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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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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키드의 불행 극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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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을 걸으며 아들러를 이해하다-7급공무원 이형준 씨


자랑인줄로만 알았다. 어릴 적부터 강남에서 자랐으며, 그곳의 명문인 단대부고 1회 졸업생이라 말해왔다. 내심 부러웠다. 나처럼 소외되고 가난한 지역에서 청소년시절을 보낸 이는 ‘강남 키드’라는 말에 주눅이 들기 마련이다. 낡은 흑백필름으로 과거를 회상하는 사람과 총천연색으로 과거를 추억하는 사람이 어찌 같겠는가. 그러니 말은 못해도 질투의 감정마저 느낄 수밖에. 나랑 같이 다니던 북한산에 갈까, 혼자 자주 다니는 광교산에 갈까 하다 양재천을 걷기로 한 이유도 그가 강남키드이기 때문이다. 나는 듣고 싶었다. 그의 화려했던 시절을.


이런, 그런데 아니었다. 한 사람의 지난날을 쉽게 짐작하는 게 아니다. 일종의 위악이었다. 과거의 지층은 잘 드러나지 않는 법이다. 친해지면 그곳에 닿으려 탐침을 꽂기 일쑤다. 그래서 미리 노출했다. 짐작한 대로라 믿게 말이다. 나처럼 일차원적인 사람에게 강남키드라고 말하면 이야기는 끝이다. 어허, 잘 살았겠네, 이런 젠장 술값이나 내게, 라고 반응하기 일쑤다. 그는 그렇게 나에게 자신의 과거를 드러내어, 감추었다. 그렇지만 같이 걸으며 속내를 털어놓은 이야기는 예상과 무척 달랐다.


이형준1.jpg


이형준. 서울시의 한 구청 세무과에서 근무한다. 그에게서 듣는 공무원 세계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웃프다’. 작은 이익에 연연하며  조직 안에서 갈등과 배신을 겪고, 그래도 철밥통 정신으로 무장해 굳건히 버텨낸다. 오해말기를. 그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게 아니라, 그가 말해주는 공무원세계의 에피소드를 들으며 내가 내린 해석이 그렇다는 것이니까. 그의 삶에 내가 끼친 선한 영향이 딱, 하나 있다. 고소공포증 있는 사람을 끌고 지리산에 갔다. 믿고 따라와준 것도 대단하지만, 고소 공포증에 맞선 것은 더 대단했다. 나는 정말 고소공포증이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지 몰랐다. 결국 탈진직전까지 가는 모양을 보았다. 그래도 같이 산에 가자 계속 유혹했다. 북한산도 함께 올랐다. 아직 육교를 건널 때 고소공포증이 되살아난다지만, 이제 산은 잘 탄다. 자화자찬이지만, 이래서 좋은 친구를 두어야 하는 법이다. 불가능도 가능이 되니까 말이다.


그가 대치동 일대로 터를 옮긴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대학 졸업할 때까지 줄곧 이 일대를 누비며 살았으니, 분명히 강남키드이다. 그런데 이 시절이 그에게는, 미루어 짐작한 바와 정반대로, 암흑시대였다. 그 이유를 털어놓자면, 어쩔 수 없이 걸으며 들은 그의 가족사를 이야기해야겠다.


그의 할아버지는 황해도 지역의 지주이면서 기관사였다. 요즘으로 치면 강남에 살며 파일럿으로 일했다 보면 된다. 집안의 사위로 만주군의 장교를 받아들였다. 일본강점기, 집안형편에 걸맞은 선택이었다. 그런데 해방이 되고 사위가 인민군 창군작업을 하다 월남한 사실이 결국에는 동티를 냈다. 압박을 받았고 1.4 후퇴 때 온집안이 월남했다. 이 집안의 문제적 인물인 고모부에 대한 증언은 실로 흥미롭다. 5.16쿠데타 시기에는 박정희와 협력관계였으나 정권 수립 이후에는 찬밥신세였다고 한다. 집안에 내려오는 풍문에는 만군시절 박정희보다 선배였던 고모부가 그이를 많이 괴롭힌 죄과라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그래도 뒷배 보아주는 만군인맥이 있어서였을 텐데 사업가로 굳건히 자리잡았단다. 정작 물의를 일으킨 것은 그이의 아버지였다. 자동차관련 사업을 하며 잘나가다 여기저기 보증 서 준 탓에 다 말아먹었다. 잘 나가던 시절 이태원에 살다 망해 들어온 곳이 강남이었다.


그에게 트라우마는 아버지 사업이 쫄딱 망한데 있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인연을 맺은 어머니가 아들을 낳고서는 얼마 안 있어 집을 뛰쳐나간데 있다. 그는 버림받은 자식이었다. 이유는 누구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들리는 말에 따르면, 다른 남자가 생겨서였다고 한다. 믿을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어미 없는 아이를 돌보아주신 이는 친할머니였다. 생활력이 강한 할머니는 일수로 돈을 악착같이 벌어 손주를 뒷바라지했다. 아비는 생활력이 없었다. 이것저것 손댔지만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그러다 여자를 만났고 신접살림을 차렸다. 새엄마가 그이를 키우겠다고 했으나 할머니가 단호히 거부했다. 그의 의견을 묻지 않은 이 결정은 그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새엄마가 단 한번도 그를 자식으로 대접해주지 않았다.


