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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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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자유가 재앙을 초래한 적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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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관용


볼테르는 대상이 누구건 부당함을 느끼면 독설을 퍼부어 투옥된 일이 부지기수였다. 후견인 오를레앙 공, 호의로 초청했던 프리드리히 대제는 물론 서슬 퍼런 가톨릭교회도 그의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시, 희곡, 소설, 역사 등등 그의 다양한 글에는 기지와 재치가 넘친다. 그것은 가시가 돋친 재치로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과 종교적 독단이 있는 곳이면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관용을 역설했다. 그가 특히 존경을 받는 것은 자신의 견해를 행동으로 증명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곳에도 개신교도는 있었다. 소수의 그들에게는 유무형의 박해가 가해졌다. 그것이 극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장 칼라스에게 가해진 거열형이었다. 개신교를 믿던 늙은 상인 칼라스의 아들이 자살했다. 아들에게는 도박 빚 등 개인사정이 있었다. 그가 목을 매어 세상을 하직한 현장을 목격한 부모는 울부짖으며 의사를 부르고 치안판사에게 신고했다.


그러나 맹신에 빠져 있던 한 무리의 툴루즈 군중이 아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려 했기 때문에 홧김에 칼라스가 아들을 살해했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군중심리는 걷잡을 수 없이 퍼졌고, 교회와 행정관마저 가세했다. 증거가 없기에 자백을 얻으려고 갖가지 극심한 고문이 가해졌으나 칼라스는 끝내 무죄를 주장했다. 수레에 묶여 사지가 찢겨 죽는 순간에도 그의 주장엔 변함이 없었다.


소문을 접한 볼테르는 처음에 칼라스에게 혐의를 두었다. 그러나 냉정하게 사실을 확인하여 칼라스의 무죄를 확신한 볼테르는 그 증명에 나섰다. 재판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짚어나간 <관용론>이 유럽 지식인들의 호응을 이끌었고, 국왕이 나서 재개된 재판에서 사후에나마 칼라스의 무죄가 확정되었다. 가족은 보상을 받았고, 툴루즈의 치안판사는 파면되었다. 볼테르는 묻는다. “관용과 신앙의 자유가 끔찍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관용과 신앙의 자유가 재앙을 초래한 적이 있었는가?”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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