바이네. 선생님이 특정한 주군에게 충성해야 할 이유도 없네. 따라서 공산이 계오 등과 함께 자립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데 우리 공문이 지혜를 보태지 못할 바가 없음을 내가 모르지 않네. 그럼에도 나를 비롯해 많은 제자들은 선생님이 좀 더 현실을 직시해 주실 것을 요청했던 것이네.”

”현실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아무리 비성이 견고하고 큰 읍이라 해도 노나라 전체로 보면 일개 읍성에 불과하다. 그 성 하나에 의지해 노나라 병권을 한 손에 쥔 계씨와 언제까지 맞설 수 있다고 보나?  노나라는 아직 삼환의 나라일세. 계씨로부터 벗어나기에 급급한 나머지 밀려서 자립하는 형국으로는 노나라의 개혁은 커녕 스스로의 존립도 보장할 수 없을 걸세. 선생님은 높은 이상을 지니셨지만, 현실을 보는 눈은 내가 선생님보다 나을 수 있네.”

“선생님이 공산씨에게 가지 않으신건 결국 그런 현실론을 수긍했기 때문인가요?”

“선생님이 자신의 포부를 접은데는 우리 제자들의 존재도 작용했지. 양호의 사변을 수습하려면 새로운 제도와 인물이 많이 필요할 때가 아닌가. 그런 판국에 선생님이 훌쩍 계환자에게 반기를 든 공산씨에게 간다면 많은 제자들의 앞길이 어떻게 될까? 선생님은 결국 공문 전체를 놓고 고심한 끝에 최종판단을 내리셨다고 보네. ”

“그렇다면 애초에 선생님이 공산에게 가려한 마음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요?”


 

7. 공산불요

공자가 실력자 양호는 한사코 마다하면서, 장래가 불투명한 공산불요에게는 그렇게 마음을 열려 한 까닭을 이해하려면 공산불요라는 사람에 대해 알지 않으면 안된다. 공산불요는 선생님과 같은 예교주의자였다. 양호가 가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주군 계평자를 임금의 예로 장사지낼 것을 주장했을 때, 공산불요는 같은 이해관계에 있는 편이면서도 양호의 주장이 예에 맞지 않다(非禮也)며 반대했다. 공산불요는 또 최후까지 ‘무례(無禮)한’ 계환자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했다. 공산불요가 양호 반란에 동조한 세력을 보호하며 비성에서 농성한 지 3년째 되던 해 공자는 노나라 사구(司寇·법무장관)의 벼슬에 있었고 자로는 계씨의 가재(家宰)가 되어 있었다. 자로가 조정의 명을 받들어 삼환의 본성을 모두 허무는 정책을 펴자(이 일은 나중에 상술할 것이다), 이에 저항해 군대를 일으켜 곡부를 공격했다. 이 반란은 공자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의 신속한 대응으로 실패하고 공산을 비롯한 ‘독립세력’은 모두 제나라로 망명했다. 공자와 자로는 이때 공산불요를 구할 뜻이 있었으나, 공산은 이를 마다하고  ‘동지’들과의 의리를 선택했다는 것이 나, 이생이 내린 결론이다.

공자와 공산불요의 인연은 이 비극적인 대치를 끝으로 더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공산불요가 역사의 장에 다시 등장한 것은 공자가 65세의 나이로 유랑 중일 때였다.

 

훗날 나, 이생이 남쪽 지방을 여행하며 들은 공산불요의 마지막 행적은 이러했다. 서기전 487년 공산불요는 멀리 오나라까지 달아나 오왕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조국을 등진 지 15년이 흘렀을 때였다. 오왕 부차가 노나라 침벌을 계획하자 공산불요와 같이 망명 온 숙손첩이 길잡이를 맡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공산불요가 숙손첩에게 말했다. “그것은 예가 아닙니다(非禮也). 군자는 본국을 떠나 외국으로 망명하는 경우에도 원수의 나라로 가지 않고, 도망간 나라의 신하가 되기 전에 그 나라가 본국을 치는 일이 있으면 본국으로 돌아가서 임금의 명을 받고 달려가 싸우다가 죽어야 하고, 이미 그 나라에 몸을 의탁하였으면 (그 토벌에 참가하지 않고) 몸을 숨겨야 합니다. 또 사람은 자기 나라를 등져도 사사로운 원한 때문에 배신하지 않는 것인데, 어째서 당신께서는 작은 원한으로 조국을 전란에 밀어넣는 일에 가담하려 하십니까?  만약 오왕이 강요하면 그 일을 저에게 미루십시오.” 결국 숙손첩 대신 오나라 군대의 길잡이로 나선 공산불요는 오나라 군대를 일부러 먼 험로로 인도하여 노나라가 침략에 대비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좌전> 노애공 8년) 그 후 공산불요가 어떻게 되었는 지는 전해지는 바가 없다. 아마도 그 일로 오나라 사람들의 박해를 피해 숨었거나 아니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는지 모른다.