우리는 당당히 ‘발기’해있는 타워팰리스 밑의 양재천에서 잠시 고민했다. 어느 방향으로 갈까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우리가 서있는 방향에서 오른쪽으로 가고싶어 했다. 그리로 걷다보면 아마 양재역이 나오리라 여겼다. 그런데 이런 길을 자주 걸은 내가 왼쪽으로 가자했다. 겨울이라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왼쪽으로 더 많이 가고 있었으니, 그쪽이 한강이라 짐작했다. 나는 단순하다. 내가 있어 따라가면 강이 나올 터이고, 강을 끼고 걷다보면 바다가 나온다 믿는다. 그것이 세상사의 순리이지 않은가. 나는 내심 이 길을 걷다 한강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준비성없는 나는 어느 곳으로 가야 강에 이르는지 몰랐다.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양재천의 시원은 과천이었다. 과천쪽 관악산의 남동쪽 계곡을 적신 물이 여기저기서 흘러온 물과 합쳐 천을 이루었다. 이곳에 오려고 그와 학여울역에서 만났는데, 역 이름이 양재천과 인연이 있었다. 양재천이 탄천과 합류하는 곳이 여울이 세다고 해서 한여울이라 했다고 하고, 이 여울에 백로가 날아들어 학여울이라 했단다. 본디 미도아파트쪽 천에 포구가 있었다는데, 개포동이라는 지명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따지고 보니, 우리는 개포에서 시원이 아니라, ‘종착’쪽으로 걸어간 셈이다.


그에게서 새어머니에 대한 원망은 이제 옅어진 모양이다. 무기력했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많이 가신듯하다. 그러나 아직 남은 근원적인 질문이 있다. 어머니는 왜 그 때 나를 버렸을까? 어릴 적 어머니가 미국에 갔다는 말은 들었고, 외삼촌이 귀국했을 때 은밀히 어른들끼리 만난듯한 낌새는 느꼈다. 하지만, 생모소식을 직접 들은 적은 없다. 몇 년전 다시 생모가 생각나 현재 사는 곳을 추적할 수 있는지 알아보았으나 모든 서류가 폐기돼 이도 무산되었다. 생모가 찾기 전 그는 평생 어미를 모른 채, 거기다 왜 떠났는지도 모른 채 살아야 한다. 상처다, 아주 깊은. 그래서 깊이 스며들어 있으나, 때가 되면 다시 용솟음쳐 견딜 수 없는 의문에 휩싸이게 한다. 정말 올무가 아닐 수 없다. 갓 태어나자마자 던져진. 벗어날라야 벗어날 수 없고, 오히려 더 옥죄어 온다. 그의 영혼은 아마도 긴 세월에 걸쳐 받아온 이 상처로 너덜해졌을지도 모른다.


가다보니, 더 가면 한강이 나온다는 표지판이 나왔다. 둘이 함께 환호성을 질렀다. 정말, 천을 따라 가니 강이 나오는구나. 순리대로 살아오지 못한 두 사람인지라 그 단순한 자연의 이치에 감동받은지도 모르겠다. 기록에 따르면 본디 양재천이 곧바로 한강으로 이어졌는데, 수로변경공사를 해서 지금은 탄천에 합류해 한강으로 흘러들어갔다. 탄천 너머 수지가 보이니, 그의 강남시대가 마감된 이야기를 했다. 영동에 연탄보일러 들어오는 아파트를 팔고 수지로 넘어갔단다. 물론 수지맞는 장사는 아니었다고 한다. 너무 일찍 아파트를 팔아 제값을 받지 못했다. 후배네 집은 더 버티다 분당으로 이사가 차액을 많이 남겼다고 한다. 될 놈은 되고, 안될 놈은 안되는 게 세상이치인 모양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회한이 없다. 그 모든 재산은 새엄마 관할에 놓여 있고, 그는 그 모든 것에서 단 하나의 혜택도 보지 못했으니까.


강남시대를 마감하며 그에게 남은 회한은 할머니다. 억척스레 돈을 번 할머니는 뒷마무리를 제대로 할 새 없이 삶을 마감하셨다. 그래도 혼자 남을 손주에 대한 염려 때문인지 친한 이웃집에 삼백만을 맡겨두셨다. 그가 받은 유산은 이게 다였다. 대학을 다녀야 하는데 아버지한테 지원을 받을 수 없어 이 돈을 고모한테 넘겼다. 고모가 종잣돈을 적절하게 배분해주어 비록 아르바이트로 전전한 대학생활이었지만 졸업은 할 수 있었다.


