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지붕이라는 티베트에서 온 수행자들이 서울 관광을 했다고 합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며칠 동안 문명세계를 둘러본 이들은 아스팔트 위로 끝없이 질주하는 자동차를 보고 가이드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디로 저렇게들 달려가는 겁니까?”
<속도에서 깊이로>라는 책을 쓴 윌리엄 파워스는 이 ‘참을 수 없는 디지털 문명’의 한계를 날카롭게 지적한 뒤 마음의 속도를 늦추라고 권합니다. 그러면서 내적으로 행복하고 충만한 삶, ‘이게 바로 삶이야!’하고 느끼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깊이’라고 갈파합니다. 하지만 어디로 달려가는지도 모르는 맹목적 속도의 위험을 알면서도 우리는 좀처럼 멈추지 못합니다. 트랙을 도는 경주마처럼 헐떡일 뿐이지요.
무엇이 그리 바쁜지, 너나없이 바쁘다는 말을 주렁주렁 매달고 사는 인생들. 들숨과 날숨 사이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도 쉼표가 찍힌다던데 이러다 삶의 깊이는 커녕 숨 쉬는 것조차 까먹는 건 아닐까요. 바로 지금이 쉼표가 필요한 시점은 아닐까요. 고단한 발걸음, 헐떡이던 숨소리, 부질없는 생각 사이에 ‘즐겨 쉼표(,)를 찍는다’는 시인의 고백이 마음 깊은 곳을 두드립니다.
흙이 흙으로만 가득하다면 무엇도 잉태할 수 없습니다. 적당량의 공기와 촉촉한 물기가 땅속 깊이 잠든 생명을 일깨우듯 쉼표는 삶의 고요와 평화라는 씨앗을 싹트게 하는 사랑의 여백입니다. 하늘을 나는 새들도 나무나 풀섶에 둥지를 틀고 고요한 쉼을 얻습니다. 물고기들은 으슥한 수초 속을 파고들며 안온한 쉼을 누리고 우리도 지친 몸과 마음을 뉘일 안식의 보금자리를 늘 갈망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기도 하지요. 그토록 원해도 마음은 좀체 쉬지를 못합니다. 이토록 쉼 없이 끄달리면서도 쉼표를 찍지 못한다면 우리 생명의 진액은 금세 고갈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 삶에서는 싱싱한 생명의 고동을 느낄 수 없겠지요.
<시 읽어주는 예수>(고진하 지음, 비채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