 

공자는 이런 공산과 함께 젊은 시절부터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나누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자로 등 제자들의 뜻을 따라 공산불요와 결별했다. 제자들의 앞날을 걱정하기도 하였고, 무엇보다 당시의 시세가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보았을 것이다. 실제로 공자는 공산불요가 망명한 이후 조정에 등용되자, 그 자신도 양호나 공산불요처럼 노나라 정치의 재정립을 시도했다. 양호와 공산불요가 했던 것 처럼 삼환세력을 약화시키는 일에 공자도 착수했다. 그러나 공자의 시도는 삼환이 이를 눈치채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공자도 결국 양호나 공산불요처럼 망명의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당대의 정치현실 속에서 이들 모두가 자신의 당파를 떠나 같은 개혁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8. 동주(東周)라는 나라

나, 이생은 자로를 비롯한 고제들의 회고를 들으면서 그때까지 몰랐던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공자는 공산불요의 제안을 놓고 자로와 격론을 벌이는 와중에 자기도 모르게 가슴 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던 속마음을 꺼내 보이고 말았던  것이다.

 

  가지 마십시오. 하필이면 공산씨에게 가시려 하십니까? 자로가 화를 내며 공자를 말렸다.(子路不說曰 未之也已 何必公山氏之之也.)

  그러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부르는 사람이 어찌 아무런 뜻도 없이 부르겠느냐? 나를 쓰는 자가 있다면, 내가 그의 나라를 동쪽의 주나라로 만들 것이다! (子曰 夫召我者 而豈徒哉 如有用我者 吾其爲東周乎) -‘양화’편 5장⑧

 

‘내가 동쪽 땅에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것이다!’

이는 부지불식간에 터져나온 공자 스스로의 천기누설이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새 나라의 건설’은  공자가 가슴 속 깊이 간직해 온 꿈이자 평생을 통해 줄기차게 추구한 원대한 이상이었다. 그러므로 ‘동주’는 막연한 수사(修辭)가 아니다. 공자가 이상국가로 여기는 초기 주나라를 모태로 하는 문화를 동쪽 땅에 완전히 실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공자가 어느 시기부터 그 자신을 ‘문명의 계승자’로 자리매김하고 ‘동쪽 땅(주나라 입장에서 보면 동쪽 노나라)’에 주나라와 같은 문화국가를 건설한다는 웅지를 품었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실제로 ‘주나라를 계승한 제4의 왕조를 꿈꾸었다’고 믿은 사람은 후대에도 많았다.(H.G. 크릴. <공자, 인간과 신화>) 그랬기에 ‘공자는 주나라 제도를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를 피력한 적은 있어도, 주왕실에 대한 충성을 공개적으로 밝힌 적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부사년, <풍우란의 중국철학사>)도 적지 않았다. 공자에게 ‘충’(忠)은 쇠락한 주왕실에 대한 화석화된 충성이 아니라 백성을 위한 변혁의 갈구였다. 공자가 살던 혼란한 시대에 ‘역’(易·변혁)은 뜻있는 지식인의 당연한 시대정신이었다. 공산불요에게 가려했고, 훗날 망명 시절 중모성에서 조간자로부터 자립하려한 필힐(노나라 출신의 진나라 대부)에게도 가려했던 공자의 정치적 지향은 따라서 “도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풍우란, <중국철학사>)것이었다.

 

새로운 나라를 그려보는 공자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유일한 사표는 주공(周公·주나라 문왕의 아들로 조카 성왕이 성인이 될때까지 섭정하며 주나라 제도와 문화를 사실상 창시했다)이었다. 공자는 일평생 자신을 주공의 계승자로 자임했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공격을 당했을 때 공자는 이렇게 외친다.