대학시절, 전공은 호텔경영. 몇차례 관련분야에서 일했지만 적성에 안 맞아 공무원시험을 보기로 했다. 편의점 알바, 고시원 총무를 하며 공부했다. 포천에서 고시원 총무할 때는 재미있는 일이 많았던 모양이다. 이야기를 아껴두는 것을 보니, 술을 두둑하게 사줘야 할 모양이다. 이거는 나중에 듣기로. 이렇게 남겨놓은 게 있어야 또 보게 되니까. 아무튼 어렵사리 공부해 목표했던  7급시험은 떨어졌지만 9급에는 붙었다. 숨이 트였다. 독립된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불운이 엄습했다. 마침 IMF가 터져 발령이 무기한 연기됐다. 2년여를 다시 편의점 알바 하며 견디다 발령받아 오늘에 이르렀다. 한 청년이 세파를 거치며 머리숱이 성긴 중년이 된 것이다.


한강을 걸으니 신났다. 언제 이렇게 한강을 걸어보겠는가. 걷다보니 다리가 자주 나왔다. 다리 이름 맞히기 게임을 하며 걸었다. 서울에서 공무원 생활하건만 그는 지리감각이 없었다.  다리가 놓인 동네나 다리 건너가 어딘지 잘 모르거나 틀렸다. 서로 놀리며 낄낄거리며 걸었다. 한강의 석양녘은 볼만했다. 단지 걷기보다는 자전거 타기에 더 적합한 길이라 온몸으로 느껴야 하는 충격이 좀 부담스러웠다. 흙길이 있으면 무조건 올랐다. 한강현대아파트 부근부터는 올림픽대로가 한강 위에 건설된지라 길 밑을 걷는다. 밤길이라 조금 으슥하기는 했는데, 가끔 운동하는 사람도 있고 해서 큰 불편은 느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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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천을 걷기로 했을 때, 한강을 만날지 예상하지 못한지라 어디까지 걷겠다고 목표를 정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야기 나누며 걷다보니 여의도까지 가보는 건 어떨까 싶었다. 저녁에 먹을 곳도 많을 테고 하니 말이다. 그래서 내처 걷기로 했다. 나중에 보니 대략 25킬로미터 정도를 다섯시간 반 정도 걸은 셈이었다. 웬만한 산을 길게 탄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하도 다리가 많이 나와 몇 개나 지났을까 세어보니, 청담대교부터 원효대교까지 무려 12개를 지났다. 한강에는 정말 다리가 많더구나!라고 감탄할 수밖에,


그에게는 잔인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아버지 제사는 누가 지내느냐 물었다.  두 군데에서 지낸단다. 본인이 지내고, 새엄마집에서 지내고. 더 잔인한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해준 것도 없는 아비 제사는 왜 지내느냐고? 그가 말했다. 할머니의 아들이고, 나를 있게 한 아버지라서 지낸다고. 더는 물어볼 말이 없었다. 그냥 가슴이 먹먹했다. 저 말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 그가 겪었던 아픔을 나는 혜량할 도리가 없다. 그럴 때는 가만히 있어야 한다. 친하다 해서 함부로 나불댈 수 없는 부분이다. 화해했다면, 용서했다면, 이해했다면 되는 부분이니까 말이다.


토요일 저녁 여의도 중심가는 한산했다. 선술집에 앉아 막걸리 마시며 한강변으로 방향 잡기를 잘했다고 서로 추켜세웠다. 그러다 문득, 이 짧은 여행이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우리는 시원으로 가지 않았다. 그곳에서 발원하여 숱한 고비를 넘기며 순리에 따라 흘러가는 곳을 걸었다. 우리 인생도 이랬으면 싶었다. 자꾸 오늘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여기는 트라우마로 기어들어가지 말고, 그럼에도 이겨내고 넘겨내고 쓸어내서 이른 오늘의 삶에 감격하자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양재천에서 걷다 한강에 이르고 그 길을 따라 걷다 뒤돌아보며 스스로 대견해 했듯 말이다. 그러니까 놀랍게도 우리는 한강을 걸으며 아들러의 심리학을 온몸으로 체험한 셈이다.


아들러는 무언가를 할 수 없게 하는 원인이라 여기는 것을 ‘열등 콤플렉스’라 했다, 이 열등 콤플렉스 때문에 그 무엇을 하지 못한다고 스스로 속이는 데 이를 ‘인생의 거짓말’이라 했다. 그렇다. 오늘 나를 괴롭히는 삶의 문제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톺아보아 거기에 책임을 전가하지 말자. 지금 내가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 어떻게 해야 거기에 이를 수 있는지 탐색하는데 더 비중을 두자. 어쩌겠는가, 가장 무력할 적에 받은 상처인데, 내 잘못이 아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었다 해서 주저앉아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의 정신으로 삶을 꾸려가야 하는 법이다. 반복하거니와, 물길이 이를 일러주지 않았던가. 어디에서 비롯했든, 어떤 고비를 만나던 그 무엇도 탓하지 아니하고 바다로 묵묵히 흘러갔다. 그렇다고 바다로 상징되는 그 무엇을 반드시 성취하자고 서로 채근하자는 말은 아니다. 과거에 발목잡혀 오늘의 삶을 망치지 말자는 뜻이다. 인생, 뭐있겠는가. 훗날 되돌아보니 스스로 대견하고, 용하고, 격려할만하면 되지 않겠는가. 술자리 파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본 한강이 귀띔해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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