 

  문왕이 이미 세상에 없으니 그 문화가 (계승자인) 나에게 있지 않으면 누구에게 있겠는가! 하늘이 이 문화를 단절시키고자 했다면 어찌 내가 있어 이 문화를 간직할 수 있었겠는가!(文王旣沒 文不在玆乎 天之將喪斯文也 後死者不得與於斯文也) -‘자한’편 5장⑨

 

늙어 기력이 쇠해졌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이제 쇠하였나보다. 꿈에 주공을 뵙지 못한 지가 오래구나!(甚矣 吾衰也! 久矣 吾不復夢見周公) -‘술이’편 5장⑩

 

마침내 죽음에 이르렀을 때는 이렇게 한탄한다.

 

 명왕(明王)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세상에 누가 나를 종주(宗主)로 받들 것인가! (明王不興 而天下其孰能宗予)(<예기> ‘단궁 상’)

 

9. 위대한 꿈인가, 과대망상인가

‘밝은 임금이 나타나지 않아 나를 기용해 주지 않았으니 후세에 누가 나를 새 나라의 종주로 받들 것인가’라는 이 한탄을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했을까?

나, 이생이 선생님의 꿈을 쫓아 그 행적을 추적할 때, 선생님에 대해 악평하는 사람들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그 가운데는 선생님을 과대망상증 환자처럼 치부한 부류들이 있었다.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하려고 덤벼드는 사람”(是知其不可而爲之者與-헌문편41장)이라는 야유는 그에 비하면 차라리 안타까움에서 나온 연민이었다고 할까.

 

 봉황이 오지 않고, 하도가 나타나지 않으니, 나의 시대도 이제 다하는가 보다. (鳳鳥不至 河不出圖 吾已矣夫)- ‘자한’편 8장⑪

 

선생님은 말년에 당신의 큰 뜻을 봉황과 하도(河圖·고대 황하에 나타났다는 신령스런 그림)와 같은 위대한 하늘의 계시와 비견하였는데, 이를 전해들은 악의에 찬 비판자들은 너무 어이가 없어 가가대소(呵呵大笑)하였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어떤 비난도 선생님의 삶 전체와 철학을 깊이 이해하고 있지 않았다. 선생님의 높은 이상이 죽음의 순간까지도 원대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보다 선생님 자신이 그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공자는 자신을 진실로 비범한 존재로 여겼고, 평생동안 그 비범성을 실현하고자 하였다.(풍우란 <중국철학사>)


 

공자는 자신을 고대 문화의 건설자인 문왕의 도통(道統)을 계승할 사람으로 자임하고, 그 도를 세상에 펼쳤던 주공의 덕을 자기 시대에 펼치고자 했다. ‘동주’의 건설은 그런 자기 확신이 만들어낸 정치적 테제였다. 공자의 자기확신은 외부에서도 비롯되었다. 제자 자공이 스승을 ‘하늘이 내린 사람’(固天縱(풀어놓을 종)之將聖 -‘자한’편 6장)이라고 단언했듯이 당시에도 공자를 신적인 존재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후대의 맹자는 ‘공자가 살던 시대에 500년마다 반드시 왕자가 나타난다는 예언이 있었다’(五百年必有王者興)- <맹자> ‘공손추 장구 하’)면서 공자가 바로 그 소왕(素王·무관의 제왕)임을 내비쳤다. 역사가 사마천은 ‘주공 사후 500년만에 공자가 태어났다’는 위대한 징조의 반복성를 강조하면서 ‘주공과 공자의 계승성’을 ‘사실화’했다.(<사기>, ‘태사공자서’)

 

공자는 문명의 계승자라는 자기 확신에 따라 일생을 그토록 고단하게 자신을 등용해 줄 명왕(明王)을 찾아나섰다. 밝은 눈의 임금이 있어 자신을 등용해야 비로소 자신은 주공이 되고, 자신이 주공이 되어야 임금을 밝은 눈을 가진 ‘문왕’으로 만들 수 있었다. 문왕과 주공이 함께 하고 봉황과 하도가 나란히 세상에 드러나야 공자의 대동세계(大同世界)가 건설될 수 있었던 것이다. 공자는 만년에 이르러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할 때까지 그 꿈의 실현을 위해 매진했다. 죽을 때까지 ‘좋은 때를 만나(時中) 좋은 값으로 매겨져서 사방에 선이 가득한(止於至善) 세상을 이룩하기를’ 소망했다. 공자는 천생 유사였으므로 그것은 스스로 설정한 숙명이자, 천명이었다.


공자12.jpg

*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 중에서



 

10. 천명(天命)

일평생 쉴 틈이 없었던 공자가 마음 한켠에 감추어 놓고 진실로 부러워했던 부류는 탁류에 몸을 더럽히지 않고 비켜 서 있는 은자(隱者)였다. 공자가 평생을 유랑하며 조롱박 신세를 면하고자 했을 때(吾豈匏瓜也哉 焉能繫而不食-‘양화’편 7장⑫), 은자들은 그런 공자를 경멸했다.

  이보게 공구, 그런 짓은 속유들이나 하는 걸세. 도대체 자네같은 용이 무얼 더 바라길래 그렇게 일생을 비루하게 떠돈단 말인가.

 

공자도 인간이기에 이런 야유를 들으면 야속했을 것이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 외쳤을 것이다. 

‘나는 그대들과 다르다. 그래야 할 것도 없고, 그러지 말아야 할 것도 내게는 없노라!’(我則異於是 無可無不可-‘미자’편 4장)라고.

공자는 또 은자의 야유 속에서 한 줄기 역설의 위안을 발견하고 싶어했다. ‘있는 듯이 없고, 찬 듯이 빈 마음, 수모조차 수행으로 삼는(有若無 實若虛 犯而不校-‘태백’편 5장), 그 초월이 공자는 한없이 부러웠다. 유(儒)는 그럴 수 없으므로, 사(士)는 조롱박처럼 매달려 있을 수만은 없으므로, 문명의 계승자는 결코 그래서는 안되므로.

 

천명을 짊어진 몸이 어찌 잠시라도 쉴 수 있겠는가! (君子以 自彊不息-<주역> ‘대상전’⑬)

 

나, 이생은 선생님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고서 공자라는 한 인간이 간직했던 필생의 꿈을 내 마음 속에 그려본다.

 

공자는 참으로 정치력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또한 공자처럼 정치적 이상이 큰 사람도 없었다. 공자는 자신의 꿈이 현실에서는 이뤄지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것을 받아들였다.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그러자 공자의 마음도 담담해졌다. 쓸쓸했지만 외롭지 않았다. 세속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으나, 빛은 이미 영원을 향해 출발했다고 그는 확신했다.

 

  하늘을 원망하지도, 사람을 탓하지도 않으련다. 내가 진실로 최선을 다했음을 하늘은 알아줄 것이다…

(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 知我者其天乎) -‘헌문’편 37장

 

 



<원문 보기>


 *<논어명장면>은 소설 형식을 취하다 보니 글쓴 이의 상상력이 불가피하게 개입되었다.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논어를 새롭게 해석해보자는 글쓴 이의 취지를 살리면서 동시에 독자들의 주체적이고 다양한 해석을 돕기 위해 원문을 글 말미에 소개한다. 소설 이상의 깊이 있는 논어읽기를 원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2014년 11월호 연재부터 <논어> 원문보기에 인용할 한글 번역본은 <논어정의>(이재호 정해,솔)와 <한글세대가 본 논어>(배병삼 주석, 문학동네)이다. 표기는 이(논어정의)와 배(한글세대가 본 논어)로 한다. 이밖에 다른 번역본을 인용할 때는 별도로 출처를 밝힐 것이다. 영문 L은 영역본 표시이다. 한문보다 영어가 더 익숙한 분들의 논어 이해를 추가하였다. 영역 논어는 제임스 레게(James Legge. 1815-1897. 중국명 理雅各)본을 사용하였다.

 ***<논어>는 편명만 표시하고, 그 외의 문헌은 책명을 밝혔다.

 


   ① 자한편 15장

 子曰 出則事公卿 入則事父兄 喪事 不敢不勉 不爲酒困 何有於我哉(자왈 출즉사공경 입즉사부형 상사 불감불면 불위주곤 항유어아재)

 이-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밖에 나가서는 공경을 섬기고, 집에 들어와서는 부형을 섬기며, 상사를 당해서는 힘쓰지 않을 수가 없으며, 술때문에 곤경에 빠지지 않는 것, (이 세가지 가운데) 어는 것이 나에게 있겠는가?”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조정에) 나가면 공경을 올바로 섬기고, (집으로) 들어오면 부형을 잘 섬기며, 상사에는 애쓰지 아니함이 없고, 술에는 휘둘리지 않음, 이 가운데 내게 (능한 것이) 무얼꼬!

 L-The Master said, “Abroad, to serve the high ministers and nobles; at home, to serve one’s father and elder brothers; in all duties to the dead, not to dare not to exert one‘s self; and not to be overcome of wine:-- which one of these things do I attain to?”

 

   ②양화편 26장

 子曰 年四十而見惡焉 其終也已(자왈 년사십이경오언 기종야이)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나이가 40세가 되고서도 남에게 미움을 받는다면, 그 사람의 수양은 여기서 끝나고 말 것이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나이 사십이 되어서도 손가락질을 받으면, 그걸로 끝이다.

 L-The Master said, “When a man at forty is the object of dislike, he will always continue what he is.”

 

 ③술이편 16장

    子曰 加我數年 五十以學易 可以無大過矣(자왈 가아수년 오십이학역 가이무대과의)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하늘이) 나에게 몇 해 동안만의 수명을 빌려주어 마침내 <주역>을 배우게 해준다면, 큰 허물은 없을 것이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내가 몇 년을 더 살아 오십에 역을 배울 수 있다면, 큰 허물은 없을 터인데.

  L-The Master said, “If some years were added to my life, I would give fifty to the study of the Yi, and then I might come to be without great faults.”

 

 ④자한편 12장

   子貢曰 有美玉於斯 온(감출 온)(궤 독)而藏諸 求善賈而沽諸. 子曰 沽之哉 沽之哉 我 待賈者也.(자공왈 유미옥어사 온독이장저 구선가이고저. 자왈 고지재 고지재 아 대가자야)

 이-자공이 말했다. “여기에 아름다운 옥이 있을 경우, 이것을 궤 속에 감추어 두겠습니까. 좋은 값으로 살 사람을 찾아서 팔겠습니까?”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팔아야지, 팔아야지. 나는 살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배-자공이 말하였다. 아름다운 옥구슬이 여기 있다고 합시다. 궤 속에 감춰두어야 할까요? 아니면 좋은 값을 구해 팔아야 할까요? 선생님 말씀하시다. 팔아야지! 팔아야 하고말고! 다만 나는 제 값을 기다리고 있지.

 L-Tsze-kung said, “There is a beautiful gem here. Should I lay it up in a case and keep it? or should I seek for a good price and sell it?” The Master said, “Sell it! Sell it! But I would wait for one to offer the price.”

 

 ⑤자한’편 29장

   子曰 可與共學 未可與適道 可與適道 未可與立 可與立 未可與權(자왈 가여공학 미가여적도 가여적도 미가여립 가여립 미가여권)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함께 글을 배울 수는 있어도 함께 정도로 나아갈 수는 없으며, 함께 정도로 나아갈 수는 있어도 함께 뜻을 굳게 지켜 자립할 수는 없으며, 뜻을 굳게 지켜 자립하더라도 함께 사물의 경중을 헤아려 정의에 부합할 수는 없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더불어 함께 배울 수는 있어도 더불어 도에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며, 더불어 도에 나아갈 수는 있으나 더불어 서지 못하는 수가 있으며, 더불어 설 수는 있느나 더불어 형량하지 못하는 수도 있다.

 L-The Master said, “There are some with whom we may study in common, but we shall find them unable to go along with us to principles. Perhaps we may go on with them to principles, but we shall find them unable to get established in those along with us. Or if we may get so established along with them, we shall find them unable to weigh occurring events along with us.”

 

 ⑥자한편 13장

 子欲居九夷 或曰 陋 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자욕거구이 혹왈 루 여지하 자왈 군자거지 하루지유)

 이-스승께서 동쪽 오랑캐 땅에 가서 살려고 하시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 곳은 풍속이 비루하니 어찌 살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군자가 이 땅에 살고 있었으니 무엇이 비루한 것이 있겠는가?”

 배-선생님, 구이에서 살고자 하였다. 누가 말했다. 누추할 텐데 어쩌시려구요? 선생님 말씀하시다. 군자가 사는 곳에 무슨 누추함이 있겠더냐.

 L- The Master was wishing to go and live among the nine wild tribes of the east. Some one said, “They are rude. How can you do such a thing?” The Master said, “If a superior man dwelt among them, what rudeness would there be?”

 

 ⑦자로편 10장

   子曰 苟有用我者 朞月而已 可也 三年 有成(자왈 구유용아자 기월이이 가야 삼년 유성)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진실로 나를 등용해 주는 집권자가 있다면, 만 1개월만 지나면 나라의 기강이 설 수 있고, 3년만 지나면 치적이 이루어질 것이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정녕 날 등용할 수 있는 나라라면 일 년이라도 좋고, 삼 년이면 그 성과가 날 터인데.

 L-The Master said, “If there were (any of the princes) who would employ me, in the course of twelve months, I should have done something considerable. In three years, the government would be perfected.”

 

 ⑧양화편 5장

 公山弗擾以費畔 召 子欲往 子路不說曰 末之也已 何必公山氏之之也. 子曰 夫召我者 而豈徒哉 如有用我者 吾其爲東周乎.(공산불요이비반 소 자욕왕 자로불열왈 미지야이 하필공산씨지지야. 자왈 부소아자 이개도재 여유용아자 오기위동주호)

 이-공산불요가 비읍을 점거하고 계씨를 배반하여 공자를 초빙하므로, 스승께서 가시려 하시니 자로가 기뻐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도가 행해지지 않아서) 가실 곳이 없으면 그만두어야 할 것인데, 하필이면 공산씨에게 가시려고 하십니까?”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도대체 나를 초빙하는 사람은 어찌 부질없이 그렇게 하겠는가. 만일 나를 써주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곳을 동쪽의 주나라로 만들 것이다.”

 배-공산불요가 비땅에서 난을 일으키고는 (공자를) 불렀다. 선생님, 가려 하시다. 자로가 언짢아 하며 말하였다. 가지 마십시오. 하필이면 공산씨에게 가시려구요? 선생님 말씀하시다. 다 나를 부를 적에 어찌 뜻없이 그랬겠느냐? 나를 쓸 수 있는 자가 있다면, 내가 그의 나라를 동방의 주나라가 되게 할 터인데! 

 L-Kung-shan Fu-zao, when he was holding Pi, and in an attitude of rebellion, invited the Master to visit him, who was rather inclined to go. Tsze-lu was displeased, and said, “Indeed, you cannot go! Why must you think of going to see Kung-shan?” The Master said, “Can it be without some reason that he has invited ME? If any one employ me, may I not make an eastern Chau?’

 

  ⑨자한편 5장

  子畏於匡 曰 文王旣沒 文不在玆乎. 天之將喪斯文也 後死者 不得與於斯文也 天之未喪斯文也 匡人 其如予 何(자외어광 왈 문왕기몰 문부재자호. 천지장상사문야 후사자 부득여어사문야 천지미상사문야 광인 기여여 하)

 이-스승께서 광 땅에서 (뜻밖의 사고를) 대비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문왕께서 별세하셨으니, 문물(예악 제도)이 이 몸에 있지 않겠는가? 하늘이 이 문물을 없애버리려 하셨다면, 살아있는 내가 이 문물에 참여하지 못했을 것이지만, 하늘이 이 문물을 없애버리지 않으셨으니 광 땅의 사람들이 내게 어떤 박해를 하겠는가?”

 배-선생님, 광 땅에서 어려움에 처하였다. 말씀하시다. 문왕이 이미 돌아가셨으니, 문이 나에게 있지 않겠느냐! 하느님이 장차 ‘ 이 문명’을 없애려 할진댄 나를 이 문명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으려니와, 하느님이 이 문명을 없애지 않을 터라면 광 땅 사람들이 나를 어쩌겠느냐!

 L-The Master was put in fear in K‘wang. He said, “After the death of King Wan, was not the cause of truth lodged here in me? If Heaven had wished to let this cause of truth perish, then I, a future mortal, should not have got such a relation to that cause. While Heaven does not let the cause of truth perish, what can the people of K’wang do to me?”

 

 ⑩술이편 5장

 子曰 甚矣 吾衰也 久矣 吾不復夢見周公(자왈 심의 오쇠야 구의 오불부몽견주공)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심한 편이구나, 나외 노쇠한 기력이여. 오래되었구나, 내가 꿈 속에서 다시 주공을 뵙지 못한 것이.”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심하구나, 나의 늙음이여! 오래되었구나, 꿈에서 주공을 다시 뵙지 못한 지가!

 L-The Master said, “Extreme is my decay. For a long time, I have not dreamed, as I was wont to do, that I saw the duke of Chau.”

 

 ⑪자한편 8장

  子曰 鳳鳥不至 河不出圖 吾已矣夫(자왈 봉조부지 하불출도 오이의부)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봉황새가 날아오지 않고, 하수에서 용마가 그림을 가지고 나타나지도 않으니, 나는 이제 끝난 것이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봉새가 이르지 아니하고, 황하에선 그림이 나오지 아니하는구나. 나도 끝났도다!

     L-The Master said, “The FANG bird does not come; the river sends forth no map:-- it is all over with me!”

 

 ⑫양화편 7장

 佛힐召 子欲往 子路曰 昔者 由也聞諸夫子 曰 親於其身 爲不善者 君子不入也 佛힐 以中牟畔 子之往也 如之何. 子曰 然 有是言也 不曰堅乎 磨而不린 不曰白乎 涅而不淄. 吾豈匏瓜也哉라 焉能繫而不食.(필힐 소 자욕왕 자로왈 석자 유야문저부자 왈 친어기신 위불선 군자불입야 필힐 이중모반 지지왕야 여지하. 자왈 연 유시언야 불왈견호 마이불린 불왈백호 날이불치. 오기포과야재 언능계이불식)

 이-필힐이 스승을 초빙하므로, 스승께서 가려고 하시니 자로가 말하였다. “예전에 제가 스승님에게 들은 적이 있사온데,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직접 자신이 나쁜 행동을 한 사람에게는, 군자는 그 무리에게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필힐이 중모읍을 점거하여 배반하고 있는데, 스승님께서 가시려고 한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스승께서 대답하셨다. “그렇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또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바탕이 단단한 물체는 갈아도 닳지 않는다는 말과 바탕이 흰 물체는 검은 물을 들여도 검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내가 어찌 바가지와 같은 존재로써 한 곳에 매달려 있으면서 밥을 먹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배-필힐이 (공자를) 불렀다. 선생님, 가고자 하시다. 자로가 말하였다. 예전에 제가 선생님께 듣기로, ‘군자는 자신과 친한 이를 해코지한 자에겐 의탁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헌데, 필힐이 중모에서 난을 일으켰는데도 선생님이 가려 하시니 어째서입니까? 선생님 말씀하시다. 그래,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지. (허나) 단단하다고 하지 않겠느냐? 갈아도 닳지 않는다면! 희다고 하지 않겠느냐?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는다면! 내 어찌 (한낱) 조롱박일쏘냐? 어찌 매달려 먹지도 못하는 존재일까 보냐?

 L-Pi Hsi inviting him to visit him, the Master was inclined to go. Tsze-lu said, “Master, formerly I have heard you say, ‘When a man in his own person is guilty of doing evil, a superior man will not associate with him.’ Pi Hsi is in rebellion, holding possession of Chung-mau; if you go to him, what shall be said?” The Master said, “Yes, I did use these words. But is it not said, that, if a thing be really hard, it may be ground without being made thin? Is it not said, that, if a thing be really white, it may be steeped in a dark fluid without being made black?  ’Am I a bitter gourd! How can I be hung up out of the way of being eaten?”

 

 ⑬ 주역 대상전 중

 象曰 天行健 君子以 自彊不息 地勢坤 君子以 厚德載物(상왈 천행건 군자이 자강불식 지세곤 군자이 후덕재물)

 상전에 이르기를, 하늘의 운행이 굳건하니, 군자가 이로써 스스로 굳세어 쉬지 않느니라. 땅의 형세가 곤이니, 군자가 이로써 두터운 덕으로 만물을 싣느니라.(대산 김석진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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